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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바람과 돌, 시간의 한숨소리를 사랑했네-남제주 기행

  • 조회수 225
  • 행사기간 2017.04.25 - 2017.04.25
  • 등록일 2017.04.25

생활

길 위에서 바람과 돌, 시간의 한숨소리를 사랑했네

화산섬 제주도는 우뚝 솟은 한라산을 중심에 두고 동서로 긴 타원을 이루며, 대략 그 남쪽 절반이 남제주 곧 서귀포이다. 대한민국 최남단이어서 봄이 가장 일찍 찾아온다.

봄을 맞아 만발한 유채꽃밭 너머 푸른 바다와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안녕, 길 위에서 처음 본 당신에게 인사를 합니다.
아세요? 당신. 인생의 행복은 사랑하는 이와의 인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와의 인사가 쌓이고 쌓여 행복이 된다는 것을. 행복은 포도주와 같아서 인생이 절망과 좌절의 강을 건널 때 우리에게 강을 건널 작은 방주와 노를 건네지요, 행복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남제주의 길 위에 있습니다. 이 길 위에 몇 번쯤 섰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길 위에 설 적마다 나는 내 생의 첫 연인을 만난 것처럼 안녕, 하고 따뜻한 인사를 합니다. 당신도 내게 따스한 목소리로 안녕! 인사하는군요. 이 인사를 나눌 때 가슴은 설레고 눈빛은 하늘의 꽃밭을 만난 것처럼 환해집니다. 마음 안의 미움이나 절망의 그늘들이 봄바람처럼 사라지게 되지요.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드는 당신, 당신은 혹 당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없나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지요. 지상에서 내가 보낸 60년 시간들의 본질. 그것은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열정과 순수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지 못했고 마음을 바친 최고의 시들을 쓰지 못했습니다. 밤을 새운 몇 편의 시들을 향해 평론가들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것이 최고일 거라 생각하며 우쭐대곤 했지요. 조급함과 졸렬함으로 가득 찬 시간의 웅덩이를 건너 왔을 뿐이라 생각하면 마음은 더 어두워집니다.

검붉은 돌기둥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서귀포 주상절리대는 화산섬 제주의 절경 중 하나로 꼽힌다.

일출이 아름다운 이유
내가 인사를 나눈 길은 제주도 일주도로입니다. 아직도 옛 명칭인 ‘12번 국도’로 더 많이 알려진1132번 지방도이죠. 신비하고 아름다운 자연현상을 가득 간직한 이 섬의 생태는 2007년 유네스코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요.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용암들로 둘러싸인 마을들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화산 동굴들,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들과 섬들을 보며 걸어가다 보면 짙은 노란빛의 유채꽃이 천지를 가득 채웁니다. 나는 잠시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넋을 놓습니다. 부끄러움도 잠시 호흡을 거두지요. 내가 이 길을 찾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추사 적거지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사람 얼굴 형상을 한 석상이 올라앉아 있는 돌탑과 마주치게 된다. 오른쪽으로는 제주의 수 많은 오름 중 드물게 뾰족한 형상을 한 단산이 보인다.

인간은 길을 만나 외로움을 접고 길은 인간의 외로움과 부끄러움을 만나 완성되는 셈입니다. 나는 지금 일주도로의 동남쪽 길 위에 있지요. 눈앞에 코끼리 형상을 한 신비한 모양의 산봉우리 하나가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이 산을 성산 일출봉이라 부릅니다. 제주의 맨 동쪽 끝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서귀포를 찾은 관광객들이 산방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

5천 년 전 바다 속의 화산이 폭발하여 바다 위로 솟구친 이 휴화산은 처음에 섬이었으나 퇴적물이 쌓여 육지와 연결되었지요. 이곳의 일출이 아름다운 이유는 색색으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입니다. 초록색과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의 햇살들이 쏟아집니다. 신비하지 않은지요. 색색으로 쏟아지는 햇살이라니요. 잠시 고갱의 그림을 생각해보세요. 타이티의 섬에서 생을 마친 이 ‘고귀한 야만인’ 의 그림 속에 투영된 원시의 빛들이 바로 햇살의 빛깔이지요. 구멍이 송송 뚫린 검은 색의 용암석들, 산자락에서 바다까지 밀려나가는 노란 유채꽃들, 푸른빛으로 출렁이는 바다의 물살들, 해녀들이 내뿜는 긴 숨소리 사이로 햇살이 쏟아집니다. 해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녀는 제주도의 삶의 상징입니다.

이들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수심 수십 미터의 바다에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지요. 경험 많은 해녀들은 물속에서 5분쯤 호흡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잠수 작업을 마치고 물 위에 솟구쳐 내뿜는 숨소리야말로 제주 해녀의 상징이며 제주도 여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한평생 이들이 바다와 싸우며 늙어가는 모습은 경외 그 자체이기도 하지요. 2016 년 제주도의 해녀들과 그들의 삶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는 일출봉 위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처음엔 노랑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햇살이 쏟아지고 점점 연두색과 푸른색으로 바뀌다가 아주 신비한 분홍빛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봄날 유채꽃 속에 앉아 성산 일출봉의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새들이 왜 노래하는지 꽃들의 얼굴이 왜 이리 환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섭지코지로 걸음을 향하던 나는 방향을 바꿉니다.
‘코지’는 아주 작은 곶(串)의 의미를 지닌 제주 방언입니다. 30년 전 내가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때, 신혼여행이었지요, 이곳은 원시 자체의 풍광을 지니고 있었지요. 두 사람이 있고 꽃 냄새를 가득 실은 바람이 있고 파도 소리가 있고 색색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있었습니다. 사실 아무 것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거친 세상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어린 부부에게 이곳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감당해야 하는 삶이 마련한 선물과 같은 공간이었지요. 이젠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올인>이라는 한류 드라마 혹 아세요? 이말고도 많은 영화들과 또 다른 드라마들의 촬영장소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 수 없지요. 고독했으나 우아했던 한 신비의 장소가 빛을 잃은 공간에 사람들의 탑이 쌓일 때 비로소 내가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이들 모두 절망과 슬픔과 아픔을 지녔겠지요. 그 아픔들을 잊기 위해 몰려온 것은 아닌지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나도 그들도 우리 모두 다 슬픔 속에서 꿈을 꾸는 인간일 테니 말이지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1844]는 전문화가가 아닌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스산한 유배지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긴 선비의 마음이 담겨 있다. 수묵화, 23 x 69.2 cm

화가 이중섭과 서귀포 바닷가
남제주 여행길에 내가 만날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 중 한 사람을 만날 차례군요. 이중섭(1916-1956), 그는 한국의 화가입니다. 스무 살 적 그의 그림과 삶에 매료가 되었지요. 고은 시인이 쓴 이중섭 평전을 표지가 다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서야 이 독서는 끝이 났지요. 제주의 남쪽 서귀포 시에는 이중섭을 기념하기 위한 미술관과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중섭이 남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1951년 1월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참이었고 그는 이곳에 아내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피난 왔습니다. 부유한 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무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공부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났지요. 이십 대의 내게 식민지 시절 젊은 한국 예술가와 일본 여인의 사랑이 가슴 아프게 닿아왔습니다. 둘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바다인 현해탄을 왕래하며 만났고 1945년 결혼하였지요. 그 직후 한국은 해방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땅인 원산에서 평화롭게 살던 부부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원산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지요. 이중섭이 남제주에 머문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비좁은 피난지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옮겨온 중섭은 1951년 1월부터 그 해 12월까지 서귀포의 바닷가에 머물렀지요.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머문 이 바닷가 시절 가족은 바닷가의 게를 잡아먹으며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중섭의 그림에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게들의 그림이 자주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중섭은 그 때 잡아먹은 게들에게 많이 미안했다고 밝힌 적이 있지요. 1952년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 보낸 뒤 중섭에게 불행한 시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흘이 멀다 하고 마사코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 중 어느 날의 편지 한 통을 여기 옮깁니다.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나의 발가락 군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뜰한 키스를 보내오.

남덕(南德)은 마사코의 한국 이름입니다. 이 편지에서 내가 눈을 떼지 못한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발가락 군에게 키스를 보낸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지요. 가장 낮고 허름한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 중섭의 세계관이 여기 나타나 있지요. 중섭은 아내의 발가락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많은 편지에 아내의 발가락에 키스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중섭은 황소를 즐겨 그렸습니다. 소의 우직함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이끌어내고자 했지요. 전쟁 통에 물감과 그림 재료를 제대로 구할 수 없었던 그가 즐겨 화폭으로 삼았던 것이 담배 은박지였습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난 뒤 포장지 안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3백여 점이 남아 있는 이 은박지 그림 중 세 점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지요. <길 떠나는 가족>은 중섭의 그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소 수레에 아내와 두 아이를 태우고 소풍 떠나는 가장의 모습 속에 중섭이 꿈꾼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중섭은 1955년 마지막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었으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지요. 정신이 쇠약해진 그는 음식을 거부했고 정신과 병동을 전전하다 1956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지켜보는 이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중섭 미술관에서 평생 그가 사랑한 그림들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시절 예술가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볼 수 있어서 마음 따스해집니다. 미술관 아래의 자구리 해안은 중섭이 가족들과 산책을 한 길입니다. 외롭고 쓸쓸한 날 이 길을 걸으며 궁핍했던 한 예술가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당신의 마음이 위로가 되지 않을는지요. 도보로 십 분이나 이십 분 거리의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에 들러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모두들 외로우니까 함께 모이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한국의 한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성산 일출봉에서 산방산에 이르는 길은 ‘파라다이스 로드’라 불릴 만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신비하지만 그곳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선비와 예술가의 숨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중섭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돌 구조물에 이중섭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한 조선 선비의 모슬포 유배 생활
산방산은 남제주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산입니다.
산의 능선은 부드럽고 따스하지요. 말들이 풀을 뜯는 한가로운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곁에 모슬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작은 포구도 있지요. 능선 길을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해 저물녘 모슬포의 작은 식당에 들러 청어구이 백반을 먹습니다.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단지 외로운 날, 깊은 절망에 빠진 날, 작은 포구의 허름한 식당에 앉아 혼자 소주 한 병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철저히 지나간 자신을 분석하며 느끼는 중이지요. 그가 생의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기 1840년 모슬포에 한 사내가 유배를 옵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유배는 왕조 시절 왕명을 거슬린 자에게 내리는 유형을 말하지요. 그는 제주도에서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초가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지요. 극도의 곤궁함과 결핍의 시절에 한 인간의 꽃이 피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과 예술의 최고봉을 빚었지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세한도(歲寒圖) 라는 그림이 1844년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국보 180호로 지정된 이 그림을 꼭 한 차례 보기를 권합니다. 그림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 몇 개로 처리된 허름한 집이 한 채, 거기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가 세 그루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문자가 새겨져 있지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논어에 나오는 이 글의 뜻은 이렇습니다. 추운 겨울이 온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거친 인간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생의 빛남이 찾아오는 것을 은유로 표현한 문장입니다. 이 그림에는 그 당시 청나라의 문인 16명의 그림에 대한 찬이 붙어 있습니다. 유배된 조선 선비의 그림에 당대의 청나라 문인들이 감상을 덧붙인 것이지요.
추사 적거지에서 인생의 한 의미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충분히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는지요. 성산 일출봉에서 산방산에 이르는 길은 ‘파라다이스 로드’라 불릴 만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신비하지만 그곳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선비와 예술가의 숨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곽재구 (郭在九, Gwak Jae-gu)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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