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한국 미술

미니애폴리스의 동양 미술 열풍
미네소타의 아시아 미술에 대한 사랑은 일찍이 미국인 디자이너이자 실내장식가 존 S. 브래드스트리트가 미니애폴리스미술관(Minneapolis Institute of Arts) 최초의 아시아 미술 전시회 중 하나의 개최를 도와주었던 1878년에 시작되었다. 주로 유럽의 유화와 수채화가 전시되었던 브리검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아시아 미술 작품들이 전시된 ‘동양’실이 소개되었다.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으로 아시아 예술에 대한 열풍이 일자 브래드스트리트는 정기적으로 중국, 일본, 한국 등으로 여행을 하며 조각, 도자기, 목판화, 청동제기, 건축 요소 등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미술품을 가져와 미니애폴리스 부유층에게 팔았다.
최전성기 시절에는 크래프트하우스라는 대형 스튜디오 겸 전시실을 운영하면서 아시아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을 따로 제작하는 목수 팀도 고용했다. 1914년에 사망한 브래드스트리트는 개인적으로 소장한 아시아 미술품을 그 즈음에 건축된 미니애폴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렇게 하여 초창기부터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아시아 미술 소장품은 17개의 아시아 문화권을 대표하는 9,500점 이상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의 미국 공공 박물관처럼 초기의 소장품들은 개인 수집가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미네소타 북부와 캐나다에 수백 개의 대형 곡물 저장소를 소유했던 설그레인사의 오거스터스 L. 설(1863~1955)은 18세기 중국의 옥 세공품, 코뿔소 뿔로 조각한 컵, 코담배 병, 금 세공품 등을 수집했다. 1928년에 이르러 설은 300점 이상을 미니애폴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1930년대와 1940년에 미네소타 제분업계 명문가 출신의 앨프레드 F. 필즈베리(1876~1950)는 청조의 단색 도자기와 이슬람 도자기는 물론 고대 중국의 옥과 청동 미술품을 수집했다. 그는 1950년에 사망하기에 앞서 900점이 넘는 소장품을 미니애폴리스미술관에 기증했다.
벌채와 목재업에서 큰 돈을 벌었던 토머스 발로 워커는 처음에는 서양의 판화와 그림을 수집하다가 나중에는 수많은 중국의 훌륭한 옥 세공품을 포함하여 거의 천여 점에 이르는 아시아 미술품을 모으게 되었다. 1880년, 워커는 집 옆에 작은 미술관을 짓고 자신의 소장품을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무료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사망하기 한 해전이었던 1927년에 별도로 워커미술센터(Walker Art Center)를 세웠다. 워커미술센터가 현대 미술로 초점을 옮기면서 워커의 옥 소장품 대부분은 장기 대여의 형식으로 미니애폴리스미술관으로 보내졌다

한국과 일본 미술의 후원자 루이스 힐
1992년, 이들 미술품은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영구 소장품 중 일부가 되었다. 중국 컬렉션은 이들 세 명의 초기 수집가 설, 필즈베리, 워커 덕분에 상당한 수준으로 커진 반면, 한국과 일본 컬렉션은 1970년대가 될 때까지 주요 후원자가 없었다.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한국과 일본 미술에 대한 최초의 큰 후원자는 루이스 W. 힐 2세(1902~1995)였으나, 정치적인 이유와 겸손함으로 인해 그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철도와 목재업계의 거물이었던 제임스 J. 힐의 손자였던 그는 세인트폴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퍼스트내셔널은행의 대표로서 힐 가문의 여러 자선재단을 관장했으며 1937년부터 1951년까지 미네소타 주 하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니애폴리스미술관에 대해 그가 보여준 관대함은 그의 생전에는 사실상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완전한 익명으로 남기를 고집하여, 심지어 미술관 이사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금할 정도였다. 또한 자신이 미술관에 기증한 것에 대해 미술관장이 감사의 편지를 써 보내는 것까지도 그만둘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자선과 공공의 의무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3대째 세인트폴의 시민이었던 그는 자신이 옆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술관을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의 진수, 도자기 기술
루이스 힐이 한국 미술의 진가를 인식하게 된 것은 시카고에서 미술 중개상 히사조 나가타니를 방문했던 때였다. 1970년대에 힐은 거의 40점에 달하는 한국 미술품을 미니애폴리스미술관에 기증했으며, 그 중 많은 것들은 그가 나가타니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다. 일부는 현재 미니애폴리스미술관 한국 컬렉션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의 금동여래입상(도판1)은 한국 불교 미술 초기 특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이처럼 작은 봉헌 청동물은 들고 다니기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도상법과 형식이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힐은 한국 도자기도 많이 기증했는데 청자당초문주자(도판 2)와 분청사기상감대접(도판 3)이 대표적이다. 청자당초문주자의 형태는 감을 연상시키는데, 완만하게 굴곡진 주둥이 부분이 마치 감 꼭지 같다. 주전자의 몸체는 아름다운 연꽃과 잎 문양이 화려하게 덮고 있다. 고려의 장인들은 흙의 표면을 능숙하게 조각하여 청자색에 섬세한 농담 변화를 주었다. 힐은 이러한 세련미의 주전자에 대비되는 박진감 넘치는 분청사기상감대접도 기증했다. 이 대접은 안쪽 벽에 ‘밧줄 무늬’가 촘촘하게 들어가 있으며, 안쪽 바닥에는 커다란 국화 문양이 있다. 도공이 가볍게 찍어낸 문양은 회색의 석기 몸체에 놀라울 정도로 균일하고 명확한 자기 문양을 만들어낸 확실한 상감 기술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루이스 힐이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에 기증한 가장 유명한 도자기는 아마도 기운찬 용이 그려진 조선시대 백자철화용문매병(도판 4)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도자기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도공은 익살스럽게 긴 주둥이와 부드러운 큰 눈, 불규칙적으로 색을 칠해 표현한 비늘 등 매우 자유분방하게 용을 그렸다.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한때 이 매병을 소장했으며, 뉴욕 플라자호텔의 자신의 방을 장식하는데 쓰기도 했다.
이들 기증품은 1970년대에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지만 미술관이 처음으로 한국 및 일본 미술 큐레이터를 고용한 1990년대 초까지 창고 속에서 빛을 잃고 있었다. 심지어 그때에도 전시실 공간 부족으로 한국 미술품의 전시는 진열장 하나에 국한되었다.
1998년,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은 본격적인 건물 건축 및 개조 작업을 시작했다. 아시아 전시실은 3개에서 22개로 늘어났다. 중국 및 일본 미술품의 확대 전시 외에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슬람, 히말라야, 동남아, 한국 등의 미술품을 상설 전시하기 위해 새로운 전시실이 여러 개 만들어졌다.

한국 미술의 컬렉션을 구축한 프레더릭 웰스
새로운 한국실이 개관하기 한 해쯤 전에 미술관 최초의 진정한 한국 미술 후원자인 프레더릭 B. 웰스 3세가 이 지역 재계로부터 등장했다. 웰스는 미국 최대 곡물 회사 중 하나이며 미니애폴리스에 본부를 둔 F. H. 피비사의 일원으로 국제개발부문의 젊은 부사장으로 1970년대 초 서울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전 이후 동물 사료 업계를 활성화시키는 일을 도왔다. 당시 그는 한국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박물관이 항상 가족들로 붐비는 것을 인상적으로 여겼다. 또 그는 한국의 부모들이 그들의 문화적 업적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또 미국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과 독특함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프레드 웰스는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의 한국 미술 컬렉션 확장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1998년, 그는 큐레이터와 함께 뉴욕과 도쿄를 방문하여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이 중요한 미술품들을 많이 입수할 수 있도록 한 결과 그 해 한국실 개관으로 이어졌다.
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고, 밑부분이 우아하고 둥근 항아리(도판 5)는 웰스가 미술관을 위해 확보한 가장 오래된 미술품이다. 이 병은 매우 얇은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물레를 돌려 만든 도자기의 초기작으로, 그 이전에 흙가래(코일)를 쌓아 만든 거친 용기를 뛰어넘는 중요한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목 부분이 넓고, 밑부분은 둥글며, 특징적인 ‘소 뿔’ 손잡이를 가진 이 병은 순장품 중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특히 인상적인 5세기 가야 왕국의 항아리(도판 6)는 커다란 단지를 만들어 물이 새지 않는 석기의 경도로 구워낼 수 있었던 초기 한국 도공들의 기술(이 용기가 만들어졌을 무렵 한국의 도공들은 이처럼 발전된 기술을 일본에 소개했다 )을 보여주고 있다.
프레더릭 웰스의 또 다른 주요 기증품으로 고려시대의 훌륭한 청자표형주자(도판 7)가 있다. 아름답게 빚어지고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이 형태는 중국 송나라 여요 청자의 영향을 받았으나, 더 얇고 투명한 청록색 광택은 고려 도공들이 개발해낸 반짝이는 청자 빛을 보여주는 탁월한 특징이다. 이러한 도자기는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해졌으며, 심지어 어느 중국 관리는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선언하게 만들기도 했다.
웰스는 한국의 청자를 좋아했지만 박진감 넘치는 분청사기, 특히 거침없이 그려진 문양으로 장식된 것들도 찬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화살 모양의 잎 무늬가 대담하게 그려진 분청사기철화병(도판 8)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했는데, 이 분청사기는 15세기에 계룡산에서 만들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용기 형태와 장식 기술은, 앞서 언급했던 문양을 찍고 조각한 분청 대접과 대조되는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레더릭 웰스는 한국 도자기에 관심을 갖기 전에 중국 도자기를 수집했기 때문에 도자기 질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 회화에 대해서는 경험이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스는 미니애폴리스미술관 컬렉션에 이 분야가 포함되어야 하는 중요성을 인식했고, 최소한 몇몇 작품을 추가하기로 결심했다.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이 확보할 수 있도록 그가 도와줬던 가장 인상적인 회화 작품은 아마도 중국의 유명한 장군 곽자의(697~781)의 생일 축하연을 그린 10폭 병풍(도판 9)일 것이다. 오랫동안 뛰어난 무장으로서 활약한 곽자의는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평생을 자신의 군주와 나라를 위해 헌신하여, 유교적 덕을 실천한 인물이다. 곽자의는 중국 화가들 사이에서 흔한 소재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국의 예술가들도 그를 주제로 궁과 고관 귀족들의 집을 장식하는 병풍을 많이 그렸다.
2005년, 프레더릭 웰스의 사망으로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은 훌륭한 친구이자 미술관의 한국 미술 컬렉션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미니애폴리스미술관은 한국 미술 상설 전시관을 계속 운영할 것이며, 미술품 시장에 중요한 작품이 나오게 되면 추가로 확보하여 관대한 기증자들이 마련해준 토대 위에 한국 미술 컬렉션을 더욱 발전시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