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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상과 문화

나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깊은 호의를 갖고 있으며,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 문화를 즐길 많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전통문화와 그 문화가 낳은 일상생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문화는 가끔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살아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나 말이 없는 먼 과거의 표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는 내게 현재의 이 곳, 즉 내가 개인적으로 매일 한국에서 겪는 일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만 치중하고 과거와 그 문화를 잊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한국인의 문화는 내가 아는 어떤 다른 문화보다 현재와 과거의 공존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종종 정신분열적이고 해결이 어려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의도는 현재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일정한 생활 양식이나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한국적인 일상의 시학’이 한국문화에 대해 인지하고 이해하는 내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 선생의 일상에 대한 동정심
오 선생은 많은 서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그러나 실제로 그곳을 방문해 본 사람은 거의 없는 독특하고 오래된 동네인 왕십리에서 작은 작업장을 운영했었다. 그는 80년대에 그곳으로 이사하여 소규모의 제조업을 시작했다. 아직도 그 지역에는 그가 종사했던 직종의 작업장이 눈에 많이 띄는데, 그런 것을 보면 왕십리에서는 시간이 다소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이 고객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하는지 알게 되면 그런 첫 인상은 곧 사라진다.
오 선생의 회사는 그 지역의 주요 도급업자에게 납품할 금속 부품을 생산했다.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사업을 운영하고 가족이 살 아파트 세를 벌기에는 충분했다. 오 선생은 지금도 왕십리 주변의 사업가들과 이웃들 간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돈독했는지 회상하곤 한다. 그에게는 작은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게 된 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었다.
그러나 한국에 닥친 금융위기로 오 선생의 사업은 도산했고 모든 것을 잃었다. 오 선생은 집세가 좀 더 낮은 풍동으로 이사했지만 풍동은 이미 재개발을 기다리는 빈집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풍동은 고양시에 6만 세대의 새 주택을 건설하는 야심찬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현지의 지방자치 단체와 건설 회사는 신속한 재개발을 위하여 재빨리 이 지역의 주택 소유자들과 계약을 맺었고, 집주인이 집을 팔고 나자, 오 선생은 다시 갈 곳을 잃게 되었다. 많은 거주자들이 그와 같은 위기 상황에 놓였지만, 그들은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풍동에 남기로 결정했다. 자신들도 살 곳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건설회사는 이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남아있는 거주자들에게 찾아온 것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대화의 기회가 아니라 악명 높은 현지 건설을 진행하기 위한 조직폭력배들이었고, 그들은 강압적인 철거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집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거주자들은 모두 함께 똘똘 뭉쳐서 강제철거에 대항했고, 희망 빌라(Villa Hope)라고 이름 붙인 한 건물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보금자리가 조직폭력배들의 거친 압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 선생은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던 몇몇 즐거운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던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뒤, 결국 희망 빌라는 철거되었다. 그러나 거주민들은 끈질긴 투쟁을 통해 건설회사로부터 풍동 재개발이 끝났을 때 그들에게 집단 거주지를 제공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오 선생은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으려 한 적이 없다. 단지 딱 한 번, 많은 한국 사람들이 매일 보게 되는 일상사인 자신의 경험이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든 것인지 이해해주기를 부탁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희망 빌라는 여전히 한국의 일상에서 평등한 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일상생활의 이해
매일 매일의 일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와 동시에 일상은 평범함, 흥미, 일과, 불확실성, 무기력, 투쟁, 기쁨도 같이 포함하고 있다. 이는 지배의 순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치성이 깨지고 헤게모니가 저항을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매일의 일상은 억압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금껏 사람들이 삶을 살아온 방식들의 여러 대안, 그리고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과 관련되어 있다.
매일의 일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평범함의 특이성과 삶의 경험에서 보편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경험과 구체적인 지역 전통 및 장소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도, 매일의 일상이 국가적인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문화와 전통은 매일매일의 관습을 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한국의 경우 특히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말을 해체하고 복수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서만이 국가라는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화이론가인 벤 하이모어는 국제적인 현대화의 보편성을 각 지역의 전통이 지니는 특수성과 접목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매일의 일상이 현대성의 비교문화 연구 관점에 적절한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올바르게 지적한 바 있다.
오 선생은 사회적 불평등, 배제, 그리고 정치적인 무시를 경험했으며, 이는 한국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희망빌라는 세계의 어느 도시화된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 표현하는 바는 현재의 한국에 대해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이들의 행복을 키워가는 것
한국적인 일상의 시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최근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헌신적인 자원 봉사자 그룹에 의해 기획된 홈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아주 훌륭한 한국 가족을 만났고 서울 동부의 외곽에서 멋진 주말을 보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옆의 거대한 현수막에 평화로운 녹색 경관에 둘러싸인 매력적인 주택단지가 그려진 것을 보았다. “모든 이들의 행복을 키우는데 앞장서 갑니다” 그림 아래에 이런 문구가 빛나고 있었다. 서울의 또 다른 한 부분이 재개발되고 있구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현수막을 내건 회사는 오 선생과 풍동 주민들이 끝까지 투쟁했던 바로 그 회사였다.
그 현수막은 오 선생이 말했던 한국적 일상의 모든 모순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결국, 한국적인 일상의 시학을 이해하는 것은 내가 앞서 언급했던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한가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한국적 일상의 이해는 나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고 슬로베니아에서 우리가 겪는 매일의 경험을 되새겨 보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