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뉠 땅 없는 막장 인생을 그림으로 토해 내다

  • 조회수 154
  • 행사기간 2018.01.23 - 2018.01.23
  • 등록일 2018.01.23

문화 예술

인터뷰 뉠 땅 없는 막장 인생을 그림으로 토해 내다

화가 황재형(Hwang Jai-hyoung 黃在亨)은 탄광촌 막장의 풍경과 인생을 살아 숨 쉬는 날 것의 싱싱한 조형 언어로 풀어놓는다.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구현할 수 있는 그림에 대해 고민하며 그림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만들고자 강원도 산골 태백 탄광촌으로 떠났던 현장주의자는 삶의 희망을 그림에서 구하는 ‘그림 광부’가 되었다.

「광부 초상」, 2002년, 캔버스에 유채, 65 × 53 ㎝.

황재형의 두툼하고 따듯한 손이 덥석 먼저 손님을 반긴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다는 말이 따르고, 텁수룩한 수염에 시꺼먼 작업복과 검은 모자가 눈에 들어온다. 장대한 기골의 몸피가 일꾼 두 몫은 할 장부의 기개를 풍긴다.
사람을 아는 데는 손이 제일이라 했던가. 악수만으로도 그의 인생 반 너머가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탄광촌의 화가는 칙칙한 검정 일색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자신도 광부가 되어 그들의 막장 인생을 그렸던 화가는 “막장에선 삶의 마지막 희망이 별처럼 빛난다”고 했다.
“1982년 가족을 이끌고 태백에 내려왔을 때는 어두침침한 선술집 분위기가 좀 거시기했는데 요즘은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립네요. 이곳도 지난 30여 년 경기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로 흩어지고 난리굿을 했는데, 그걸 모두 지켜본 저로서는 오히려 차분하게 버티며 증언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이제는 떠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분에겐 이렇게 말하죠. 난 여자 단물만 쏙 빼먹고 떠나버리는 남자가 아니라고요.”

인간이 절망하는 곳은 다 막장이다
황재형은 잊히지 말아야 할 땅과 사람의 기억, 자취를 무던히 좇아왔다. 도시 사람들이 탄광을 막장이라 치부했을 때 그는 “막장이란 인간이 절망하는 곳, 서울이 더 탄광 같지 않은가. 그 속에서 시름하는 실업자들 가운데 광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반문했다. 그래서 그가 수십 년 간 자신의 전시회 제목으로 일관해 온 ‘쥘 흙과 뉠 땅(The Dirt to Hold and the Ground to Lie on)’은 손에 쥘 흙은 있어도 몸을 누일 땅은 없는 사람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시대 풍경을 은유한다.
“미술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 땅의 현실과 동떨어져 화가 행세나 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왜곡된 산업화의 실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서울 구로동, 가리봉동 같은 변두리 지역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을 보았는데, 그 공장 지대에서마저 쫓겨난 사람들이 가는 곳이 바로 탄광촌이었죠. 1980년대 민중미술이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를 나는 깨고 싶었습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막장이란 것은 인간이 절망하는 곳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막장은 태백뿐 아니라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곳, 그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사람이 선택하는 직장이나 거리나 집은 모두 다 막장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 절망한 사람, 거기서 소생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의 대표격인 광부를 만나러 갔던 겁니다.” 태백문화예술회관 옆 골목 주택가에 있는 그의 화실은 높직한 천장이 ‘그림의 성전’ 같은 경건함을 불러일으켰다. 부옇게 탄진이 날리는 갱도에서 안전등을 서로 비추며 도시락을 먹던 막장의 추억, 어머니 뱃속 같기도 했던 그 굴속의 치열함이 그의 작업장에 서려 있다. 문간 입구에는 물감 통이 벽마다 층을 이루며 빼곡이 쌓여 있다. “한때는 돈만 생기면 물감을 샀다”는 화가의 말이 실감났다. 끼니 걱정을 하면서도 그림이 더 고파서 물감 살 일을 궁리했던 가난한 화가의 회한이 사무친다.

「검은 울음」, 1996~2008년, 캔버스에 석탄과 혼합 재료, 193.9 × 259.1 ㎝.

광부들은 예술보다 땀을 원했다
“1980년대 운동권 궤멸은 인내력 부족, 이론과 실천을 통합 못 시킨 탓이라 봅니다. 강원도 사북과 정선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구경꾼일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광부들은 나의 예술보다 땀을 원했거든요. 당시 내 붓질이 광부의 삽질과 과연 같은가 고민했었습니다. 마당패를 만들고 벽화 운동, 시민 판화 운동을 벌이며 미술 캠프를 시작한 것도 그들과 나를 붙들어 매겠다는 선언이었죠. 시대에 절망했으나 소생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겠다는 뜻을 그림으로 토해 냈습니다.”
1982년, 안경 낀 사람은 갱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콘택트렌즈를 끼고 정선의 구절리 광산에 광부로 위장 취업했다. 심각한 근시였던 그는 집에 올 때까지 렌즈를 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구와 렌즈 사이에 낀 탄가루 탓에 극심한 결막염을 앓았고, 의사는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3년 만에 곡괭이를 놓았지만, 막장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그의 모델이 되었다.

작품과 생활이 같은 궤도 위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로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노동자, 광부 화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태백을 제2의 고향으로 삼게 했던 늙은 탄부들, ‘엄니’ 같은 마음으로 그를 새 땅에 뿌리내리게 했던 선탄부(選炭婦)는 사라져가고 있다. 노동을 변화시키는 돈의 위력, 자본주의의 횡포가 흙을 말려 버리고 있다. 2020년께 탄광은 모두 문을 닫는다. 관광은 이 지역을 선전하는 미끼일 뿐, 여전히 없는 사람들은 뉠 땅을 잃는다. 화가는 캔버스를 밀어놓고 소주만 마시는 날도 꽤 된다고 했다. 탄가루로 시커먼 얼굴 탓에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 보이는 그림 「선탄부 권씨」 앞에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니 눈빛을 되살리려 했는데 그게 영 어렵네요. 정과 눈물이 뒤엉킨 촉촉한 눈망울이 아마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고 가야 할 모든 것일 수도 있어요. 이 산 저 산 나무를 많이 그리게 되네요. 아무 불평 없이 나무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 30여 년을 지내다 보니 제 붓이 곧 삽이자 곡괭이가 되게 하자는 마음뿐입니다.”
화실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림은 광부 화가로 걸어온 그의 투쟁의 증언이자 기록물이다. 탄가루가 캔버스 구석구석에 짓이겨진 「검은 고드름」은 주름 가득한 늙은 탄부다. 누런 흙을 두텁게 쳐올린 「두문동 고갯길」은 우리 인생사처럼 구불텅구불텅 요동친다. 번들번들 기름기가 많은 유화 물감이 느끼하게 느껴질 때 그는 흙과 탄가루로 범벅된 거칠한 화면을 만든다. 그것이 더 우리를 닮았다고 믿어서다.
“재료에 대해 오래 묵상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1980년 황지 탄광에서 갱도 매몰 사고로 숨진 광부 김봉춘 씨의 작업복과 만난 일이지요. 명찰에는 ‘황지 330’이라 쓰여 있었죠.

「식사」, 1985년, 캔버스에 유채, 91 × 117 ㎝.

해어지고 주름진 작업복만이 덜렁 남아 광부의 삶과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어요. 그 작업복 자체보다 더 나은 자화상이 있을까 싶었어요.”
화가는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재료, 탄광촌의 일상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물질을 과감하게 화폭에 투입해 인간적 훈기를 불어넣는다. 광부의 진폐증 사망진단서, 버려진 탄광 사택에서 나온 합판과 철망이 그대로 작품에 녹아들어 사라진 사람들과 한 시대를 추모한다. 「버스」, 「연탄찍기」, 「식사」, 「앰뷸런스」 등은 노동의 길에 동승한 화가의 자기 혁신을 보여준다.

황재형은 1982년부터 탄광촌이 있는 태백에 정착해 그곳에서 살아가는 광부들의 고달픈 삶을 화폭에 담아 왔다.

예속의 인간사를 꿰뚫는 머리카락 그림
화가는 요즘 새 물질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화실 곳곳에 세워진 대형 캔버스는 머리카락 소묘가 뿜어내는 기로 충만하다. 한때 사람의 정수리에 붙어 있었을 털이 화폭에서 회오리를 일으킨다. 낱낱은 연약하나 엉키면서 강인해진 머리카락의 에너지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150여 년 리얼리즘 미술 역사에서 이런 비장한 묘사는 처음 아닌가 싶다.
“어느 날 여교사 한 분이 절 찾아와 집안일로 상담을 하고 싶다 했어요. 시어머니와의 갈등 문제였는데 얘기를 듣는 순간 전율이 일더군요. 아이를 낳고 시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을 받아 첫술을 뜨는 순간, 국그릇에 든 머리카락 한 줌을 봤다는 겁니다. 갑자기 지배와 피지배의 인간사가 그 머리카락에 중첩되면서 영감이 떠올랐어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예속의 굴레는 끊을 길이 없겠구나.”
「광부 초상」 등 기존에 그려진 그의 옛 작품이 머리카락 선묘만으로 새 생명을 얻는다. 간단한 밑그림을 그린 바탕 위에 접착제로 완성해 가는 작업 과정은 신들린 듯 귀기(鬼氣)가 서린다. 화가는 “머리카락이 움직여 가는 길이 스스로 흐름을 잡아 주며 리듬의 선을 타는 걸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화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소재로 쓰다가 양이 부족해 딸과 아내 것까지 얻어 쓰게 됐다. 그는 “피붙이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으면 애틋해진다”며 두 손을 모았다. 또 “서구 화단에 없는 이 그림으로 한국 화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삼아 볼까 싶다”며 희망도 내비쳤다.
그는 올해 12월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에 이 미술사 초유의 머리카락 그림을 선보였다. 그의 그림을 본 한 화가는 “가슴을 후벼 파는 혁명적 충격”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신작은 또 있다. 바이칼 호수의 대자연을 그린 흑연 작업 「거대한 침묵」 연작이다. 민족의 시원을 찾아 긴 여행을 하며 그는 주문하듯 외웠다고 했다.
“제발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마라.”
“사사로운 것에 묶이지 말자.”
인간의 내리막길인 막장, 그 낮은 곳으로 하강했던 화가는 수천 만 년 전 인류의 탄생을 지켜본 바이칼 호수, 그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두 곳 모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명의 빛을 끌어올리는 극지다. 그는 무엇을 보고 그렸을까. 화가는 자신이 그린 「엄니의 얼굴」, 「아버지의 자리」처럼 눈이 촉촉이 젖어든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정겨움이 있는 한 삶은 꺾일 수 없지요.”

화가는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재료, 탄광촌의 일상에서 거둬들인 다양한 물질을 과감하게 화폭에 투입해 인간적 훈기를 불어넣는다. 광부의 진폐증 사망진단서, 버려진 탄광 사택에서 나온 합판과 철망이 그대로 작품에 녹아들어 사라진 사람들과 한 시대를 추모한다.

정재숙(Chung Jae-suk 鄭在淑) 중앙일보 문화 전문 기자
안홍범(Ahn Hong-beom 安洪範)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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