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은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나는 외형적 사회의식보다는 개인의 무의식 세계, 그들의 꿈과 악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들은 합리적 사고로 해명이 안 되는 세계인만큼 자연히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지요. 내 소설이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 위주인 것은 이 때문이며 나는 독자와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상상력에 더 많은 여지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1984년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분단 상태였고 이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남과 북은 엄혹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고 이른바 신군부가 등장해 강압적인 통치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한국문학은 압제에 저항하며 기층 민중들을 위무하는 이른바 ‘민중문학’이 대세였고 사회주의리얼리즘이 각광받고 있었다.
그 해에 소설가 이제하(Lee Ze-ha李祭夏)가 단편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발표해 이듬해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이제하는 동시대 작가군 중에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아웃사이더형 소설가였다. 1937년생인 그는 미술의 명문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화집을 통해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무의식을 소설로 표현하면서 이러한 사조의 강조와 변형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초식>이나 <유자약전> 같은 그의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비교적 줄거리를 따라잡기 평이하게 서술하여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선 소설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끝까지 친절한 건 아니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독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갈수록 독자들은 벌어진 상황과 그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 길이 없어 혼란스러워진다. 항구도시의 시내버스에서 맨 나중에 내린 한 남자가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발견하고 왜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서있어야 했는지에 대한 단서도 한동안 찾기 어렵다.
그는 바닷가에 내려섰다가 젊은 초병에게 제지를 당하는데, 당시 속초 등 동해안 곳곳에 북한의 침투에 대비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경비구역이 많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이 또한 어리둥절한 상황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줄곧 이러한 모호성을 견지해나간다. 이 남자가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가 마주친,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행락객들이 몸 파는 여자들과 설왕설래하는 흔한 광경은 남자의 동기가 분명치 않아 보이는 행적과 대조적이다.
그들이 식당에서 나간 뒤 식당 주인은 남자를 식당 안쪽 방에 간호사를 데리고 머물고 있는 병든 노인에게 안내하더니 그들을 휴전선 바로 아래 어떤 마을까지 데려다 달라고 사례금을 제시하면서 청한다. 그는 제안을 거절하고 식당을 나와 돌아다니다가 버스에서 만난 사내들이 간다던 여관으로 간다.
남자는 버스에서 만난 사내들과 여관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뜻하지 않게 매춘을 하는 여인과 같이 방에 들지만 교접은 물리치고 잠자리에 든다. 한밤중에 행락객 중 한 사내가 그를 흔들어 깨우더니 여자들 중 하나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며 경찰이 오기 전에 떠나라고 충고한다. 여관을 나온 그는 고향 가까이에 가려는 노인을 모시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식당으로 돌아갔지만 노인과 간호사는 이미 떠나고 없다.
다시 버스로 길을 떠난 그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강릉에 내린다. 아내와의 신혼지인 경포 호반에 이르자 비로소 소설은 그의 죽은 아내 이야기, 뒤늦게 아내의 뼈를 바다에 뿌리려는 사연을 내비친다. 독자는 이제야 소설 초입에서 남자가 가방에서 꺼냈던 비닐봉지 속 뼛가루에 대해, 사내의 여행 목적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는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대신에 그저 간이횟집 2층 창문을 열고 뼛가루를 바람에 날려보낸 다음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꿈과 생시가 뒤섞이며 매우 초현실적으로 펼쳐지고, 독자는 사내의 아내가 차에 뛰어들어 세상을 버렸다는 사실을 암시 받는다.
그의 아내는 태어난 곳을 모르는 떠돌이 부초 같은 신세였다. 아내가 태어난 곳이 막연히 동해안 어디쯤일 거라는 심증만으로 아내를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해 온 길에서 주인공은 한사코 휴전선 너머 고향 가까이로 가서 죽으려는 노인을 만난 것이다.
죽을 때 고향 가까이 가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노인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떠나 온 간호사’만 빼고 모두 노인의 고향 행을 방해하는 인물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설움을 되갚으려는 양 악다구니를 쓴다. 서울에서 자수성가했으면 서울이 고향인 줄 알라고. 간호사는 끈질기게 뒤를 쫓아 온 아들에게 발각되어 노인을 서울로 떠나 보내고 사내에게 쓰러져 서럽게 운다. 사내는 간호사와 새로운 삶을 같이 할 기약을 하고 내륙의 포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정작 그 여인은 무당으로부터 신 내림을 받는다. 무당의 굿소리가 요란한 포구를 떠나면서 사내는 언젠가 그 여인이 들었다는 말을 떠올린다.
“서른에 물가에서 관(棺) 셋 짊어진 사람을 반드시 만난다. 그 사람이 전생의 네 남편이다.”
무당은 여인에게서 오래 전 죽은 자신의 딸을 보았고, 사내는 죽은 아내를 보았다. 소설은 이렇듯이 현세와 이승의 경계가 모호하게 흐려지면서 혼란한 그림을 그린다. 사실적인 이야기 전개와 동떨어진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며, 돌연한 결말은 남자와 여자의 이날 이후에 대해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신산스런 삶을 살아온 뿌리 없는 아내의 설운 뼛가루를 3년씩이나 간직하다가 이제 떠나 보내려는 사내의 길이 어찌 순탄할 수 있겠는가. 살아도 죽은 목숨이요 죽어도 살아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한스러운 현세의 나그네 길을 떠도는 방랑자들이다. 어느 길에서도 안착할 수 없는 슬픈 영혼들이다.
이제하는 이 소설을 쓸 당시 사실주의적인 소설 작법이 지나치게 강요되는 분위기에서, 시대의 화두인 분단 문제를 소재로 가져오긴 하되 다른 무엇인가를 더 확보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다른 무엇은 샤머니즘이었다. 죽어서도 가고 싶은 고향인데 살아서 못 가는 비극적인 현실을 무당의 굿으로나마 위무해야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