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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바트만 그리고 네 개의 카르마

비운의 여인 ‘사라 바트만(Sara Baartman)’의 생애를 동시대적으로 은유화한 한국과 아프리카의 합작 연극인 ‘사라 바트만 그리고 네 개의 카르마(Karma·업보)’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시작한 연습 일정을 포함해 아프리카의 뉴욕이라 일컫는 요하네스버그 공연, 지난 10여 년 간의 내전을 까맣게 잊은 듯 뜨뜻한 동아프리카의 물살에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는 모잠비크의 마푸토 공연 그리고 인류의 발상지인 케냐의 나이로비에서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난 두 달의 일정을 모두 마감하였다.

미학적 실험과 공연 언어에 대한 실험
사라 바트만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유럽의 식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시절, 불룩 튀어나온 엉덩이와 커다란 생식기 그리고 조그마한 뇌를 가진 일명 ‘부시맨’(학명: 호텐토스 비너스)이라는 이유 때문에 영국인의 손에 이끌려 아프리카 땅을 떠나 유럽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른바 ‘특이한’ 둔부 하나로 당시 제국주의 인종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던 사라 바트만은 일반인들에게도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간의 신체적 차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나아가 성적 관음증의 대명사가 된다. 이후 무려 5년 동안 이어지는 노역과 수모를 이기지 못한 사라 바트만은 스물 다섯 살의 꽃다운 나이로 끝내 프랑스 땅에서 숨을 거둔다.

사라 바트만과 네 개의 카르마는 이런 바트만의 생애를 밑그림으로 차용하고 있긴 하지만, 전기적으로 그녀의 일생을 추적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200여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한 비극적 사건이 동시대 여성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현대적으로 추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국적과 인종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네 명의 여성이 출연한다. 한국인 둘, 모잠비크인 하나, 케냐인 하나.

전체적인 형식은 한국의 ‘손님굿’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전통 연극에는 한국의 무속성과 통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즉 아프리카에서는 ‘부시맨 여인의 한’이라는 내용적 소재를, 한국에서는 ‘손님굿’이라는 형식적 소재를 빌려와 양 대륙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충격적 실험을 감행해 본다.

이 작품은 이러한 미학적 실험 외에도 인적 구성과 공연 언어에 대한 실험도 감행하고 있다. 한국인과 아프리카인이 함께 공연을 담당한다. 공연 언어로는 한국어, 포르투갈어(모잠비크의 공용어) 그리고 케냐의 루오어가 사용된다. 이는 묵시적으로 공연 언어가 반드시 한 가지 언어, 특히 유럽어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식민주의적 잔재를 불식시키는데 일조한다. 사라 바트만 그리고 네 개의 카르마가 요하네스버그에서 공연되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찾아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영어를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아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느낌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대사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어 오히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모잠비크 공연 때에는 많은 관객들이 ‘배우들이 울 때 자신들도 함께 따라 울었다’고 고백했다. 모잠비크는 모든 면에서 매우 열악한 나라였다. 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사관도 들어가 있지 않은 데다 말라리아까지 창궐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매일 말라리아 약을 먹고 공연을 해야 하는 터라 비장한 느낌까지 들었다.

마지막 공연지인 케냐에서는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 공연 첫 날은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순회 공연의 종착지이자 피날레인 마지막 날 최종 공연 때 전기가 나간 것이다. 삼 개월에 한 번 꼴로 불이 나간다는 케냐 극장은 자체 발전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다소 상투적인 신념과 이럴 때 일수록 한국인의 프로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부족한 애국심이 머리를 드는 순간이었다. 초와 손전등을 들고 공연을 개시하기 직전 겸연쩍게도 불이 들어와 그나마 마지막 공연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공연 성과는 그야말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케이프타운 공연을 비롯해 남아공 주재 외국 대사들이 물경 20여 명이나 몰려든 요하네스버그 공연,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관객이 들어차던 모잠비크의 마푸토 공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케냐 공연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서서히 조락의 계절로 접어들고 있던 땅 끝 마을에서 한국과 아프리카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