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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글쓰기에 대한 경계와 매혹 사이

  • 조회수 196
  • 행사기간 2019.04.11 - 2019.04.11
  • 등록일 2019.04.11

문학 산책

평론 글쓰기에 대한 경계와 매혹 사이

김덕희(Kim Deok-hee 金㯖熙; 1979년 출생)는 출발선상에 선 작가다. 2017년 단편 9편을 묶어서 낸 첫 소설집 『급소』에서 이미 단단하고 정확한 문장과 예상을 뒤엎는 전복으로 단편 소설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책의 제목은 수록작 중 하나의 제목인데, 소설과 문학의 핵심을 단숨에 찔러 보이겠노라는 신인 작가의 야심찬 포부가 느껴진다.

김덕희의 첫 소설집 『급소』[문학과지성사 발행]에 실린 단편들은 소재와 주제가 제각각이다. 이 책에서 한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또는 표징이라 할 만한 주제의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주제의 일관성은 자칫 동어반복으로 떨어질 위험을 내포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작가가 집중적으로 매달리는 하나의 화두나 세계관은 한 작가를 다른 작가들로부터 구분할 수 있게 하는 표지로 요긴하게 구실하는 법이다.

그의 소설들은 소재와 주제뿐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역사물에 해당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SF적 성격을 지닌 작품도 있고,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냉정한 사실주의 소설들과 환상적 장치를 활용한 소설들이 공존한다. 이는 작가가 매우 폭넓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직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신인 작가는 여전히 모색 중인 것 같다.

소설집은 전반적으로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치중해 있다. 작가가 소설들을 통해 하려는 말보다는 그 말을 하는 방식에 더 주력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김덕희는 미학주의자라 할 수 있다. 앞서 그의 소설들이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지녔다고 말했지만, 그런 이질성 속에서도 공통적 특성으로 확인되는 것이 있으니 치열한 세공(細工) 정신이 그것이다. 그의 소설들은 그 나름의 세계 안에서 완성도 100%를 지향한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꼼꼼한 취재로 핍진성을 높이고, 소재와 주제에 어울리는 문체를 구사하고자 한다. 가령 날것의 폭력이 난무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표제작 「급소」는 주제에 어울리는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구사한다.

“이 책에 모아 놓은 작품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기분이 복잡했다. 마치 오래전의 내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로 돌아가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거나 옷매무새를 고칠 수 없듯 모든 문장들을 그대로 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덜 덧대고 더 지우려 애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쓰게 했는지 되새겼다.”

“그때로 돌아가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거나 옷매무새를 고칠 수 없듯 모든 문장들을 그대로 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덜 덧대고 더 지우려 애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쓰게 했는지 되새겼다.”

소설집 말미에 게재된 ‘작가의 말’에서도 완결성과 미의식을 추구하는 작가의 천착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을 압도하는 ‘어떻게’에 대한 관심은 이 책 속의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표제작에서 골프채로 늪돼지를 때려잡을 때의 자세와 방법을 묘사한 부분, 「낫이 짖을 때」에서 붓글씨 쓰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 「자망(刺網)」에서 노를 저어 배를 나아가게 하는 요령, 「혈」에서 침을 놓을 때 침을 놓는 이와 맞는 이의 교감과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 등은 각각의 해당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이가 터득한 노하우를 담고 있다. 이것들은 결국 글쓰기에 대한 다채로운 비유이며,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자 문학적 출사표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낫이 짖을 때」는 김덕희의 재능과 역량, 그리고 문학적 지향이 잘 나타난 수작이다. 이 작품은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수미쌍관 구조를 지녔다. 또한 이 소설은 글쓰기에 관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메타소설적 면모를 지닌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글을 쓸 줄은 알되 읽을 줄은 모르는 기묘한 처지가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지 등에 관한 흥미로운 사유를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은 글을 읽지는 못하지만 그리듯이 베껴 쓰는 법은 훌륭하게 익힌 노비 신분이다. “세상만물을 옮겨놓을 수 있고 허공에서 흩어져버리는 말들을 온전히 잡아둘 수 있으며 머릿속에 눈처럼 내려 쌓이는 생각들을 녹아 사라지기 전에 간수할 수 있”는 ‘글’을 알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아비는 필사적으로 말린다. 아비의 생각에 글이란 곧 패가망신에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아비의 반대로 글 익히기를 포기한 주인공은 대신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낫을 그리면 풀을 벨 것 같고 개를 그리면 곧바로 짖어댈 것만” 같았던 그의 그림 솜씨는 글씨마저 그림처럼 베껴 ‘그리는’ 데에 이르는데, 그 재능을 알아본 주인이 그에게 자신이 쓴 글을 베껴 쓰는 임무를 맡긴다. 필경사다. “이놈은 글을 모르니 네놈들처럼 제가 쓰는 것에 그 어떤 사사로움도 담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인이 다른 문하생들에게 한 말은 글쓰기에 관한 아이러니한 통찰을 담고 있다. 글에는 사사로움이 담겨야 하는가 담기지 말아야 하는가.

글이란 투명한 거울과 같아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제 아무리 투명하고 깨끗한 거울이라도 거기 비친 것이 대상 그 자체일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왜곡되고 얼룩진 그림자일 뿐이라는 생각도 터무니없지는 않다. 「낫이 짖을 때」에서 글을 아는 주인과 글을 모르며 단지 그리듯 베껴 쓸 뿐인 노비 사이의 관계는 글쓰기의 사사로움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글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주인공 아비의 절박한 호소만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절박한 울림을 갖는다.

“양반들은 그 낫으로 사람의 목을 베고 그 개를 앞세워 사냥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그 낫이 짖기 시작하고 그 개가 논두렁에 뛰어들어 추수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얼핏 기이해 보이는 소설 제목이 바로 이 대목에서 왔음이 확인되거니와 글쓰기에 대한 경계와 매혹 사이를 오가는 듯한 이 소설 속 주인공의 태도는 작가 역시 여전히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망설이며 모색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본 단편소설은 Koreana 종이책 구매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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