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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만쿠르트(Mankurt)' 전설: 중앙아시아 예술계의 국가정체성 구축 모델

  • 조회수 260
  • 행사기간 2018.07.02 - 2018.07.02
  • 등록일 2018.07.02

만쿠르트(Mankurt)' 전설:
중앙아시아 예술계의 국가정체성 구축 모델



박영은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HK교수)


1. 『마나스』에 등장하는 튀르크전설 만쿠르트의 원형과 아이트마토프의 전승 시도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에서는 우리는 만쿠르트가 아니다!(Мынеманкурты!)라는 플랫카드를 들고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빈번하게 볼 수 있었다. 격동의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중앙 아시아인들의 몸부림과 정치적 움직임이 맞물리는 현장이었다. 하지만 만쿠르트라는 단어가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것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ЧингизАйтматов: 19282008)의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Идольшевекадлитсядень)에 힘입은 바 컸다. 아이트마토프는 자신의 소설에서 만쿠르트전설을 소개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만쿠르티즘이라는 신조어가 문화적 개념으로 정착되면서 사회정치평론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소설을 매개로 러시아 문학어에 도입된 만쿠르트는 자신의 주인에 대해서는 순종적인 노예이면서도 자기 선조들의 과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역사적 기원을 추적해 보았을 때, 초원의 제국시대에 만쿠르트는 가혹한 고문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빼앗긴 포로들을 지칭했다. 이 용어가 구소련 해체 이후에는 만쿠르트화(Mankurtisation) 혹은 만쿠르트주의(Mankurtism)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소연방에 귀속되어 있던 국가들이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 역사를 성찰하려는 동향과 연결되었다.

만쿠르트전설의 원형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키르기스 출신 작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입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에 등장하는 만쿠르트에 대한 전설은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전해들은 키르기스의 옛 이야기라고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작가의 이런 발언은 그가 소설에서 사용한 우화가 『마나스』(Manas) 서사시에서 그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기도 했다. 튀르크어족 내 주요 종족들의 역사를 포괄하면서 키르기스인의 역사에 서사의 초점이 맞추어진 『마나스』 서사시는 중앙아시아 구비 영웅서사시의 대표적인 작품인 동시에 수천 년에 걸친 종족의 역사를 포함해 중앙아시아의 역사·문학·철학·민속이 녹아있는 보물창고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나스』는 소비에트 이전 시기에 대부분은 문맹이었던 키르기스인들에게 그들의 과거를 보존하는 주된 보관소 역할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친기즈 아이트마토프가 키르기스 민족의 신화나 전설에 주목하고, 이를 러시아어 소설에서 재현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이트마토프가 1956년에서 1958년까지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에서 작가 수업을 받았고, 푸쉬킨·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고전 문학의 전통을 이해하면서도 사회주의 이상을 교육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가 키르기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음송시인들이 서사시를 노래하고 신화를 이야기하며 공동체적인 풍습에 따라 살았던, 즉 족장시대 유목민들의 삶과 풍속도를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는 태생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서 구전된 이야기로 전해 오는 신화나 노래, 서사시 같은 구비문학은 민족 역사의 아스라한 기억의 끈을 발굴해 이를 예술적으로 재현했던 아이트마토프에게 민족 뿌리 찾기의 일차적 자료였을 것이다.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의 만쿠르트전설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가 정체성 구축

 

아이트마토프는 『마나스』에서도 발견되는 소재를 활용해 만쿠르트 이야기를 소설에 도입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 이 전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사로제크 사막을 스텝의 잊혀진 역사책이라고 일컫는 작가는 당시 중국 북방 대초원에 무리지어 살며 다른 부족들을 잔인하게 정복했던 츄안츄안(Жуаньжуан)족의 습성과 그들이 포로를 다루는 방식을 도입해 서사를 구축한다. 츄안츄안족이 사로제크 사막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된 나이만족 전사들의 머리를 밀고 시리라는 암낙타의 유방 가죽을 모자처럼 씌워 기억을 말살시킨 후, 주인에게 충실한 만쿠르트라는 노예로 만들었다는 내러티브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우선 포로들의 머리가 면도날로 철저하게 밀리고, 남은 머리칼은 한올 한올 뿌리까지 뽑힌다. 그 일이 다 끝나면 츄안츄안족의 솜씨 좋은 백정이 근처에 있던 어미낙타를 죽여 가죽을 벗겨 내기에 앞서 털이 숭숭 난 묵직한 유방부터 도려낸다. 그런 다음 그것을 몇 조각으로 나누어 아직 더운 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면도로 박박 민 포로의 머리에다 씌운다. 그러면 그것은 당장에 씌워진 자리에 접착제처럼 달라붙는데, 수형을 당한 사람은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죽거나 또는 과거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더라도 그는 과거의 삶을 기억할 수 없는 만쿠르트라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츄안츄안족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생각해 낼 정도로 잔인하고 야만적인 종족으로 알려져 있어 아이트마토프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이런 장면이 결코 우연한 상상력의 산물만은 아니다. 정신을 앗아가 버리는 지독한 고문을 겪은 후, 결국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부모가 누구인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마디로 스스로 인간인 줄 인식하지 못하는 노예 만쿠르트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끌려갔던 자식이 만쿠르트가 되어 버리면 어차피 정상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 부모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통념을 깨고 만쿠르트가 되어 버린 아들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여인이 소설에 등장한다. 전설에는 나이만-안나(Найман-Анна)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부인은 아들이 츄안츄안족과의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다. 이로서 작가는 포로가 만쿠르트로 변화되는 서사와 아들을 찾아 헤매다 결국 아들 손에 죽어 묻히게 된 아나-베이트 묘지의 기원을 전해주는 나이만-안나의 전설을 결합시킨다.

소설에서 나이만-안나라는 이름의 이 나이만족 여인은 만쿠르트가 된 아들을 발견하고,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에게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되풀이하며 기억을 되살리려 애쓴다. 하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결국 주인의 명령을 받아 어머니를 살해하게 된다. 여기서 작가는 아들이 쏜 화살에 맞아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어머니 머리에서 떨어진 흰 수건이 도넨바이(Доненбай)라는 새로 변했다는 전설을 언급한다. 그리고 밤이면 아나-베이트 묘지를 날아다니다가 여행자를 만나면 네가 누구 자식인 줄 아니? 네 이름이 뭐지? 네 아버지는 도넨바이였어! 도넨바이! 도넨바이!하며 우는 새에 대한 전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설에서 아나-베이트(Ана-Бейит), 즉 어머니의 안식처라는 이름의 묘지를 사람들이 숭상하게 된 전통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이트마토프는 만쿠르트 전설과 도넨바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설정된 사로제크와 아나-베이트 묘지를 중심에 두고, 소비에트 시대에 죽음을 대하는 이 지역 카자흐인들의 의식을 묘사했다. 여기서 작가는 카자흐 민족의 기억과 전통을 수호하는 중심축으로 예지게이라는 인물을 창조한다. 이 소설이 카자흐스탄 사로제크 초원의 부란늬 간이역 철도원인 예지게이가 그의 오랜 친구였던 카잔갑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굳이 30킬로미터 떨어진 나이만 부족의 공동묘지인 아나-베이트로 가려했던 상황이 설정되고, 여기서 예지게이가 한 세기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하루 동안에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것은 이 때문이다.

예지게이가 카잔캅의 시신을 굳이 아나-베이트에 모셔오려 했던 것은 삶의 여러 면에서 모범이 되어 왔던 그의 훌륭한 인격에 걸맞게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지게이는 소비에트 법률이 시행된 지 60년이나 지난 시점에도 불구하고 카잔캅의 입관준비와 기도문 암송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이에 반해 카잔갑이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정작 아버지 죽음에는 관심도 없는 거만한 아들 사비트잔(Сабитжан)은 장례식을 그저 후딱 해치워 버리고 빨리 떠나기에만 급급하다. 이른바 현대판 만쿠르트인 사비트잔은 소비에트 시대 과학이 이루어낸 업적을 끝없이 찬양하고 설파하는 반면, 신이나 영혼의 세계는 믿지 않는다. 이에 예지게이는 사비트잔에게 만쿠르트가 된 아들을 붙잡고 어머니 나이만-안나가 했던 것처럼, 네 이름을 기억해라. 네 아버지는 카잔갑, 카잔갑, 카잔갑이다....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윤리적 중심축인 예지게이의 의식과 행동을 세상의 소금에 비유하며, 그가 보여준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족 전통의 부활을 옹호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소비에트적 관점을 비판하며 무조건 전통 수호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소비에트의 현실과 타협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 노력했다. 작가가 인간의 영성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 동시에 인민성·계급성·당파성을 기조로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 예지게이 같은 인물을 설정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키르기스 민족 문화부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백년보다 긴 하루』는 포스트소비에트 키르기스스탄의 국가 정체성 구축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만큼 키르기스스탄의 문화발전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아이트마토프의 위상 역시 강력한 것이었다.


. 투르크메니스탄 감독 호자쿨리 나를리예프의 영화 < 만쿠르트 >

 

만쿠르트전설은 중앙아시아 독립 후 오랜 세월 금지되어 왔던 테마를 다룰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감독들에게도 흥미로운 소재로 부상했다. 그 첫 영화로 제작된 것이 투르크메니스탄출신 감독 호자쿨리 나를리예프(Khodzhakuli Narliyev) <만쿠르트>(Mankurt)(1990)였다. 영화 <만쿠르트>는 소련·터키·리비아 3개국의 합작으로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투르크멘 배우뿐만 아니라 터키 배우들도 출연했다. 무엇보다 감독은 이것을 튀르크계의 단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로 부각시키는데 치중했던 것이다.

마리야 우르마토바(Mariya Urmatova)가 시나리오를 집필한 lt;만쿠르트gt; 역시 소설 『백년보다 긴 하루』의 내러티브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로제크 사막을 중심으로, 소설에서처럼 카자흐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민족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하려했던 투르크멘족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소설의 기본 플롯과 마찬가지로 영화에는 포로가 된 졸로만(Zholoman)이라는 인물이 고문을 당해 만쿠르트가 된 후, 결국 자신을 구하러 온 어머니마저 살해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영화의 기본 플롯은 소설에서 차용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미학적 가능성과 독창적 플롯을 투영하고 있다.

영화 <만쿠르트>는 츄안츄안족이 튀르크족을 습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실질적으로 영화에서 전투 장면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감독은 전투 이후 승자와 패자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포로들이 어떻게 만쿠르트로 변화되는지에 집중한다. 아이트마토프가 소설에서 사람을 만쿠르트로 변모시키는 과정의 외적인 면만 묘사했던 반면, 영화에서는 만쿠르트로 변해가며 고통받는 포로의 의식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기법을 통해 관객들은 만쿠르트가 되어 가는 졸로만의 삶을 추적하며 그의 내면을 응시하게 된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졸로만의 약혼녀가 등장하는데, 감독은 그 여인을 통해 졸로만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기도 한다. 졸로만은 그 고통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과 끝내 치를 수 없었던 결혼식에 대한 단상과 함께, 마을 친구들이나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 등 삶의 여러 편린과 기억을 떠올린다. 특히 그의 결혼식 준비로 온 마을이 떠들썩했던 날, 적군이 마을로 오고 있다는 기수의 말에 잔치가 중단된다. 그리고 그의 행복한 회상도 거기서 멈춘다.

감독은 졸로만이 만쿠르트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비교적 현 시점과 근접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그의 어린시절 기억까지 파고 들어간다. 졸로만은 일곱 살 먹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활 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 요람 곁에서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 고통이 길어질수록 더 깊은 곳에 잔존했던 기억까지 떠올린다. 하지만 더 시일이 지나자 그런 기억마저 사라지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사라지자 절망으로 가득 찬 졸로만이 엄마, 살려주세요. 가지 마세요!라고 소리친다. 이 외침을 들은 주인은 이제 그가 만쿠르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마실 물을 주고 족쇄를 풀어준다. 주인은 그가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물과 먹을 것만 있으면 그 어떤 개보다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될 만쿠르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쿠르트로 변모시키는 과정에 대한 스틸컷>


감독은 영화 <만쿠르트>전반부에서는 기억의 상실을, 후반부에서는 기억은 잃었지만 고통에도 맞설 수 있는 힘, 바로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그리고 있다. 졸로만의 어머니 아임은 아들이 살아있음을 직감하고 흰 낙타를 타고 아들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초원에서 양을 치고 있는 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만쿠르트가 되어버린 아들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아들을 데려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생명은 붙어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자식을 위해 애가를 부른다. 이것은 아이트마토프의 소설 속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애가를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만쿠르트가 된 욜라만과 어머니 아임의 모습>


영화는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계몽주의 차원에서 금지되었던 소재도 과감히 도입하고 있는데, 졸로만의 어머니 아임이 며느리 규젤과 함께 아들을 찾아 나서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들을 찾아 산을 헤매는 아임은 전투에서 사망한 남편 돈메즈의 혼령과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아이트마토프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 감독이 부여한 것이다. 사실 튀르크족에게 꿈이나 샤먼의 주문을 통해 저승세계와 접촉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 시절에는 이러한 영적인 교류가 반계몽적이고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영화 소재로는 거의 등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호자쿨리 나를리예프 감독은 소연방 붕괴 후 영화제작의 해빙 무드에 힘입어, 저승은 파란색과 푸른색으로, 이승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그리며 두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감독이 <만쿠르트>의 시나리오를 소설 원작에 기반을 두도록 하면서도 타니르라는 츄안츄안 족장의 아들을 창조하여 그에게 무게감을 부여하는 것에도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관객들은 졸로만이 겪는 모든 일을 무엇보다 타니르의 동정심 가득한 눈을 통해 지켜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리를 씌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타니르는 졸로만이 발작을 일으키고 몸부림칠 때 그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 줄 정도로 선한 심성을 지닌 인물이다. 아들을 찾아 먼 길을 온 졸로만의 어머니 아임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활과 화살을 감추기도 하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결국 아버지가 아임을 향해 화살을 당기자 아버지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행위로 타인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막아내기도 한다. 감독은 소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의 친어머니를 살해하는 만쿠르트를 만든 장본인에게 그 죄업이 아들의 죽음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드리우는 것이다.

<만쿠르트를 지켜보는 타니르의 시선>


소설속의 배경이 카자흐스탄의 사로-제크 초원이었던 것에 반해, 나를리예프의 영화 <만쿠르트>가 터키와 시리아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촬영되었다는 점도 비중 있게 분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서사를 관객들에게 단순히 중앙아시아의 한 초원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비극에 유비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감독은 아들이 친모를 살해하는 인류의 비극을 신()의 죽음이라는 메타포와 연결지어 인류 차원의 각성을 도모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만쿠르트의 어머니 살해 현장을 보고 자살하는 부족장 아들의 이름 타니르가 튀르크족의 천신(天神)인 텡그리 신(Tengrian God)을 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설에는 없는 타니르의 이야기를 통해 감독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 강제로 기억을 없애는 행위를 자행할 경우, 이에 대한 목격자가 있다는 것은 그의 시선을 통해 기억말살에 대한 시도가 재조명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반드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감독이 이를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투르크메니스탄이 주축이 되어 제작된 이 영화가 기억문화의 관계, 기억예술의 관계를 인지하는 대표 영화가 된 점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곳에 문화와 예술은 꽃필 수 없듯이, 실제 이 영화는 투르크메니스탄 영화사에 하나의 예언처럼 되어버렸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90년 투르크메니스탄 영화는 큰 붐을 일으켰지만 결국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에 대통령이 영화를 비롯해 발레와 오페라, 서커스, 공연 등을 투르크멘 정신에 적합하지 않은 예술로 규정지으며 영화의 시대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성전이 서 있던 터가 파괴되어 가축을 방목하는 곳이 되어 버렸듯이, 이 영화를 제작한 투르크메니스탄 역시 유사한 상황으로 전락했다. 스튜디오 <투르크멘필름>은 폐쇄되었고, 영화 <만쿠르트>는 1990년대 말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만쿠르트>는 투르크메니스탄 영화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었다. 사실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초기 중앙아시아 영화계가 전례 없는 약진을 맞이했을 때,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영화 제작자협회가 운영되었던 곳이 투르크메니스탄이었으며, 바로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 영화계를 장악하며 제작협회장을 맡은 감독이 호자쿨리 나를리예프였던 것이다. 당시 영화제작협회는 튀르크어 사용국의 단합을 위해 제1회 국제영화제 쿠무시 야리마이(Kumush Yarimay: 은빛 초승달) 1992년에 개최하기도 했다. 튀르크어족 국가의 연합을 위한 첫 번째 시도였던 이 행사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타타르스탄, 바슈코르토스탄, 터키, 바시키리야, 카라칼파키야 영화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튀르크어족 국가들의 영화 발전을 보여 주고자 개최한 이 영화제는 튀르크 민족의 단합을 위한 초석이 되었으며, 영화 <만쿠르트>의 역시 이를 기념하며 상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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