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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백제, 망각을 거부하다

  • 조회수 217
  • 행사기간 2017.08.03 - 2017.08.03
  • 등록일 2017.08.03

기획특집

백제, 잃어버린 왕국의 자취를 찾아서 기획특집 1 백제, 망각을 거부하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백제 고분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1970년대부터다. 오랜 동안 백제는 달빛 아래 있었다. 그 흐릿한 실체와 모호한 시각으로 백제는 자신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가치관에 따라 내면화되고 파편화되었다. 왜곡되긴 했으나 잊히진 않았고, 소외되긴 했으나 버림받진 않았던 백제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어려움과 위기의 순간을 겪을 때마다 신화처럼 되살아나 한국인의 사유와 감성을 일깨운다.

금강 건너편 공산성에 어둠이 내리자 성곽을 따라 등불이 켜졌다. 공산성은 475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인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은 총 길이 2660m에 이르는 왕성이다.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이바지한 백제의 유적지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유적지구는 모두 여덟 곳으로 충청남도 공주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그리고 전라북도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다. 이 가운데 공산성과 부소산성, 그리고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미륵사지의 서석탑(西石塔) 정도가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기울면 기운 채로 햇빛과 바람과 눈비를 맞으며 적어도 1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인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부활하는 옛날의 지배자들
그 나머지는 얼마 전까지 땅속에 있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에 하나가 백제의 무령왕릉으로 확인되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1971년 여름이고,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위 능사(陵寺)에서 백제금동대향로 등이 출토되어 왕실 묘지임을 추인한 때는 1993년 12월이다. 토성인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부여 나성은 1975년 발굴 조사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주변에서 크고 작은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의 동탑지는 1974년에 윤곽이 드러났고, 왕궁리 유적은 1989년 이후에야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 신청에서는 빠졌지만,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세우고 농업과 철기 문화를 발전시킨 건국 후 초기 500년의 역사를 지닌 한성백제 시대의 대규모 토성을 포함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백제 최초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比定)되는 북쪽의 풍납토성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대홍수 때이지만 이곳에서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97년의 아파트 단지 조성 공사 때문이고, 도성의 시가지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남쪽의 몽촌토성 역시 1980년대에 발굴되었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공산성 성곽길은 강바람을 맞으며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걸을 수 있는 좋은 산책길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은 7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불선 사상을 토대로 뛰어난 건축 기술과 독특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고대 왕국들과 교류한 증거가 됨으로써 세계 유산으로의 보존 가치를 입증했다. 깊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거나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너무도 우연히 발견된 놀라운 객관적 증거물들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고 강조하는 일은 학자나 연구자들에게 미루고, 대신에 나는 이런 물증들과 무관하게 백제가 한국인의 사유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 일단을 보여주려 애쓸 것이다.
이 시도는 야심차지만 나의 자산은 아마추어적인 관심이 전부다. 내 관심의 단초는 햇빛에 노출되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들은 항상 흐릿하고 모호한 비가시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내면화된 과거를 부둥켜안는다. 좀처럼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망각을 거부한다. 그럼으로써 옛날을 지배한다.

저녁 어스름이 밤의 경계를 넘어설 때면 공산성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때 검푸른 하늘빛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어깨를 드러내는 성곽의 실루엣은 멀리 강 건너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밤이 되어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호명하지 않아 돌아갈 곳을 잃은 부재자들의 짧은 생애가 있는 것이다.

7세기 중엽에 건립된 높이 8.8m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옛 백제 땅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 석탑 2기 중 하나이다. 백제인들은 목탑의 형식에 석재를 이용해 새로운 석탑 양식을 만들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전형적인 불탑양식이 완성되었다. 국보 제9호.

한국전쟁의 치유와 화합에 소환되다
1955년 4월 18일, 부여에서는 백제를 기리는 ‘백제대제(百濟大祭)’ 행사가 처음으로 열렸다. 봄비가 뜻하지 않은 폭우로 변해 예고된 개막일을 이틀이나 미룬 뒤였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포함해 여섯 왕이 123년을 통치한 백제의 고도(古都)다. 역대 제왕의 추모제로 시작된 백제대제는 망국의 슬픔으로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삼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재(水陸齋)를 끝으로 닷새 동안 벌어졌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2만여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 부여읍내의 여관과 음식점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의 사회 여건과 교통 환경을 고려하면 엄청난 인파였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를 봉안하는 삼충제였다. 이 제례 행렬에는 수백 명의 학생과 군민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구경꾼이 더해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부여의 백마강과 ‘삼천 궁녀의 낙화암’이 그 시절에도 이름난 관광지였다는 점에서 보면 이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지역민들이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했다는 증언을 납득하기는 충분치 않다. 이때는 매장된 백제의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이므로 문화적 자긍심도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명분은 결국 ‘단결과 화합의 장’인가?
유엔군이 처음으로 참전한 한국전쟁은 3년간의 치열한 전투로 300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이중에는 내전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남과 북 부역자들의 희생도 포함됐다. 1953년 휴전이 되자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지역사회가 해결해야 할 내밀한 과제는 이 분열의 상처를 봉합하고 보듬는 일이었다. 부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이때 부여의 유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스토리텔링이 외세에 의해 스러져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삼충신과 삼천 궁녀의 충절을 기리는 일이었다. 이로써 이들의 위령제는 자연스럽게 전쟁으로 분열된 부여 주민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한 위령제로 치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축제는 10년 뒤인 1965년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지역 문화제로 성격이 바뀌고 그 규모도 커졌다.

부여 백마강 유람선이 높이 40m의 절벽인 낙화암을 지나고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할 때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이 절벽 중턱에는 11세기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암자인 고란사가 세워져 지금까지 내려온다.

부여군 은산면에서 전승되어 오는 은산별신제의 유래를 얼개로 삼은 오태석의 희곡 <백마강 달밤에>(1993)는 굿을 연극의 요소로 활용해 주목을 받은 문제작이다. 은산별신제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은산에 역병이 돌았는데 한 노인의 꿈에 백마를 탄 한 장수가 나타나 백제 병사들의 주검이 사방에 흩어져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를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면 이 마을의 역병을 그치게 해주겠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꿈에서 이른 대로 흩어져 있는 백골을 수습하고 굿을 해주었더니 역병이 사라지고 마을이 평안해졌다는 것이다.
2014년 여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백마강 달밤에>가 새로 공연될 때, 연출가이자 원작자 오태석은 “초연에 비해 백제 병사와 의자왕, 그리고 순단(마을 굿을 주재하는 노무당의 딸. 백제 의자왕을 찌른 신라 첩자의 환생)의 화해에 집중함으로써 갈등과 서사의 전개가 담백하고 명료해졌다”는 평을 들을 만큼 원작을 대폭 수정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전쟁과 백제 패망을 연결 짓던 ‘흐릿하고 모호한’ 연결고리는 사라졌다. 마을 어귀의 옛 백제 성터 자리인 솔매 성벽 아래서 열일곱 유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 “백제 병사가 됐든, 인공 때 잘못된 떼죽음이 됐든”이란 절묘한 중층적 표현도 삭제되었다. 역사적 알레고리가 빠진 틈새를 작가는 특유의 말놀이와 해학으로 채웠다. 무엇이 70대의 노작가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부여) 도읍기 백제왕들의 무덤으로 현재 7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해발 121m의 능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자리잡고있다.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현진건(1900-1943)은 한국 근대 소설의 정착기에 사회와 역사 문제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사실주의 문학의 전범을 보인 뛰어난 작가다. 일제 강점기에 신문기자로도 활동한 그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보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를 만큼 민족의식도 뚜렷했다. 그러나 이 행동의 결과로 그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집을 처분해 양계업 등을 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업은 신통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지병인 결핵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발표한 장편소설 <무영탑>(1939)에서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阿斯女)라는 백제의 석공 부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진건은 <무영탑> 이후로 백제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 <흑치상지>(1940)와 <선화공주>(1941)라는 두 편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집필했다. 그는 <흑치상지>의 연재를 앞두고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띠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으며,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다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며 역사소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외세의 승리에 불복하고 백제의 부흥기를 이끈 장수를 주인공으로 한 <흑치상지>는 동아일보에 연재 중에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중단됐으며, 백제 무왕의 전설로 알려진 <서동요>를 소재한 <선화공주> 역시 월간지 춘추에 연재했으나 미완으로 중단했다.
현진건이 신라의 수도 경주로 끌려와 불국사의 석탑을 만드는 부여의 한 석공을 주인공으로 정한 것은 다수의 백제 목공이나 석공이 신라에 절이나 탑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여러 기록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에게 아사달이란 이름을 준 것은 현진건이 처음이다. 이 이름을 짓고 혼자 득의양양했을 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사달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나오는 시조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의 도읍지로, ‘아침 햇빛의 땅’이란 뜻을 가진 일종의 한민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백제의 보잘것없는 석공인 아사달과 그를 사랑한 신라 귀족의 딸 주만, 그리고 기다리다 지쳐 부여에서 남편을 만나러 경주로 온 아내 아사녀의 관계가 <무영탑>의 기본적인 갈등 구조다.
일제 강점기에 부여에서 나고 자란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시는 부여라는 장소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이유가 단지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이나,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같은 고향의 체험에 근거한 서정 때문은 아니다. 그의 역사적 상상력은 그를 백제에서 삼한, 고구려, 부여라는 상고 시대로 이끌다 훌쩍 동학과 3.1운동, 한국전쟁, 4.19혁명 같은 근현대사의 현장에 내려놓는다. 아사달과 아사녀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적 대상 혹은 화자다. 그는 현진건이 <무영탑>에서 구축한 이 허구적 인물들의 설정과 상황을 이어받은 뒤 아사달과 아사녀를 전쟁과 가난으로 수난 받는 이웃이거나, 분단 체제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의 역사에 대한 휴머니티는 서사시 <금강>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 같은 이웃들에 대한 연민과 분노로 과거의 사건들을 구조화함으로써 역사를 통찰하려 했다. 그의 성공이 역사를 현재화한 것이라면, 그의 실패는 그 역사의 관념성이다. 다음의 시구는 이런 나의 감상에 대한 반론으로 들기에 적절한 예다.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신동엽, <금강> 23장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신동엽, <금강> 23장

전라북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의 석탑형식에 통일신라 양식을 가미하여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궁리는 지명이 말해주듯 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 기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현재 높이는 8.5m로 국보 제289호이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금강 기슭으로 이어진 나성 터에 가면 가난과 연민으로 “아픈 조국을 앓고” 간 그의 시비가 서 있다.

고쳐 써야 할 패자들의 이야기
‘가짜 뉴스’에 대한 논란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존재했다. 언제나 승자들의 이야기는 과장되어 널리 퍼지지만, 패자들의 이야기는 늙은 여인들의 한숨에 섞인 푸념처럼 이어진다. 백제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승자의 지략과 용맹 앞에 패자의 무능과 타락은 강화되었으며, 이 단순한 구도는 시대를 떠돌다 사실보다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 사이에 과거는 이를 기억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가치관에 따라 내면화되고 파편화되었다. 비극적인 전쟁의 현장이었던 타사암(墮死岩)이 ‘삼천 궁녀의 낙화암(落花岩)’으로 변질되고, 부소산성 정상의 사자루(泗泚樓)가 사비루(泗沘樓)의 오기임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쉽사리 바꾸지 못하는 소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객관적 사실 관계에 의한 서사 구조는 굳이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달 노피곰 도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속악의 가사로 불려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정읍의 한 행상인이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에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정읍시립국악단은 이 노래를 기념하기 위해 매월 보름에 다채로운 국악 공연을 연다. 그러고 보니 백제를 노래한 작금의 대중가요들은 빠뜨리지 않고 달밤을 기린다. 이 의식에는 늘 ‘백마강’과 ‘물새’와 ‘고요’와 ‘일엽편주’ 그리고 ‘종소리’가 빠지지 않는다.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병주(1921–1992)는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에 이런 표현을 옮겨놓았다. “태양 빛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 말에 답례를 하자면, 백제는 달빛 아래에 있다. 저녁 어스름이 밤의 경계를 넘어설 때면 공산성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때 검푸른 하늘빛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어깨를 드러내는 성곽의 실루엣은 멀리 강 건너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밤이 되어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호명하지 않아 돌아갈 곳을 잃은 부재자들의 짧은 생애가 있는 것이다. 백제의 달빛은 이 훼손되고, 누락되고, 왜곡되어 버린 눅눅한 산하의 흔적들을 감싸고 어루만진다.

이창기 시인, 문학평론가
안홍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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