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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밑 뻘이 650년 동안 품고 있던 ‘보물선’

  • 조회수 283
  • 행사기간 2016.08.22 - 2016.08.22
  • 등록일 2016.08.22

SPECIAL FEATURE

신안의 섬 : 깨끗한 자연과의 대화 특집 5 바다 밑 뻘이 650년 동안 품고 있던 ‘보물선’

1323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원나라의 무역선이 난파되었다. 난파선의 잔해는 6세기 반을 신안 바다 밑 뻘에 묻혀 있다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1차례의 수중 발굴 작업 끝에 건져 올려졌다. 배 안에는 중세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실체를 말해주는 유물들이 가득했다. 이 발굴은 한국 수중고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1975년 8월 20일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화병(靑磁花甁) 등 6점의 자기가 걸려 올라왔다. 어부는 이 사실을 문화재관리국(현재의 문화재청)에 신고했고 이 그릇들은 중국 도자기로 확인되었다. 예로부터 “큰 배가 침몰했다” 고 전해 오던 바로 그 바다였다.

‘세기의 발굴’
문화재관리국은 이곳에서 배가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발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여러 어부들의 그물에 중국 도자기가 자주 걸려 나온다는 얘기가 퍼져나갔다. 이 같은 소식이 점차 알려지고 급기야 조직적으로 바다 밑에 들어가 도자기를 도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문화재관리국은 1976년 10월, 침몰선 주변 반경 2km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서둘러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발굴은 해군 해난구조대의 지원을 받아 1984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바닷속은 놀라웠다. 난파한 배가 침몰해 있었고 그 안에 진귀한 유물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거대한 배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바닷속 뻘에 박혀있던 상태였다. 바닷물에 노출된 갑판 이상 부분은 오래되어 부서지고 사라져 형태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뻘에 묻혀 있는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발견될 당시의 배는 길이 28.4m, 최대 폭 6.6m, 깊이 3.4-3.8m였다.
해저 발굴은 고난도 작업이었다. 경험이 전혀 없었던 한국 고고학계였기에 더욱 어려웠다. 바닷속 시계(視界)는 0에 가까웠고 수심은 평균 20-25m로 깊었으며 유속은 평균 2.5노트로 매우 빨랐다. 조수 간만의 차이도 커서, 하루 4번 돌아오는 정조(停潮) 시간대 중 작업이 가능한 기회는 한두 번에 불과했다. 잠수대원들은 공기 탱크를 지고 강한 수압을 견뎌내야 했다. 해저 뻘층에 묻혀있는 도자기를 꺼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바닷 속 뻘은 호미질도 어려울 만큼 단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어 리프트와 같은 장비를 이용해 공기를 강하게 쏘아 뻘의 흙을 파헤친 뒤 도자기를 인양했다. 해군 해난구조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신안 해저발굴은 어려운 여건을 뚫고 ‘세기의 발굴’이라는 큰 성과를 올렸다.

드러난 해상 교류의 실체
조사 결과, 이 배는 중국 원나라의 무역 범선으로 확인되었다. 1323년 중국 닝보(寧波)에서 일본 하카타(博多)와 교토(京都)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배의 제작기술, 나무의 원산지, 선원들이 사용하였던 용품, 각종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배의 원형은 길이 약 34m, 최대 폭 11 m, 최대 깊이 3.75-4.5m에, 중량이 260톤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훗날 학자들은 발견 지점의 이름을 따 이 배를 ‘신안선(新安船)’이라 명명했다.
신안선에서 발견된 유물은 도자기 2만여 점, 동전 약 28톤, 자단목(紫檀木, 붉은 박달나무) 1017개를 비롯해 금속제품, 목칠기, 유리제품, 석제품, 골각제품, 각종 향신료, 먹, 차와 약재, 각종 과실 씨앗 등 다종다양한 무역품과 생활유물이다. 물건을 운반하는 데 사용한 상자와 포장자료, 상자에 붙어 있던 목찰(木札, 나무 화물표), 부서진 배의 조각 등도 함께 나왔다.
발굴된 360여 점의 목찰을 보면 도후쿠지(東福寺)와 같은 일본 사찰 이름, 하치로(八郞)와 같은 일본인의 이름이 적혀 있어 이 배의 목적지가 일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물들은 당시의 무역 규모, 교류 양상, 생활상, 중국 문물에 대한 선호도 등을 잘 보여 준다. 해상 교류의 실체를 보여주는 명확하고 결정적인 유물들인 셈이다. 배에서 엄청난 양의 도자기가 발견된 것은 당시 도자기가 중국과 일본 간의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물에 가라앉아도 자기는 부식되지 않기에 오랫동안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발굴된 도자기 가운데에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룽취안요(龍泉窯) 청자가 60% 정도를 차지하여 당시 일본인들이 룽취안요 자기를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각종 화병, 향로, 주전자, 다완(茶碗), 다호(茶壺), 다합(茶盒) 등이 발견되어 일본인 특히 귀족이나 승려들이 중국의 도자기 다구(茶具)를 애용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중국 동전도 일본의 주요 수입품이었다. 당시 일본은 동전을 주조하지 않았던 탓에 중국 동전을 수입해 경제생활에 사용했다. 일본인들은 또 이 동전을 녹여 불상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귀한 가구 목재인 자단목의 경우, 갯벌에 묻힌 상태였기 때문에 부식하지 않고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중국 원나라 것이었지만 고려와 일본 물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고려청자도 발견되었는데, 중국이 고려에서 수입해간 청자를 다시 일본으로 수출하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올해는 신안 해저발굴이 시작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은 7월부터 10월까지 신안해저문화재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오랜 세월 깊은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었던 문명 교류사의 생생한 증거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서남해안 해저 유물 발굴
신안 앞바다 발굴은 한국 해저 문화재 발굴의 서막이었다. 이후 1984년 전남 완도군 앞바다에서 고려청자 3만여 점 등이 발굴된 것을 비롯해 귀중한 문화재들이 서남해 연안에서 끝없이 발견되었다. 수중발굴은 신안선이 그랬듯이 대개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 2002년 4월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상에서는 9톤짜리 소형 저인망 어선으로 고기를 잡던 한 어부의 그물에 고려청자 243점이 무더기로 딸려 올라옴으로써 본격 발굴이 시작되어 고려청자 3000여 점 등을 건져 올렸다. 2007년 5월엔 충남 태안군 대섬 앞바다에서는 한 어부가 다리 빨판에 청자를 붙이고 있는 주꾸미를 건져 올리면서 긴급 발굴이 이뤄져 고려청자 2만3000여 점 등을 건져 올렸다. 도굴한 범인이 잡히면서 발굴이 시작된 경우도 있다.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 앞바다에서 2006년부터 2009년 까지 계속되었던 고려청자 수중 발굴은 청자 500여 점을 건져 올린 도굴범 검거가 실마리가 되었다.

그 동안 서해에서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려청자다. 서해에서 청자가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시대(918‒1392)에 청자는 대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만들었고 여기서 만든 청자가 전국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수도인 개경에 사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청자를 많이 구입해 사용했을 것이다.
  옛날엔 물류 이동에 육로보다 바닷길을 선호했다.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데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화물을 옮기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사람들은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청자를 뱃길로 날라 개경으로 공급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서해를 지나다 보면 때로는 거센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 배가 생기는 것이다. 바다에서 발견되는 청자들은 고려시대에 그렇게 침몰한 것들이다.

서해안 바다에서 고려청자만 발굴되는 것은 아니다. 충남 태안군 마도 앞바다에선 수 차례에 걸쳐 죽간(竹簡, 글씨를 적어 놓은 대나무 조각), 녹각, 머리빗, 볍씨, 좁쌀, 된장, 메주, 게젓, 새우젓, 멸치젓 등 생필품과 음식 잔해 1400여 점이 청자와 함께 발굴되기도 했다. 개경 사람들이 주문한 지역 특산품이나 생필품을 청자와 함께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에서 2010년에 걸쳐 발굴된 배는 발송자, 수취인, 화물 종류 등이 적힌 죽찰(竹札, 대나무 화물표)을 확인한 결과, 1208년 2월 전남 해남, 나주, 장흥에서 벼, 콩, 조, 메밀, 젓갈, 석탄과 말린 가오리 등을 싣고 개경으로 향했던 곡물 운반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안 해저문화재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
신안 앞바다에서 시작한 해저문화재 발굴이 서해로 범위를 넓혀 계속되자 수중발굴을 전담하고 유물을 보존, 전시, 연구하기 위한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남 목포시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해양유물전시관에는 고려선실, 신안선실, 세계의 배 역사실, 한국의 배 역사실 등이 설치되어 선박과 해운, 수중발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야외 전시장에서는 실물 크기의 다양한 전통 선박들도 관람할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품은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청자 등 각종 유물과 관련 자료 5만여 점. 완도선(고려 11세기 후반-12세기, 1984년 전남 완도군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 달리도선(고려 13-14세기, 1995년 전남 목포시 달리도 갯벌에서 발굴) 등 난파되었던 배들의 잔해와 모형도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신안선은 ‘도자기의 길(Ceramic Road)’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던 중세 동아시아 국제 해상교류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발견이다. 바다 밑 뻘에서 인양되어 조심스럽게 보존 처리된 배의 잔해가 앞에 말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고 배 안의 주요 유물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상설된 신안해저문화재실에서 만날 수 있다.
올해는 신안 해저발굴이 시작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은 7월부터 10월까지 신안해저문화재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물 중 35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오랜 세월 깊은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었던 문명 교류사의 생생한 증거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광표 (Lee Kwang-pyo, 李光杓)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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