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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땅과 바다를 끌어안은 제주 해녀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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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사기간 2017.11.03 - 2017.11.03
  • 등록일 2017.11.03

기획특집

한국의 주방: 화덕부터 가상현실까지 기획특집 4 땅과 바다를 끌어안은 제주 해녀의 부엌


부뚜막 없이 흙바닥에서 조리를 하고, 온 식구가 그 바닥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던 제주의 전통 부엌 정지. 한반도 내륙과는 전혀 달랐던 이 섬의 부엌 문화는 아열대성 기후적 특성과 함께 극한 노동을 감당했던 해녀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올해 89세인 해녀 오순아(吳順兒). 제주도 표선면에서 홀로 사는 그녀의 집은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열두 평 남짓한 원룸 형태의 슬레이트 집. 한때는 아이들이 찾는 구멍가게였을 것 같은 그녀의 집. 평생 바닷일하고, 밭일하면서 살아온 한 여인의 황혼집으론 딱 맞춤형 아닌가.
길가에 면한 미닫이문을 열면 누구나 쉽게 그녀의 원룸에 들어갈 수 있다. 싱크대와 냉장고, 거실 격인 마루, 침대가 놓인 방 하나에 창고 겸 부엌 하나가 전부인 공간이다. 구조와 구성으로 보면 도시 젊은이들이 사는 오피스텔과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이 작고 낡은 집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다.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결혼한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사는 집이 코앞에 보인다. 자식들의 텃밭도 그녀의 부지런한 손길이 닿아 잡풀 하나 없다.
제주에서는 부모가 노년에 이르면 결혼한 자식에게 안채를 내주고, 자신들은 바깥채로 옮겨 살았다. 이곳 가옥이 전통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두 칸 집, 세 칸 집이 있는 이유다. 주거 공간이 나눠져 있다 보니, 부모는 자식과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에 살며 따로 취사를 한다. 이 섬 사람들의 오랜 습관이다.

한 울타리 안에 두 채의 가옥
그녀가 알루미늄 재질의 오래된 둥근 밥상을 내왔다.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는 거실에서 우린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의 냉장고는 성게와 미역 등 온갖 해산물이 가득찬 ‘바다의 냉장고’다. 그녀가 내온 국은 싱싱한 날미역에 돼지고기를 넣고 푹 끓여 낸 돼지고기 미역국이다. 이 지역에선 귀한 날에만 먹었던 음식이란다. 돼지고기 기름이 둥둥 떠 있다. 한 술 뜨자 바다와 육지의 고기가 중화된 독특한 맛이다. 모자반에 접짝뼈(돼지 등뼈의 제주 사투리)를 넣고 푹 고아 낸 산모를 위한 몸국처럼 이 국 또한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묘한 맛이다. “이젠 이만한 살림에 스스로 만족한다”며 밝게 웃는 노 해녀에게 흙바닥에 주저앉아 무쇠솥 앞에서 불을 지피던 시절은 이제 아득한 모양이다.
그녀 역시 한때는 넓디 넓은 흙바닥 부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제주도 부엌은 ‘정지’라고 불렸다. 이곳의 부엌은 한반도 내륙의 부엌과는 많이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내륙과 달리 취사와 난방을 별도의 공간에서 했다는 것이다. 아궁이는 아궁이대로 온돌을 때는 굴묵(굴뚝의 제주도 사투리)을 만들어 썼고, 솥을 앉혀 취사를 했던 솟덕(봇돌의 제주도 사투리)은 따로 있었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로 왔던 이형상(李衡祥)은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부엌에서는 오직 솥만 앉히고 불을 땐다”고 기록했다. 시멘트로 화덕을 만들어 솥을 앉히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주택 개량 사업을 할 때부터였다. 이때부터 방에 온기가 들어가도록 구조를 바꾸는 집이 늘었다.
또한 한 곳에서 취사와 난방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내륙에서는 부엌이 안방 옆에 딱 붙어 있지만, 여기서는 안방이 정지와 뚝 떨어져 있는 것도 다른 점이다.

물허벅을 등에 지고 온 해녀가 부엌 문 옆 큰 항아리에 물을 쏟고 있다.

원시적이었지만 합리적인 구조
오순아, 그녀 역시 출가 전 친정집 부엌에 솥 다섯 개쯤을 걸어 놓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양쪽에 돌을 놓고 뒤에도 하나, 이렇게 해서 솥을 앉히지. 불을 때면 세 개의 구멍으로 불길이 활활 나가는 거야. 그렇게 지은 밥을 큰 알루미늄 양푼에 담아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바쁘게 숟가락질을 했었지.”
그 시절 어느 집 마당에 들어서도 부엌이 어디 있는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부엌 문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물팡만 찾으면 됐다. 물팡은 돌기둥 위에 평평한 돌을 얹고, 그 위에 둥근 물항아리인 허벅을 올려 놓는 자리다. 정지에서 나와 언제든 물을 뜰 수 있게 한 것이다.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여성들은 물항아리에 채울 물부터 길어 오는 게 큰일이었다.
“어릴 땐 대바지라는 작은 물항아리를 등에 지고 용천수를 뜨러 갔어. 대바지를 지고 오면 어머니가 물을 항아리에 비워 줬지. 오다가 깨트리면 꾸지람도 듣고.”
나무 정지 문을 열면 안에서 왈칵 풍겨 나오는 흙냄새. 찰흙으로 다져지고 다져진 흙바닥은 그야말로 반질반질했다. 구석엔 아주 작은 싸리비가 놓여 있어, 틈만 나면 깨끗이 쓸었다. 밭에서 혹은 바다에서 일하고 돌아온 여인들은 귀가하자마자 부엌에 들어가 흙바닥에 줄방석을 깔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줄방석은 띠풀을 꼬아서 만든 똬리 모양의 방석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방석을 엮을 줄 알면 줄방석을 만들어 주시고, 안 그러면 나무 의자라도 만들어 앉았어요.”
옛날에는 아이들이 쓸 작은 것부터 어른용까지 식구 숫자만큼 줄방석을 만들어 정지 바닥에 깔고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한편 정지 한쪽에는 납작한 돌을 밑에 받쳐 물항아리를 두고, 다른 한쪽에는 식기를 보관하는 찬장인 살레를 뒀다. 살레의 나무 문을 열면 그 속에 밥사발, 접시 등 다양한 용도의 그릇들이 가지런했다. 식사를 마치면 식기를 들고 정지 뒷문으로 나갔다. 돌을 깔아서 설거지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에서 설거지를 한 후, 다시 살레로 그릇들을 옮겼다.

제주민속촌에 재현해 놓은 제주 전통 가옥과 장독대의 모습이다. 정지의 뒷문 밖에는 바로 장독대와 텃밭이 있어 주부가 일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제주에서는 지역마다 부엌의 구조가 조금씩 다르지만, 돌을 놓고 솥을 앉힌 것은 같았다. 부엌 크기에 따라 무쇠솥은 세 개, 네 개 혹은 다섯 개가 놓였다. 큰 솥에는 물을 넣고 끓였다.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이들이 씻을 물을 데우던 솥이었다. 국솥, 밥솥, 반찬솥 등 솥의 크기에 따라 쓰임새도 달랐다. 흙과 돌로 이뤄진 초가의 정지는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연기가 빠질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문을 내기도 했다. 이처럼 제주의 정지는 원시적이었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구조였다.
“그 시대엔 부인병이란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불을 지피면 뜨거운 열기가 여인의 체온을 저절로 높여 주었고, 살균 작용도 저절로 되었겠지요.”
이웃 주민 고복희(高福姬) 씨의 말이다.

제주에서는 그릇을 보관하는 찬장을 ‘살레’라고 부른다. 살레 위에 함지박과 소반을 올려 놓았다.

뜨겁고 눈물 나던 공간
그 옛날 정지는 뜨겁고 눈물 나던 부엌이었다. 매운 연기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열두 살 딸도 부지깽이를 쥐어 주고 불을 지피라고 하면, 꼼짝 않고 활활 타는 아궁이 앞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스위치가 있는 것도 아닌 아궁이 불은 감으로만 조절이 가능했다. 검불이나 땔나무로 불 조절을 해야 했지만, 그런 요령을 잘 모르는 어린 딸들에겐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일 어려운 음식이 콩국, 콩죽을 만들 때야. 절대 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자칫 한눈이라도 팔면 콩물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서 남는 게 없어요. 그 뜨거운 콩물이 솥 밖으로 튀어나와 몸에 닿기라도 하면 어떻겠어? 콩물이 끓어갈 때 나물을 넣거나 소금을 살짝 뿌리는 것이 요령이지.”
제주의 전통 음식인 콩국과 콩죽은 난이도가 높은 음식이다. 그래서 엄마는 된장을 뜨러 가면서, 어린 딸이 마구 휘저어 버려 맛없는 콩죽이 되지 않게 늘 주의를 주었다.

정지의 뒷문 밖엔 바로 장독대와 텃밭이 있어서 음식을 만들다 잠깐 된장, 간장을 뜨러 가거나 채소를 뜯어 오기가 수월했다. 또 부엌과 가까운 곳에 곡식을 보관하는 항아리들을 두는 고팡(庫房)이 있었다.
땔감이 떨어지지 않게 늘 장만해 놓는 것도 고된 노동이었다. 땔감으론 소가 먹다 남긴 꼴도 긁어다 지폈고, 솔잎이나 보릿짚을 긁어오거나 죽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정지 한쪽에 오름처럼 쌓아 두었다. 그중에서도 보릿짚은 불이 잘 붙었다. 하지만 장작으로 밥을 짓고 나면 솥 아래 그을음이 심해 그때그때 솥을 정성스레 닦아야만 했다. 그대로 두면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돼지기름을 모았다가 솥뚜껑을 닦아 반들반들 윤을 냈다. 그렇게 윤을 내 반짝이는 솥들이 가지런한 정지는 안주인의 부지런함을 상징했다. 간혹 살가운 남편들이 무거운 솥뚜껑을 닦아 주기도 했지만 대개는 여인들의 몫이었다.
솟덕에 불을 땔 때 가장 큰 문제는 재였다. 땔감으로 불을 지필 때마다 재를 아궁이 뒤로 넘기다 보면 재가 잔뜩 쌓인다. 그 재가 ‘불치’다. 하지만 재도 버릴 것이 없었다. 솥을 앉힌 솟덕과 벽 사이에 50~60㎝ 정도의 빈 공간을 두었고, 이 공간에 재가 쌓이면 재만 모아두는 불치통에 담았다가 밭의 거름으로 썼으니 말이다.
“재를 밭에 갖고 가서 거름을 주면 농사가 잘됐어.”
재마저도 농작물의 비료로 활용한 셈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재에다 메밀씨를 섞어서 밭에 심기도 했다. 가늘게 판 밭고랑에 그걸 조금씩 집어 넣고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든 도구로 한 번 흙 위를 쓸어 주면 흙이 잘 덮였고, 메밀 농사가 잘됐다.

부뚜막이 있는 육지의 부엌과 달리 양쪽 앞에 두 개, 뒤에 하나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가마솥을 앉혔다. 이렇게 걸린 가마솥은 각각 용도가 달랐다.

그 정지에서 지어낸 솥밥은 그냥 밥이 아니었다. 활활 타는 매운 불길 속에서 눈물과 한숨을 닦아 내던 어머니의 밥이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이 지은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마당을 휘감았고, 허기를 휘감았다.

불편해도 따뜻했던 추억
제주의 정지는 마루방처럼 깨끗하게 손질된 흙바닥에서 밥을 만들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그 흙바닥에 앉아 타오르는 불과 함께 몸을 녹였고, 땔감이 타고 난 재로는 다시 밥이 되는 곡식의 거름을 삼았다. 그 정지에서 지어낸 솥밥은 그냥 밥이 아니었다. 활활 타는 매운 불길 속에서 눈물과 한숨을 닦아 내던 어머니의 밥이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이 지은 구수한 보리밥 냄새가 마당을 휘감았고, 허기를 휘감았다.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옛 제주의 정지는 불편한 공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자연과 닿아 있던 우리들의 식문화 공간이었다. 온 가족이 한 솥에 숟가락을 꽂던 혈육의 공간이었고, 사랑방이었고, 온기의 공간이었다. 그랬던 제주의 부엌, 해녀의 부엌이 이제 입식 취사 구조로 바뀌었다. 싱크대 위의 가스레인지로 변모했다. 문명은 그렇게 추억의 정지를 밀어 냈다. 팔락팔락 타오르던 아궁이 앞의 불길을 바라보던 해녀 오순아의 젊은 시절 또한 이제 멀고 먼 저편이다.
이제는 민속촌에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제주의 정지.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휘익 지나가며 솟덕 앞 여인의 이마를 닦아 주던 이 자연의 부엌은 땅에서 나는 것들, 바다에서 나는 것들 모두를 끌어안은 공간이었다.

허영선(Heo Young-sun, 許榮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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