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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지역 한국학전공 대학원생 대회를 다녀와서

언어, 문화적으로 공통의 오랜 역사를 지닌 이웃 나라를 그 나라 말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여행한다는 것은 조금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그 여행 목적이 수천 마일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 역사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이라면 그 여행은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지난 달 유럽지역 한국학전공 대학원생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서 독일의 보쿰으로 간 나는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하지만 주최측의 환대 덕택에 어색함을 느낄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보쿰은 루어 지방의 작은 도시로 커다란 대학 캠퍼스가 자리잡은 곳인데 독일에서 한국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대학교 중 하나이다. 전설적인 효율성을 자랑하는 독일의 대중교통 체제를 잘 이용하여 쾰른공항에서 보쿰대학교에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 한국학과 학과장이신 마리온 에거트 박사의 환영사를 들을 수 있었다. 대회 첫날 오후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가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또 그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쓴 안드레아스 뮐러-리(보쿰대)의 멋진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를 이어 멀리 럿거스, 오슬로, 베를린에서 온 대학원생들이 김시습, 한국어의 비균일 중첩사, 민중목판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처럼 다양하고 어려운 주제로 고군분투한 대회 첫날은 좀 더 세속적인 것들로 마무리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맛있는 한국음식 뷔페와 훌륭한 독일맥주, 그리고 ‘유로 2004’ 축구대회였다. 불행히도 그날 경기에서는 독일이 체코에 져서 중도하차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초청한 독일 친구들은 그 패배에 대해 침착한 태도를 보였는데, 아마도 복잡한 한국어 형태론에 대해 심사숙고 하느라 너무 바빠서 다른 것에는 신경쓸 틈 조차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둘째날은 마리온 에거트 박사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발표자가 불행히도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친절하게도 대신 발표를 한 에거트 박사는 18세기에 쓰여진 박지원의 여행기, 열하일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발표를 통해 나는 언어와 일상어(자국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후대에 등장할 많은 아이디어를 미리 예시한 독창적인 사상가를 제대로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 발표자였던 네덜란드 레이든대학교의 이정심 씨는 한용운 사상의 새로운 측면을 밝히면서 우리들을 불교사상의 세계로 인도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평할 자격은 없는 것 같다.

둘째날 오후는 두 편의 논문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조선 후기 한양의 비단상인에 관한 나의 발표이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늘 꽤 신경 쓰이는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테이블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너무나 편했던지 정해진 발표시간을 넘기기까지 했다. 마지막 발표자로 나온 보쿰대학교의 유명인은 20세기 초에 한글 소설 구운몽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발표를 통해 보통의 한국인들이 이전에는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천하다고 여겨진 한글로 쓰여진 소설에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잘 전달해 주었다.

둘째날 역시 축구로 끝을 장식했다. 이번에는 보쿰의 악명 높은 술집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몇 병의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관람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술집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잉글랜드가 ‘유로 2004’ 주최국 포르투갈과의 대단한 한판 승부 끝에 무너지면서 다시 한번 패배의 기운이 감돌았다.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이런 것들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독일 맥주와 즐거운 대화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독일에서 한국학 분야는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많은 2세대 한국계 독일인을 포함하여 상당한 수의 한국인 이민자를 가지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번 대회에서 이 점에 놀랐다. 한국계 인구가 비교적 적고, 젊은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유학생인 영국과는 매우 다르다고 느꼈다. 보쿰에서 나를 이틀 동안 보살펴준 학부학생들의 열의와 환대 역시 오래 갈 인상을 남겼고 유럽 내 한국학의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주최측은 이 첫 번째 유럽지역 한국학전공 대학원생 대회의 신청자 수가 적어서 다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종류의 행사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혼자 해야 하는 대학원 공부의 특성을 고려하면 오래 지속될 네트워크 형성에 도움을 주고 생각과 경험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이런 모임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모임이 미국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유럽에서도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이루어지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비록 참석자 수가 적다는 것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전에는 잘 알지 못했거나 혹은 전혀 몰랐던 분야까지 배우도록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학문활동의 대부분을 아주 세밀한 분야에 집중해서 보내는 우리들에게 전혀 해로운 것이 아니다(언어학은 내 전공과 한 세상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도 최적성 이론과 비균일 중첩사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다고 인정하더라도 이승훈 씨는 날 용서해주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 단 한 가지는 다른 역사학 논문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 어딘가에 또 다른 역사학자가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사소한 몇 가지 점들은 제쳐놓고, 전반적으로 모든 참석자들은 이런 회의가 유럽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서로 접촉하고, 생각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으며, 다음 행사는 보쿰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개최되어 유럽지역 대학원 한국학의 깊이와 폭이 좀 더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독일축구팀의 결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설파한 것은 물론 우리 모두를 신경써 주고 모든 것들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보쿰대학교의 토어스텐 트라울젠에게 특별히 감사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