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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재기와 유머 뒤에 드러나는 윤리 감각

  • 조회수 90
  • 행사기간 2020.10.16 - 2020.10.16
  • 등록일 2020.10.16

LIFE

한국 문학으로의 여행 평론

재기유머 뒤에 드러나는 윤리 감각

1972년생인 이기호는 유쾌한 입담을 자랑하는 작가다. 그래서 황석영(黃晳暎 1943~)과 성석제(成碩濟 1960~)의 뒤를 잇는 이야기꾼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우선 웃기고, 때로 울리며, 다 읽고 나면 묵직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기호는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2004)에서 자신이 능청과 입담이 빼어난 이야기꾼임을 세상에 알렸다. 표제작은 신앙심 깊은 여주인공 최순덕이 바바리맨 ‘아담’을 교화해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열심히 전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성경의 장과 절을 흉내 낸 형식에 편집 역시 성경처럼 2단으로 구성한 것이 재미를 더한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나니”라는 1장 1절에서부터 시작해 주인공의 성령 충만한 삶을 블랙 유머가 섞인 반어적인 방식으로 나열한다.

같은 작품집에 실려 있는 등단작 「버니」(1999)는 이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작품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매춘 알선업 ‘보도방’을 운영하는 청년과 몸이 불편한 매춘 여성 순희를 등장시킨 이 작품은 흡사 랩을 쏟아내듯 빠르며 직설적인 말투로 시종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두 단편은 새로운 형식을 향한 젊은 작가의 도전과 실험 정신을 보여 준다.

© 문학동네

첫 장편 『사과는 잘해요』(2009)는 복지시설에서 살다가 사회로 나온 두 지적장애 청년이 ‘대신 사과하기’라는 기상천외한 일을 직업으로 삼은 후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데 직접 하기 어려운 이들의 부탁을 받고 대신 사과를 해 주는 일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재미있다. 다양한 사정과 까닭으로 대리 사과를 주문하는 이들의 사연도 흥미롭고, 전후 맥락에 무지한가 싶다가도 뜻밖에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두 주인공의 좌충우돌 소동은 실소를 자아내는 한편 아릿한 슬픔을 선사하기도 한다. 순진한 화자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올바르고 떳떳하게만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죄악과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해학적인 필치로 그려낸 소설이다.

두 번째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2014)는 1980년대 전두환 군부 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삼는다. 지방 도시 원주에서 택시 운전 일을 하던 나복만은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어 시국사범으로 몰리는데, 고문을 당한 끝에 조직 사건 연루자가 되어 평생을 수배범이자 도피자로 지내게 된다. 제목 ‘차남들의 세계사’는 구약성경의 장남 카인과 차남 아벨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설 안에서는 이렇게 설명된다.

“보좌신부님은 그때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

‘세계사’라고는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1980년대 한국의 엄혹한 현실을 겨냥한 소설인데, 학식은 얕아도 심성만은 맑고 투명했던 나복만이 한 건을 노리는 정보기관원의 먹이가 되어 파멸하고 마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특유의 능청맞은 입심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시절은 예지력 넘치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판단력을 지닌 각종 요원들과 형사들이 전국 각지에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한데, 그들은 일단 자신들의 손에 넘어온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가정주부든 성직자든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아니 그 이상의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능숙하고 능란한 취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기호: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2018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그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일곱 단편이 묶였고 그 작품들 모두가 주인공 또는 주요 인물의 이름을 제목에 담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곱 가운데 네 작품이 작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또는 정황상 이기호일 것으로 짐작되는 소설가를 등장시킨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집 말미에는 후기에 해당하는 작가의 말이 실려 있는데, 후기 치고는 꽤 길어서 마치 짧은 단편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는 이런 흥미로운 문장들이 나온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기호’와 소설을 쓰는 ‘이기호’ 사이에는 과연 어떤 벽이 세워져 있는가? 그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개별적이며 고유한 영혼을 지닌 인물인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작품을 읽기로 하자. 책 맨 앞에 실린 단편 「최미진은 어디로」에도 ‘작가 이기호’가 나온다. 그는 우연히 중고 물품 거래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책이 매물로 나온 것을 발견한다. 우여곡절 끝에 생면부지의 청년한테서 자신의 책을 되사고 사과의 말까지 듣지만, 그는 이제 모욕감 대신 부끄러움에 시달리게 된다. 아마도 그 청년은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로 추측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전화를 걸어와 했던 말이 주인공을 더 부끄럽게 만든다.

이기호는 작가의 말에서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최미진은 어디로」와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며 모종의 윤리에 대해 배우게 되지 않을까.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기호는 기존의 날렵하고 재치 있는 유머에 더해, 윤리적 딜레마라고나 할 미묘한 상황과 불편한 질문을 자주 제시한다. 어느덧 등단 20년을 넘은 그의 소설 세계가 한층 성숙해졌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하겠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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