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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고교 미술교사 김원교 씨의 단조롭고도 치열한 나날들

  • 조회수 261
  • 행사기간 2016.08.30 - 2016.08.30
  • 등록일 2016.08.30

LIFE

이 사람의 일상 고교 미술교사 김원교 씨의 단조롭고도 치열한 나날들

그녀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지내는 고등학교 미술교사이다. 그녀의 삶의 중심은 학교, 외동딸, 그리고 교사로서 매너리즘에 빠졌던 시절 다시 찾은 자기만의 그림 세계이다.

새벽 5시 20분. 김원교(Kim Won-gyo 金元敎) 씨는 오늘도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을 먹는다. 점심에는 학교 급식이 나오지만 야채 위주의 식사를 위해 손수 도시락도 싼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승용차로 40분쯤. 6시 40분이면 상계동 집을 나선다.
올해 쉰두 살인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시 광동고등학교 미술교사다. 담임교사로 학급을 이끌 때에는 사고친 아이들 수습하러 경찰서도 들락거리고, 소심한 아이의 소심한 부모, 거친 아이의 거친 부모들을 겪으며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실감한다. 그러다 올해는 담임을 한 해 쉬고 그 대신 학생부 교사를 맡아, 아침마다 차량 통행이 많은 학교 앞 비좁은 골목에서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한 등교 지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7시 반이면 학교에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이 안쓰럽다
미술수업은 감수성을 훈련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냥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게 하기보다는 시나 산문을 읽히고 거기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기게 하는 방식의 수업을 자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 구절을 제각기 그림으로 옮기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가 선생이 된 것이 참 뿌듯해요. 저는 늘 남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부족하니까 열심히 하게 됐고 열심히 하다 보니 그림을 잘 그리게 됐지요. 아이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가르치고 싶은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게 잘 먹히지가 않아요”
고등학교 수업이 대학 입시 위주이다 보니 입시와 직접 상관이 없는 미술 시간은 학교마다 재량껏 배정한다. 광동 고등학교 학생들은 2학년 때만, 주당 3시간 미술 수업을 받는다. 그러니 미술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방과 후 수업 시간에 견주면 정규 미술 시간의 분위기는 상당히 느슨한 편이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과외수업 때문에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 아이도 있다. 곤히 잠든 학생을 보면 안쓰러워서 ‘그래 얼마나 고달프겠니’ 하고 내버려둔다.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하진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그림에 즐겁게 푹 빠져드는 아이들을 볼 때도 안쓰럽긴 마찬가지이다. 좋아하는 그림도 마음껏 못 그리고 공부만 하는구나, 싶어서.

그녀는 대학 4년 내내 서울 동대문 근처 숭인청소년학교라는 야학에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를 보는 아이들이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야학에서 그 아이들과 어울렸어요.”

그렇게 보낸 대학시절에는 항상 시간에 쫓겨서 변변하게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지 못했지만 그 대신 가르치는 기술과 기쁨을 충분히 배웠다. “제 이름이 원교잖아요. 으뜸 원, 가르칠 교! 그 당시는 정말 내가 최고의 선생이라는 기분으로 수업을 했지요.”

“10년 동안 붓을 놓지 않으면…”
요즘 학교 수업은 하루 4시간 정도, 여기에 야간자율학습 지도와 방과 후 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밤 9시, 따로 운동할 시간도 그림 그릴 시간도 내기 어렵다. 그래도 그녀는 이제까지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12월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최근 전시회에서는 50 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전시장 전면에 걸었던 400호짜리 불상 그림이 압권이었다.
<내 안의 화엄--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그 그림에서 그녀는 비로자나불 이미지의 뒤편 드넓은 배경에 반가사유상의 부분 부분을 한국의 전통 삼베 쪽보자기 이미지와 잇대어 가득 펼쳐놓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삼베 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듯 했다. “올올이 그려 넣는 작업 자체가 기도였어요. 시간도 엄청나게 오래 걸렸지요. 빈 시간이면 학교 미술실에 틀어박혀 삼베 올을 하나씩 붓으로 그려 넣었어요. 2년 넘게 쉬지 않고 그렸더니 비로소 그림의 꼴이 잡혀갔어요.”
관객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이 그림 앞에서 마음의 평화를 맛보고 간다는 관객들, 전시기간 중 서너 번 찾아와서 그림 속 부처님 앞에 서있다 가는 스님들도 있었다.
“원교야. 10년 동안 손에서 붓을 놓지 않으면 그림이 된다. 붓은 일단 한번 놓아버리면 새로 잡기가 힘들어.” 대학시절 은사인 화가 황창배 선생의 이 말씀에 매달려 그녀는 아무리 학교 일이 바빠도 붓을 놓지 않았다.

“좋은 선생이 된다는 게 점점 어렵게 느껴져요. 그래서 요즘은 가끔 학교를 그만두고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도 연금이 나올 때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아침에 아이들을 만나면 기운이 불끈 솟아요.”

수업 없는 빈 시간을 잡담으로 때우지 않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와도 꾸준히 그림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런 ‘골 빠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미련하지요. 하도 오래 같은 자세로 그림을 그려서 나중에는 척추가 비뚤어졌어요. 척추 교정을 받으러 다니면서도 그림을 놓을 수는 없었어요.”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녀는 1급 상담교사 자격증을 지닌 상담교사이기도 하다. “학교가 요구하는 질서와 제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 사이에 갈등을 겪는 아이들이 많아요. 제 딸도 사춘기 때 그랬어요. 엄마 말을 귓등으로 듣고 마음을 열지도 않았지요. 그냥 대화를 하자고 설득하는 걸로는 부족하겠다 싶어서 상담교사 과정을 밟았어요. 상황을 아이들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는 훈련과 소통하는 기술을 배운 거지요.”

그녀는 엄마 같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 때문인지 슬그머니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중학교 3년 내내 학교에서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여린 마음에 어떤 일로 상처를 깊이 받은 아이였어요. 매일 그 아이와 그림을 함께 그렸어요. 질문도 하지 않고 훈계도 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두드리거나 손을 잡아 주었지요. 꼬박 2년이 지나니까 어느 날 날더러 ‘선생님 감사해요’라며 입을 열더군요. 그 때 얼마나 기쁘던지. 머지 않아서 친구들도 사귀기 시작했지요.” 그녀를 그림으로 이끈 개인사 김원교의 삶은 단순하다. 학교 생활과 딸과 그림, 그게 전부다. 좀처럼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고 쇼핑이나 외출도 자주 하지 않는다. 외곬수라 할 만하다. 성향 탓도 있지만 환경 탓도 있다. 그녀는 젊어서 남편을 잃었다. 나에게 “이런 것도 말해야 해요?” 라고 물었지만 김원교의 삶과 그림에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혼자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주변의 권유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재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건 죽은 남편을 못 잊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였다.
“결혼은 평범했어요. 연애결혼도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고등학교 교장이셨는데 예전 담임했던 아주 모범생이었던 제자를 중매하셨어요. 부모님 인품이 좋고 사람이 성실하다고…” 만난 지 6개월 만에 혼인했고 일 년 후에 딸아이를 낳았고 아기가 두 돌이 됐을 때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남편은 대구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떨어져 지낼 때가 많았다.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혼자 됐을 때 32살이었다. 남편이 사라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제가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요. 다른 데 한눈 안 팔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으니까요.” 딸아이를 혼자 키우는 데에는 여동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대학원생이 된 지금도 딸은 엄마보다 이모와 더 친하다.
어릴 적에 딸은 유치원에 다녀오더니 “ 나는 왜 아빠가 없어?” 라고 물었다. “대답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교수가 되려던 사람이었기에 ‘미국에 교수로 가셨어’라고 엉겁결에 대답해버렸어요. 11살이 됐을 때 불러놓고 사실대로 말해줬어요. 듣고 나서 엉엉 울더니 그 날 이후 아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교사 생활의 매너리즘에 젖을 때쯤 김원교는 새로운 스승을 만났다. 전시회에서 강렬한 먹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박대성 화백이었다. 불상과 탑의 도시,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 경주에 사는 선생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와도 좋다고 허락하신 후 10년 동안 주말마다 빠짐없이 경주에 내려갔어요.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려면 붓에 힘이 들어가야 하고 붓에 힘을 넣자면 글씨를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꾸준히 붓글씨를 쓰고 있어요.”
그는 먹으로 붓글씨를 쓰는 한편으로 꾸준히 불상과 탑을 그려왔다. 탑과 불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걸 그리고 있으면 그 고요가 더욱 깊어진다고 했다.
“좋은 선생이 된다는 게 점점 어렵게 느껴져요. 그래서 요즘은 가끔 학교를 그만두고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도 연금이 나올 때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 아이가 다 자라고 나니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생각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기도 하고...그래도 아침에 아이들을 만나면 기운이 불끈 솟아요. 저는 천상 ‘원교’니까요.” 진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김서령 (Kim Seo-ryung, 金瑞鈴)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Writer; Representative, Old & Deep Story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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