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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그 부엌에서는 항상 뭔가가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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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사기간 2017.11.03 - 2017.11.03
  • 등록일 2017.11.03

기획특집

한국의 주방: 화덕부터 가상현실까지 기획특집 3 ‘그 부엌에서는 항상 뭔가가 끓고 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들고 먹기도 하는 공간이지만, 때로는 그 용도를 훌쩍 넘어선다. 어떤 이들에게는 부엌이 작업실이 되기도 하고, 추억을 저장해 주는가 하면, 청춘의 무늬가 그곳에 새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부엌에서는 국이든 밥이든 그리움이든 항상 뭔가가 끓고 있다.

집에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특히 주거와 식사라는 두 기능이 혼재된 부엌은 이곳에 사는 사람의 생활 방식과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직접적이고 실재적인 공간이다. 이런 시각으로 부엌을 담론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가장 익숙한 접근 방법은 ‘변화’다. 물론 부엌이 변화의 주체일 수는 없지만, 부엌 역시 더디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반영해 왔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또는 불을 제어하는 방식에 따라 부엌의 역할과 생김새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톺아보는 시각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생활 양식과 문화를 비교할 수 있는 썩 유익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쭐거리며 터득한 계몽적 지식이 말해 주는 것은 사실 별로 새롭지 않다. 오히려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질문이나 호기심은 대개 이런 근대적 상식 너머에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내밀한 공간이었던 부엌을 남자들은 어떻게 사용하고 기억했을까.

「황금전설」, 1958, 캔버스에 유채, 130×97 cm (위);「이것은 한 조각의 치즈다」, 1936, 캔버스에 유채, 10.3×16.2cm. 르네 마그리트는 부엌을 화실로 사용했는데, 그래서 부엌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낯선’ 부엌
예술가들이 어떤 공간을 지나치게 침울하고 칙칙하게 묘사하거나, 보란 듯이 밝게 드러냈다고 해서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 예술가들은 모순적이며, 대상에 대한 감정을 극대화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어쩌면 짐작되는 갈등이나 대립조차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는 현실의 생활 공간을 내적 공간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다. 이 독특한 관계 맺기 방식은 종종 실증주의보다 더 큰 설득력으로 인간과 공간에 대해 공감하고, 끌리게 만들며, 이해시킨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 이름난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는 부엌 겸 식당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식사를 하고 손님을 맞는 일상생활을 함께 영위했다. 그는 한 번도 번듯한 화실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듯한 화실이 턱수염을 기르고 베레모를 쓰는 파리의 화가들처럼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혐오했다. 협소한 아파트의 부엌 겸 식당에서 양복을 차려입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식탁에 부딪히기도 하고, 프라이팬에 손을 데기도 하고, 드나드는 사람 때문에 문손잡이에 팔을 찧어 붓이 캔버스의 엉뚱한 곳에 닿기도 했다. 식사 때가 되면 작업을 중지하고 이젤과 팔레트, 붓 같은 화구를 정리하는 수고를 매번 반복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식당이나 부엌에서 보는 사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한 조각의 치즈다」에 나오는 유리 상자 속의 치즈 조각이라든지 「황금전설」에서 비행기처럼 편대를 이루어 하늘을 날아가는 바게트 빵들이 그 예이다. 그는 실물 그대로 재현한 이 평범한 사물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치함으로써 그 친숙함을 낯설게 만들었다. 벨기에에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시인 폴 누제(Paul Nougé)는 이렇게 말한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나면 세상이 변한다. 평범한 물건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미술관이 된 마그리트의 이 ‘부엌’이 있는 집은 브뤼셀 변두리의 제트라는 마을에 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과 불화가 생겨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축출된 마그리트가 1930년 파리에서 돌아와 안착한 곳이다. 이곳에서 마그리트 부부는 24년을 살았다.

예술가들이 어떤 공간을 지나치게 침울하고 칙칙하게 묘사하거나, 보란 듯이 밝게 드러냈다고 해서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 예술가들은 모순적이며, 대상에 대한 감정을 극대화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어쩌면 짐작되는 갈등이나 대립조차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 끓는’ 부엌
마그리트가 부엌 한쪽에서 「이것은 한 조각의 치즈다」를 완성한 1936년 한국에서는 백석(Baek Seok 白石)이라는 20대의 젊은 시인이 첫 시집 『사슴』을 발간한다. 근대화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백석은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후 조선일보사에 취직해 『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엘리트이자 ‘모던 보이’였다.
“완두빛 더블브레스트를 젖히고 한대(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그가 “외모와는 너무도 딴판인” 조선의 전통, 그것도 평안북도 정주 지방의 토속적인 세계를 추억하고 탐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지방주의라는 관점에서 조선의 보편적 정서가 아니라는 점을 우려하며 비판한 이는 임화(Im Hwa 林和)였고, 복고도 감상도 없는 “속임 없는 향토의 얼굴”을 가졌다는 점에 감탄한 이는 김기림(Kim Ki-rim 金起林)이었다.
백석의 시는 정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토속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화자의 절제된 서술, 평안북도 지방의 풍습과 샤머니즘적 세계에 기반을 둔 풍부한 언어 표현, 특히 플랑드르 화가의 세밀화를 보는 듯한 극단적 이미지즘의 방식으로 사투리를 현란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 통상적 ‘시골뜨기 문학’과는 분명 다르다.
백석이 가장 주목한 고향 정취 중 하나는 음식이다. 모두 33편의 시가 실려 있는 『사슴』에 나오는 음식의 가짓수는 46가지다. 그 음식 이름 앞에서 생소하기는 보통의 한국인도 외국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음식의 산실인 부엌 풍경 또한 백석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그 부엌의 솥단지에서는 항상 뭔가가 끓고 있다.
“시누이 동세(동서의 평안북도 방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끄리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곬족(族)」
“내일 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쎄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고야(古夜)」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버의(홀아비)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끄린다 / 그 마음(문학평론가 이숭원(李崇源 Lee Soong-won)의 해석에 의하면 ‘마을’의 오기다. 그에 따르면 ‘외딸은 집’은 산모의 친정집을 뜻한다)의 외딸은 집에서도 산국(산모를 위한 국)을 끄린다” 「적경(寂境)」

백석의 시에는 부엌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데 가마솥 안에는 늘 어떤 국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다. 부엌의 솥단지에서 뭔가가 끓고 있다는 것은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인 동시에 방이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재래식 부엌은 대체로 안방 벽에 이어져 있으며, 벽 쪽에 붙여 만든 부뚜막에는 크고 작은 무쇠솥이 서너 개 걸린다. 이 무쇠솥 아래 아궁이에서 지피는 불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그 불길의 열기가 안방 밑 구들을 지나 굴뚝으로 나가면서 방을 덥힌다. 따라서 부엌의 솥단지에서 뭔가가 끓고 있다는 것은 뜨듯한 방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있다는 뜻이며, 한 가정이 온전히 기능해야 가능한 평화로운 모습을 상징한다. 추운 겨울, 아침 잠결에 맡는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만드는 무이징게국은 무와 새우젓갈로 끓인 평안북도 지방의 향토 음식을 말한다. 뭇국의 개운함에 새우젓갈의 감칠맛이 더해져 담백하고 구수하다는 평이다.
백석은 모던 보이답게 옷을 입고 20세기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활보했지만, 그의 입맛과 후각과 정서는 ‘애기 무당이 작두를 타고’, ‘돌배 먹고 아픈 배를 떨배 먹으면 낫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살았던 19세기 조선 북방 마을의 전통에 속해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의 불행은 근대와 전통, 망국과 식민 사이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부모의 강요에 의한 다섯 번의 결혼과 잦은 이직, 그리고 떠돌이 생활은 『사슴』 이후 그의 시세계를 고향 마을에 대한 따뜻한 기억 대신 회한과 쓸쓸함으로 채웠다.
예이츠(W. B. Yeats)의 전기를 쓴 포스터(Roy F. Foster)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스무 살이었을 때의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예이츠의 경우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했다. 예이츠가 어린 시절 겪은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조국 아일랜드의 신화와 전설에 대한 경도를 영문학도인 백석이 몰랐을까. 정치 사회적 억압과 자신의 성향을 잘 조화시켜 나간 예이츠와 달리 백석은 그러지 못했다. 종전 후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 중 한 곳을 택해야 했던 그는 북한에 있는 고향 정주로 돌아갔고, 이것으로 그의 개성 넘친 문학적 시도는 끝이 났다. 이로써 한국문학사는 한국인의 원초적인 상상의 세계를 좀 더 탐닉하지 못한 채 ‘비탄과 체념의 시인’으로 그의 만년을 기록해야 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공양간에서 한 스님이 국이 다 끓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을 쓴 필자도 한때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부엌에서 절 식구들이 먹을 국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며 지냈다.

‘텅 빈’ 부엌
서울 사당동에 가면 ‘서울 미래 유산’으로 지정된 시인 서정주(Seo Jeong-ju 徐廷柱)의 집이 있다. 이 집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죽을 때까지 마지막 30년을 살았다. ‘미당(未堂)’이라는 서정주의 호는 ‘덜 된 집’, 곧 ‘아직은 좀 부족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런 겸손한 이름과 달리 많은 한국인이 그를 한국 근대 문학의 최고 시인으로 대접한다.
그 집 부엌 한쪽에는 1978년에 낸 방범비 영수증이 놓여 있고, 하얀 모시 적삼을 입은 부부가 어느 여름날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린 채 나란히 뜨락 돌담에 앉아 찍은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시인의 부인 방옥숙(Bang Ok-suk 方玉淑) 씨가 어떤 이였는지를 알기 위해 젊은 시절 한 신문 기사에 실린 그녀만의 게장 담그는 법을 소개한다.
“참게장은 논두렁이나 냇가에서 사는 참게가 재료인데 소슬바람이 불고 벼가 익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참게에 살이 붙고 까만 장이 생겨 특히 맛있게 담가 먹을 수 있습니다.”
미당은 평생 수백 편의 시를 남겼지만, 부엌에 대한 어떤 감상도 시어로 드러내지 않았다. “나 바람나지 말라고 /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 삼천 사발의 냉숫물.”을 보며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내 아내」)라고 노래했던 그로서는 좀 뜻밖이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 준 것은 「시론(詩論)」이라는 시다.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濟州海女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 것을……”
이제는 아무도 맞이하는 사람 없는 텅 빈 집 1층 부엌에는 미당이 마지막까지 마셨다는 맥주 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부인과 사별한 85세의 노시인이 다른 음식은 모두 거부하고, 부엌 식탁에 혼자 앉아 오로지 맥주만 마시다 석 달을 채 못 넘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 이는 나의 아내다. 아내는 그런 시인의 마음을 아는 눈치다.

‘쑥스러운’ 부엌
가부장제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던 20세기 한국에서 부엌에 관한 남자들의 속내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추억이 없는 이도 드물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심심하거나 출출할 때면 종종 부엌 문 앞에 서서 어두컴컴한 부엌을 훑어보곤 했다. 이때 눈길이 머무는 곳은 속을 감추고 있는 유일한 가구인 찬장이다. 찬장 문을 열면 참기름 냄새를 비롯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흐른 자국에서 나는 시큼하고, 찝찔하고, 비릿한 냄새들이 뒤섞여 코를 후볐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꿀단지에서 꿀 한 숟가락를 퍼 입에 털어 넣거나, 찬장 귀퉁이에 놓아둔 어머니의 손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부엌은 소박한 노동의 공간이 되었다. 어느 날 초저녁인가는 부뚜막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보고 있는데 새로 같은 반 짝이 된 여자애가 불쑥 나타나 부엌문에 기대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살 터울인 여동생과 어떤 계기인지 갑작스레 친구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매운 나무 연기를 마시며 부엌 바닥에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점심시간에 건네준 푸른 돌배에 대한 고마움도 미처 전하지 못했다.
좀 더 커서는 군불을 지피다 말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받아 적느라 허둥대던 곳도 이 낮고 음습한 부엌 바닥이다. 그러고 보니 스무 살 겨울에 출가를 결심하고 물어물어 찾아간 오대산 상원사에서 늙은 보살이 비벼준 언 국수를 허겁지겁 먹던 곳도 스님들과 나무꾼들의 처소로 쓰던 초당(草堂)에 딸린 부엌 앞 툇마루에서다. 그 부엌에서 나는 한동안 불을 지피며 절 식구들의 국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눈치껏 불경 대신 김수영(Kim Soo-young 金洙暎)의 시를 읽었다.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구름의 파수병」
이렇게 털어놓은 곧고 예민한 남자 김수영. 한국문학사에서 그만큼 자기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스스로를 관찰하고,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긴 시인이 있을까. 이것이 내가 만난 스무 살 무렵의 세상이다.

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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