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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숲길에서 누리는 ‘마음속의 평화’

  • 조회수 202
  • 행사기간 2016.11.04 - 2016.11.04
  • 등록일 2016.11.04

기획 특집

DMZ: 철책선을 통해 엿본 금지된 땅 기획 특집 2 DMZ 숲길에서 누리는 ‘마음속의 평화’

평화를 창안해낼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제는 숲길이 된 60여 년 전의 전쟁터를 걸으며 나는 줄곧 생각했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을지전망대에서는 한국전쟁 때의 치열했던 격전지 펀치볼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맑은 날에는 멀리 북한에 있는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도 보인다.

1986년 5월, 유네스코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비폭력 교육에 관한 국제 학술회의를 열면서 <폭력에 관한 세비야 선언>을 발표했다. 전쟁과 같은 조직적 폭력이 인간의 생물학적 폭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관념에 반박하기 위해 작성된 5개 명제의 세비야 선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전쟁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듯이, 평화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 전쟁을 창안한 종이라면 평화를 창안해낼 능력도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그렇다면 DMZ는 인류가 마음속으로 만들어낸, 전쟁에서 평화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로 볼 만한 꽤 그럴 듯한 발명품인가? 제법 성공한 몇몇 경우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진 이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뭔가 말해야 한다.

DMZ와 간전
상(商) 나라 때의 일이다. 제후국이던 우(虞) 나라와 예(芮) 나라가 국경 분쟁으로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퉜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가리자며 또 다른 제후국인 주 나라 서백(西伯)을 찾아갔다. 그러나 두 나라의 왕은 주 나라에 들어서자 곧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는 서백을 만나보지도 않고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들이 본 것은 밭을 가는 자들이 서로의 경계가 되는 두렁을 양보해 공유하는 풍습이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 일화의 배경은 물론 주 문왕(文王)이 된 서백을 칭송하려는 데에 있지만, 동양의 농업인들의 지혜나 풍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른바 간전(間田), 또는 한전(閑田)을 말한 것이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분쟁이 되는 곳을 양보하여 간전(間田)으로 한다.”고 했으며, <설원(說苑)>에는 한전(閑田)이란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완충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예기>에는 이를 ‘한전(閒田)’이라고 불렀다. 누구의 것도 아닌 창밖으로 보는 달이나 나뭇가지 같은 땅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DMZ와 간전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보인다. DMZ가 협상의 테이블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능적이고, 가장 이해국 중심적인 수준의 판단만을 남긴 결과라면, 간전은 현실적 이해관계의 바탕 위에서 상대에 대한 양보와 절제와 관용이라는 마음이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개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MZ는 비교적 성공한 발명품으로 보인다. 잠정적이었지만 여러 분쟁 지역에서 전쟁을 중단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특히 남극과 같은 과학적 탐험이나 연구를 위한 목적에는 빛을 발했다. 그러나 둘 이상의 세력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국의 가치와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하는 경우 DMZ의 효용은 매우 제한적으로 보인다. 한국의 DMZ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약 150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과 온갖 무기들이 집결한 중무장지대가 되어 버렸으며, 살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분명한 대치 국면이 아주 광범위한 지역에서 60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거대한 국제기구나 국가기관의 싱크탱크, 뛰어난 지도자의 결단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끌어낸다고 믿는다면 이 글은 여기서 멈춰야 옳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오솔길을 가로 막는 가지를 쳐내거나 학교로 가는 길을 넓히고, 마당에 이름 모를 꽃을 옮겨 심는 것 같은 그 사소함에 대해 말할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사는 곳이 DMZ 인근 민통선 안이라는 것이고, 같은 점은 그들 역시 더 나은 삶을 위해 부단히 견디고 양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평화를 창안해낼 능력을 본다. 모름지기 간전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펀치볼 둘레길에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펀치볼(Punch Bowl)’은 한국전쟁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이 지역을 적에게 빼앗기면 춘천까지 위험하고 춘천을 빼앗기면 곧장 서울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어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양구군 안에서만 큰 전투가 아홉 차례 있었는데 그 중 네 번의 전투가 이 펀치볼에서 벌어졌다. 한국 해병이 ‘무적해병’이란 별칭을 달게 된 ‘도솔산 전투’와 40일 동안 주인이 6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고지전을 벌인 ‘가칠봉 전투’의 무대가 바로 펀치볼이다.

DMZ 펀치볼 둘레길의 숲길 체험 지도사 김은숙 씨(맨 오른쪽)가 탐방객들에게 주변의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

펀치볼이란 지명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 외국인 종군기자가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인 지형이 화채 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지만, 한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암석의 풍화와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이 해안분지(亥安盆地)는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작은 산골 마을에 불과했다. 휴전이 된 뒤인 1956년 민통선으로 분류된 이 폐허가 된 마을에 정부가 정책적으로 민간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지금과 같은 1700여 명이 모여 사는 면 단위 마을이 된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던 시절에 이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땅을 일궈 지뢰가 가득한 해발 600미터(가장 낮은 곳이 해발 400미터다) 산비탈까지 농토로 만들었다. 15년 전 산림청 주도로 와우산에 조림을 하려고 땅을 고르면서 주운 탄피만 두 가마니였다니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도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땅은 지뢰밭이거나 군사보호지역이다. 올해도 제4땅굴이 있는 현리 쪽에서 두 건의 지뢰 사고가 있었다.

숲길 체험 지도사 김은숙 씨는 탐방객들에게 “펀치볼 둘레길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자연의 신비에 대해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각별한 숲길”이라고 강조하곤 한다.

2011년 가을, 이 최북단 마을에 ‘DMZ 펀치볼 둘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생겼다. 민통선 지역 안에 있는 탓에 탐방로를 만들 때 지뢰 탐지는 필수였다. 그래야 관할 군부대에서 통행 허가를 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전을 위해 반드시 ‘숲길 체험 지도사’를 동반해야만 한다. 김은숙 씨(56세)는 5년째 이곳에서 숲길 체험 지도사로 일하고 있다. 탐방객들에게 가이드 역할도 하지만, 숲길 관리나 생태 조사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는 이 직업을 이곳에서 자란 덕에 받은 손꼽을 만한 혜택 중의 하나로 여긴다.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어 자식 둘을 키우긴 했지만 갈수록 일은 고되고, 농산물 가격은 자꾸 떨어져 뭔가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일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트레킹 코스는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어머니와 피나무 껍질이며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그 길과 겹친다. 그때 어머니에게 주워들은 나무 이름이며 풀 이름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물론 그때와 달리 쥐치, 껌쑥, 솜나물 같이 사라진 식물도 있는가 하면, 또 새로 들어온 외래종 식구도 많다.
DMZ 펀치볼 둘레길은 총 73㎞의 트레킹 길로 ‘평화의 숲길’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먼멧재길’ 등 4개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녀는 백두대간의 시작인 먼멧재길도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각별히 애착이 가는 길은 오유밭길이다. 지뢰가 많고 산세가 험한 가칠봉이나 대우산 쪽과 달리 비교적 평탄하기도 하고, 고원의 황톳길과 계곡과 저수지가 차례로 펼쳐져 탐방길이 다채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그녀가 초등학교 때부터 “부뚜막에 올라가 밥을 지으며” 살았던 동네이다. 오유밭길 초입에는 부모님의 산소도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외출할 때면 갓 쓰고 두루마리 입고 다니던 아버지,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부끄러워 등을 돌렸던 기억은 오래도록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탐방객들을 안내하다가도 문득 어머니와 함께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특히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의 흰 구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더 그렇다. 언젠가 해병대로 펀치볼 전투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길라잡이를 할 때도 그녀는 그들의 눈빛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그들도 이 숲길 어딘가에서 총을 거머쥔 채 앉은 자리에서 어린 아이처럼 여념 없이 꾸겨져 잠든 어린 병정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언젠가 해병대로 펀치볼 전투에 참전했던 노병들의 길라잡이를 할 때도 그녀는 그들의 눈빛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그들도 이 숲길 어딘가에서 총을 거머쥔 채 앉은 자리에서 어린 아이처럼 여념 없이 꾸겨져 잠든 어린 병정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철원 평야에서
시베리아나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서식하는 겨울철새들에겐 한반도는 최적의 월동지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와 간척 사업은 철새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나마 철새들에게 위안이 되는 곳이 철원평야다. 추수가 채 끝나기 전부터 기웃거리던 기러기나 두루미의 선발대는 10월이 되면 철원평야의 하늘을 뒤덮을 만큼의 기러기와 두루미를 몰고 온다. 여기에 비교적 늦게 날아오는 청둥오리나 가창오리까지 합류하면 철원평야에만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철새들로 장관을 이룬다.

1990년 양구 북동쪽 26km 지점 DMZ 안에서 발견된 제4땅굴은 펀치볼지구 안보관광지 중 한 곳이다. DMZ 지역에서는 북한이 판 남침용 군사통로인 땅굴이 모두 네 개 발견되었다.

이들이 이곳을 첫 기착지로 여기는 것은 철원에 있는 화산 오리산이 만든 용암 대지 위로 섭씨 15도의 따듯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길과 비옥한 현무암 풍화토는 이곳을 강원도 최고의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비록 이곳이 민통선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드는 까닭도 풍요로운 자연 환경에 있듯이, 새들도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 지천으로 널린 낙곡과 풀, 갖가지 애벌레, 얼음장 밑의 물고기를 찾아 이곳으로 날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한국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다. 철원과 함께 평강군, 김화군을 잇는 삼각 축선은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라 불리며 중부전선을 장악하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중공군과 맞붙은 유엔군은 정전 협상 직전까지 엄청난 포격전을 펼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1992년 12월, 철원 DMZ의 한 병사의 눈에 눈 덮인 벌판에서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두루미 한 마리가 관측되었다. 일주일쯤 되던 날 두루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병사가 달려갔을 때 이 암컷 두루미 옆에는 또 한 마리의 두루미 사체가 있었다. 이 두루미는 수컷이었고, 죽은 지 꽤 시간이 흐른 것으로 보였다. 병사는 일단 기진한 암컷을 극진이 보살폈다. 이 병사와 두루미 이야기는 수컷의 주검을 슬퍼하던 암컷 두루미의 이야기로 마을에 퍼졌다.
극진한 보살핌으로 한 달 만에 기력을 회복한 이 미망인 두루미를 마을사람들은 자작나무 숲에 둘러싸인 어느 북쪽 호숫가로 날려 보냈다. 그녀의 발목에는 가락지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다시 철원평야를 찾아왔을 때 그녀를 알아보기 위한 표식이었다. 그 뒤 이 민통선 지역에서 생산한 철원 오대쌀은 비옥한 땅과 청정 지역이라는 이미지에 힘입어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다. 그 두루미를 다시 보았다는 사람은 없지만 철원 사람들은 이를 두루미의 은혜 덕분이라 여기며, 해마다 잊지 않고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장단반도와 적성면 두지리 임진강변, 그리고 철원군 동송읍 토교저수지 등 민통선 지역 일대는 손꼽히는 독수리의 월동지다. 2,30년 전부터 굶주린 거대한 독수리들이 탈진한 채 민가에서 자주 발견되자 주민들이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서 독수리들의 겨울 나들이가 더 활발해졌다.

그 수가 줄거나 늘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 해 2,000마리 안팎의 독수리들이 이곳 민통선 주위에서 겨울을 난다. 이 자연의 청소부는 축산 농가에서 폐기한 동물의 사체들까지 깨끗이 치워줌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또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준다.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내 월정리역은 1914년 개통되어 서울에서 원산까지 운행하던 경원선의 간이역으로, 한국 전쟁 직후 폭격을 맞고 멈춰선 객차의 잔해가 철길 옆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가 담긴 간판 아래 전시되어 있다.

1979년 UNEP(유엔환경계획)가 국제 자연 평화생태 공원을 제안한 이후 여러 국제기구는 물론 한국 정부의 각 기관과 언론의 지원으로 다양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토대로 남북한 간에 DMZ의 평화적 이용을 다짐하는 합의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지만 약속은 늘 흐지부지 되었다. 평화를 담보로 한 협상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함민복 시인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놀라운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민통선 내 초소 아래 철원평야의 가을풍경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 북한의 산야가 보인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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