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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한국 추상미술 거목의 내면(內面) 산수화

  • 조회수 243
  • 행사기간 2017.04.25 - 2017.04.25
  • 등록일 2017.04.25

문화 예술

아트리뷰 한국 추상미술 거목의 내면(內面) 산수화

유영국(Yoo Young-kuk, 劉永國, 1916~2002)은 국내 화단에 추상이란 개념조차 낯설었을 때, 점·선·면·형·색의 기본 조형요소로 산의 핵심을 명징하게 그리며 한국의추상미술을 개척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유영국, 절대와 자유” 전시(2016년 11월 4일부터 2017년 3월 1일까지)는 60년에 걸쳐 그린 작품 100여 점이 한 자리에 모인 뜻 깊은 회고전으로 거장의 재발견을 시도했다.

<직선이 있는 구도>[1949]. 캔버스에 유채, 53 x 45.5 cm

붉디붉은 산이 금강석처럼 반짝인다. 너무 붉어서 터져버릴 듯 충만한 산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녹색 산, 주황색 산, 푸른 색 산이 캔버스를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솟아오른다. 산은 여러 색 삼각형으로 단순화되어 강렬하다. 산은 산이되, 산을 꿰뚫은 삼각의 강건함이 보는 이 마음에 육박한다. 광휘에 찬 색면(色面)은 정열과 냉정을 동시에 내뿜는다.
화가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했다. 그가 좋아했던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한마디가 그의 말과 겹쳐진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비극을 극복하고 일어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평온함을 의식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유영국은 자기 마음에 들어 앉힌 산을 그리면서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 여러 색과 형태로 구현된 산은 그가 보고 느낀 인간 내면의 산수화다. 산의 화가 유영국은 1916년 경상북도(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강원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울진은 응봉산이 있는 골 깊은 동네다. 산은 그의 놀이터였다. 그는 어린 시절 몸에 익은 산을 무언의 벗으로 삼고 그 벗을 평생 일관되게 그렸다.
“내 그림은 ‘산’이라는 제목이 많은데, 그것은 산이 너무 많은 고장에서 자란 탓일 게다. ‘숲’이라는 그림도 내가 어렸을 때 마을 앞에 놀러 다니던 숲이 생각나서 그린 것이다. 무성한 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잔디밭에 쏟아지는 광선은 참 깨끗하고 생기를 주는 듯 아름답다. 항상 나는 내가 잘 알고, 또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곳에서 느낀 것을 소재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다.”
생 빅투아르 산을 즐겨 그린 프랑스 화가 폴 세잔처럼, 유영국에게 산은 화면의 구성과 색채를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친근한 주제였다.

서울에 정착한 뒤인 1960년대에도 그는 주변의 도봉산, 북한산, 남한산성 등에 부지런히 다니며 산의 정기를 흡수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비틀리며 신음하는 이 땅의 아픔을 기쁨으로 빛나는 원색의 삼각형들로 달랬다. 미술사가 이인범(Lee In-bum)은 이런 유영국의 작품 세계가 “추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가능성을 평생에 걸쳐 일으켜 세우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침>[1958]. 캔버스에 유채, 100 x 73 cm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은 1950년대 한국에서 추상미술을 하는 의미이자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4남매 중 셋째인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는 자신이 중학생 때 겪었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부모 직업 조사 때 아버지가 뭐하시냐는 질문에 화가라고 대답하면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을 다시 받게 되어 어느 날 아버지에게 그 대답을 구했다는 것이다.
“뭘 그리느냐 하면 어찌 할까요, 여쭸더니 아버지는 ‘추상화가’라고 답하라 하셨다. ‘추상화가’라고 하면 또 그게 뭐냐고 묻는다 하니 그러면 ‘모던 아트를 한다 해라’ 말씀했다. 그것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하니 ‘그럼 아방가르드 작가’라 말하라며 웃으셨다. 한참 뒤에 개인전을 열었을 때 누군가 그림을 매입하자 ‘내 그림도 팔리나?’ 하시며 빙그레 미소 지으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유영국은 1935년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한 뒤 하세가와 사부로(長谷川三郞) 등 당대 추상미술의 대표 작가들과 교유하면서 전위 미술운동에 뛰어들었다.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최고상인 협회상을 한국인으로 첫 수상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 무렵 오리엔탈 사진학교에서 사진수업을 받고 전위사진을 발표한 것도 그의 앞서가는 창작열을 엿보게 한다.
유영국은 1943년 귀국한 뒤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변기에는 붓을 놓고 가업인 어업과 양조업에 종사하며 가장으로서 대가족을 이끌다가 나이 마흔에 아내에게 “나는 금산도 싫고, 금밭도 싫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화업에 복귀했다.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新象會) 등에 참여하며 한국 추상미술운동을 이끌던 그는 돌연 모든 단체 활동을 중단하고 1964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 뒤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하는 은둔에 들어갔다.

 

<해토>[1961]. 캔버스에 유채, 130 x 162 cm

<작품(Work)>[1967]. 캔버스에 유채, 130 x 130 cm.

신화가 없는 작가
유영국은 과묵과 금욕, 고집과 뚝심의 화가로 이름났다. 그는 신화가 없는 화가였다. 동년배 화가였던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이 식민지의 그늘에서 천재 또는 기인으로 튀어 오르거나 일그러진 데 반해 금욕주의자처럼 반듯하고 건조한 나날을 보냈다. 오전 8시에 화실로 들어가 오후 6시에 작업을 마무리하는 ‘그림 노동자’의 삶을 견지했다. 그의 일상을 지켜본 소설가 강석경 씨가 “대패질하듯 그 흔적을 깎아서 ‘좋은 화가’로만 남았을 뿐” 그 어떤 장식의 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그는 형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고립과 은둔 속에 오로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았다.

 

<원-A (Circle-A)>[1968]. 캔버스에 유채, 136 x 136cm

<산과 호수(Mountain and Lake)>[1979]. 캔버스에 유채, 53 × 65 cm

1968년경 서울 약수동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는 유영국의 모습을 사진가 임응식 이 찍었다.

 

그는 제 그림 속의 산을 닮아 순수하고 초월적인 정신세계를 갈구했던 자유인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동기였던 화가 김병기 씨는 고인을 일러 “형식을 혐오하고 자유롭고 활달한 기질을 지녔던 멋쟁이”라 했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서울대 교수직을 2년 3개월 만에 청산했고, 다시 홍익대에서 교수로 모셨으나 역시 3년 만에 사표를 내고 교직을 떠났다. 무리에 섞이지 않고 홀로 화실을 지키며 내면의 산과 대화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회화란 모름지기 자기를 내세워야 한다. 나의 이미지의 출처는 자연과 생활 주변이다. 나는 예순 살까지는 기초를 좀 해 보고, 이후 자연으로 더 부드럽게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인이 생전에 자식들에게 남긴 얘기도 일맥상통한다. “아버지는 항상 ‘그림공부’란 말을 입에서 놓지 않으셨다. 60세까지는 그림공부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70세였을 때 ‘50대는 청년이다’라고 하셨다. 80세가 되시더니 ‘60대는 한창이다’라 하셨다. ‘나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추상을 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그림 앞에서 그는 늘 푸른 ‘강원도의 소나무’ 같은 분이셨다.”

곁가지와 수사학을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화면은 작가의 침묵 속에 보는 이를 그 산 너머 절대적인 고요, 자유, 평화의 세계로 데려간다. 화면 거죽은 서양화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내면은 조선 산수화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산-Red>[1994]. 캔버스에 유채, 126 x 96 cm

도덕적 산수화가
시대별로 나뉜 4개 전시실을 둘러보면 동양에서 회자되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의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청정한 공기와 높은 기상은 깊은 산중에 든 듯 보는 이를 명상과 서정으로 이끈다. “자연 중에서도 특히 산을 ‘한국성’이라 생각하는 태생적인 느낌과 경험, 그리고 믿음의 ‘총체적인 조화’를 화가는 성정처럼 표현했다. 온통 조화로운 삶과 예술과 자연의 합일, 이것이 화가의 이상(理想)이라는 측면에서, 화가는 색의 조화를 추구했다기보다 애당초 색의 본질이 화합의 세계와 맞닿아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화가의 산 그림을 ‘도덕적 풍경’이라 함은 이러한 뜻에서다.”(<유영국>(2012) 중 정영목의 글 ‘유영국의 산: 도덕적 풍경’에서)
유영국의 산 그림을 전 세계인이 집에 앉아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된 것도 이번 회고전의 쾌거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글은 유영국의 주요 작품 20점을 온라인 예술작품 전시 플랫폼인 ‘구글 아트 앤 컬처(Google Arts & Culture)’에 무료 전시한다.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에서 개발한 ‘아트 카메라’를 국내 최초로 사용해 평면 작품을 초고화질로 촬영했다. 이 화면으로 우리는 돋보기나 확대경으로 그림을 살펴보듯 표면의 재질감을 감상할 수 있다. 기하학적인 엄격한 조형성, 나이프로 두텁고 균질하게 바른 강렬한 색면, 그 속에서 우람하고 굳건하게 솟은 산은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다”는 화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곁가지와 수사학을 털어버리고 본질만 남은 화면은 작가의 침묵 속에 보는 이를 그 산 너머 절대적인 고요, 자유, 평화의 세계로 데려간다. 화면 거죽은 서양화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내면은 조선 산수화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작품>[1989]. 캔버스에 유채, 65.4 x 91 cm

<작품>[1994]. 캔버스에 유채, 66 x 91 cm

정재숙 (Chung Jae-suk, 鄭在淑)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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