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아츠&미디어

천재 문인들이 남긴 근대의 유산

  • 조회수 209
  • 행사기간 2019.04.11 - 2019.04.11
  • 등록일 2019.04.11

기획특집

근대로 가는길: 20세기 여명 속의 한국 기획특집 2 천재 문인들이 남긴 근대의 유산

근대라는 변혁기는 한 사회와 구성원들을 격랑 속에 몰아 넣었다. 특히 식민화로 이어진 이 땅의 근대는 예민한 감성과 지성을 지닌 문인들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그들은 궁핍한 일상과 병마를 견디며 저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다.

김유정은 1933년 「산골 나그네」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농촌을 배경으로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소설들을 썼다.

판소리 명창 박녹주(1906–1979)는 1924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음반을 취입한 이후 여러 레코드사에서 수십 장의 음반을 냈다. 소설가 김유정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상은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건축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듬해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월간지에 연재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다수의 시와 소설을 남긴 그는 자의식이 강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였다.

1926년 시 「누님」으로 문단에 등장한 박태원은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작가로 꼽힌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사진 속 박태원은 당시 동경에서 유행하던 ‘갑바머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과 문화에는 언제나 웃음과 풍자라는 황금 광맥이 있었다. 근대 문학기에 그 황금 광맥을 캐낸 독보적 소설가였던 김유정(1908~1937)은 부유한 대지주의 2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흔히 농촌 출신에 토속적 정서를 가졌던 작가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강원도 춘천 인근 산자락 속에 묻힌 실레마을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실상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더 오래 살았던 김유정은 질풍노도적인 격정과 낭만, 절망, 사랑에 부대꼈던 도시 출신 문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좋아하는 작품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를 언급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로맨스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유정을 당시 서울의 도심에 위치한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시기에 유년과 청년기를 보낸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과 비견해 보면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이상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해에 경복궁의 서쪽 인왕산 기슭에 자리한 서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30년대 경성[식민지 시대 서울의 이름]을 풍미한 모더니즘의 절정을 누린 전형적인 ‘경성 모더니스트’로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작품 「종생기」(1937)에서 “나는 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한때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던 건축가 출신답게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과 건축물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민족적 자각이 강했고 일제에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의식은 일상에서 한복을 즐겨 입었던 데서도 드러났다. 부인 변동림은 자신과의 첫 만남에 이상이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고 회상했고, 신혼 시절 한복을 입으면 일경에 불심 검문당하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하기도 했다고 상기했다. 이 같은 증언은 봉두난발에 파이프를 입에 문 데카당트한 모습, 특유의 기이한 행적이나 극단적 일탈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192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유정은 둘째 누나 김유형과 함께 살았다. 사진 왼쪽이 김유정이며 가운데가 누나 김유형, 오른쪽은 조카 김영수이다. © 김유정문학촌

경성의 젊은 예술가들
김유정 역시 ‘조선 옷’을 일상적으로 입는다고 한 바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 양반가의 후예였으며, 경복궁의 동남쪽 운니동에 백여 칸이나 되는 고대광실을 마련하여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살았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은 김유정은 1920년 서울 집 근처의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4년 만에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학적부에는 ‘가족 11명, 형제 2명, 재산 5만 원, 성질은 질박, 키는 5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산 대부분을 상속받은 맏형은 이 무렵부터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김유정은 2학년 때 말더듬이 교정소를 다녔으며, 낙제를 하여 4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기도 한다.

고보 재학 시절 그는 후일 유명한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해 연서를 보내며 열렬히 구애했다. 박녹주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하자 그는 박녹주의 동생을 통해 자신의 음성을 녹음한 레코드며 선물을 끊임없이 보냈고, 자살을 기도한 박녹주가 입원 중인 병원에 찾아가서 청혼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녹주는 자신은 기생이고 김유정은 학생이라 신분이 다르고 “나는 더 이상 남자를 믿지 않으니 괜한 기대 말고 돌아가시오”라며 거절했다. 다음 날 박녹주의 집 앞에서 김유정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무단 결석으로 제명 처분을 받았고, 이후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 다시 입학했으나 실연의 절망에 고질병인 늑막염과 치질이 겹쳐 폐인 생활을 하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곧 노름꾼이며 건달, 들병이들과 무절제하게 어울리며 함부로 처신하다가 몸을 더욱 해치게 되었다. 그 결과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발전하여 요양을 하던 중 농촌 마을의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야학을 설립하고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고교 시절 친구이자 소설가 안회남의 주선으로 1933년 단편 「산골 나그네」를 한 문예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친구의 초상>, 구본웅, 1935년, 캔버스에 유채, 62 × 50 ㎝.이상과 절친했던 화가 구본웅이 그려준 이상의 초상화이다. 이상의 반항적인 내면과 성품을 잘 포착하였다. © 국립현대미술관

질풍노도의 격정
한편 이상은 화가 구본웅, 소설가 박태원과 일생의 벗이었다. 특히 바로 이웃 동네에서 나고 자란 구본웅과는 ‘꼽추 화가’와 ‘폐병쟁이 괴짜 시인’단짝으로 유명했다.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짓게 된 것,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된 것, 다방 ‘제비’를 연 것, 직장을 다니게 된 것이 모두 구본웅 덕분이었으며, 파이프를 문 그의 모습을 담은 <우인의 초상>을 그려 준 사람 또한 구본웅이었다. 후일 화가 김환기의 부인이 되어 김향안으로 개명하게 되는 부인 변동림은 구본웅 계모의 동생이었다.

이상은 소설가 박태원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박태원의 중편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됐을 때 삽화를 그렸고, 박태원의 결혼피로연 방명록 첫 장에 결혼 후 자주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해 “면회 거절 절대 반대”라는 글을 남겼다. 박태원은 이상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애욕(愛慾)」(1934)을 쓰기도 했다.

이상과 박태원은 1933년 서울에서 조직된 문학 단체 구인회의 멤버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구인회라는 단체 이름은 회원이 몇 차례 바뀌기는 했어도 항상 아홉 명인 데서 유래했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 예술을 추구했던 이 모임에는 역량 있는 중견 작가들과 최고의 신인 작가들이 참여했으므로 문단에서 위상이 높았다. 이들은 3~4년 만에 흩어지지만 각자 개성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근현대 문학사에 기름진 토양을 제공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불안정한 내면에 천착한 이상과 농촌 사회의 피폐한 현실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사뭇 다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혼을 이해했다.

가난과 폐병의 굴레
한편 김유정은 일제에 의해 야학이 강제로 해체되고 난 후 할 일이 없어진 데다가 병세가 도져서 무위도식하는 형편이 되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삼촌과 누나들의 집을 전전하며 얹혀 살게 된다. 이 시절 서울에 살았던 둘째누나는 밥 장사에, 김유정은 창작에 전념한다. 안회남의 격려를 받아가면서 원고를 써 돈을 벌고 생계에 보탬이 되리라는 각오로 각고의 노력을 거듭했다.

그는 등단 2년 후인 1935년 1월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어 일약 문단의 촉망을 받는 신진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어 구인회에 들어간 김유정은 기존 멤버였던 이상과 사귀게 되었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이상은 폐결핵을 천형처럼 달고 살았는데 김유정도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김유정이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듯 이상도 백부에게 입양되어 친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점, 둘 다 가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점도 그들이 연대감을 가진 이유였다.

이상의 대표작으로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너무 난해하다는 이유로 독자들의 비난을 받아 연재가 중단된 시 「오감도」(1934)와 아무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모순된 자의식을 보여 준 단편 「날개」(1936)가 꼽힌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불안정한 내면에 천착한 이상과 농촌 사회의 피폐한 현실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사뭇 다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혼을 이해했다. 급기야 이상은 김유정을 소재로 한 단편 「김유정」(1936)을 쓰는데, 이 글에서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따구니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라 언급했다.

김유정은 1936년 봄 몹시 앓았을 때 의사로부터 가을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선고를 받고도 술을 실컷 마시고 연일 밤을 새우며 원고를 쓰는 생활을 계속하다가 여름에 서울 정릉 근처의 산중 암자로 요양을 갔다. 술과 담배를 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병세가 한때 호전되었다. 이때 이상은 그를 찾아가 동반 자살을 제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유정은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피골이 상접한 앙가슴을 보여 주면서도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며 끝내 거절했다. 이상은 힘겹게 호흡하는 김유정을 바라보다가 “김형!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라고 작별 인사를 했는데, 김유정은 소리 내어 크게 울었다고 한다.

치명적인 병마에 신음하면서도 김유정은 수삼 년 동안 그야말로 남은 생명을 모조리 연소시키듯 치열하게 창작에 몰두했는데, 그 결과로 단편 소설 30여 편, 수필 20여 편, 장편 소설 하나에 번역본까지 한 권 남겼다. 그는 1937년 3월 18일 안회남에게 쓴 편지에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는 막다른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고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김유정은 이어 그 돈으로 닭과 뱀을 많이 사서 고아 먹어 보겠다는 재생의 절절한 의지를 보여 주었으나, 답장을 받기도 전인 3월 29일 새벽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약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동경의 한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상의 폐를 진단한 일본인 의사는 “이 사람에게는 폐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불우한 두 천재 작가들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명을 달리했다.

1935년 12월 『조광(朝光)』지에 발표한 김유정의 단편 소설 「봄봄」(좌측)은 머슴으로 일하는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갈등을 희극적으로 그린 소설이며, 1936년 5월 같은 잡지에 발표한 「동백꽃」(오른쪽)은 사춘기 소년·소녀의 심리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 김유정문학촌

식민지 농촌과 도시 하층민의 현실
김유정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이 꼽힌다. 이 세 작품에는 해학적 요소가 많고, 구수한 사투리와 토속성 짙은 단어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엉뚱한 전개와 뜻밖의 반전, 육담과 속어를 적절히 배합해 사용하며 과장과 익살, 어리숙한 능청스러움 뒤에 숨은 현명함과 날카로운 풍자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글이 재미있고 당시의 시골 풍경을 밀착된 시선으로 풀어내는 서술이 실감 난다.

생전의 김유정은 박녹주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흥보가」와 「춘향가」의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즐겨 들었고, 자다가도 육자배기를 듣는 게 싫지 않다고 했다. 그의 소설에는 알게 모르게 판소리의 질펀한 해학성과 음악성이 녹아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장과 대사 또한 구어체를 넘어 ‘구연체(口演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명과 흥이 주조를 이룬다. 그의 단편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배경도 당시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던 농촌 마을이라 당대를 눈앞에 보여 주는 듯 생생하다.

그의 소설은 1930년대 일제 치하 농촌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현미경처럼 묘파하는 자연주의적인 세밀화였다. 서술은 희화적이고 향토적이나 그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윤리마저 팽개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조선 사회, 더 나아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깔려 있다.

「봄봄」은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라 마름과 소작인의 착취 관계가 배경이고, 「금 따는 콩밭」은 겉은 해학적이지만 친구며 부부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개선되지 않는 삶의 절망적 상황을 보여 준다. 「소낙비」에서는 남편이 도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를 동네 유지에게 보내며 부부끼리 도둑질과 매춘을 서슴없이 권한다.

「땡볕」에서는 대학병원에서 희귀병을 고쳐 주고 돈도 준다는 소문만 믿고 남편이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진 채 힘든 길을 나서지만, 아내의 배 속에 죽은 아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데다가 제 병 고쳐 주는데 돈을 왜 주느냐는 병원 측의 핀잔만 듣고 돌아서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죽어도 배는 못 가르겠다며 어서 집으로 가자고 재촉하던 아내는 빚진 쌀과 남편 빨래 걱정을 하고, 남편은 그것을 유언인 양 들으며 땡볕 아래 다시 지게에 아내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 외의 작품들 또한 당시의 처참한 민생과 비극적인 사회 상황을 담고 있는데, 나을 가망이 없는 폐병 환자가 각혈하며 골방에서 연필로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채워 간 상황이 참으로 눈물겹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해학성은 겉모습일 뿐 본질적으로는 당시 농촌과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현실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 같은 현실 속에서 사는 작가에게는 그 비참함, 참혹함이 목숨을 던져서라도 캐내지 않으면 안 될 황금의 광맥임을 김유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신은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가시렵니까”라는 어느 잡지의 설문에 “글쎄요. 생각은 간절합니다만 암만해도 결핵균 외에는 남을 것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보름달처럼“허공에 둥실 높이 떠올라 그곳에서 한 평생을 늙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그의 작품은 휘황한 보름달이 되어 우리 근대 문학의 지평을 환하게 비춰 주고 있다.


소설가 구보와 함께하는 1930년대 서울 산책

그는 오늘도 정오 무렵 대학 노트와 단장을 손에 들고 집을 나선다. “이렇다 하게 한 군데 갈 곳도 없는” 그가 다음 날 새벽녘에 귀가할 때까지의 여정을 그린 박태원의 중편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메타픽션적 성격이 돋보이는 자전적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태원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동란 중에 북한으로 넘어가서 작가 활동을 계속하다가 1986년 사망했다. 이 소설은 1934년 8월 한 달에 걸쳐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으며, 그와 함께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었던 시인 이상이 삽화를 그렸다. 박태원과 구보의 내면 세계가 교차하는 경로를 따라 당시 서울의 근대적 도시 풍경을 돌아본다.

1934년 8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박태원의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시인 이상이 그려준 삽화이다.

식민지 도시의 우울한 젊음
구보의 어머니는 동경 유학까지 다녀왔으면서도 스물여섯 살이 되기까지 변변한 직업도 없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글이나 쓰고 있는 아들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구보는 오늘도 그런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는 그는 전차 길을 건너 화신상회[193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백화점이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를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어린 자녀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부부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다가 문득 자신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자문한다.

종로 거리로 나온 구보는 무작정 전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다방에 들어간다. 오후 두 시의 다방에는 자신처럼 별다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 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인데, “광선이 부족하고 불균등한 속에서 제각각의 우울과 고달픔을 하소연하고”있는 듯 보인다. 구보는 머리 위에 걸린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다가 서양이나, 심지어 동경에라도 갈 수 있는 돈이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보가 커피 한 잔과 담배를 주문한 이 다방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던 ‘낙랑파라’[樂浪 Parlour; 1931년 문을 연, 경성 최초로 한국인이 운영한 다방]이다. 이곳은 주인이 화가여서 2층은 화실로, 1층은 다방으로 사용되었다. 매주 금요일에는 빅타레코드사의 신곡을 틀어 주고, 화가들의 개인전이나 시인들의 출판 기념회도 종종 열렸기 때문에 예술인들이 많이 모였다. 박태원이 참여하고 있던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작은 모임 구인회 회원들에게도 이곳이 아지트였다고 한다.

종로 거리로 나온 구보는 무작정 전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다방에 들어간다. 오후 두 시의 다방에는 자신처럼 별다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거나 음악을 듣고 있다.

돈을 좇는 사람들
밖으로 나온 구보는 경성부청(府廳) 쪽으로 걷다가 덕수궁 대한문을 바라보고는 “빈약한 옛 궁전은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 망연해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통학교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지만, 초라한 차림의 그가 냉랭한 인사만 남기고 제 갈 길로 가버리자 서운함과 고독을 느끼게 된다.

구보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면 마음이 풀릴까 싶어 경성역 대합실로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인간의 온정을 찾아볼 수 없는” 인파 속에서 늙고 병든 여자, 지방에서 온 상인, 사람들을 염탐하고 있는 수상쩍은 사나이들을 쳐다보며 괴리와 슬픔을 느끼고, 오히려 더 큰 고독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평론가와 시인 같은 문인들조차 노다지를 꿈꾸는 ‘황금광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우연히 중학교 시절의 동창을 만나는데, 전당포집 아들이었고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아름다운 여자와 동행하고 있음을 보고 그들이 육체와 금전을 교환하면서 나름의 행복과 쾌락을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구보는 이어 시인이자 신문사 사회부 기자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방에서 만난다. 이 친구는 돈 때문에 매일 살인 강도와 방화범의 기사를 써야 한다고 불평하고 구보의 소설에 대해 품평도 한다. 두 사람은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온다. 친구는 이내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간다며 전차를 타고 가고, 구보는 그런 친구가 ‘생활’을 가진 사람이니 자신과 다른 것이라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신상회는 1931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으로 현재의 종로 네거리에 있었으나, 1987년 주변 도로가 확장되면서 철거되었다. © 한국콘텐츠진흥원

1900년 10평 규모의 목조 건물로 시작된 경성역(구 서울역사)은 이용객 증가로 인해 1925년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새로 지어졌는데 당시 도쿄역과 함께 큰 규모에 속했다. 2003년 고속철도 역사가 신축되면서 구 서울역사는 현재 공연이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혼의 고독
종로 네거리에서 외로움 속에 서성이던 구보는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 한 작은 다방에 들어가 주인을 찾는다. 이 다방의 주인이 그의 친구인 까닭이다. 외출 중인 주인이 곧 돌아온다는 말에 그는 앉아서 기다리기로 한다. [시인 이상이 연인인 기생 금홍과 함께 1933년부터 약 2년 동안 운영했던 ‘제비 다방’이다.] 당시 한 잡지의 기사에 의하면 “전면 벽이 전부 유리로 깔린 것이 이색적”인 이 다방에서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통유리창 너머로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종로대로를 걸어가는 신여성들을 구경하곤 했다고 하는데, 구보는 이곳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동경 유학 시절 사랑했던 여학생에 대한 추억을 돌아본다.

다방에서 나와 친구와 설렁탕을 한 그릇 먹고 헤어진 구보는 광화문통을 다시 혼자 걸어간다. 열 살 아이는 봄 노래를 부르며, 주정꾼 둘은 어깨동무를 한 채 수심가를 부르며 그의 옆을 지나간다. 사각모를 쓴 학생과 젊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때 구보는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기도 한다.

거리에서 친구의 조카들을 만난 구보는 아이들에게 수박을 사서 들려 보내고는 다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낙랑파라로 향한다. 그 사이 전보를 배달하는 우편 자전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에게 온 한 장의 전보를 손에 들고 감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다가 수천 매의 엽서를 산 뒤 다방 구석진 탁자에서 벗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잠시 흡족해한다.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 이순석이 1931년 개업한 다방 ‘낙랑파라’는 현재의 소공동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으며, 경성의 ‘모던보이’들이 자주 찾던 아지트였다.

새벽의 종로 거리
구보는 다방 안으로 들어가 구석 자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이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Valse Sentimentale」을 조용히 듣는다. 그때 한쪽에 앉아 일행과 값비싼 맥주를 마시던 생명보험회사 외판원이 그를 알아보고 자신의 자리로 청한다. 어쩔 수 없이 합석한 구보가 소설마저 화폐 가치로 환산하는 그들에게 불쾌감을 느끼던 찰나,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는 친구와 함께 자리를 뜬다.

가난한 시인과 가난한 소설가 두 친구는 서로 우울한 마음을 안고 종로 카페[당시 장안에서 유명했던 대규모 사교 장소‘카페 엔젤’로 추정되는]에서 술을 마시는데, 친구는 술을 마시면서도 맛을 모르는 ‘음주 불감증’이 있다. 구보는 그것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말하다가 어쩌면 증세는 제각기 달라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정신병자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밖에 나와 보니 새벽 2시의 종로 거리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문득 구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릴 어머니의 “조그만, 외로운, 슬픈 얼굴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내일 또 만나자”는 친구의 말에 “내일부터는 집에서 글을 쓰겠다”고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집을 나설 때 자신의 행복을 찾던 구보는 이제 어머니의 행복을 생각하고 있다.

성석제(Song Sok-ze 成碩濟) 소설가

코리아나웹진

코리아나웹진 바로가기

코리아나 홈페이지에 방문하시면 10개 언어로 출판된 콘텐츠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