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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결혼의 미래

  • 조회수 166
  • 행사기간 2017.04.25 - 2017.04.25
  • 등록일 2017.04.25

기획 특집

결혼: 한국의 결혼 방식 기획 특집 4 결혼의 미래

결혼의 개념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거리는 사랑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에 서로 함께 하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욕구는 날로 커진다.

심야의 FM 라디오에서 사랑에 관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새벽 1시, 사람들의 마음이 말랑해지는 시간. 많은 사연들이 라디오 부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지난 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 덕분에 이전과는 다른 ‘시대상’을 반영하는 연애와 사랑에 대한 고민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가령 24시간 연결된 SNS 시대를 반영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사랑에서의 거리 개념
이제 ‘과거의 사람들’이라는 개념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이전의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과거의 사람들과 멀어졌다. 졸업은 달리 말해 입학을 의미했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거리 때문에 특정한 사람과 이별할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결별한 연인 사이도 그렇다. SNS의 알고리즘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옛 연인을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의 ‘친구추천’에서 보게 됐다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어디 그뿐인가. 헤어진 애인의 여자 친구를 친구로 추천한 페이스북 때문에 며칠째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녀는 (의도하지 않게) 스토커가 된 것처럼 옛 남자의 연인을 뒤쫓다가 그들이 곧 결혼한다는 (결코 알고 싶지 않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연애담은 또 있다. 바로 ‘장거리 연애’의 활성화다. 남자친구는 도쿄에, 여자는 서울에 있는 커플의 사연이 종종 라디오 부스에 도착한다. 한창 연애 중이던 커플 중 한 명이 유학이나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일 역시 생각보다 잦다. 도쿄와 서울이라면 시차가 없으니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그렇다면 런던과 서울은 어떤가? 서울과 상파울루는? 요즘은 꼭 연애 중인 커플만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게 아니다. 내 주변에는 남편은 서울에 아내는 포항에, 아내는 캘리포니아에 남편은 뉴욕에 있는 커플도 있다.
서울에 사는 후배가 암스테르담에 사는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했다. 후배는 어느 날 남자를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가 석 달을 함께 지냈다. 비자 문제 때문에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야 하던 날, 공항에서 남자는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겠다고 말하며 ‘피앙세 비자’를 언급했다. 피앙세 비자는 국적이 다른 연인의 추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 장치이다. 이미 유럽에선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커플들이 50퍼센트에 육박한다. 결혼과 동거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떨까. ‘3포세대’(취직, 연애, 결혼)에 ‘결혼’이 포함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현재와 같은 결혼 제도가 유지된다면 결혼을 포기하는 커플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결혼이 생활을 윤택하게 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과 동시에 은행의 대출 이자를 감당해야 한다면 누가 쉽게 결혼을 선택할 수 있을까. 결혼은 그저 두 사람간의 ‘사랑’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부동산, 금융과 같은 다양한 정책들이 공고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에 예정보다 오래 머물던 후배는 남자친구와 결국 헤어졌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연애하던 다른 후배 역시 얼마 전, 연인과 헤어졌다. 그 얘길 친구와 하고 있는데, 뉴욕과 서울 사이 14시간 시차를 극복하며 연애 중이었던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2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느낀 결론은 딱 하나야. ‘롱디’(long distance에서 나온, 장거리연애를 뜻하는 속어)가 성공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양다리 걸치기야!” 정신과 전문의였던 그녀는 단호했다. ‘양다리’만이 장거리 연애로 인해 생기는 ‘섹스 없는 연애’라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장거리 연애’의 가장 큰 미덕은 상대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는 적당한 무관심이란 말도 덧붙였다.

반동거, 새로운 결합의 형태
독일 소설가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는 ‘사랑은 지리로 인해 죽어 버린다’라고 말했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도 ‘눈에 안 보이면 멀어진다’란 뜻의 다양한 속담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해진다. 사랑이 견딜 수 있는 거리는 대체 얼마만큼일까?

사실 새해 첫 주에도 나는 장거리 사랑에 대한 고민을 상담했다. 이들은 거리와 시차 때문에 떠나기도 전에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결혼하고 싶지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미리 실패를 예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사랑의 완성이 꼭 결혼이어야 할까. 결혼이 꼭 그 사람과 내내 함께 있는 것만을 포함하는 걸까. 우리 시대의 결혼은 과거와는 달라질 것이다. 이미 우리 삶의 조건이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 저널니스트 안희경(Ann Hee- kyung)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발견했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에 대해 전에 내가 말했던가요? 우엘벡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디스토피아에 대해 썼습니다. 이는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으로 아주 끔찍한 미래를 말하는데, <어느 섬의 가능성>이라는 책에 나오죠. ‘우리가 지금의 경향대로 더 나아간다면 어디에 도달할까?’ 그 결과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아주 많은 커플들이 반만 결합된 채로 살 거라는 거예요.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체가 함께하고 싶어 하면서도 독립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인데, 미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표현 있잖아요. “난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 이 말은 좀 떨어져 있으라는 거죠. 날 좀 놔두라는. 바로 우리 시대의 이념입니다.” 바우만에 의하면 오늘날 ‘의존성’은 추접스러운 말이 되었다. 이 말을 해석하면, 우리가 결혼할 때 서약했던 말, 즉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그대를 의지하겠다는 말이 이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그만큼 독립성을 강조한다.
이제 사랑이 응답하는 곳은 이전과 다르다. 사람들은 24시간 연결되어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몸이 있는 곳은 일종의 자기만의 요새이다.

연결은 인터넷으로만 하고, 각자 홀로 산다는 뜻이다. 우리는 정말 많은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24시간 연결되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도 원한다. 문제는 ‘자유’와 ‘안정감’은 결코 양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정감 있는 자유란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자유는 필연적인 위험함을 동반한다. 안정감은 필수적으로 공동체를 요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결합의 형태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반동거 커플이다. 내 인터넷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게 아니라, 각자의 집을 두고 필요할 때 만나는 것이다. 제주에 사는 한 커플은 남편은 협재에 아내는 표선에 산다. 이들은 각자의 일을 하다가 주로 주말에 만난다. 물론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고 오고 간다. 이들이 내게 말하길, 그것이 결혼 12년차에야 터득한 황금 비율이라고 했다. 적당한 밀도감의 자유, 적당한 정도의 안정감이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어준다는 말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말살시키지 않는 정확한 거리를 찾아냈다.
최근에 아예 ‘졸혼’(卒婚)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결혼을 졸업한다'라는 뜻으로 이혼과는 다른 개념이다. 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으로 일본에서 등장했다. ‘졸혼’은 반동거 커플보다 훨씬 더 독립적인 삶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결합의 형태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반동거 커플이다. 내 인터넷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게 아니라, 각자의 집을 두고 필요할 때 만나는 것이다.

근자기만의 방
대부분 우리는 결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결혼한다. 그건 마치 사랑에 대해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사랑에 대한 미신에 가까운 신화들이다. 첫 눈에 빠지는 사랑,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랑, 모든 게 자연스러워서 온 몸으로 이 사람이 ‘내 사람’임을 알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의 사랑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나 소설 드라마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시작되는 사랑’에 대해 갖는 관심의 반만큼 ‘유지되는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한다면 지금과는 분명 다른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해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만큼 오랫동안 고민한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잘못된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이 칼럼에서 그는 미혼시절 보통의 남자 혹은 여자였던 우리가 어째서 결혼과 동시에 인내심 없고 인정머리 없는 ‘미치광이’가 되는지 그 매커니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화가 났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리 지를 데가 없죠. 결혼할 때까지 내가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종일 일만 해도 저녁 먹으라고 전화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일에 얼마나 미쳐있는지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누군가 나를 막으려 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예측하지 못합니다. 밤에 누군가를 껴안고 포옹하는 건 좋지만, 아주 깊이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충실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차갑고 어색하게 행동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혼자 살다 보면 쉽게 빠지는 착각이 내가 다른 사람과 살기 쉬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거죠. 나 자신을 모른다면,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보통은 그러므로 세상 모든 데이트의 첫 번째 질문은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미쳐있나요?”가 되어야 한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왜 아니겠는가! 내게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른 가지쯤 되는 문장을 쓰겠지만, 지금으로선 당장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결혼이란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매순간, 미리 실패하는 것이다. 과장법 같다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결혼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충고는 바로 아래의 말이다.
결혼이란 사실상 어떤 고통을 참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그건 앞으로 결혼 상대자가 내게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종류의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대상자는 그런 고통을 참아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선택하는 일에 가깝다.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누가 주는 상처를 견딜 것인가는 최소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야 최소한 덜 불행할 테니까! 결국 결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면 견디는 일이 때때로 상상보다 훨씬 힘든 일이 될 것이란 말이다.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가? 여전히 이 질문은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정이 가능한가 아닌가만큼이나 진부한 질문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15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통해 배운 건 선택이 A와 B사이의 무엇을 택하는 정도의 간단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선택이 그렇다. 선택은 배타적이고 잔인한 속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말해줄 것이 있다. 분명한 건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이 둘이서도 잘 지낼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자기만의 방은 작가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백영옥 (Baek Young-ok, 白榮玉)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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