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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배달 경제의 변천사

  • 조회수 368
  • 행사기간 2020.10.16 - 2020.10.16
  • 등록일 2020.10.16

기획 특집

배달 산업과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특집 3 배달 경제의 변천사

스마트폰 배달 앱으로 거의 모든 물품을 주문할 수 있는 시대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미 조선(1392~1910) 시대에도 존재했던 한국의 배달 문화는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적 양상을 갖추었고,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1882년 주청 독일영사관에서 근무하던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는 조선 최초의 서양인 고문이 되어 한양(현재의 서울)에 왔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는 서양인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는 식사부터 걱정했다. 저녁이 되자 관리 하나가 하인들과 함께 그의 숙소를 방문했다. 하인들은 나무로 만든 이동용 도구인 교자(轎子)를 들고 왔는데, 교자 위에 덮인 보자기를 벗기자 난생처음 보는 온갖 음식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묄렌도르프의 저녁 식사였다. 이미 중국에서 유사한 경험을 했던 그는 음식들을 식탁에 옮겨서 차려 먹었다.

<설중향시도(雪中向市圖)>. 傳 이형록(李亨祿 1808~?). 19세기. 지본담채. 세로 38.8 × 가로 28.2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시대 상단 일행이 말과 소에 물건을 가득 실은 채 시장에 가는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화원 이형록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화첩에 담겨 있는 그림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공물과 선물
조선 시대에 배달은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 대부분을 지방 관청들이 백성으로부터 거둬들여 세금처럼 바쳤기 때문이다. 일례로 종묘에서는 매월 음력 1일에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에 바치는 제사가 열렸는데,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각종 곡물, 생선, 과일, 소금 같은 식재료를 비롯해 종이나 그릇 등 생활용품을 왕실에 보냈다. 서울까지 수송을 맡은 지방 관리는 여러 명의 하인들이 수레에 물품을 싣고 옮기는 일을 감독했다. 만약 특산물 수급을 맡은 각 곳의 관리들이 제때 배달을 못 하면 관직을 박탈당할 만큼 이는 중요한 업무였다.

한편 지방의 부유한 양반들은 서울의 권력자나 지인들에게 지역의 특산품을 선물로 보냈다. 한 예로 노비 수백 명을 거느렸던 부안 지방의 부호 김수종(金守宗 1671~1736)은 말린 해삼, 전복, 홍합, 문어, 김 등 건어물과 말린 꿩고기, 돼지고기, 감, 그리고 종이, 부채, 모자, 빗 등을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 고위층 관리들에게 보냈다. 부안에서 뱃길로 서해안을 따라 서울 마포나루에 도착한 물건들은 그의 하인들이 수레와 지게에 나누어 싣고 집집마다 방문하여 직접 전달했다. 그는 물건을 보낼 때 물품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문서 두 장을 작성해 하나는 자신이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받는 이에게 보냈다.

남편이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관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도 부부 사이에 음식 재료가 오고 갔다. 안동 지방에 살았던 이씨 부인은 타향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 김진화(金鎭華 1793~1850)에게 문어, 방어, 광어, 소금 같은 식재료와 고추장, 된장 같은 장류를 보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남편은 고등어, 명태, 은어, 청어, 소고기 등을 집으로 보냈다. 이때도 배달은 하인들이 맡았다.

성리학을 숭상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화폐로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낮추어 보고, 물물 교환을 군자의 예라고 생각했다.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그러한 성리학적 사고 방식이 조선 시대에 ‘배달 경제’ 체제가 갖춰질 수 있었던 이념적 배경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음식 배달부와 귀부인>. 안석주(安碩柱). 1934. 1934년 4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삽화가 안석주의 만평이다. 한쪽 어깨 위로 커다란 음식 쟁반을 받쳐 들고 가는 배달원의 모습에 한 귀부인이 “무겁겠다”며 놀라워하자, 배달원이 “당신의 머리쪽과 손가락에 낀 것들이 더 무겁겠다”고 응수한다. ⓒ 조선일보

계층 의식
20세기 초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을 겪었지만, 도시들이 차츰 근대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곳곳에 대중음식점들도 생겨났다. 시대가 바뀌며 조선 시대의 계층 간 위계질서는 표면적으로 붕괴되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상업적인 음식 배달이 시작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서울의 음식점들에서 팔던 대표적인 메뉴는 설렁탕이었고, 주인은 대부분 조선 시대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이었다. 가축을 도살하는 일을 했던 백정이 운영하는 식당에 양반들이 가서 하층 계급민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 시기에 설렁탕 배달부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그릇을 찾으러 갔을 때 돈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화도 종종 빚어졌다. 종로의 한 설렁탕집 종업원은 같은 집에 음식을 계속 배달했다. 그런데 그릇을 찾으러 갈 때면 주문한 사람이 외출하고 집에 없어 음식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렇게 서너 차례 빈손으로 오게 되자, 화가 난 그는 친구들과 함께 그 집의 하녀를 협박했고, 결국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시기 배달의 주된 대상은 설렁탕이나 냉면, 떡국처럼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많이 생겨난 대중음식점들의 대표 메뉴였다. 이때는 전화로 음식을 주문했다. 물론 전화는 관청이나 일부 회사, 또는 부유층의 가정에서만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주문을 받은 음식점 배달부는 자전거 손잡이를 왼손으로 조정하면서 오른손에 배달 음식을 들고 주문한 집을 찾아갔다. 멀리서 보면 마치 서커스단의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이어서 구경거리가 되곤 했다.

1900년경 활동했던 우편 배달부의 모습. 국내의 근대식 우체 업무는 1884년 한국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수레와 말을 이용하여 우편물을 운송했다. 당시 세워진 건물이 현재 서울 조계사 옆에 남아 있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인천의 유명한 냉면집 사정옥 앞에서 배달부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곳의 냉면 맛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서울 명동에서 장거리 전화로 주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냉면은 설렁탕과 함께 1930년대의 대표적인 배달 음식이었다. ⓒ 부평역사박물관

<아침>. 임응식(Limb Eung-sik 林應植). 194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46년 부산 서면의 한 거리에서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을 한 젊은 여성들이 꽃이 가득 담긴 함지박을 이고 걸어가고 있다. 머리 모양이 미혼임을 나타내고 있다.ⓒ 임상철

1950년대, 속초 함흥냉면옥의 창업주가 자전거를 타고 배달에 나선 모습이다. 냉면 대접들을 겹쳐 놓은 널찍한 목판을 어깨에 이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조정하는 모습이 당시에도 진풍경이었다. ⓒ 속초시립박물관

손수레와 자전거
배달원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도시에 상설시장이 나타나면서부터다.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시장 상인들이 음식점에 배달을 시켰고, 그러면 음식이 담긴 그릇을 차곡차곡 쌓은 쟁반을 머리에 인 아주머니가 조심조심 걸어서 가져다주었다. ‘요릿집’이라고 불렸던 고급 음식점에서도 20여 가지의 요리를 배달해 주었다. 이렇게 요리의 가짓수가 많으면 교자에 음식을 실어 날라야 했다. 부잣집에서 손님을 불러 잔치를 할 때는 요릿집의 요리사와 웨이터, 웨이트리스가 출장을 가기도 했다. 고급 중국 음식점에서도 주문을 받으면 음식을 배달해 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음식 배달은 무료로 해 주는 고객 서비스였다. 전문적인 규모의 배달업은 우편물, 신문, 술 등의 품목에서 나타났다. 특히 술은 주조공장에서 음식점이나 술집의 주문을 받으면 자전거로 직접 공급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른 후 1960년대는 정부의 압축 성장 정책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 결과, 서울의 도매 시장과 소매 시장도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도매점에서는 소매점의 주문이 들어오면 손수레 배달부를 불러 물건을 나르게 했다. 이들 손수레 배달부 중에는 도매점의 물품을 사서 그 가격 그대로 소매점에 파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유통 이익을 챙기는 대신 물건을 담았던 상자를 도매점에 되팔아 적은 이윤을 남겼다.

당시 도시의 주택에서 난방이나 취사용으로 쓰는 연료의 대부분은 연탄이었다. 대다수 가정에서도 월동 준비로 연탄을 창고에 미리 쟁여 두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 아무리 많은 양의 연탄을 주문해도 공장에서 직접 배달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사람들이 손수레를 빌려 연탄을 직접 실어 날라야 했다. 그러나 그 수요가 점차 많아지자 1970년대부터는 소정의 배달비를 받고 전문적으로 각 가정에 연탄을 공급해 주는 연탄 가게들이 생겼다. 연탄 배달은 가정이 아닌 곳에서도 유용했다. 한겨울에도 난방 시설을 갖출 수 없는 노점 상인들을 위해 등장한 것이 연탄 화덕 배달업이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는 배달부들이 새벽 5시부터 이동식 화덕에 불을 지핀 연탄을 넣고는 상인들의 주문을 기다렸다. 이들은 연탄 값에 약간의 수고비를 보태 배달료를 받았는데, 하루 평균 200개 정도를 배달하면 그런대로 일당은 되었다고 한다.

배달 음식이 중국 음식 위주에서 벗어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 미국식 패스트푸드 점포가 유입되면서였다. 그러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전까지 생소했던 음식인 피자를 오토바이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으로 청년들이 배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도 힘차게(가제)>. 임응식. 1960. 서울 명동에서 소년들이 배달할 신문을 받아 들고 달리고 있다. 과거에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가정의 청소년들이 학비나 용돈을 벌기 위해서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 흔했다. ⓒ 임상철

<익선동>. 한정식(Han Jung-sik 韓靜湜). 1993. 한 손에 철가방을 든 중국집 배달원이 자전거를 타고 서울 주택가 골목을 지나고 있다. 중국 음식 배달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 한정식

1970년대 초반, 서울의 한 산동네에서 연탄 배달원이 지게로 연탄을 나르고 있다. ‘구공탄’ 또는 ‘십구공탄’이라 불렀던 연탄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까지 난방 및 취사를 위한 연료로 널리 쓰였다. ⓒ 뉴스뱅크

오토바이, 그리고 스마트폰 앱
한동안 음식 배달의 대명사격이었던 중국 음식점 배달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전거가 배달 음식의 거의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1970년대 말 한국 정부의 화교 정책에 따라 대학 입학에 불이익을 당하게 되자 많은 화교들이 대만으로 이주했고, 그 때문에 이들이 운영하던 중국 음식점에서 배달부 일을 했던 한국인들이 중국 음식점을 차리는 일이 늘어났다. 때마침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대단지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거주 밀집 지역이 늘어나면서 중국 음식에 대한 배달 수요도 급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는 배달료를 지급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소비자들이 늘어났고, 이것이 국내 배달 산업을 발달시키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982년 한 경제신문이 향후 유망한 업종으로 배달업을 손꼽았을 정도였다. 배달 음식이 중국 음식 위주에서 벗어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 미국식 패스트푸드 점포가 유입되면서였다. 그러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전까지 생소했던 음식인 피자를 오토바이라는 새로운 운송 수단으로 청년들이 배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토바이가 속도와 효용성 면에서 매우 뛰어난 운송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이때부터 중국 음식점이나 재래 시장의 배달부들도 자전거나 도보 대신 오토바이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택배를 근간으로 하는 배달 산업은 일본의 택배 시스템이 도입되어 유망 업종으로 떠오른 1990년대의 일이다. 택배 서비스를 처음 접한 한국인들은 처음엔 잘 적응하지 못했고, 별도의 배달료를 수용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얼마간 돈을 지불하면 문 앞에까지 주문한 물품을 가져다주는 편리함은 사람들을 쉽게 매혹시켰다. 편의성을 앞세운 택배업은 급속하게 성장했고, 2010년 스마트폰 앱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기성 세대와 달리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IT 신기술에 너무나 잘 적응했고 어느새 배달 문화는 한국 사회의 아이콘이 되었다. 21세기 한국의 배달 산업을 창출한 주인공은 바로 스마트폰 세대이다.

1990년대 말 서울 고려대 근처 한 중국 음식점의 배달원. 조태훈(趙太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그는 요란하게 치장한 오토바이에 ‘번개’같이 빠른 배달 속도를 자랑하며 동네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이후 방송 출연과 기업 강의를 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 뉴스뱅크

서울 남대문 시장 안 밥집 아주머니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머리 위에 켜켜이 인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가게를 떠날 수 없는 상인들의 요긴한 점심식사다. ⓒ 서울시 제공, 사진 문덕관

주영하(Joo Young-ha 周永河)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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