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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과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앞날

  • 조회수 324
  • 행사기간 2016.08.16 - 2016.08.16
  • 등록일 2016.08.16

CULTURE & ART

FOCUS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과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앞날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1등상과 폴로네즈 최고연주상을 수상했다. ‘조성진 돌풍’은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진지하게, 보다 면밀히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나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종일 한 청년의 사진이 오르내렸다. 주로 문화계 종사자들과 음악애호가들로 구성된 페이스북 친구들은 쉬지 않고 감격의 문구들을 쏟아냈다. 청년의 얼굴은 곧 한국 최대 온라인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에 올랐다. 그 자리에서 그 또래 젊은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그가 유명 연예인이거나 혹은 스포츠 스타거나. 대한민국 전체가 주목한 이 청년은 둘 다 아니었다. 매우 이례적으로 그는 ‘피아니스트’였다.
지난해 10월 21일, 제17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발표됐다. 2005년 라파우 블레하치(폴란드), 2010년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러시아)에 이은 5년 만의 스타 탄생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우승은 조성진에게로 돌아갔다. 쇼팽 콩쿠르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우승자였다. 우승이 알려지자마자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기획사 크레디아는 조성진과 이번 대회 입상자들이 참여하는 ‘쇼팽 콩쿠르 갈라 콘서트’ 개최(2월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소식을 알렸다. 이 공연의 예매 시작일이었던 2015년 10월 29일, 기획사의 예매 시스템 서버가 한 차례 마비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드문 해프닝이 벌어진 뒤 공연 티켓은 한 시간 만에 전석 매진되었다.

쇼팽 콩쿠르 ‘흥행’의 역사
이른바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쇼팽, 퀸 엘리자베스,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피아노만을 위한, 또는 피아노 부문이 가장 활성화된 콩쿠르라는 사실은 클래식 음악 인구 중 피아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절대적임을 증명한다. 그 중에서도 오직 쇼팽의 피아노 작품만으로 실력을 겨루는 쇼팽 콩쿠르는, 3대 콩쿠르 중 제약이 가장 심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많은 스타와 스캔들을 배출해왔다. 그 막강한 흥행 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89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황폐해진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험해진 폴란드 국민들은 예술이 아닌 스포츠에 열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예르지 주라플레프는 고민이 많았다. 바르샤바 고등음악원의 교수이자 쇼팽 스페셜리스트였던 그는 폴란드가 문화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폴란드 국민들을 다시 예술 무대 앞으로 모으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 결과, 주라플레프가 얻은 해답은 ‘음악 올림픽’ 즉, 콩쿠르였다.


제1회 쇼팽 콩쿠르는 1927년 1월 23일, 바르샤바 필하모니아 홀에서 열렸다. 쇼팽의 작품만을 과제곡으로 내놓는 원칙은 초대 대회부터 지금까지도 고수되어 왔다. 초대 우승자는 러시아 출신 레프 오보린. 이어 1932년과 1937년 제2•3회 행사가 펼쳐졌지만, 2차 대전의 혼란으로 콩쿠르는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종전 후인 1949년, 쇼팽 사후 100주년을 맞이하여 재개된 제4회 대회에서 폴란드는 첫 자국 우승자인 할리나 체르니 스테판스카를 배출한다(벨라 다비도비치와 공동 우승). 1955년 제5회 대회 이후 5년 주기로 열려온 쇼팽 콩쿠르의 역사에서 첫 번째 ‘빅 스타’는 1960년 등장한다. 다름 아닌 마우리치오 폴리니. 1965년에는 ‘그녀’가 등장한다. 다름아닌 마르타 아르헤리치이다. 이어 1970년에 미국인 최초로 게릭 올슨, 1975년에 폴란드 출신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우승한다. 1980년 열린 제10회 대회에서 아르헤리치는 또 한 번 바르샤바를 뒤흔든다.

개성 넘치는 포고렐리치가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아르헤리치가 이에 항의해 본선 심사를 거부한 일명 ‘포로렐리치 사건’이 그것이다. 물론 그해 우승자인 당 타이손 역시 우리 시대의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올린 지 오래다. 이어 1985년 스타니슬라프 부닌의 손을 들어준 쇼팽 콩쿠르는 이후 우승자를 내지 못했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새로운 천재가 탄생한다. 2000년, 중국의 윤디 리는 쇼팽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이자 15년 만의 우승자로 기록되며 스타덤에 올랐다. 2005년 열린 제15회 대회도 기록할 만하다. 1975년 지메르만 우승 이래 30년 만에 자국 출신 우승자를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폴란드 전역을 뜨겁게 달군 경연이었다. 2위와 5위 없이 네 명의 아시아계 연주자가 3위(한국 임동민•임동혁)와 4위(일본 세키모토 쇼헤이•야마모토 다카시)를 공동 수상한 것도 화제를 모았다.

콩쿠르 우승보다 더 큰 꿈
지난 가을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조성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94년생인 조성진은 한국의 유명 예술계 특수학교인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2012년부터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미셸 베로프에게 배우고 있다. 2008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으며, 2009년 일본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하며 전 세계 음악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2014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쿠르 3위에 오르며 꾸준히 그 성장을 증명했다.
내가 조성진을 처음 만난 건 2008년 12월로, 예원학교 2학년 재학 중 앞에 말한 모스크바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귀국한 뒤였다. 촬영을 위해 주뼛주뼛 스튜디오로 들어선 교복 차림 소년은 얼굴이 통통하고 동그랬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은 반짝이다 못해 눈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날 조성진은 내게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도전했던 국내 콩쿠르 일화를 들려주었다. 다른 출전자들을 보며 ‘다들 저런 모습으로 피아노를 치는구나. 진짜 피아니스트들만 저렇게 치는 줄 알았는데…’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고. 모스크바 청소년 쇼팽 콩쿠르 우승 소감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러시아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에게서 음악적 자신감과 당당함을 느꼈을 때, 초라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로 서양음악을 공부하며 많은 한계를 느낄 거예요.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우승 이듬해인 2009년 1월, 그는 금호아트홀 신년음악회 무대에서 리스트 ‘단테 소나타’를 연주했다.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는 그가 악보에 나타난 음표와 지시어만 따르면 과연 리스트의 사랑을, 단테의 지옥과 천국을 표현할 수 있을까? 조성진의 연주는 이런 의구심을 말끔히 걷어내며 내게 분명 리스트와 단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어린 소년이 다가와 이런 이야기를 ‘말’로 들려줬다면, 과연 나의 마음이 움직였을까. 음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음악은 위대하며, ‘음악을 한다는 것’도 위대한 일임을 소년은 음악으로 전했다.
2011년 겨울에 다시 금호아트홀에서 조성진을 만났다. 이번에는 친한 누나이자 동료인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였다. 그들은 듀오 무대를 앞두고 있었다. 긴긴 대화의 끝에 조성진은 뜬금없이 오키나와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얼마 전에 오키나와에 가서 연주를 했는데요, 최근 몇 년 사이 해외에서 연주가 끝나고 그곳에서 하루 놀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쉬면서 둘러보니 그곳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을 하면서도 정말 기뻐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행복이란 게 뭔지 생각하게 됐어요.” 열일곱 살 조성진은 왜 그때 따뜻한 남쪽나라의 행복을 이야기한 것일까?
다시 2년 후인 2013년 조성진을 만났다. 파리 유학중인 조성진은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뮌헨 필과의 내한 공연을 한 달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물가 비싸고 언어 어려운 것 말고는 파리 생활에 정말 만족해요. 새롭고 재미있어요. 성격도 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겁이 없어졌다 할까요. 전에는 약간 낯을 가렸는데, 이제 저는 편하고 상대는 좀 불편한 그런….”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지만, 차갑게 반짝이던 눈빛은 여전했다. 대화 속에 유머인지 도발인지 모를 문장들이 간간히 등장했다. 그의 내면에 열의와 달관이 묘하게 섞인 작은 용광로가 자리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공하고 싶긴 해요?” 나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도인이 됐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욕심은 있죠. 근데 그게 어떤 욕심이냐가 다르죠. 연주로 돈을 많이 버는 연주자가 성공한 건가,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연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게 성공인가, 음악은 나를 위한 거라며 자기 방에서 자기 만족을 위한 음악을 하는 게 성공인가… 성공이 뭐다, 정의는 없어요. 저는 꿈이 엄청나게 커요. 귀한 연주를 하고 싶어요. 조성진이 연주한단다, 그냥 그런 게 아니라 루푸, 소콜로프, 페라이어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성공이 아닐 수도 있지만요. 정말 큰 꿈이에요. 콩쿠르 일등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꿈이에요.”
젊은 음악가들에게 ‘콩쿠르’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조성진이 3위를 수상했던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2위에 올랐던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콩쿠르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 있다. 역시 ‘음악가로서의 성공’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예전에 콩쿠르에서 이상한 경험을 많이 하고, 그래서 회의가 커졌을 때 스승인 김대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콩쿠르가 넌센스라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넌센스지만… 세상에 나가보면 콩쿠르만큼 공평한 것도 또 없을 것이다. 틀린 말씀이 아니었어요.” 전업 음악가로서의 삶을 택한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콩쿠르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확실한 등용문인 셈이다. 그러나 콩쿠르는 문자 그대로 ‘등용문’일뿐이다. “귀하게 느껴지는 연주를 하고 싶다”는 꿈이 콩쿠르 우승보다 더 큰 꿈이라는 조성진의 발언은 그래서 더 진솔하게 들린다. 최근 조성진은 프랑스의 음악 매니지먼트사인 솔레아(Solea) 매니지먼트와 계약했다. 솔레아 매니지먼트는 지난 1월 5일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계약 사실을 알렸다. 2005년 로맹 브롱델이 세운 이곳에는 피아니스트 메나햄 프레슬러,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호프,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 플루티스트 에마뉘엘 파위 등 20여명의 음악가들이 소속돼 있다. 파리에서 공부 중인 조성진은 같은 도시에 자리한 소속사를 통해 더 활발한 유럽 내 활동을 이어갈 전망이다.

“성공이 뭐다, 정의는 없어요. 저는 꿈이 엄청나게 커요. 귀한 연주를 하고 싶어요. 조성진이 연주한단다, 그냥 그런 게 아니라 루푸, 소콜로프, 페라이어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성공이 아닐 수도 있지만요. 정말 큰 꿈이에요. 콩쿠르 일등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꿈이에요.”

조성진 효과?
한편,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이 한국 클래식 음악 시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각양각색이다.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실황 음반 발매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젊은 남성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김선욱의 신보도 발표됐다. 세 음반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높은 판매율을 유지 중이다. 그러나 이른바 ‘조성진 효과’가 얼마나 유지되고 확장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본적으로 한국 클래식 음악산업의 내수시장은 너무 작다. 산업의 활성화 방안 마련에 꼭 필요한 부문별 매출액 통계, 공연 관람객 분석 등에도 불명확한 부분이 적지 않은 상태다. 어느 젊은 음악가의 말을 빌리자면 “억울한 건 다른 게 아니라, 한국에는 ‘음악하는 사람들’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도, 음악을 제대로 다루는 매체도, 소비자와 공급자도 부족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22세 청년이 불러일으킨 ‘사건’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는 이제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그 결과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든,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진지하게, 보다 면밀히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조성진의 우승은 값지다.
쇼팽 콩쿠르 직후 국내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2월 내한공연을 앞두고 국내 팬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게 싫다,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가로 남고 싶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쇼팽은 내가 지금도 가장 자신 없어 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만년으로 갈수록 음악이 가벼워지는데, 많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나이 때는 많이 얻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래야 나중에 버릴 게 있을 테니.”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는 돌풍이 어쩌면 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잦아들지도 모를 이 성급한 도시에서 우리는 응원해야 한다. 한 젊은 음악가의 ‘화려한 성과’가 아닌 ‘외로운 성장’을.

박용완(Park Yong-wan 朴鎔妧) 전 월간객석 편집장, 문화체육관광부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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