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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희망의 빛과 그림자

  • 조회수 218
  • 행사기간 2020.07.08 - 2020.07.08
  • 등록일 2020.07.08

문학 산책

한국 문학으로의 여행 평론

희망의 빛과 그림자

박찬순(Park Chan-soon 朴賛順)은 2006년 예순의 나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이후 세 권의 소설집을 묶어 내며 외국 영화와 드라마 번역가로서 쌓아 온 경험과 함께 젊은 작가 못지않은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박찬순은 초기작들에서 주로 다양한 공간과 민족을 넘나드는 다문화적 풍경을 선보였다. 등단작인 「가리봉 양꼬치」는 불법 체류자로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 요리사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첫 단편집 표제작인 단편 「발해풍의 정원」은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한 한국 회사의 세일즈맨을 등장시켰다. 이 외에 체코 프라하, 동남아시아의 밀림, 태국 등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한편 탈북한 젊은 여성이나 중국 소년이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2000년대의 한국 소설에 다문화적 배경과 인물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그리 새롭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의 소설들에서 다문화적 맥락은 삶의 전환기 또는 막다른 대목에서 희망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가늠하는 조건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설 속 ‘경계인’들은 암담한 현실에놓여 있지만, 작가는 혹독한 삶을 견뎌내는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희망을 모색한다.

2009년 출간된 첫 단편집 『발해풍의 정원』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 세 작품에서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물 번역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꾸러미로 묶인다. 이런 설정은 작가 자신이 소설을 쓰기 전 30여 년간 외국 영화와 드라마 번역 일을 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방송국 피디를 거쳐 영화와 드라마의 영한 번역자로, 나아가 통번역 대학원 교수로 활동한 경험이 첫 소설집의 다문화적 토대를 이루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두 번째 단편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2013)에는 아홉 단편이 실렸는데, 스리랑카에서 한국 공장으로 돈을 벌러 온 소년을 등장시킨 「루소와의 산책」에서 볼 수 있듯 다문화적 관심과 사회적 약자에대한 시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미국 아이오와의 옥수수 들판,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일본 센다이, 쿠바 아바나 등 작품의 무대 또한 여전히 국제적이다. 세 번째 단편집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2018)는 아예 책 제목에서부터 이국 취미를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전 책들과 비교해 이 단편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특징은 일종의 ‘문학사적 감각’이라 할 만한 것이다. 「테헤란 신드롬」은 제목처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무대로 삼았지만, 레지던시 작가인 주인공이 이란 학생들에게 김승옥(金承鈺 1941~)의 소설을 비롯해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레몬을 놓을 자리」도 한국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교토 도시샤대 유학 시절 및 그와 동시대 일본 작가인 가지이 모토지로(Motojiro Kajii 梶井基次郞 1901~1932)의 일화를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는 내용이다. 「북남시집 오케스트라」는 팔레스타인 출신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유대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특히 두 단편 「신천(新川)을 허리에 꿰차는 법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성북동 230번지」는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1910~1986)에 대한 오마주로 읽히는 작품들이어서 주목된다. 1930년대에 장편 『천변풍경』과 단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같은 단편으로 주목받았던 박태원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월북한 후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奉俊昊)가 그의 외손주라는 사실도 아울러 언급해 둘 만하다. 어쨌든 두 단편에서 박찬순은 박태원으로 대표되는 ‘선배 작가’, 더 나아가 한국 문학사 자체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감추지 않는다. 독자는 그것을 작가 자신이 놓인 문학사적 위치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에 실린 단편 「재의 축제」는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느새 칠십대에 들어선 작가의 원숙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 말미 ‘작가의말’에서 그는 “결국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소소하고 작은 것들, 덧없는존재들이 생의 가장 막막한순간에 뿜어내는 지순한 숨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각자 자기 몫의 슬픔을 안고 고단한 세상살이를 이어가지만, 작가는 그 안에서 희미하게 존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박찬순:
결국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소소하고 작은 것들, 덧없는 존재들이 생의 가장 막막한 순간에 뿜어내는 지순한숨결이었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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