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아츠&미디어

호숫가 꽃그늘에 앉아 시를 읽다

  • 조회수 180
  • 행사기간 2017.11.03 - 2017.11.03
  • 등록일 2017.11.03

생활

길 위에서 호숫가 꽃그늘에 앉아 시를 읽다

한반도의 남단,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인구 35만의 유서 깊은 도시 진주 — 그 중심을 가르며 남강이 흐른다. 그 옛날에는 일본군을 맞아 처참한 혈투를 치렀고, 현대에 이르러 남강댐 공사와 함께 인공호수 진양호의 물길이 되었다. 진주에서 시간은 물과 함께 흐른다.

호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다. 시와 물, 여행의 속성은 서로 닮아 있다. 물은 대지를 고요히 흐르다가 멈추고, 시는 인간의 영혼 속을 흐르다 어디선가 멈춘다. 여행은 인간이 시간 속을 흐르는 방식이다. 잠시 여행을 멈추고 시간 속에 몸을 누일 때 인간은 따뜻해진다. <ㅠㄱ> 진양호(晉陽湖) 변에 자리한 내촌(內村) 호수 마을. 이곳에서 여행이 시작될 수 있음은 행운이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시집의 페이지를 넘긴다.

청동기인들에게도 시가 있었을까
내가 사는 도시의 재래시장 골목 안에 젊은 부부가 ‘심다’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 ‘나무를 심다’, ‘꽃을 심다’ 할 때 그 ‘심다’이다.
“도대체 이 시장 거리에서 누가 책을 읽겠소? 굶어 죽지나 마시오.”
주변 상인들이 걱정하며 말했지만 기우였다. 세 평 남짓한 서점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인근에 있는 기차역에서 내린 여행자들이 시장을 비집고 서점을 찾아왔다. 그곳에 비치된 여행기와 시집, 그림책들을 읽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도 찾아왔다.
진주에 오기 전 ‘심다’에 들렀을 때 부부가 내게 한 권의 시집을 건넸다. 『담담(淡淡)』. 물 흐르듯 고요한 마음이라…. 장성희(張誠希)의 첫 시집이다.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시집 제목과는 달리 이승에서 그가 겪은 삶의 격랑과 횡액이 깊게 느껴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중심을 흐르는 남강 변 촉석루 난간 너머로 진주 시내가 보인다. 고려 시대에 지어져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친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 역할을 했고, 지금은 도 지정 문화재자료로 시민들이 사랑하는 휴식처가 되었다.

혼자 아픈 날
추위에 녹아 형체가 없어졌다

나는 엉터리입니다

오래 걸어 잔뜩 젖은 발을 짓누르며
네모난 신발을 신고
아주 높은 굽의 소리를 내며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던 나의 친애하는 차가움

이내 놓지 못했던 긴 이름들이
혀끝에 남아 텁텁하다

「얼음」이란 제목의 시. 눈물을 얼음이라 표현한 은유가 마음에 들었다. “나의 친애하는 차가움” 또한 눈물의 은유이다. 네모난 신발에 눈길이 꽂힌다. 삶은 굽 높은 네모난 신발을 신고 끝없이 허공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호수의 물빛은 담담하다.

진주 청동기 문화 박물관 내부 전시실에 진주시 대평면 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호숫가를 따라 흐르는 1049번 지방도로를 달린다. 10여 km 달렸을 때 ‘진주 청동기 문화 박물관’이라는 팻말이 눈에 띤다. 기원전 1500년 무렵 여기 삼각주에 터를 잡고 살았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지금부터 350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400기의 움집 터가 발굴되었다는 기록을 읽었고, 그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한 의식주 생활을 했다는 데 놀랐다. 불을 피워 토기 솥에 밥을 지어 먹었고, 강에서 잡은 생선을 구워 먹었으며, 숯이 된 복숭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곡물을 저장했던 다락과 실을 빚는 데 쓴 추, 꽃자주빛 토기들을 보았다.
문득 그 시절 사람들은 마음의 흐름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토기들의 겉면을 조심스레 살폈는데 이곳의 토기들은 모두 무문토기였다.
3500년 전 이곳 사람들에게 시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여행 또한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식은 근세 이후 인간이 이룩한 문물에 대한 지적 오만이거나 허세일 확률이 높다.

불운한 시대의 아름다운 언어
같은 길을 따라 계속 달린다. 호숫가를 따라 달리는 길에는 자귀나무 꽃이 한창이다. 이 나무를 사람들은 ‘합환수(合歡樹)’ 또는 ‘합혼목(合昏木)’이라 부른다. 낮에는 잎이 잎줄기 좌우로 활짝 펼쳐져 있다가 해가 지면 서로 포개지기 때문이다. 호수가 보이는 언덕배기 자귀나무 그늘에 앉아 다시 『담담』을 읽는다.

신과 술
안전한 해독제로 알고 있던 이름

겨울이 지났는데 입김이 난다 무덤이 필요한 몸
나는 전쟁 같은 날씨,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
숨마다 붙는 물음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데
우산 없이 걷던 당신이
쓰러진 나무 그늘 같다

「걸어도 걸어도」 라는 제목을 지닌 시. “우산 없이 걷던 당신”이란 시인 자신이다. 쓰러진 나무 그늘 같은 1980년대, 나는 이십 대였고 ‘시의 시대’라 불린 시절이 한국에 찾아왔다. 정치적인 박해와 탄압이 끊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시를 썼다. 농부도, 목수도, 버스 운전사도, 철근공도, 선생님도, 광부도, 간호사도 모두 시를 썼다. 시가 사람들의 위안이었으며 영혼의 쉼터였다. 100만 부 이상 팔리는 시집들이 속속 간행되었고, 사람들은 그 시절을 사랑했다.
『담담』을 쓴 젊은 시인이여, 절망하지 마라. 사랑스런 언어가 곁에 있으니 언젠가 당신에게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지 온전히 기록할 날이 올 것이다.

아픈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아픈 영혼의 여행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3500년 전 청동기 사람들에게 시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에게 아픔이 존재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3층 규모인 진양호 전망대에서 시민들이 석양의 강변 경치를 즐기고 있다.

양귀비꽃보다도 붉은 마음의 여인
촉석루(矗石樓)는 진주성 안에 있는 누각이다. 남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아름다운 이 누각은 한국인들에게 역사의 아픔과 위로를 함께 주는 영혼의 장소다.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로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그것이다. 1592년 10월 일본군이 2만의 병사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을 때 당시 진주 목사(牧使)였던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병력으로 맞싸워 승리한다. 7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일본군은 지휘관급 장수 300여 명과 병사 1만 명을 잃었다 하니 싸움의 처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 적탄을 맞아 전사하는데 그의 나이 39세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은 이듬해인 1593년 6월에 시작된다. 장맛비 속에 펼쳐진 전투 끝에 진주성은 함락된다. 성 안의 모든 병사들이 일병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죽고, 백성들은 도륙 당한다.

일군이 본국에 보낸 수급(首級)만 2만 급. 익사자가 강물의 흐름을 막았다고 한다. 비록 진주성은 함락되었으나, 이 싸움으로 손실을 크게 입은 일군은 결국 조선의 곡창지인 호남을 점령할 수 없었고 끝내 조선 정복의 야망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할진대 싸움의 거룩한 향기가 깊고 깊었다.
역사는 이 싸움 끝에 피어난 한 송이 꽃 같은 여인의 이야기를 남긴다. 논개(論介). 논개를 기생이라 하기도 하고 양인 신분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진주성 싸움이 끝나고 일본군은 전승 잔치를 벌이게 된다. 논개는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Keyamura Rokusuke 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다. 논개가 적장과 투신한 바위를 진주 사람들은 의암(義菴)이라 부르고,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남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시인 변영로(Byeon Yeong-ro 卞榮魯)는 논개를 이렇게 노래했다.

진주성벽 아래에는 600m에 걸쳐 ‘인사동’이라 불리는 골동품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골동품 가게들이 하나 둘 터를 잡기 시작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진주 사람들은 매년 10월 열리는 유등축제(油燈祝祭)를 도시의 자랑으로 여긴다. 세계축제협회(IFEA)는 이 축제를 고유한 스토리를 지닌 아름다운 축제로 인식하고, 2015년 총회에서 진주에 ‘세계 축제 도시’상을 수여했다.
축제가 시작되면 남강 일대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등으로 뒤덮인다. 밤하늘에는 별보다 많은 풍등들이 떠오르는데, 이는 진주성 싸움 때 성안 사람들이 성 밖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성 밖 사람들이 성안 사람들에게 고향 소식을 전했던 데서 유래했다.
여행자인 당신이 10월 초에 진주에 들른다면 여행이 주는 뜻밖의 호사로움에 가슴이 몹시 설렐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꿈, 당신의 그리움을 새긴 풍등을 가을 밤하늘에 날릴 수 있을 테니. 어쩌면 지금부터 425년 전 진주 사람들이 남강을 최후의 보루 삼아 펼친 전투를 그때 그들의 마음이 되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진주시 남강로 일대에서 매년 10월 개최되는 진주남강 유등축제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소설가가 사랑했던 골동품 거리
나는 진주성벽을 따라 형성된 오래된 거리를 좋아한다. 이 거리는 서울의 이름난 골동 거리인 인사동과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진주 인사동에 들를 적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Park Wan-suh 朴婉緖) 선생이다.
그이는 이 거리를 몹시 사랑했다. 서울의 인사동은 너무나 번잡하고 물건 값도 비싼데 이곳은 호젓한 데다가 사람들 인심도 후하니 걸을 만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주의 골동상들은 대부분 한두 권씩 선생의 작품을 읽었고, 어떤 이는 선생의 책을 꺼내 들고 와 사인을 부탁하기도 했으니, 자신의 작품을 정중히 대하는 독자의 마음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선생이 좋아하는 골동은 조선 목가구였다.
“세련된 서양 그림이나 비구상 작품과 함께 있어도 조선의 목물은 기가 죽지 않아. 기품을 잃지 않고 고요하게 정물을 완성시키는 힘이 있지.”
선생의 말을 떠올리며 몇 군데 골동품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지름신’이 왔다. 옹기로 구운 도자기 한 점을 300달러 조금 넘는 가격에 샀다. 완서 선생이 계셨으면 “아이, 곽 선생 어디서 그걸 찾았어? 눈이 보배야”라고 하셨을 것이다.

시가 생기는 자리, 시가 있어야 할 자리
진주 시립 이성자미술관(Rhee Seund-ja Jinju Museum of Art)은 2015년 문을 열었다. 이성자(Rhee Seund-ja 李聖子; 1918–2009)는 김환기(Kim Whan-ki 金煥基), 이응노(Lee Ung-no 李應魯) 들과 함께 20세기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린 진주 출신의 서양화가다.
전시된 그이의 작품 중 다수가 시적인 제목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 결」, 「새벽의 속삭임」, 「근심 없는 인어」와 같은 작품들이 마음속으로 따뜻이 걸어 들어왔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 유학했으며 한국 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프랑스로 유학했다는 이 이의 이력이 그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통 받는 고국, 고향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픈 인간의 마음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아픈 영혼의 여행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3500년 전 청동기 사람들에게 시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에게 아픔이 존재하지 않은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의 인간보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평화롭고 따스했으니, 시를 빚은 인간의 역사는 그 시절보다 후퇴한 것인지도 모른다.


곽재구(Gwak Jae-gu, 郭在九) 시인

코리아나웹진

코리아나웹진 바로가기

코리아나 홈페이지에 방문하시면 10개 언어로 출판된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