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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풍경과 삶이 어우러진 이상향

  • 조회수 217
  • 행사기간 2017.08.03 - 2017.08.03
  • 등록일 2017.08.03

생활

길 위에서 충주, 풍경과 삶이 어우러진 이상향

충주는 한반도의 중원이라 불린다. 그 위치가 단순히 한 가운데 있어서가 아니라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한강의 남쪽 상류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남과 북을 가르고 또 잇고 있다. 자연히 물류와 군사, 생활의 요충지로 오랜 동안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잦았다. 그 덕에 충주에는 승전을 기리는 비와 탑이 유난히 많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비경도 많아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이 많이 내려와 살았다.

충청북도 충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7층 석탑인 중앙탑은 높이가 14.5m로 탑 주변에는 충주호를 끼고 너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비가 소복소복 내렸다.
옛이야기처럼 내리는 비는 여행자에게 반가운 선물이다. 산과 들이, 꽃과 나무가 촉촉한 빗 속에 고요히 스며들 때 여행자의 마음도 잠시 삶의 그물에서 놓여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충주시 중앙탑면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차를 세웠다. 깊게 숨을 들이키며 마음 속으로 인사를 했다. 한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심호흡을 하는 것은 내 여행의 묵은 버릇이다. 고통과 환희, 슬픔과 그리움, 꿈과 절망.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이 이 공기 속 어딘가 떠돌고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오래전부터 나는 한 도시가 지닌 최고의 문화유산은 그 도시를 떠도는 공기라고 생각했다.
충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도시를 중원(中原)이라 부르길 좋아한다(예전에는 실제로 중원군이 있었지만 1995년 충주시에 통합되었다). 지리적・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행자가 충주에서 두 밤만 묵고 나면 이 생각은 쉬 이해된다. 남한강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묵은 탑과 비이다.

탑과 비의 도시
중원에서 나의 첫 참배 대상은 고구려비였다. 지금은 새 행정 지명에 따라 공식 명칭이 충주고구려비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중원고구려비라고 더 많이 부르고 있는데,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석비이다. 이 비는 지금의 만주 남부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면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와도 같은[여형여제(如兄如弟)] 관계였으며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라고 하여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시대 석비이다. 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3m이다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은 고구려 역사 교육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3D 컴퓨터로 복원된 안악3호분(북한 국보 28호, 현 황해남도 안악군 소재) 벽화에는 고구려의 정예병사인 개마무사(鎧馬武士)의 모습이 선명하다. 말에 쇠로 된 갑옷을 입히고 역시 갑옷으로 중무장한 개마무사는 공격 때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 때 적의 공격을 막는 방호벽 역할을 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5만 명 이상의 개마무사를 보유했다고 한다. 서양사에는 이보다 훨씬 뒤인 1221년 페르시아와 몽고의 전투 기록에 처음 개마가 등장한다.
고구려가 한때는 신하로, 한때는 동생으로 여겼던 신라에게 망한 것은 668년의 일이다. 중원 거리에 우뚝 서 있던 고구려비가 그 이후 어떤 대접을 받았을 것인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박해를 염려한 고구려 유민들이 이 비를 땅에 묻었을 거라 생각하는 이도 있고 비문이 뭉개진 채 대장간의 밑돌로 망치질과 풀무질을 견디어냈을 거라 추측하는 이도 있다.
중원에서의 두 번째 참배를 위해 탑평리 7층석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충주 사람들은 이 탑을 중앙탑이라 부르기 좋아한다. 아예 탑의 면소재지 명칭을 중앙탑 면으로 바꾸었다. 오랜 전쟁 끝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자랑스러운 새 나라의 기상을 상징하여 국토의 한가운데에 이 탑을 세웠다. 해질 무렵 나는 이 탑을 세 바퀴 돌았다. 횟수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구려와 신라 백제 세 나라를 생각했다. 세 나라는 서로 각축하며 문물과 역사의 발전을 꿈꾸었지만 최종 승자는 신라였다. 탑을 도는 동안 알 수 없는 신비한 에너지가 탑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옛 탑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는 에너지를 나는 사랑한다. 인도 카주라호의 돌로 만든 스투파(석탑) 그늘 아래 앉아 한나절에 30편의 시를 쓴 적이 있고 아그라의 타지마할 곁에서 역시 수십 편의 시를 하루에 쓴 적이 있다. 묵은 탑 그늘을 돌면 오랜 세월 이 탑을 돌며 꿈꾸고 노래했던 사람들의 숨결이, 그 냄새가 느껴진다.

꽃 피는 밤에 빗소리를 노래함
탄금대는 이 지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를 새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다. 552년 신라 진흥왕 때 우륵(于勒)이라는 사내가 귀화한다. 그는 신라의 남쪽, 예악을 중시한 가야라는 작은 나라에 살며 12줄을 지닌 악기를 만들었고 12개의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다. 12줄은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왕은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여 중원에 머물게 하였으며 음악의 기초를 가르치게 하였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바위다. 굽이치는 남한강의 절경과 우륵의 가야금 연주는 절묘하게 어울렸을 것 같다. 국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예악을 숭상하게 한 옛 왕들의 처사가 따스하다. 이상향이란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삶의 큰 가치는 변함없는 것이다.

충주호를 따라 단양으로 가는 강변길에서는 기암괴석을 스치며 흘러가는 남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유람선을 타면 단양팔경을 가까이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충주에는 무학시장이라 불리는 상설시장이 있다. 시장은 발려진 생선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척추에 해당하는 긴 통로가 있고 좌우로 가시들이 펼쳐진다. 척추를 따라 걷다 샛길을 찾아들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길을 잃어버렸다. 저자거리를 구경하다 길을 잃는 것은 그럴 듯하지만 차를 세워놓은 곳을 알 수 없으니 문제였다. 헤매다가 반선재라는 한옥집을 보았다. UN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씨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라 한다. “반듯하고 착하게 살자”는 꿈이 담긴 집이란다. 시장 안에서 길을 찾지 못한 내가 마침내 선택한 방법은 시장 밖으로 나와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두 시간 만에 차를 찾았을 때 반가움과 시장기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칼국수집의 아낙이 칼국수에 밥 한 공기를 더 내밀었다. 내 배가 많이 고픈 것을 안 것이다.
여관의 창을 열고 밤새 빗소리를 들었다.
신라나 고구려의 옛 사람들 중에도 밤새 창을 열고 빗소리를 들었던 이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우륵의 12곡 중에도 혹 빗소리를 노래한 곡이 있지 않았을까. 꽃 피는 밤에 빗소리를 노래함. 있었을 것 같다. 비는 아침에도 자박자박 내린다.

희고 푸른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힘차게 싹 터 오르는 죽순을 연상시킨다는 옥순봉은 단양팔경 중에서도 뛰어난 절경으로 꼽힌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없다면 절경은 한쪽의 아름다움밖에 지니지 못한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곳에 넋을 부린 사람들의 숨결이 있을 때 이상향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옛 나루터에서
강을 낀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목계나루로 향했다. 이 나루에는 조선시대부터 남한강 물길의 제일 큰 장이 섰다. 서해와 동해의 물산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충청 강원 경상 세 도의 세곡선이 물길을 따라 흘렀다. 3월부터 11월까지 뱃길이 열렸는데 7, 8월 물이 많은 철에는 큰 상선도 오르내렸다 한다. 물길을 따라 서울로 가는 길은 12-15시간이 걸렸으며 물길을 거슬러 목계로 오는 데는 5일에서 2주일이 걸렸다 한다. 조선시대에 800호가 모여 살았고 100여 척의 상선이 머물렀다니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옛 나루터의 언덕에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던 목계나루에서는 요즘 관광객들을 위한 강배 타기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유람선으로 도담삼봉을 지나 상류로 200m쯤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 강변으로 마치 강을 품은 바위 굴과도 같은 석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운이 좋았다. 이곳에는 매월 네 번째 토요일에 리버마켓이 선다. 내가 목계에 들어선 날이 그날이었다. 일종의 벼룩시장인 셈인데 파는 물건은 모두 수제품이었다. 물건들이 다 내 마음을 붙들었다. 한글과 한자로 두 개의 도장을 팠는데 몹시 마음에 들었다. 청국장과 된장, 유자잼을 샀으며 목각인형과 손지갑을 샀다. 열쇠고리 같은 기념품도 몇 개 사는 동안 지갑이 비었다.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정성’이 될 것이다.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바탕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내게 4월이면 나루가 유채꽃으로 덮인다고 내년 4월에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충주호의 유람선 충주호를 따라 단양으로 가는 강변길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길은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시작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끝을 지니기 마련이다. 보슬비 속에 이어지는 길은 포근하고 따스하다. 한없이 가도 끝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한 시간쯤 달려 장회나루에서 차를 멈춘다. 오래전부터 이 나루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싶었다. 그런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유람선이 다닐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승객들이 많다. 배를 가득 채운다.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일 절경이라는 구담봉과 옥순봉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조선 시대에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은 이곳의 경치를 보며 진경산수화를 그렸고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은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소상팔경보다 뛰어나다고 적었다. 그러나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우산을 쓰고 유람선 객실 밖으로 나갔다. 물안개와 비구름이 깊게 스미어 절경을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크다. 단 한번의 여행으로 어찌 천하의 절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1980년대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나루>를 처음 읽었을 적부터 보고 싶었던 두 봉우리와의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절경”
강변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눈앞에 도담삼봉이 들어온다. 남한강 상류의 물굽이에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솟구쳐 있다. 19세기 말 이곳을 찾은 유명한 여행자가 있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였다. 그는 여행기 <한국과 이웃나라들>에 이곳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적었다.
“한강의 아름다움은 도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낮게 깔린 강변과 우뚝 솟은 절벽. 그 사이 푸른 언덕배기에 서 있는 처마가 낮고 지붕이 갈색인 집들이 그림처럼 줄지어 있는데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절경이었다.”
비숍 여사가 본 풍경은 두 가지다. 도담의 그림 같은 풍경과 언덕배기의 초가집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없다면 절경은 한쪽의 아름다움밖에 지니지 못한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곳에 넋을 부린 사람들의 숨결이 있을 때 이상향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지금은 초가집 대신 몇 개의 비닐하우스들과 현대식 집들이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도담에서 가파른 산기슭 계단을 300m쯤 오르고 다시 100m를 내려가면 석문(石門)이 나타난다. 바위 굴 사이로 푸르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이 지닌 이상 세계의 품격이 있다. 교통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을 19세기 말 비숍 여사는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요즘 여행자의 내공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강마을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빗 기운 속에 반짝이는 마을의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도담삼봉은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 세 개의 기암으로 이뤄진 섬이다.

곽재구 시인
안홍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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