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소설의 고전으로 알려진 존 르 카레(John le Carré)의 1983년도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이 지난 해 6부작 TV 미니시리즈로 다시 태어났다. 영국 BBC One 과 미국 케이블 채널 AMC에서 방영된 후 올해 3월 감독판이 국내에서도 공개된 이 작품은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 감독이 연출한 최초의 TV 시리즈라는 점에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국내외 팬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영국 BBC와 미국 AMC가 공동 제작한 첩보 스릴러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포스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배경으로 한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 co-produced by the BBC and AMC. The TV miniseries is based on John le Carré’s novel by the same name, set against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냉전 시대 유럽의 첩보 전쟁이 주요 배경이었던 존 르 카레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소설의 무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으로 옮겨졌다. 또한 소재도 첩보 경쟁이 아닌 테러의 폭력적 행위와 그 이면에 내재된 양면성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으로 부각되면서 로맨스의 비중이 한층 높아졌다. 그 자신 한때 영국 정보국에서 비밀 요원으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한 르 카레는 이 작품의 출간을 계기로 스파이 소설의 범위를 넘는 문학성을 인정 받았다. 이 작품은 1984년에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다이앤 키튼과 클라우스 킨스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번 TV 시리즈는 시대를 앞선 감각을 가진 박찬욱 감독의 손에서 여러 모로 이색적인 시도를 거치며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박찬욱 감독이 굳이 먼 나라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소재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내의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며 “나도 분단 국가에서 살아왔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았고, 한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미 판문점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병사들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인간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을 그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만든 경험이 있다. 그의 이 말은 분단 국가의 예술인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속에 던져진 개인들의 혼돈스런 삶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이 얼마나 르 카레의 여러 작품들을 탐독해 왔으며 이 작품을 읽는 순간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임을 확신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가상과 현실
박찬욱 감독의 관심이 단지 한국적 상황과 유사한 분쟁 지대의 정치적 상황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리틀 드러머 걸>에서 특히 그를 매료시킨 것은 그런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내면이었다.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본진에 들어가 정보를 캐내는 이스라엘 정보국의 이야기 속에서 그 임무를 맡은 인물이 첩보원이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매우 독특한 설정이면서 박찬욱 감독의 흥미를 유발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1979년 독일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관저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정보국 고위 요원인 마틴 쿠르츠는 이 문제를 융단 폭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공습 대신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심장부로 들어가 테러의 요인들을 제거하는 ‘예술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그 침투 작전에 무명의 젊은 영국 여배우 찰리를 끌어들인다. 연기 오디션인 줄 알았다가 이 임무에‘캐스팅’된 찰리는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의 비밀 요원 가디 베커의 연기 지도를 받으며 팔레스타인 혁명군 속으로 침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며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죽은 팔레스타인 혁명 전사의 연인 역할을 하게 된 찰리의 연기를 돕기 위해 가디는 그 혁명 전사의 역할을 하며 연기 지도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찰리는 점차 혼돈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 역할 속의 실제 인물인지 아니면 대역을 해 주는 가디인지 헷갈릴 뿐 아니라 자신이 과연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느 편이 옳은 것인지 갈등에 빠진다. 박찬욱 감독은 찰리의 이런 복잡한 심리 변화에 섬세한 묘사를 더하며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동시에 이 고도의 작전을 연출하고 지휘하는 쿠르츠 역시 ‘현실 속 드라마’(theater of the real)의 감독이라는 역할에 심취해 있는 모습으로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다.
찰리 역의 Florence Pugh와 베커 역의 Alexander Skarsgard가 처음 만나는 아크로폴리스 배경의 스틸컷. 찰리는 점차 미묘한 감정의 변화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최초의 TV 시리즈이다. 존 르 카레의 팬이기도 한 그는 이 드라마를 연출하며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허구적 경계를 넘어
이 드라마는 훌륭한 원작에 기초한 스파이 첩보 액션물인 동시에 박찬욱 감독이 제시하는 일종의 ‘연기학 개론’처럼 느껴진다.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 과연 연기인가 실제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 하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의 예술적 가정이 단순히 허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국가주의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사실상 얼마나 해체되기 쉬운 자의적인 것들이었는가 하는 것도 이 드라마가 주는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배우의 연기는 그 많은 자의적 경계 중 하나일 뿐인가. 국적이 다르고 언어와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생존의 이름 아래 총칼을 들고 대립해 온 것도 바로 그 자의적인 경계들 때문이 아닌가. 분단 국가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경계의 살벌함과 허망함’은 일상적 경험이다.
박찬욱 감독이 영국과 미국 방송사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이 드라마를 전 세계 관객들이 동시에 보게 되는 과정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소위 ‘글로벌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국가주의 아래 고착된 허구적 경계와 선입견들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한류 콘텐츠’가 ‘한류’의 개념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 무대로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호탄으로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