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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조선 유교사회의 이념적 표상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들 일터를 벗어나 두루 여행을 다니는 철이 되었다. 몇 년 전 답사길에서 만난 작가 이청준은 여행을 ‘밖에선 건물구경, 안에선 그림구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적확한 지적이고, 여행길이 도시를 벗어난다면 여기에 자연 풍광 하나를 덧델 정도이다. 건축이 이처럼 중요한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건축이 그것을 짓고 사용하는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온전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건축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건축공학적 지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 건축을 만든 사회의 이상과 현실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깊은 공감이 필수적이다.
조선사회의 서원은 치국의 중심이념인 성리학을 학습하고 이념을 강화하고 보급하여 후속세대를 길러내는 기간시설이다. 굳이 현대의 것과 비교한다면 지방의 대학과 종교시설, 사회단체의 사무실 등을 합한 것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서원은 궁궐이나 불교 사찰과 같은 화려함을 지니지 않아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있고, 규모가 크지 않고 상대적으로 역사성도 적기 때문에 조형적 우수함을 으뜸으로 삼는 예술사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뒷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서원이 제자리를 찾아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건축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조선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부각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성리학과 풍수 등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이 담고 있는 이념적 원리에 천착해 온 이상해 교수는 이미 그의 앞선 저작에서 보여주었듯이, 이처럼 다루기 어렵지만 조선시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서원의 해석에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학자이다.

물질보다 정신 우위에 둔 유교 건축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서원이 갖는 가장 큰 건축적 덕목은 유교적 이상을 구현하는 방식에 있다. 불교의 사찰이 건축물은 물론 불상과 탱화, 그리고 조각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조형적 수단을 동원하여 사부대중에 직접적으로 다가섰던 것에 반하여, 유교의 서원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스스로의 행위적 실천을 통하여 유교적 이념을 체화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이 가시적인 도상적 이미지에 주력한다면 서원은 암호와 같은 명분론적 의미 지향을 사용한다. 절은 어디를 가나 대웅전이 있고 명부전과 사천왕문, 일주문 등 비슷한 이름을 갖는 건물들이 있지만 그 건축의 형식과 의장은 장소에 따라 다르고 거꾸로 서원 내의 각 건물들은 모두 다 다른 이름들을 갖지만 배치나 건물의 규모 형식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물질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유교 건축의 특징이고, 유교 건축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서원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적 성과임을 과시하는 부분은 환경을 다루는 솜씨에서 찾을 수 있다. 건축의 배경이 되는 환경은 고정의 것으로 땅의 생김새와 기후, 사용가능한 재료와 식생 등 자연적인 것은 물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까지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이 불교가 되었건 유교가 되었건 외래의 문화가 처음 소개될 당시는 외래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시간의 경과와 함께 토착화되어 우리의 환경 속에 녹아드는 과정을 겪게 된다. 서원도 마찬가지여서 굴곡이 심한 우리의 지형에 맞추어 산을 등지고 강을 내려다 보며, 안으로는 닫혀있고 밖으로는 열려있는 이중적인 실존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더욱이 서원 건립의 이념적 배경이 되는 성리학이 토착화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서원은 그 처음부터 중국의 형식을 과감하게 재해석하여 한국적 상황 속에 맞추어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계곡변의 절터라고 하는 조건을 유가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면, 남계서원은 한국적 질서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고, 병산서원은 구체적인 지형에 적응하는 우수한 적응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서원이 지어지는 역사적 과정과 그것이 갖는 건축적 특성과 이념적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각각의 구성요소들과 함께 전국에 산재한 모범적인 서원 8곳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담고 있다. 여러 해에 걸친 전국 답사를 바탕으로 시간과 지역이라는 종횡의 그물망을 통하여 통찰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니 그 내용의 정밀함과 정요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욱 반가운 것은 이 책이 영문판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나서면 볼 것이 건축인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우리의 건축을 알릴 만한 변변한 책이 나오고 있지 않다. 동아시아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하바드대학의 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조차도 한국건축에 관련한 영문책은 단지 1970년대에 나온 사진집 한권이 전부일 정도이다. 일년에 50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학 관련 저술의 영문판 보급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다.

저자: 이상해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
기획·진행: 한국국제교류재단
출판: 한림출판사
출판언어: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