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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성북동의 세 남자 이야기

  • 조회수 200
  • 행사기간 2018.10.08 - 2018.10.08
  • 등록일 2018.10.08

생활

인문학 기행 성북동의 세 남자 이야기

한양도성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 성북동.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 북악산 기슭의 정취를 사랑했던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모여 살면서 예술가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 동네 골목골목에는 이름난 미술관과 문화 유적이 많다.

성북동은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조선 후기 한양도성의 동북쪽 외곽을 따라 조성된 마을이다. 문화 유적이 많아 서울의 주요 관광지가 된 이 동네에는 현대식 고급 주택 단지와 오래된 마을이 공존하고 있다.

도시는 늘 거기에 여일하게 있는 장소가 아니다. 도시는 그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생활 양식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늘 새롭게 변한다. 따라서 도시는 언제나 낯설고, 오늘의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최신 안내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지도를 펴면, 도시는 대개 광장으로 이어진 큰길과 그 길에서 파생된 작은 골목길들로 이루어져 있다.
직장에서 고달픈 하루를 보낸 사람이나 또는 피켓을 들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도 저녁이면 광장에서 벗어나 약간의 후회를 겸한 휴식과 돌봐야 할 가족이 기다리는 한갓진 언덕길을 오른다. 그 길모퉁이에 있는 주인 없는 집의 소박한 마당을 서성이다 나는 한때 그 집을 짓고 살았던 한 남자의 생활과 생각을 다시금 마주보게 되었다. 그날 나는 그에 대한 오래 묵은 편견을 수정했다.

한양도성과 복사꽃
성북동 길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에서 성북초등학교를 지나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약 3㎞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멀리 보이는 산을 이마 앞에 두고 한껏 치장을 한 길가의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한 발 두 발 걷다 보면 어느샌가 길이 점점 좁아지고 가팔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성북천을 복개해 도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발 아래로는 노들바위 위를 계곡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으리라.
한양도성을 바로 곁에 두었음에도 숲이 산골처럼 무성하여 어느 부잣집에서는 별장지로, 또 어떤 가난한 이에게는 비와 추위를 피하는 모옥의 집터쯤으로 여겨져 100년 전까지만 해도 70여 호에 불과하던 이곳이 어느덧 인구 2만 명의 마을을 이루었으니 이 재개발을 마냥 흠잡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서울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동네 길임에도 곳곳에 각종 문화 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수시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표지판들도 많다. 모두 이 동네가 자랑하고 기리는 누군가의 흔적들이다. 그러고 보니 작은 손깃발을 든 인솔자를 따라 무리를 지어 걷는 관광객들도 눈에 띈다. 자치구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볼거리로 만들기 위해 투자를 하고 캠페인에 공을 들이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관광이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되면서 도시의 정책을 바꿔 놓은 것이다. 여러 면에서 아쉬울 것 없어 보였던 뉴욕 관광청마저도 눈 밖에 있던 할렘가를 ‘흑인 문화의 본거지’라 소개하며 흑인 문화 축제를 지원하는 등 해마다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성북동의 관광 자원을 꼽자면 으뜸이 한양도성이다. 한양도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 李成桂)가 한양으로 천도해 경복궁을 지은 뒤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주변 네 곳의 산을 연결해 쌓은 둘레 18.6km의 도성이다.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이 한국식 도성은 그 내부에 궁궐과 여러 행정 시설은 물론이고, 시장과 일반인들의 주거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성곽과는 사뭇 다르다.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한양도성은 군사 시설이면서도 모두에게 개방된 시설이었다. 이 가운데 성북동은 북악산에서 낙타산으로 이어지는 약 4km의 산성 유적을 끌어안고 있다. 도성 중에 가장 지대가 높다 보니 산등성이의 성곽 길을 오르다 예스런 성곽과 현대식 주택이 어우러진 풍경 너머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의 전경이 압권이다. 지역 사람들은 와룡공원의 말바위를 꼽지만, 전문가들은 북문인 숙정문과 창의문 사이에 있는 청운대에서 남산을 바라보는 조망을 최고로 친다.

작가 이태준은 1933년에 철원의 고가를 옮겨 지은 이 집에서 10여 년에 걸쳐 살며 창작에 몰두했다. ‘수연산방’이라 불리는 이 곳은 현재 그의 친척이 전통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지은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기초가 무너진 곳 하나 없이 온전하다고 자랑했지만, 도성 안의 인구 증가는 30년 앞도 예측하지 못했다. 성 안에 인구가 급속히 늘자 조선은 동대문 밖을 시작으로 도성 밖 십리를 주거 지역으로 정해 인구를 분산했다. 그러나 이때도 성북동 지역은 제외되었다. 계곡이 깊고 숲이 우거진 탓이었다. 그러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인 1766년 도성 방비를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도성 경비대인 어영청(御營廳)의 파견대인 북둔(北屯)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군대가 상주하자 군량을 자급하기 위한 농토가 만들어지고, 이를 기반으로 하천변에 집들이 들어섰다. 하천 모래땅에서 농사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포목을 손질해 납품하는 따위의 일감이 주어졌고, 생계에 보탤 요량으로 복숭아나무를 집 주변에 심었다. 그로부터 대략 20년이 지난 뒤 이 일대를 유람하던 조선 후기의 명재상 채제공(1720~1799 蔡濟恭)은 성북동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다 쉬다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다수가 복숭아나무로 울타리를 삼아 창문과 처마 끝이 언뜻언뜻 복사꽃 울타리 밖으로 보였다. 도성의 사람들은 벼슬아치건 평범한 사람이건 모두 이 구경거리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북둔이 ‘도화북둔(桃花北屯)’으로 바뀐 것이다. 이 무렵부터 권세가 있는 문인이나 왕족, 거부들의 별서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양옥 별장이 들어서고 오늘날 재벌들의 고급 주택이 즐비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수연산방과 노시산방
1929년 6월에 창간된 『삼천리』(三千里)라는 잡지에 「성북동의 문인촌」이란 기사가 실렸다. 서울 근교에 있는 성북동은 경치가 좋고 공기가 맑아 최근 서울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는데 특히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예로 든 사람 중 한 사람이 소설가 이태준(1904~미상 李泰俊)이다. 이태준은 당시 갓 서른이 된 신예 작가였지만, 뛰어난 문장으로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최인훈(1936~현재 崔仁勳)은 소설 『화두』에서 이태준이 살던 집을 이렇게 묘사했다.
“누(樓)가 달려서 기역자가 된 남향집인데 이 누의 남쪽 정면에 ‘문향루(聞香樓)’라 새긴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누는 집을 향해 오른쪽 끝이고, 기역자의 가로 부분이 대청과 건넌방이다. 이 대청은 마루에서 올라선 곳이 바깥마루고, 그 안쪽에 유리 낀 창살문들로 막힌 그 안쪽이었다. 겨울에 따듯한 대청이었을 것이다.”
이태준은 1930년에 결혼해서 이곳에 이사를 온 후 1933년에 옛 초가를 헐고 어린 시절을 보낸 철원 용담의 당숙 집을 그대로 뜯어 그 목재로 이 집을 지었다. 이태준은 이 집을 지은 늙은 목수들의 일솜씨를 지켜보며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모리 요새 시체집이라도 얼마쯤 날림끼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고 칭송했다. ‘시체집’이란 남녀의 공간을 구별하지 않고, 창호를 종이가 아닌 유리로 마감하고, 본체와 멀리 떨어져 있던 화장실을 마루와 잇대어 놓는 등 시대의 흐름에 맞게 한옥의 구조를 변형시켰다는 뜻이고, 그러면서도 기와지붕과 처마, 서까래, 난간 장식 같은 한옥이 지닌 외관의 멋을 꼼꼼히 살렸다는 점에서 ‘날림끼가 적다’고 자평한 것이다. 누마루를 안방이자 사랑채로 활용한 아이디어는 ‘모던 한옥’의 포인트였다.

‘심우장’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던 승려 시인 한용운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1933년에 그를 위해 여러 독지가들이 힘을 합해 지어 준 집이다. 그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 집에서 생을 마쳤다. 조선총독부를 향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불리는 이 집은 지금 이태준의 외종질녀란 분에 의해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마당의 가장 낮은 곳에 우물이 있다. 아침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이를 닦으며 건너편 산마루에 울멍줄멍 솟은 성벽을 빤히 쳐다보던 이태준이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라기도” 하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곳이다. 지금은 커다란 소나무와 건물들에 가려 성벽은 보이지 않는다.
이태준의 집에서 언덕길로 조금 더 오르면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1879~1944 韓龍雲)이 감옥에서 나와 193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심우장(尋牛莊) 입구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그 입구에 기이한 헤어스타일의 소설가 박태원(1909~1986 朴泰遠)이 1948년부터 3년간 살았다는 집터가 있다. 박태원은 이태준의 도움으로 당시로서는 독특한 로드무비 같은 구성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해 주목받았다. 그러다 무리하게 빚을 내어 지은 돈암동 집이 금전 문제에 얽혀 전전긍긍하다 결국 처분하고, 모두가 떠난 성북동 골짜기에 인세 대신 받은 싸리 울타리를 두른 초가집에 들어앉은 것이다.
박태원의 집터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면 수월암이란 암자와 현대빌라가 보이는데 그 사이에 한국화가이자 수필가인 김용준(1904~1967 金瑢俊)의 노시산방(老柿山房)이 있었다. 이태준과는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친구였던 그는 1934년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이곳으로 “맹렬히 반대하는” 아내를 끌다시피 해 이사를 왔다. 그는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노시’는 늙은 감나무란 뜻으로 친구 이태준이 붙여준 당호였다. 그는 이 집에서 십년 남짓 지내다 아끼는 제자뻘 화가인 김환기(1913~1974 金煥基)에게 팔았다. 떠넘겼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로써 “노시사(老枾舍)의 겨울을 장식해 주는 내 유일한 벗들”인 “앙상한 나무들과 까치집과 싸리 울타리와 괴석과 흰 눈과 그리고 따스한 햇볕”과 작별했다. 김용준은 이 집을 판 사연을 「육장후기」(鬻莊後記)란 에세이에 남겨 그와의 인연을 기리며 이 집에서의 삶을 “한 덩어리 환영”이라 술회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북정마을은 ‘하늘 아래 마지막 달동네’라는 별명처럼 가파른 산비탈에 좁은 골목길을 끼고 오래된 작은 집들이 모여 있다.

김용준은 그와의 인연을 기리며 이 집에서의 삶을 “한 덩어리 환영”이라 술회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흔적도 없다.

한 덩어리 환영
이제 나의 ‘오래 묵은 편견’의 내막을 밝혀야겠다. 이태준은 『해방전후』에서 주인공 ‘현’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현은 정말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는 견디어 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승리를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칙을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칙이 인류를 배반한다면 그때는 절망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현은 집을 팔지 않았다. 구라파에서 제이전선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고 태평양에서 일본군이 아직 라바울을 지킨다고는 하나 멀어야 이삼 년이겠지 하는 심산으로 집을 최대 한도로 잡혀만 가지고 서울을 떠난 것이다.”
이태준이 일본 패망 직전인 1943년 시골로 내려가면서도 팔지 않은 이 집을 지은 때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항일 투사들의 무장 투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그즈음 서울은 평온했다. 서울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경성부가 1928년 발간한 「경성도시계획조사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지금의 강북구와 성북구 일대를 경원선이 남북으로 종단하여 시가지로 발전할 지역으로 꼽았다. 경원선은 그가 사랑하는 고향 철원으로 가는 철도가 아닌가. 성북동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혜화문에서 성북동, 돈암동까지 도로가 놓일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땅값이 오를 것을 노린 부동산 중계업소가 성북동에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이태준은 1931년 「중외일보」에 입사해 후신인 「조선중앙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 앞에 놓인 관념과 현실 사이의 불화를 설명할 누군가의 해명이 필요했다. 아마 그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일군 이 아담한 집에서 누리는 일상의 행복을 따르다 보면 정의와 역사의 법칙이 그에 걸맞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어줄 것이라 믿고 싶었을 것이다.

「수향산방」, 김용준, 1944년, 수묵담채, 24 × 32 ㎝.
화가이며 수필가였던 김용준이 후배 김환기 부부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김용준이 살던 당시에 ‘노시산방’이라 불리던 이 집은 지금 없고 많은 얘기들만 전해진다. 그에게 집을 넘겨 받은 김환기는 자신의 호 수화 (樹話)와 아내 김향안(金鄉岸)의 이름을 따 ‘수향산방’이라 불렀다.

수연산방에 지금도 걸려 있는 이태준의 가족 사진이다. 이 집 마당에 서서 가족들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해방 후 혼란에 휩싸인 사회 상황 속에서 내적 갈등을 겪던 이태준은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작가로서 어떤 타협도 없이 변해 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층민들의 삶과 그 속에서 우러나는 소박한 인간애, 그리고 고향과 옛것에 대한 아름다움에 천착하리라고 다짐했으리라. 이를 위해 감내해야 할 이 고달픈 식민지 ‘해내(海內)’에서의 굴욕적인 삶이 생색나는 ‘해외(海外)’에서의 투쟁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최인훈의 말대로 “적들이 점령한 나라 안에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서울의 사정은 어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벅찬 상황의 연속이었고, 그 어떤 선택도 내면의 상처를 아물게 하거나 그가 바라던 해방의 꿈을 보장하지 못했다. 1946년 이태준은 돌연 가족과 함께 성북동 집을 떠나 월북을 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시차를 두고 김용준과 박태원이 따랐다. 그 이후에 북쪽에서 그들을 맞은 관념과 현실의 갈등은 단편적인 이력과 몇몇 증언으로만 요약될 뿐 아직 문학사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연구된 바는 없다.
독문학자로서 글쓰기를 즐기는 문광훈(文光勳)이 이태준의 가족사진 한 장을 두고 길게 사유한 「행복의 시적 순간」이란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여기 낡은 사진이 한 장 있다. 그것은 작가 이태준이 1942년 성북동 집에서 아내와 2남 3녀의 아이들과 함께 찍은 것이다. …… 이 장면은 인간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은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아마도 가장 잘 보여주는 듯한 이미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둘러본다. 주인이 없는데도 마당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꽃이 피어 있었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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