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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골목에서 대로로 나오다

  • 조회수 206
  • 행사기간 2020.04.04 - 2020.04.04
  • 등록일 2020.04.04

LIFE

라이프 스타일 골목에서 대로로 나오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비밀스럽게 운영되던 섹스숍들이 도심 번화가로 진입하고 있다. 환한 조명에 세련된 인테리어로 단장한 최근의 섹스숍들은 상호도 없이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젊은 세대의 변화하는 성 문화가 가져온 흥미로운 현상이다.

1995년 유럽 배낭여행에서 내 기억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던 곳은 파리도, 런던도 아닌 암스테르담이었다. 네덜란드는 튤립과 풍차의 나라라고 어릴 적 배웠고, 그런 것들을 보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역 주변에서 정작 내가 마주친 것은 포르노 잡지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대한 딜도였다.

남성의 성기를 그런 식으로 보게 되리라고, 그것도 친동생과 함께 보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운하를 걷다가 마주친 금발에 진한 화장과 긴 속눈썹, 족히 한 뼘은 됨직한 하이힐을 신고 걷는 ‘그녀’들은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그곳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이라 여겼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작업실 근처에서 한 섹스숍의 간판을 봤는데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건물 2층에 위치한 그곳은 얼핏 생활용품 판매점이나 화장품 가게처럼 보였다. 서울에서 유동 인구가 가장 많다는 홍대역 주변이나 고급스러운 매장들이 늘어서 있는 강남역과 가로수길에도 섹스숍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 읽었다. 그런 번화가에서 요즘 젊은 연인들은 자연스레 가게 안에 함께 들어가 이런저런 제품을 직접 만져 보고 구입한다고 한다. 궁금증이 커져 작년 여름부터 내가 진행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20대 스태프들에게 요즘 청춘들의 성 인식에 대해 물었다.

“자유분방하죠. 자신들이 키스하거나 포옹하는 사진도 소셜미디어에 자주 올리고. 요즘은 ‘엉골’이 대세라 그런 사진도 많아요!”

엉골? 멍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조명팀 스태프가 ‘엉덩이골’을 뜻한다고 말해 주었다. 한동안 가슴골 보여 주기가 유행이었는데, 이제 강도가 한층 높아져 엉덩이골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남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몸을 보여 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젊은 층이 많이 찾는 서울 연남동 입구에 위치한 한 섹스숍의 외관. 창문을 가려 실내를 전혀 볼 수 없었던 어두침침한 과거의 섹스숍들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소셜미디어 인기 콘텐츠
요즘은 성인용품을 팬시상품처럼 디자인해서 거부감이 들지 않게 만든다고 한다. 또 소셜미디어에 직접 구매한 섹스토이에 대한 소개나 섹스숍 리뷰 영상이 많기 때문에 직접 상점에 가 보지 않아도 상점별 특징이나 제품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섹스숍 중에는 포토존이 있어서 그곳에서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는 커플도 많다고 한다.

다양한 제품들이 밝은 조명 아래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어 흡사 화장품 가게 같은 느낌을 준다.

정말일까 싶어서 직접 살펴봤다. 가구 매장처럼 보이는 4층 규모의 섹스숍 1층에는 온갖 종류의 제품과 함께 임신 테스터기도 진열되어 있었다. 또한 촉감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제품들도 많았다. 한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아예 딜도를 마이크처럼 손에 들고 방송을 진행했는데, 섹스숍 판매 직원과 함께 이런저런 제품들을 자세히 리뷰해 주고 있었다.

“이 향초는 저온에 녹는 향초에요. 40도 정도에 녹기 때문에 뜨겁지 않아서 촛농으로 마사지하기도 아주 좋아요.”

“이런! 근데 초가 몸에 닿으면 굳지 않나요?”

“은근히 그런 걸 즐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인기 제품이에요.”

영상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검색 툴이 포털사이트에서 소셜미디어로 넘어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 검색하다 보니 제품을 직접 만든 사람이 나와서 홍보하는 영상들이 꽤 많았고, 그중에는 교육적인 콘텐츠들도 상당수였다.

“초박형(超薄型)은 잘 찢어져서 유럽인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유독 아시아인들이 선호하죠. 여러분, 콘돔 없는 섹스를 지양합시다! 라텍스의 단점을 보완한 폴리우레탄 콘돔은 성감에도 좋고 안전합니다.” 또 검색 중에 처음 본 ‘섹스 게임’ 중에는 카드와 주사위를 이용한 다양한 보드 게임이 있었다. 재밌는 것은 이 야한 게임들은 야광으로 변하는 제품들이라 불을 끄고 침대 위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 신촌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섹스숍의 내부 모습. 과거에는 고객이 혼자서 은밀히 방문해 제품을 구입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연인들이나 동성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방문하는 경우가 많으며 샘플을 사용해 본 후 당당하게 구매한다.

유쾌한 체험 공간
이 분야에 무관심해서였을까. 방부제 파라벤이 들어가지 않은 유기농 콘돔과 천연 성분으로 추출한 오가닉 젤을 섹스숍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고급 스킨케어 브랜드 매장도 아닌 터에 온갖 종류의 젤을 테스트해 본 후 씻을 수 있는 개수대와 클렌저가 준비되어 있는 섹스숍이라니, 격세지감이다. 대부분의 섹스숍들이 테마별 쇼룸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치 대형 DIY 가구 매장처럼 제품을 구입하지 않아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만든 체험형 공간이 섹스숍에도 도입된 것이다.

어두운 조명의 SM 코너에 매달린 채찍, 수갑, 의상들은 엽기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흥미로웠다. 그중에는 때리면 하트 모양으로 자국이 남는 기구가 있는데, 실제 많은 커플들이 자신이나 상대의 팔과 다리를 때려 보며 “진짜 하트네!”라고 말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상상력 가득한 섹스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명랑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음란함을 제거하고 발랄함을 덧붙인 공간이 탄생한 셈이다. 제품들을 시연해 보며 서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얘기하는 건 분명 커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섹스숍에 입장할 때 신분증을 검사하고, 성추행을 예방하기 위한 CCTV가 설치돼 있는 것도 변화하고 있는 성 감수성의 증거일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게르티 젱어(Gerti Senger)와 발터 호프만(Walter Hoffmann)의 공저 『불륜의 심리학(Schattenliebe: Nie mehr Zweite(r) sein)』(2007)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인터넷 섹스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 속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인터넷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자신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드러내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섹스숍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섹스 사이트는 숨겨지는 것이다. 드러내 ‘발랄함’을 보여 주는 것과 숨기며 ‘음란함’을 감추는 것은 무의식과 깊이 관여되어 있다. 즉 드러내는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기혼자들 역시 섹스 횟수를 부풀리고 있는 것 같다. …… 구글에서 드러나는 결혼 생활의 가장 큰 불만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다. 섹스 없는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결혼 생활보다 3.5배 많이 검색됐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보다는 8배 많이 검색됐다.”

세계적 데이터 과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Seth Stephens-Davidowitz)는 자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Everybody Lies: Big Data, New Data, and What the Internet Can Tell Us About Who We Really Are)』(2018)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성에 있어서 우리는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의 성적 지향이 침대 밖으로 흘러나가 동영상과 사진으로 소셜미디어에 게시되는 것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전 세대와는 다른 특유의 감수성 때문인 것 같다.

상상력 가득한 섹스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명랑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음란함을 제거하고 발랄함을
덧붙인 공간이 탄생한 셈이다.
제품들을 시연해 보며 서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얘기하는 건 분명 커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팬시상품처럼 디자인되어 발랄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제품들이 많이 늘었으며, 타이포그래피나 캐릭터 디자이너와 협업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제품들도 출시되고 있다.

변화하고 있는 성 문화
몇 년 전, 후배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브라질리언 왁싱’이 화제에 올랐다. 요즘 서울 거리에 심심찮게 보이는 왁싱숍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성적 지향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외국에서 오래 산 한 후배는 구미 지역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체모를 제거하는 게 예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했다. 팔이든 다리든 성기든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몸에 난 털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위생이나 청결에 대한 개념 역시 이전과 많이 달라진 듯하다. 여름에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으면 마치 옷을 벗은 것 같다는 느낌 역시 문명화의 흔적이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이 섹스돌 수입을 허가하면서 홍역을 겪었던 우리나라도 그렇고, 가상현실이 대중화되는 시대가 오면 가장 돈이 몰릴 곳은 단연 포르노 업계라는 말은 정설에 가깝다. 섹스의 미래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페로몬 향수나 세로토닌 알약이 화장품 파우치 안에 넣고 다녀야 할 필수 품목이 될 시대가 올지 누가 알겠는가. 성욕이 가장 왕성한 사춘기 시절 많이 분비된다는 뇌 호르몬 키스펩틴을 의사가 권태기 중년 부부에게 처방하고 약국에서 살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사랑의 묘약은 주로 ‘술’이었다. 그러다가 비아그라가 등장하며 고개 숙인 남성들을 해방시킨 것이 1998년이다. 그러니 이제 연역적 수순은 ‘정신의 비아그라’, 아니 ‘뇌 비아그라’의 개발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역시 예측이 변화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지금 같은 시절에는 빗나가기 쉬운 예측이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던 내가 그 후로도 암스테르담에 여러 번 가서 사랑에 빠졌듯이 말이다.

백영옥 (Baek Young-ok 白榮玉) 소설가
허동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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