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준령이 겹겹이 이어지다가 푸른 동해로 풍덩 빠져드는 곳, 수려한 풍광이 척박한 삶과 가슴 저리게 맞물려 내려온 곳, 한국인의 마음속에 그려진 강원도의 모습이다. 생강나무꽃의 알싸한 향기와 달빛 아래 흐드러진 하얀 메밀꽃, 그리고 가슴 설레는 동해의 일출은 가보지 않았어도 익숙한 강원도의 상징들이다. 소설과 노래를 통해 이미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흐릿한 조명 아래 마련된 소박한 무대에서 기타를 뜯던 한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피터, 폴 앤 메리’의 「500마일」이란 곡이다. 소란스런 분위기는 한순간에 가라앉고 사람들이 서서히 그의 노래에 빠져든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어떤 이들은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애를 썼고, 몇몇은 이미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미국 어느 소도시 카페의 모습이다.
노래란 이야기의 압축이자 확장이다. 미국인들은 한 방랑자가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노래를 철도 건설, 남북전쟁, 대공황, 대량 실업으로 요약되는 근대사의 애환으로 압축하고, 이를 다시 미국인들의 보편적 정서로 확장해 감상했다.
노래 한 곡을 듣는 짧은 시간에 국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 그리 놀랍거나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다.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이번 이야기의 토픽은 강원도다. 이런 이유로, 우선 하덕규(Ha Deok-kyoo 河德奎)가 만들고 양희은(Yang Hee-eun 楊姬銀)이 부른 「한계령」이란 노래를 권한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의 생가가 있는 봉평에는 그의 소설 속 배경처럼 메밀밭이 지천이다. 봉평에서는 매해 메밀꽃이 하얗게 만개하는 9월이면 이효석을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금강산 가는 길
지형적으로 보면 강원도는 유럽의 스위스에 비견된다. 스위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에 걸쳐 있듯이, 강원도는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한복판인 금강산에서 태백산까지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이 생활의 근간이 되던 시대에 온통 산으로 에워싸인 강원도는 그리 살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서인 『택리지』에서 “땅이 매우 토박하고 자갈밭이라 논에 한 말의 종자를 뿌려 겨우 십여 두를 거둔다”고 소개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런 환경 탓에 정치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던 사람들에게 강원도 산골은 맞춤한 피장처(避藏處)가 되기도 했다.
나라가 현물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시대를 떠올리면 그 형편을 더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강원도에는 추징한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두 곳이 있었는데, 그 규모는 물론이고 이를 운반하던 배의 크기나 수가 다른 지역에 견주어 턱없이 작았다. 그뿐만 아니라 영동 지방에서 거둔 세곡은 아예 그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예외를 두었다.
이마저도 17세기에 공물을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고 가구마다 부과하던 세금도 토지의 규모에 따라 매기는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그 기능은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농토가 없거나 영세한 농민들의 부담은 그만큼 줄었다.
유산(遊山)을 정신 수양의 수단으로 여기던 유자(儒者)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강원도는 금강산 가는 길에 불과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있지만, 금강산은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금강산을 보고 싶어 고려에 태어나길 바랐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고 읊을 만큼 이름난 명산이다. 그러나 고려 사람이라 해도 누구나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나귀나 가마를 타고 유람하려면 최소한 네 사람 이상의 시종이 붙어야 했고, 서울에서 출발해도 한 달가량의 기간이 걸렸으니 웬만한 재력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럼에도 금강산 유람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아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을 비워야 했던 많은 유학자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덕에 금강산 유람기는 한국의 기행문학 중 가장 흔한 소재가 되었고, 내용도 산세와 경관에 대한 상투적 묘사와 주관적 감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18세기에 문인 화가로 이름을 떨친 강세황(姜世晃)이 “산에 다니는 것은 인간으로서 첫째가는 고상한 일이지만,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은 가장 저속한 일”이라며 세태를 꼬집은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남다른 글도 없진 않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기행가사인 「동유가」(東遊歌)에는 유람 중에 목도한 빈곤한 강원도 하층민의 생활상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원부터 이리 오며 찬찬히 살펴보니 / 산수는 중첩하고 인가는 희소한데 / 단단한 자갈밭이라 쌍가래로 밭을 일구고 / 주막에 기름 없어 관솔로 등을 켜고 / 방구석에 흙으로 굴뚝과 아궁을 만들어 겨우 불을 지핀다.”
19세기 나폴레옹의 시대 프랑스에도 극빈층이 85%였다고 하니 그 시대의 가난이 강원도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였던 20세기 초반에 한 작가의 눈에 비친 강원도 사람들의 가난은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았다.
「삼부연」(三釜淵),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정선, 1747년, 비단에 담채, 31.4 × 24.2 ㎝.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강원도는 흔히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때로는 빼어난 경치가 그 여정을 늦추곤 했다. 화가 정선(鄭敾 1676~1759)도 금강산을 향해 가던 중 철원에 있는 삼부연폭포에 매료되어 그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생강나무꽃과 메밀꽃밭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은 누대째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 살아온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자랐다. 서울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가 50호 남짓 되는 실레마을로 다시 내려간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부모를 대신해 살림을 도맡은 형이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 뒤였다. 생활비와 학비가 끊기고 실연에 갑작스레 병까지 얻은 그가 실레마을에 내려간 데에는 먼저 내려가 있던 형에게 소송을 해서라도 제 몫의 재산을 받아 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지친 그를 위로한 것은 얼마간의 유산이 아니라 이른 봄이면 금병산(錦屛山)을 노랗게 물들이는 ‘동백꽃’(Lindera obtusiloba 생강나무꽃의 강원도 방언)과 그 속에서 “생활의 과장이라든가 또는 허식이” 없이 “타고난 그대로 툽툽하고도 질기게” 살아가는 순박한 고향 사람들, 특히 강원도 여성이었다.
고향의 산천과 사람들 틈에서 차츰 기운을 차린 그는 고향집 언덕배기에 움막을 짓고 마을 청년을 모아 야학을 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동네 아낙으로부터 자신의 집에 며칠 머물다 사라진 들병이(집시처럼 이곳저곳 떠돌며 술과 애교를 파는 여자)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산골 나그네」라는 첫 작품을 완성한 그는 이 시대의 풍상을 그리는 일을 숙제로 삼겠다는 각오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실레마을에서 만난, 밑지는 농사보다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 호강을 꿈꾸는 사내(「아내」)와 “일 년 고생하고 고작 콩 몇 섬 얻어먹느니보다는 금을 캐는 것이 슬기로운 짓”(「金 따는 콩밭」)이라고 여기는 사내, 빚과 흉작에 알몸으로 도주해 “살기 좋은 곳을 찾는다며 나이 어린 아내의 손목을 잡고 이 산 저 산을 넘어 표랑하는”(「소낙비」) 사내들의 비루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희화함으로써 한국 근대문학의 격을 한 단계 높였다.
김유정의 문학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는 농촌의 삶이 일제에 의한 수탈과 소작농화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작가의 통찰에서 출발했다면,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은 시대가 각박하고 위태로울수록 현실에서 벗어나 점점 더 심미주의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평창군 봉평 출신인 그가 낙엽 타는 냄새에서 갓 볶은 커피향을 느끼고,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스키를 시작해 볼까 생각한다는 내용의 「낙엽을 태우며」라는 에세이를 쓴 해는 다름 아닌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중일전쟁 이듬해였다.
특이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천하고 추잡해도 문학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마력을 가졌다”는 그의 문학론이 ‘내선일체’를 강조한 일제의 강한 압박에서도 한 걸음 비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꼽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그가 어설프게 가담했던 초기의 현실주의와 만년의 순수 사이 어디쯤 놓이는지는 여전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메밀꽃 필 무렵」)
강원도 사람들은 김유정의 실레마을에 ‘김유정 문학촌’을 만들고, 이효석의 생가가 있는 봉평에는 ‘이효석 문학관’을 세워 그들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 있다.
물길, 눈길, 그리고 고속도로
강원도의 어지간한 고갯길은 해발 1,000m를 오르내린다. 높은 산에서 시작된 강원도의 물줄기는 대부분 한강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까지 한강은 육로가 험한 강원도 고산 지대의 임산 자원을 옮기는 데 이용되었다. 북쪽인 인제와 양구 지역의 목재는 북한강으로, 남쪽의 정선과 평창, 영월 등지의 목재는 남한강으로 모여 뗏목이 되어 내려갔다. 인제에서 춘천까지는 하룻길,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일주일에서 보름가량 걸렸다. 그 물길 위에서 뗏목을 모는 사공들은 강원도 아리랑 곡조에 얹혀 개사한 「뗏목 아리랑」이란 노래를 지어 부르며 노동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랬다. 이 뗏목에는 종종 서울로 보내는 양구 방산 일대의 질 좋은 백자나 약초, 땔나무 등도 실려 있었다.
북한강은 서울의 소금 배가 오르내리고 춘천이나 서울을 드나드는 중요한 교통로이기도 했다. 세곡선도 당연히 이 물길을 이용했다. 북한강의 물길이 끊어진 것은 수력 발전을 위해 곳곳에 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1940년대 초 무렵이다. 물길이 끊어진 대신 강원도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뱃노래를 부르며 뗏목이 줄지어 내려가던 인제 내린천에 언제부턴가 래프팅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환호가 메아리친다.
강원도의 물길이 온갖 것을 이롭게 했다면, 눈길은 교류를 거부하는 비생산적인 길이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강원도의 눈길을 걷는다는 것은 눈물 젖은 빵을 먹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비장하다. 그 길은 고행을 전제로 한 수행의 길이자 회귀의 길이다. 황석영(Hwang Suk-young 黃晳暎)이 소설 「삼포 가는 길」에서 산업화의 물결에 떠밀려 떠돌이가 된 세 주인공을 삼포라는 미지의 장소를 찾아 눈길을 헤매게 한 설정, 위안부 소녀들의 삶을 담은 영화 「눈길」에서 인제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과 대관령의 끝없는 산봉우리들을 소녀들이 집으로 가는 길의 배경으로 삼은 데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1971년 판교에서 원주 새말까지 일부가 개통된 데 이어 1975년에는 새말에서 횡성, 평창, 강릉으로 가는 영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면서 강원도의 산길은 계절과 상관없이 도시인들의 등산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군사 지역으로 정해 출입을 통제하던 동해안의 일부 해안을 해수욕장으로 개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된 송창식(Song Chang-sik 宋昌植)의 「고래사냥」이란 노래를 1970년대 젊은이들은 통기타를 치며 악을 쓰며 불렀는데,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다. 여름 방학이면 굽이굽이 돌아가는 완행열차를 타든, 버스를 타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든 허술한 야영 장비를 둘러 메고 동해 바다로 달려가는 것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사치였다.
눈 덮인 대관령에 국내 겨울 스포츠의 중심이 된 용평스키장이 완공된 것도 영동고속도로가 뚫린 그 해이다. 지난여름에는 이 스키장의 정상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지형적으로 보면 강원도는 유럽의 스위스에 비견된다. 스위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 산맥에 걸쳐 있듯이, 강원도는 한반도의 척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한복판인 금강산에서 태백산까지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안에는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많다. 한국인에게 동해는 단순히 ‘바다’가 아니라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숭엄한 공간이고,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험하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동해로 가는 길
2016년 12월 어느 날, 연인원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촛불 집회에 초대된 가수 한영애(Han Young-ae 韓榮愛)는 특유의 낮고 거친 목소리로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머리에서 이글거리나 /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로 시작하는 「내 나라 내 겨레」를 불렀다.
1970년대에 이 노랫말을 쓴 이는 대학생 신분으로 한국인들의 대표적 저항 가요로 불리는 「아침 이슬」이란 노래를 만든 김민기(Kim Min-ki 金敏基)이고, 「고래사냥」이란 노랫말을 쓴 이는 신예 작가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Choe In-ho 崔仁浩)다. 다만 영동고속도로를 경제 발전을 이끈 산업화의 상징으로 여기든 개발 독재의 산물로 여기든, 우연찮게 이 노래들이 발표된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추가할 만하다.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모든 길들이 동해로 수렴되듯 한국인에게 동해는 단순히 동쪽에 있는 바다가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다. 그래야 대관령이나 한계령, 미시령 같은 백두대간의 고갯길을 넘어 동해를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뻥 뚫리고 가슴을 옥죄던 일상의 구질구질함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체험하는 사람들과 새해 첫날의 일출을 보기 위해 밤잠을 설치며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동해 바닷가를 서성이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조율은 끝났다. 이제, 노래를 들을 시간이다.
강원도에 ‘문화’의 이미지를 입힌 평창대관령음악제
류태형(Ryu Tae-hyung 柳泰衡) 음악 칼럼니스트
국제 음악제의 하나로 자리 잡은 평창대관령음악제는 2004년 용평리조트에서 처음 열렸다. 미국의 아스펜 음악제를 벤치마킹해 연주와 교육이 함께 어우러지는 여름 음악제로 기획됐다. 아스펜은 주민 6,000명의 유령 폐광촌이었지만 1949년 음악제를 시작한 이후 명실상부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 축제 도시로 성장했다.
조르벡 구가에브(Zaurbek Gugkaev)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이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공연하고 있다. 베네치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오페라는 2017년 평창대관령음악제를 통해 한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를 모델로 줄리아드 음악원 교수인 강효(Kang Hyo 姜孝)와 세종솔로이스츠를 주축으로 축제를 꾸려 갔다. 출발 당시 여건은 좋지 않았다. 연주 무대인 눈마을홀은 전용홀이 아니라서 청중에게 제대로 음을 전달하려면 마이크 증폭에 의존해야 했다. 게다가 음악회가 열린 용평리조트에서 여러 행사가 함께 개최돼, 초창기엔 검도 대회에서 들려오는 기합 소리에 청중들이 깜짝 놀랐던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해발 700m 고지에서 피서와 공연을 겸한 평창대관령음악제는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며 음악팬들을 점차 평창으로 이끌었다. 국내외 음악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제를 선정, 매해 일관성 있는 음악적 프로그램을 구성했던 것이다. 고전 명곡뿐 아니라 세계 초연, 아시아 초연, 한국 초연 등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곡과 실험적 현대 음악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며 음악적 업적을 남겼다. 2010년부터는 클래식 전용홀인 알펜시아 콘서트홀이 개관돼 비로소 제대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해엔 저명 연주가 시리즈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매년 거장급 연주가와 교수진이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전 세계 우수 음악학도들의 참가 열기 또한 확산되었다.
2011년 제8회부터는 첼리스트 정명화(Chung Myung-wha 鄭明和)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Chung Kyung-hwa 鄭京和)가 공동 예술감독을 맡았다. 이들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십분 발휘하기 시작한 이 음악제는 ‘빛이 되어’를 주제로 삼아 3만 5,000여 명이라는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했고, ‘찾아가는 음악회’ 등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다양화했다.
‘볼가강의 노래’를 주제로 러시아 음악을 다룬 올해 평창대관령음악제는 2012년 개장한 뮤직 텐트에서 열린 오페라 공연이 상징적 이벤트였다. 여건상 실내악 위주의 콘서트로 출발한 축제가 하드웨어적으로도 규모가 큰 오페라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부예술감독 손열음(Son Yeol-eum)을 비롯해 젊은 음악가들이 웅숭깊은 앙상블을 들려줬고, 세대와 국적이 다른 연주자들이 이루는 하모니가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올해 청중 가운데엔 벤치마킹을 위해 참여한 국공립 예술 단체 대표들이 유난히 많았다.
평창대관령음악제는 빼어난 기성 연주자와 음악학교가 두 바퀴처럼 균형을 이룬다. 실제로 학생들은 거장들의 마스터클래스를 수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공연을 보고 식사를 하거나 산책을 하며 때로는 커피숍에서 마주치곤 한다.
2017년 평창대관령음악제 ‘저명연주가 시리즈’에서 첼리스트 정명화, 루이스 클라레트, 로렌스 레서(왼쪽부터)와 피아니스트 김태형(Kim Tae-hyung)이 데이빗 포퍼의 「레퀴엠」을 연주하고 있다.
정명화, 정경화 두 예술감독의 존재도 빛을 발한다. 이들은 레퍼토리 선정과 아티스트 배치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훌륭한 스폰서들로부터 후원과 협찬을 받아 내고, 그들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쌓아온 노하우다. 이번에는 야마하에서 피아노를 40대나 들여와 알펜시아 곳곳에서 연습이 가능했다. 항공사의 후원과 함께 커피 업체인 테라로사 같은 강원도의 지역 기업들도 축제에 힘을 보탰다.
한편 2016년 2월부터는 평창겨울음악제도 개최되고 있다. 올림픽 특구 사업의 일환으로 강원도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강원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있다. 제1회 평창겨울음악제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자들의 독주와 실내악 협연 외에 재즈싱어 나윤선(Nah Youn-sun 羅玧宣),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 등 재즈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장르적 외연을 넓히고 접근성을 강화했다.
평창겨울음악제에는 스키를 타러 왔다가 음악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현장 티켓 판매량이 예상치를 웃돌았다. 평창대관령음악제와 평창겨울음악제로 인해 우리는 ‘청정’과 ‘문화’라는 두 키워드로 강원도의 이미지를 기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