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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짧은 사랑, 긴 이야기

  • 조회수 223
  • 행사기간 2017.11.03 - 2017.11.03
  • 등록일 2017.11.03

문학산책

비평 짧은 사랑, 긴 이야기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소설은 한국 이름이 차정신이고 미국 이름이 파멜라인 화자의 이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정신’과 ‘파멜라’라는 이름은 각기 많은 이야기를 내포한다. 두 이름 사이에는 행복과 불행, 상처와 위로가 교차하는 시간이 숨어 있다.

김연수(Kim Yeon-su 金衍洙)는 지적(知的)인 작가다. 작가란 무릇 글로 먹고사는 존재. 작가 치고 지적이지 않은 이가 드물 테니, 이 말은 어쩌면 하나마나한 동어반복(同語反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이라는 것은 풍부한 독서와 깊은 사유의 흔적이 작품에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했으면 한다.
김연수의 등단작은 1994년 발표한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다. 『작가세계』라는 문학지가 주는 상을 받은 이 작품은 1980~90년대 한국 사회와 문화계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짙게 내비쳤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이기는 했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다운 치기가 엿보이기도 했다.
등단 이후 김연수는 초기에 보여 주었던 과격한 실험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형식과 스타일을 개척해 나갔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했다. 그는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현실과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문제 삼았으며 또한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회의와 탐구에 몰두했다. 제목부터가 시사적인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1930년대 활동했던 모더니즘 작가 이상(Lee Sang 李箱)의 존재하지 않는 작품을 중심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 작품과 삶의 상호적 관계 등을 파고든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 등에서 특히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김연수의 또 다른 특징으로 ‘국제적 감각’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작가 치고도 유난히 해외여행을 즐기고, 팝 음악에 조예가 깊으며,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같은 외국 작가의 소설을 번역한 적도 있다. 카버의 작품 여러 편을 번역했던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村上春樹)처럼 김연수도 마라톤을 가끔 즐기는데, 그렇다고 해서 김연수가 이런 공통점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도 외국 지명과 외국인이 등장한다. 사실 2000년대 이후 한국 소설에서 외국인과 외국 공간이 나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점을 근거로 김연수의 국제적 감각을 언급하는 것은 자칫 촌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의 이모 차정신이 미국으로 건너가 ‘파멜라’라는 이름으로 폴이라는 미국 남자와 결혼했으며, 그 부부가 사는 곳이 미국 남부 플로리다의 해안 마을 세바스찬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뉴욕에 갔다가 내친김에 세바스찬까지 가서 오랜만에 이모를 만난다. ‘나’는 “이모가 들려준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의 결혼에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사실”이라고 밝힌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파멜라 이모이며, ‘나’는 이모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고 다시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메신저에 해당한다.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건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무조건 결혼을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이것이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모 자신의 쓰라린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기에 힘을 지닌다. 소설은 나이 든 이모가 삶에 대해 이런 결론을 짓게 된 경험담과 그 뒷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젊은 시절 매우 아름다운 배우였던 이모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감독이었던 유부남과 사랑의 줄행랑을 놓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간 곳은 제주도 서귀포였다. 두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함석지붕집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감독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석 달 만에 관계가 끝났다.
이모는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다가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라고 묘사한다. 그러고는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누워 있었지.”라고 회상한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소설은 한국 이름이 차정신이고 미국 이름이 파멜라인 화자의 이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차정신’과 ‘파멜라’라는 이름은 각기 많은 이야기를 내포한다. 두 이름 사이에는 행복과 불행, 상처와 위로가 교차하는 시간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남자를 아내에게 돌려보내고, 뱃속의 아이도 가족의 강요로 지운 뒤, 차정신은 혼자서 미국으로 건너가 ‘파멜라 차’로서 새 삶을 산다. 폴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이 정 감독을 밀어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좌절된 사랑과 이루어진 사랑의 차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두 가지 이유 모두 해당하는 건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타인의 침범은 물론 정확한 관찰조차 불가능한 심연 같은 내면은 있는 법이니까. 다만 밀월 같은 첫사랑의 장소였던 서귀포를 잊지 못하는 이모에게, 암으로 죽음을 앞둔 폴이 죽기 전 서귀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전언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폴이 지구의 반대편 한국의 남단 서귀포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이유는 ‘그곳의 지형과 느낌을 확인해야 죽은 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동양적 윤회관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어쨌든 그는 죽은 뒤에도 이모와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폴이 죽은 뒤 이모는 미국 살림을 정리해서 서귀포로 영구히 돌아온다. 그러나 이모가 서귀포로 돌아온 진정한 이유는 정 감독과 함께했던 추억을 곱씹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귀포에서 지내던 이모는 어느 날 정길성 감독의 아들 정지운 감독의 방문을 받는다. 이모의 꿈은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을 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이미 정길성 감독과 이별함으로써 그 꿈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모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꼭 닮은 아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했다’는 확신은 이모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지나가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죽고 없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이야기는 오래 산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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