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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나라 한국에서 또다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갑니다’

우리나라가 외부의 도움이 절실하던 1960~1970년대에 귀중한 도움의 손길을 주었던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다양한 봉사 활동으로 맺은 한국과의 인연을 ‘프렌즈 오브 코리아(Friends of Korea)’라는 단체를 통해 계속 이어가고 있는 그들의 한국 방문 소감을 들어보았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평화봉사단원의 수는 2,000여 명에 이른다. 영어 교육, 공중 보건, 직업 훈련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준 이들은 귀국 후에도 민간 분야 한미 우호 관계의 축으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동안 미국 내 중요한 친한 인맥의 고리였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노령화되고있는 시점에서 이들 봉사단원들의 존재와 활동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올해부터 향후 5년간 봉사단원 및 그 가족들을 차례로 초청해 그들과 한국이 맺은 인연을 더욱 공고히 다질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7월 5일부터 11일까지, 봉사단원 초청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첫번째 방문단 56명이 한국을 찾았다. 32명의전 봉사단원과 24명의 가족 등으로 구성된 이번 방문단에는 한국 최초의 스페셜 올림픽(지적 발달 장애인 대회) 개최에 기여한 패티 워너(Patti Werner) 및 스티브 워너(Steve Werner) 부부 등 한국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인사들이 포함됐다. 이들은 몰라보게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직접 느껴보는 한편, 각자 예전에 봉사활동을 펼쳤던 지역을 다시 방문해 함께 웃고 울던 한국인 동료들과 재회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또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방문해 우리나라의 해외 공적개발원조(ODA) 및 국제협력 현황을 듣고 현봉사단원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전수하는 자리도 가졌다.
열정적 봉사 활동을 펼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지 짧게는 20여 년, 길게는 4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이들의 이마엔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파였다. 하지만 봉사활동에 대한 다양한 조언과 미국 내 한국의 친구를 자처하는 그들의 관심에서 드러난 애정만큼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덜하지 않은 듯했다.
길지 않은 방문 기간이 장마철과 겹쳐 많은 일정을 비 속에서 소화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그리고 무엇보다 그만큼의 추억을 쌓은 듯했다.

“30년 전 대학생이 의사가 되어 돌아왔어요”
한센병의료봉사자 버너뎃 레버 씨

1976년부터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경북 영일군 보건소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던 버너뎃 레버씨. 금발머리, 파란눈의 대학을 막 졸업한 풋풋한 스물 세살내기였던 레버씨가 이제는 어엿한 소아과 겸 내과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30년만에 당시 보건소에서 동고동락하며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던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의 나누지 못했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어린 나이에 한국의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레버씨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오히려 얻은 게 많아요. 한국에 와서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면서 의사의 꿈을 더욱 굳건히 했죠. 만약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의과대학원에 갔다면 의사는 되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눈으로 환자를 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35년간 마음의 빚을 이제야 갚네요”
청주대학교 영어강사 봉사자 네드라 하출 씨

35년 전 청주대에서 영어강사로 봉사했던 네드라 하츨씨. 한국을 다시 방문한 그의 손에는 책 한권이 들려있었다. 그 책은 하츨씨가 1966년 봉사활동 당시 청주대학에서 대출했던 책으로 급하게 귀국하는 바람에 미처 반납하지 못한채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츨씨는 “분명 대학생들에게 소중한 책일텐데, 오랫동안 되돌려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뜻하지 않게 ‘국제도서 절도범’로 살았는데, 이제야 무거운 짐을 벗게 돼 후련해요.”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대출한 책한권도 그에게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장이었다.

“40년 전 봉사활동 제게는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대구중학교 영어교사 봉사자 마크 모어 씨

1967년스물두 살대학생 ‘미국인 선생님’이었던 마크모어씨. 스물두 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모어씨는 이제 예순을 훌쩍 넘겨 한국을 찾았다. 당시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제자 홍양호통일부차관, 이수화 전 농촌진흥청장이 이제는 쉰이 훌쩍 넘어 그를 맞이 했다. “당시 한 학급 60명 학생에 8학급이나 가르쳐서 학생들 얼굴이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반갑게 나를 안아주는 이들을 보니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를 기억하는 마크모어씨는 제자들과 만나 4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옛 추억을 떠올리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저에게도 한국은 ‘우리나라’입니다”
소록도 물리치료사 봉사자 칩 조셉 씨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약 3년간 소록도에서 물리치료사로 봉사한 칩 조셉 씨 역시 제2의 고향이 되다시피한 한국에서의 일주일이 “더 이상 완벽할 순 없었다”며 활짝 웃었다.
귀국을 하루 앞둔 날,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2016년에 반드시 한국을 다시 찾아 오겠다는 그에게 한국 방문 소감을 보다 자세히 들어보았다.

1. 3년 여의 봉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지 31년 만의 첫 방문입니다.
감회가 어떠신가요?

그 감회야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제가 일했던 바로 그 장소에 다시 가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동고동락했던 한국인 가족들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저의 또 다른 가족이 되다시피 한 그들과의 만남이 제겐 가장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주와 광주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만나보고 소록도에서는 제가 돌보던 환자들까지 만났답니다. 청년 시절 헤어진 뒤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이지만 저를 한눈에 알아본 환자도 있었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일도 있었는데요, 제가 한국에서 아버지로 모시던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셔서 고흥에 있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렸습니다.

2. 30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변한 한국의 모습이 낯설지는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 있으면서 대부분의 생활을 소록도에서 했기 때문에 서울에 대한 당시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목격한 한국의 모습은 너무나 눈부셨어요. 무엇보다 제게 가장 먼저 와 닿은 변화는 소록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가 생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봉사활동을 할 당시엔 육지에 나가기 위해 늘 배를 타야 했는데, 이번에는 차를 탄 채 편하게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병원 시설도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더군요. 예전에는 자본과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감염 때문에 손발을 잃은 환자들에게 인공 수족을 달아주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는데, 지금 환자들은 쾌적한 시설에서 더 많은 간호인력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을 보니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센병 환자 수 자체도 괄목할 만큼 줄었고요. 정말 뿌듯했습니다.

3. 처음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할 때 조지프 씨는 20대 후반의 젊은이였습니다. 동양의 낯선 땅에서 젊음의 일부를 바치기로 결심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한국행을 선택하는 데는 별로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저 역시 그 시절엔 새로운 경험과 도전에 대한 호기심,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고 새 문화를 접하고자 하는 열망이 굉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종교적 신념과 평소 관심사를 감안해서 한국에서의 봉사활동을 택한 것이지요. 당시 제 또래 사람들에게 동양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어 교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저는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현지인들을 서구화하고, 내가 지닌 서양식 사고와 상식을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대신 제가 현지인들로부터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삶을 배우길 원했어요. 그러면서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요.

4. 한국과 남다른 인연 덕에 한국에 관심과 애정도 많아지셨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수밖에요. 한국 특유의 정서와 환경은 제 삶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따뜻한 동지 의식과 정 많은 문화 같은 것이 그렇지요. 한국인은 저 같은 이방인에게 정말 따뜻했습니다. 미국인이 ‘내나라’라고할때한국인은 ‘우리나라’라고 하잖아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우리’라고 부르고 따뜻하게 감싸안는 한국인의 기질이 3년 여의 시간 동안 제게도 또렷하게 각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의 여러 활동도 그런 측면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아직도 제 생활의 많은 부분에 한국적인 것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도 집 냉장고에 김치를 넣어두고 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기분을 풀 정도니까요.

5. 함께 방문한 약혼자이신 엘리자베스 리트먼(Elizabeth Littman) 씨께도 여쭤보겠습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이신데, 느낌이 어떠신가요?
제가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데요? 약혼자의 집에서 앨범을 보며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그러면서 당시의 경험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다건너 그의 피붙이 가족에게 인사하러 온 느낌이랄까요?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태평양 건너의 한 나라에 또 다른 가족이 살고 있고, 사진으로만 보고 이야기로만 듣던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그의 가족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들 역시 제 약혼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값진추억을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어요. 서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가족들이 30년 만에 만난 것이고, 이제 5년, 10년 후에는 다시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더욱 소중하죠.

6. 아시다시피 한국은 이제 외부의 도움을 받는 국가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현재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요.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선배로서 마지막으로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전혀 없습니다. 대신, 딱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어요. 그것만 갖추면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게 봉사활동이라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바로 가슴속에 사랑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당신이 어떤 기술을 갖고 있고 어떤 기술을 갖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거기에 있고, 당신이 그들을 염려하고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언이자 가장 중요한 당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