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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미디어

짜릿하고 혼란스러운 입사 의식

  • 조회수 228
  • 행사기간 2021.01.14 - 2021.01.14
  • 등록일 2021.01.14

문학 산책

한국 문학으로의 여행 평론

짜릿하고 혼란스러운 입사 의식

1987년생인 김세희(Kim Se-hee 金世喜)의 소설들은 자기 또래 청년들의 경험과 고민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연애와 결혼, 취업과 주거 문제 등 사회 초년생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를 중심으로 한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며 세대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직장에 처음 출근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 놓였다는 점에서 김세희의 작품들은 입사(入社, initiation)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입사는 축하와 환영의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 젊은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혼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소설의 큰 흐름을 이룬다.

소설집 얘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2019년 6월에 발표한 작가의 유일한 장편 『항구의 사랑』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은 10대 중후반 소녀들의 ‘유사 동성애’ 문화를 다룬다. 책 제목은 김세희가 성장한 항구 도시 목포를 가리킨다.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은 여학생들만 다니는 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교의 학생들은 아이돌 가수들이 동성 커플로 등장하는 팬픽을 쓰고 읽으며 같은 학교 여학생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 “남학생을 사귀는 것은 저편으로 넘어가 버리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학생끼리의 사랑이 ‘이편’의 일, 그러니까 정상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이성애가 ‘저편’의 일, 곧 비정상성으로 간주되는 것이 그들의 문법이었다.

© Marie Claire

이 장편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그 시절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시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주인공이 과거를 돌이키며 그때 자신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정체와 의미를 탐구하는 얼개를 지녔다. 작가는 지난 시절 여학교 학생들의 문화적 습속을 실감 나게 재현하며, 그 바탕 위에서 사랑에 대한 열린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한국에서 동성애를 다룬 소설들이 다수 발표됨으로써 동성애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시야 확장에 기여하는 흐름과도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이보다 앞서 2019년 2월 민음사에서 출간되어 작가에게 신인 유망주를 위한 신동엽문학상을 안겨 준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로 돌아가 보자. 표제작인 단편 「가만한 나날」의 첫 문장이 상당히 시사적이다.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나는 대학로에서 우연히 재화 언니를 만났다.”

이 작품의 첫 단어는 ‘첫’이고 그 관형어가 수식하는 명사는 ‘출근’이다. 사회에 진입하는 입사 의식의 사례로 첫 출근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를 기다리는 회사와 사회(한국어에서 이 둘은 같은 음절을 앞뒤로 바꾼 두 음절짜리 단어들이어서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알게 한다)는 주인공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호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비록 일이 많아서 피곤하긴 하지만,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업무에 대한 만족도와 성취감도 높은 편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가공의 인물을 내세운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며 광고 의뢰를 받은 상품의 가짜 사용 후기를 올리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블로그 방문자들에게 광고라는 사실을 숨기고 특정 상품을 홍보하는 메커니즘 자체의 비윤리성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너무 늦게서야’ 찾아온다.

그녀가 극찬하는 후기를 올린 가정용 살균제를 사용했던 이들 가운데 사망자가 나오고 회복하기 힘든 폐 손상을 입은 경우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확인된 사망자만도 1,500여 명이고 많게는 1만 4,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실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이 일이 직접 계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은 결국 첫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했던 일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이 되었다.

같은 책에 수록된 단편 「현기증」은 연애와 결혼, 주거를 둘러싼 청년 세대의 고민과 방황을 그려 보인다. 주인공 원희는 연인인 상률과 원룸에서 동거해 왔는데, 서로 다른 생활 리듬으로 인한 불편 때문에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다. 두 사람이 적당한 집을 골라서 이사를 하고 중고 가구를 사는 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동안 눌러 놓았던 문제들이 불거진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와 동거하는 데 대한 주변의 편견과 비난, 남이 쓰던 물건들로 살림을 차려야 하는 가난에 대한 자괴감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은 원희 자신이 놓인 상황에 대한 뜻밖의 개안(開眼)으로 이어지는데, 소설에서는 ‘현기증’이라는 말로 그것을 설명한다.

김세희:
“이 소설들을 쓰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은 늘 내게 감당해야만 하는 것을 감당하겠다는 용기를 주었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소설 제목이 이 대목에서 왔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현기증은 흔히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문학 용어 ‘에피파니’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에피파니가 계시를 통한 모종의 깨달음 및 그에 따른 영혼의 고양을 가리킨다면, 김세희 소설에서의 현기증은 깨달음에 의한 혼란과 좌절에 더 가깝다. “그녀는 자신이 먼 훗날 이번 이사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는 마지막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긍정과 부정 양쪽으로 다 같이 열려 있지만, 저변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더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세희는 한 인터뷰에서 창작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해소되지 않는 뭔가가 소설로 발전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해소되지 않고 마음에 얹혀 있다는 건 거기에 뭔가가 있다는 거겠죠. 해소되지 않고 뭔가 있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그런 일들. 그런 일들을 이런저런 이야기로 만들어봐요. 이야기로 만들고 배치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에서 그게 뭔지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해요.”

작품집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 소설들을 쓰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은 늘 내게 감당해야만 하는 것을 감당하겠다는 용기를 주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바로 김세희의 소설들이 세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최재봉(Choi Jae-bong 崔在鳳) 한겨레신문 기자(Reporter,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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