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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속에 스민 정서와 나의 소중한 만남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된 것은 약 30년 전의 일이다. 나는 한국말 단어 하나도 아는 게 없었고 앞으로 가르치며 지내게 될 나라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은자의 왕국’으로 향하는 첫 여행길에서도 홍콩에서 비행기가 뜨기 바로 전까지는 한국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때 비행기를 탄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내 근처에 앉았다. 잠시 후 그들은 내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코리아’라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단어를 내뱉자 마자 그들은 생기가 돌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마치 저 밑바닥의 물결에 이끌린 것처럼 그들은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더니 그들의 나라와 사회에 대해 경쟁적으로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기역, 니은, 디귿에 관한 짧은 강의가 이어졌고, 몇분 지나지 않아 나는 종로, 을지로, 퇴계로 등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왜 성냥을 선물로 사가는 지를 알려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한국 문화의 정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의 이방인에 대한 친절한 배려와 애착
우리는 저녁 때 김포공항에 착륙했는데,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탄 델리발 방콕행 에어프랑스는 24시간이나 연착했다. 텔렉스로 소식을 보내긴 했지만,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대학 측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주머니엔 고작 몇 달러 밖에 없었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젊은이들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내가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설비가 잘 갖춰진 고급 호텔에서 편안하게 묵을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이미 모두 떠나고 없었다. 지금도 그들을 꼭 한번 다시 만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다음날 나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우체국이 어디에 있는 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과 애정의 표현은 단어와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를 미소로 반겨주었고, 열심히 이런 것들을 내게 물었다 :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몇 살이세요, 결혼은 하셨나요?” 심지어 내가 힌두어나 영어로 대답해도 그들은 변함없이 나의 한국어 ‘구사’ 실력을 칭찬했다 : “한국말 잘 하십니다.” 엉터리 한국말 단어 하나도 가게 주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인도에 있는 내 가족 전부의 안부를 다 묻고, 담배를 한 개피 건넬 때까지도 날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도 종종 내가 산 물건 위에 조그만 선물까지 덤으로 주곤 했다. 때로 어떤 택시 운전사는 단지 내가 그의 질문에 답을 해줘 그를 즐겁게 해줬다는 이유만으로 택시요금을 안받으려고도 했으며,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몸짓으로 나의 경계심을 풀어주기도 했다. 커피숍의 종업원, 여관집 주인, 술집의 바텐더까지 나를 마치 친척이나 되는 듯 대해 주었다.

한번은 내가 어떤 건물을 나서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걸어가기도 전에 “아저씨, 아저씨….”하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젊은 아가씨가 우산을 들고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우산을 건네주면서 내 이름이 뭔지, 우산을 돌려 줄 수는 있는 지 조차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우산을 들려주곤 빗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그처럼 많이 배려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한국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적인 애착과 감정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na kutch tera, na mera yahan. kurz ke mol hum sub yahan ji rahe.”

“이 세상에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또 그대의 것도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은혜를 입으며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심지어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직전 부처님께 단 맛의 음식(쌀과 우유, 설탕으로 만든 죽과 같은 음식으로 인도에서는 ‘끼르(kheer)’ 라고 한다)을 공양한 마을의 아름다운 아가씨의 은혜를 입으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본 ‘세 명의 동방박사’에게 은혜를 입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희망의 빛으로 미소짓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인들은 삶에서 평화와 평온함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준다. 그들은 불같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성냥을 선물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번창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번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번창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보이는 부와 호화로운 물건이 많아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적인 평화와 조화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의 협력과 호의 없이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1인당 소득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개인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량을 늘리는 데에만 열심이고,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관습과 특성을 이해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단순한 경제적 관심은 국가간 우정의 밑바탕을 튼실하게 쌓지는 못한다.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배려 없이 시장 개방과 세계화를 향해 미친듯이 돌진하는 것은 우리를 그 어떤 곳으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좁아지는 세계는 단순히 빠른 정보와 완전 자동화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적인 접촉과 노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가난, 비참함, 착취를 없애는 데 여전히 무력하다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그 엄청난 지식과 복잡한 기술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이 사는 지구촌을 만들게 될 것인가, 아니면 느낌과 감정이 없는 로봇과 기계로 이루어진 지구촌을 만들어 낼 것인가?

어느 주말에 젊고 정숙한 한국 숙녀분이 나를 시골로 데려갔다. 시골 풍경이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조그마한 언덕과 계곡의 수려한 풍경, 우거진 숲이 음악처럼 흔들거리는 모습, 시냇물과 골짜기 위를 어지럽게 퍼져나가는 안개는 환상 속의 세계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왜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부르며, 곳곳이 절과 도량으로 뒤덮였는 지 알게 되었다. 한국의 산들바람에는 고요함이 있다. 한국의 바로 그 영혼에는 고요함이 있다. 지는 해에 흠뻑 젖은 구불구불한 산비탈과 평야에 있는 한국식 주택의 노란색, 빨간색, 자주색 지붕이 내게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벨벳 위에 박힌 다양한 빛깔의 보석처럼 보였다. 갑자기 안내자가 손가락을 멀리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저런 곳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세상 사람들의 욕망과 갈망이란 것이 얼마나 비슷한가! 이 세상 사람들의 약점 또한 얼마나 비슷한가!

언어와 채식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이 우리 나라와 멀리 떨어진 외국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와 인도 사회는 놀랄 만큼 비슷하다. 어느 날 나는 수원 근처의 절에 가는 길에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며 흙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돌아 보다가 잠시 멈춰서서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진정 인도를 떠나왔던가?’ 초가 지붕의 집들이 비뚤비뚤 서 있고, 소들은 한가로이 문간에서 되새김질을 하고, 남자들은 앞마당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여자들은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길에서 놀며 재잘대는 모습이 똑같았다. 심지어 흙 냄새까지 너무나 비슷했다.

1970년대 초는 아직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때였지만 그 기반은 부지런히 닦이고 있었다. 청량리와 시청을 잇는 지하철이 처음으로 건설되고 있었다. 고층 빌딩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삼일빌딩이었다.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도 없었다. 대신 신세계, 반도, 조선, 유네스코 빌딩들이 명동 주변에서 가장 인기있는 건물이었다. 한강 남쪽에서는 수많은 새 도로, 고속도로, 다리, 아파트 등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국이 경제·산업 발전에서는 물론, 시민 편의시설에서도 다른 많은 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지만 서울과 기타 도시의 후미진 곳에는 가난과 불행으로 가슴 아픈 광경도 있었다. 젊은이들, 특히 학생들은 불만에 차 있었고 미래에 대해 다소 불안해했다. 대학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시위와 연좌농성이 자주 일어났다. 나라의 분단, 파괴적인 한국전쟁의 슬픈 기억과 이산가족의 슬픔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대개 입을 꼭 다물고 자기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의 젖은 눈꺼풀 뒤에서 희망의 빛을 느낄 수 있었고, 메마른 입술 위에서 한 줄기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존재를 찾아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자연의 섭리를 다시 찾자
오늘날 한국은 세계의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초현대화와 이른바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사방에서 환대와 미소를 보여주던 시절은 사라졌다. 그런 것들은 한국사람들의 얼굴과 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이제는 끊임없는 휴대전화 벨 소리뿐이다. 노인들과 몸이 불편한 통근자들을 친절하게 도와주던 버스 차장도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확장일로에 있는 도시화는 도시 근교에서 볼 수 있었던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상당부분 삼켜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나이도 많고 해서 이번이 마지막 한국 방문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나의 한국 친구들에게 한 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 싶다. 부디 잠시 멈추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경제적,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복지와 발전에 필요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과도한 자동화는 실업을 양산하고, 그것은 이어서 사회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대형 백화점이 좀 더 편리하고 매력적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조그마한 가게 주인들과 길거리 상인들의 생계를 빼앗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단순한 미국화 추세가 갖는 유해한 영향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하나의 세계 문화의 성장은 세계의 화평과 화해의 증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지구 상에서 다양성이 갖는 아름다움을 침식할 수도 있다. 이런 격언이 있다 : ‘남자들은 다 비슷하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께 감사하라.’ 자연은 이 지구를 매혹적이고 화려한 다양함으로 길들여왔다.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매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삶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알고 즐기는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창조자는 우리들에게 서로 다른 지리적 조건과 기후를 주어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활하고, 먹고, 입고,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 그렇지 않은 게 또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 지역과 나라로 여행하여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을 알게 되는 기쁨을 경험하는 이유이다. 만일, 각 문명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이 망가지게 된다면 누가 과연 안락한 자기 집을 떠나 멀리까지 가겠는가? 최소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없다. 두 가지 모두는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과 증오도 그러하며, 협력과 다툼, 선과 악, 자비와 죄악도 마찬가지이다. 태풍이 없다면 해양은 썩고 정체될 것이며, 지구 상의 생명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바다 어디에서건 늘 태풍이 분다면 그것 역시 생명에 해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 상에서 생명이 유지되려면 가끔씩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은 물론, 주기적으로 고요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 사회, 국가간의 화해와 분쟁도 그러하고 협력과 대결도 그러하다. 이것이 모든 사물의 자연의 이치이며 아마도 동아시아 사상에 들어있는 ‘하늘의 뜻’인 듯 하다.

“deeno danish urz kardam kas bachize, bur na dasht.”

“(내가 죽은 뒤) 천국으로 들여보내졌을 때 나는 그 순수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던 세상으로 나를 다시 보내달라고 말했다).”

이 지구에 천국이나 지옥을 만들려고 하지 말자. 그냥 그대로 남겨 두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를 더 나쁘게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가 핵이 없는 지대나 반도, 인권, 환경 보호 등을 위선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긴장을 없애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백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바로 우리의 눈 앞에서 매일 같이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있다. 우리가 큰 소리로 인권을 떠들어 대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가? 수백만이 굶주림과 목마름, 질병으로 죽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나라들을 우리의 감독 아래 두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출하고 있다. 가장 슬픈 일은 한 때는 문화와 지혜의 보고로 여겨졌던 한국과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의 수려한 문명들이 차례로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짓밟히고 있고, 사랑과 단합의 느낌은 매일매일 잊혀지고 있다. 그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나를 그때 그 한국 숙녀분이 김포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슬픈 눈빛의 그녀가 살며시 말했다. “마치 우리 부모님처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요.”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공자가 왜 가족간의 유대와 효를 강조했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인도행 비행기표를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비자와 입국 법규, 국적에 관한 돌 같은 장벽 아래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계가 작은 마을이 되고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녀의 볼에 진주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수하고 경건하며 온화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주 같은 인간의 사랑과 애정의 반짝임은 아직도 나의 마음 깊은 구석에 박혀 있다.

“ek hurf ek abeel hikayat se kam nahin, ek bund ek vahar ki vasuyat se kam nahin,nikle khaluse dil se jo vakte neem shab, ek ah ek sadi ki ibadat se kam nahin.”

“단어 하나가 긴 이야기보다 못하지 않고, 물 한 방울이 바다의 광활함보다 못하지 않으며, 한밤중 부드러운 순간에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한 번의 한숨이 한 세기 동안 올린 기도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