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아츠&미디어

무거움과 사소함의 카니발적 접근

  • 조회수 206
  • 행사기간 2019.02.14 - 2019.02.14
  • 등록일 2019.02.14

문학산책

비평 무거움과 사소함의 카니발적 접근

단편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는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기간, 보안이 강화된 회의장 근처 아케이드에서 한 개인이 벌이는 소동극이다. 작가 이영훈(Lee Young-hoon 李暎勳)은 이 작품에서 '무거움을 가볍게 만드는 법, 사소함을 구조적 부조리로 연결시키는 법'을 펼쳐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영훈은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무렵 막 성년의 문턱을 지난 또래, 즉 ‘IMF 세대’작가다. IMF 구제금융은 196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온 대한민국이 처음 맞닥뜨린 심각한 위기였다. 이 무렵 막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진입한 세대에게 이 경험은 씻을 수 없는 내상(內傷)으로 자리잡았다. IMF 구제금융은 단지 경제 성장 추세가 꺾였다는 사실을 뜻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사회 전반적으로 발전과 진보의 흐름에 제동이 걸렸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영훈은 200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2012년에는 단편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체인지킹의 후예>로 장편소설 공모전인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는데, 이 소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그저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살고 있어. 영화와 만화와 드라마를 흉내내면서. 아버지도 없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고, 믿고 따를 진실도 없어. 신도, 철학도 아무것도 없어.”

아버지, 거대 담론, 진리, 신… 이런 것들은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목표를 제시하는 근거이자 젊고 패기만만한 세대가 싸움의 대상으로 삼곤 하는 ‘낡고 억압적인 것’을 상징하는 가치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영훈의 세대에게는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그런 의미와 가치가 주어지지 않았다. 단적으로 이 세대의 아버지들은 IMF 구제금융에 따른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 가장의 역할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다. 믿고 의지할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싸움과 극복의 대상으로서 낡은 가치 역시 사라져 버렸음을 뜻했다.
문학은 대체로 화해보다는 갈등에 관여한다. 이 말은 문학작품 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학장이라는 더 큰 틀에서도 유의미하다. 한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문학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맞서 싸울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 세대에게는 현실적인 싸움뿐만 아니라 문학 내적인 투쟁 역시,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으로 성격이 제한되었다. 언젠가 나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영훈은 또 다른 장편 공모에 응모하고 싶다는 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대개는 하나의 유력한 장편 공모에 당선해서 작가 경력을 시작하면 같은 성격의 다른 공모에는 응모하지 않는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까닭을 물어 보았다. “문단 안팎에서 잊혀질 것 같아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또래로서는 비교적 상도 많이 받고 주목을 받은 작가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문학적 입지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IMF 세대로서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서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인용한 대사는 어린이용 특수촬영물에 빠진 서른두 살 히키코모리 민의 말이다. 그와 동갑내기인 소설 주인공 영호는 의붓아들인 중학생 샘과 말문을 트고자 아이가 몰입해서 보는 어린이용 특수촬영물 <변신왕 체인지킹>에 대해 공부하고 탐문을 한다. 이영훈의 세대는 텔레비전과 영화, 컴퓨터 게임 같은 영상물의 세례를 받고 자랐다. 민이 그 전자 세계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라면, 영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로부터 현실 세계로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는 인물이다.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될 거다”라는 영호의 외침은 그런 각오를 보여준다. 요컨대 ‘아비 없이 자란 세대의 아비 되기’가 이영훈의 문학적 테마라 할 수 있겠다.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는 ‘소녀시대’라는 한국의 대표적 걸그룹 이름을 제목으로 삼았고(물론 이름만 같지 실제의 소녀시대와는 다르다. 멤버 숫자가 아홉에서 일곱으로 줄었고 멤버들 이름도 바뀌었다) 코엑스몰이라는, 한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을 무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된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난 여성과 코엑스몰의 한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주인공 남자가 갑작스레 변의를 느끼면서 위기에 처한다. 급하게 화장실을 찾지만 마침 G20 정상회의 기간이라 가까운 화장실은 폐쇄되었다. 미로와 같은 지하 공간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곳을 찾아 헤매던 그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문을 연 화장실을 찾아 간다. 그렇게 열린 화장실을 향해 가던 주인공이 경찰 복장 남자와 소녀시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복통이 가라앉는다.
“우리는 소년처럼 수줍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소녀시대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복통마저도 소녀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업무에 바쁠 경찰관이 일개 시민의 생리적 ‘급한 볼일’해결에 도움을 주는 까닭을 주인공이 궁금해하자 경찰복 남자(그가 진짜 경찰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둘 다 소녀시대 좋아하잖아요.”그러나 소녀시대라는 대중문화적 환상이 주인공의 생리 현상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잠깐 잠잠해졌던 복통은 화제가 다른 쪽으로 옮겨 가자 다시 고개를 들고, 주인공의 참을성은 임계점에 다다른다.
민망한 소재를 콩트적 구성에 담았지만 이 작품에는 자못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경찰복 남자는 주인공을 화장실 있는 곳으로 이끌면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여기 아무데서나 똥 싸도 되잖아요.”
현대적으로 세련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이런 발언은 뜻밖의 효과를 갖는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해소되었을 설사증세가 심각한 문제가 된 까닭은 G20 정상회담에 따른 화장실 폐쇄 때문이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G20 정상회담이라는 전지구적 여건이 개인의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를 억압하게 된 셈. G20은 말하자면 이영훈의 세대적 정체성의 출발점에 놓인 IMF의 현재적 버전이라 할 수도 있겠거니와, 카니발적으로 처리된 소설의 결말은 IMF 및 G20이라는 세대적 조건에 대한 이영훈의 도전 또는 대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코리아나웹진

코리아나웹진 바로가기

코리아나 홈페이지에 방문하시면 10개 언어로 출판된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