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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그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약은?

  • 조회수 246
  • 행사기간 2018.10.08 - 2018.10.08
  • 등록일 2018.10.08

문학산책

평론 그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약은?

오현종(Oh Hyun-jong 吳玹宗; 1973년 출생)은 연애, 첩보, 무협 등 여러 장르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엮어 내는 작가다. 이 때문에 한국 소설의 지평을 한층 넓히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인간 내면의 심리가 예리하게 포착되어 있다.

오현종은 1999년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소설 「중독」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작가 생활 20년 동안 장편 여섯과 단편집 셋을 출간했다. 이 정도 경력의 작가라면 웬만한 문학상 한둘쯤은 훈장처럼 거느리게 마련인데, 이 작가에게는 그 많은 문학상 중 단 하나도 차례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문학적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학상 과잉 시대의 그늘이라 할 수 있는 부익부 빈익빈 현실을 보여 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문학상 수상이라는 인정과 보상이 없이도 자신만의 페이스로 꾸준히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이 작가의 훌륭함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장편들은 소재와 주제가 매우 다양하다. 초기에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편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며 글을 쓰는 30대 여성 작가의 지지부진한 연애담을 담은 첫 장편 『너는 마녀야』, 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색과 좌절을 그린 성장소설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20대 여자 대학생들의 연애와 사회 진출을 위한 몸부림을 다룬 『거룩한 속물들』 등이 자전적 배경을 지닌 작품들이라 하겠다.
자신의 체험과 사유를 소설화하는 데 능력을 보였더라도 자전적 소재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작가들이 있다. 상상력과 재능이 부족한 경우들이다. 반면에 오현종은 자전적 범주에 갇히지 않고, 서사를 능수능란하게 구현한다. 2007년 출간된 두 번째 장편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첩보 영화 ‘007 시리즈’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비튼 작품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제임스 본드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호남으로 그려지지만, 그의 남성성을 한껏 부각시키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 있는 본드걸은 영화와 달리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 앞부분에서 본드걸 미미는 본드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를 좇지만, 본드는 스파이로서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방패 삼아 그런 미미를 밀어낸다. 도망친 본드의 행방을 추적하던 미미는 소설 뒷부분에 가면 그 자신이 ‘013’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스파이로 변신하며, 본드의 자만과 무능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 조직을 위기에서 구해 낸다. 스파이로서 013은 007을 능가한다.

“비극 속의 왕이든 희극 속의 광대든 정오의 주사위 놀음으로 결정된다 해도 괜찮다. 이제는 내게 어떤 역이 주어지든 충실할 수 있을 것 같다.”

2013년에 낸 다섯 번째 장편 『달고 차가운』에서 오현종은 또 다른 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 살인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청년이 인간과 세계의 어두운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는 ‘잔혹한 통과의례 이야기’로 이 소설을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이 작품에 와서 오현종은 비로소 자전적 경험에 의지하지도 않고 공통의 문화적 맥락에 호소하지도 않는, 순전히 허구적인 세계 인식과 인물 구현에 성공한 듯하다.
2015년에 발표한 여섯 번째 장편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은 소재와 주제만이 아니라 문체 면에서도 완전히 다른 면모를 선보임으로써 이야기꾼으로서 작가의 다재다능함을 한껏 과시한 작품이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이 할리우드 영화의 재해석이자 변용이었다면, 이 소설은 동양 전통 서사 장르인 무협지를 현대적으로 계승∙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복수라는 동기와 주인공의 과장된 무공(武功)은 무협지의 전통에 충실하지만, 액자 소설적 구조라든가 주인공이 권력자를 척살하는 데 실패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문체와 사유 등에서는 전통 무협지의 클리셰와 한계에 갇히지 않는 창조적 역량을 엿보게 한다.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를 깊숙이 품고 나서야 비로소 내 뼈와 같이 자라난 고독, 환관 같은 고독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는 대목은 ‘이야기하기’라는 운명을 타고난 작가 자신의 고백으로 읽히기도 한다. 단편 「약의 역사」는 2017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단편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에 들어 있다. 표제작을 포함해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된 이 책은 세계 속에서 작가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이를 둘러싼 고민을 담았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다. 작품 속에서 왕이 되었다가 광대가 되기도 하는 존재가 바로 작가 아니겠는가. 이 책에 실린 자전적 단편 「부산에서」에서 작가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주인공은 방송 관련 일을 하는 한 중년 여성한테서 초면에 “소설의 시대는 이제 갔어”라는 말을 듣는다.

다른 단편 「호적(戶籍)을 읽다」에서 주인공이 은행이나 비자 대행업체 사람들이 소설가라는 자신의 불안정한 신분에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장면 역시 「부산에서」의 앞선 에피소드와 통한다 하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호적에 등재된 조상들 이름과 생몰 연도를 보면서 곱씹는 상념, 이를테면 “만남과 헤어짐, 두려움과 외로움은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되지 않는다” 같은 대목은 역설적으로 그런 것들을 기록해 남기는 소설에 대한 자부와 신뢰로 읽힌다. 이 책의 맨 뒤에 게재된 ‘작가의 말’에서 오현종은 “비극 속의 왕이든 희극 속의 광대든 정오의 주사위 놀음으로 결정된다 해도 괜찮다. 이제는 내게 어떤 역이 주어지든 충실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독백 역시 소설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약의 역사」는 특별히 소설과 문학에 관한 메타적 사유를 담은 작품은 아니다. 20대 후반인 영문학과 대학원생 여성과 늦깎이 한의학과 남학생의 관계를 중심에 놓은 일종의 연애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두 남녀의 관계가 친한 선후배와 연인 사이의 어디쯤에서 정체된 채 더는 진전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예 단절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첫 장편인 「너는 마녀야」를 떠오르게도 한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살아오면서 복용한 갖가지 약의 이력이 소개된다. 그런 약의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나이 서른이 가까운 여주인공은 감기에 걸려 개처럼 컹컹거리며 짖는 소리를 내고, 그런 그에게 한의학과 학생 섭은 나름대로 약을 처방해 주지만, 소설이 끝나 가도록 감기는 좀처럼 낫지 않는다. 섭의 약 짓는 솜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는 차츰 알게 된다.
제법 오래 만나 온 사이임에도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아본 적은 없었”으며 그 때문에 주인공은 “그와 나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거리”를 걱정하기도 한다.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오래전에 늙어버린 기분을 느낀다는 주인공은 김치찌개 잘하는 집을 발견했다며 나오라는 섭의 전화에 “떨어지지 않는 감기보다 그게 더 지겹다”고 혼자 생각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이 섭에게 전화해 “나, 약이 필요해, 약”이라 말하고 그예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약이 섭이 지은 한약이나 약국에서 조제하는 양약이 아님을 독자는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전화를 끊지 않고 그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섭 역시 그렇지 않을까.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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