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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의 호주 데뷔

현지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1995년 가을에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인 이은관씨를 처음 만났다. 우리가 함께 만날 때마다 이씨는 나에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가끔씩 자신의 이미 생생한 이야기에 가사와 소리를 가미하기 위해 황급히 악보나 악기를 가지러 가곤 했다. 그의 일에는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씨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박준영이었다. 이씨는 박씨에게 ‘배뱅이굿’이라고 하는 긴 작품을 전수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은관씨의 가장 유명한 서도소리 레퍼토리였다. 아마도 내가 이씨의 기백과 유머감각에 푹 빠졌고 ‘배뱅이굿’을 녹음한 것을 심취해서 들어서 인지는 몰라도, 이 독특한 예술은 나의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배뱅이굿’은 노래와 담화가 섞여있는, 민간에 전승되어온 일종의 무용담 같은 것이다. 소리꾼 겸 이야기꾼, 그리고 장구를 치는 반주자가 함께 공연을 하는데, 반주자는 격려의 말을 외치거나 소리꾼에게 칭찬이나 호응의 표현을 하기도 한다. 약 50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예술 공연은 한 시간 이상 걸리지만, 불행히도 오늘날에는 원래 길이대로 온전히 공연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불행한 사건에 관한 노래들은 대부분 슬프다. 이 장르의 대표적인 민요인 ‘수심가’와 매우 비슷하게, 음조가 높은 절규에서 넓은 전음으로 내려가 노래의 템포가 늦춰지는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조와 공연방식 때문에 판소리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지만, ‘배뱅이굿’은 들썩들썩하는 리듬과 불협화가 적은 음역 때문에 상당히 슬픈 곡조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판소리보다 쾌활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반주자는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북보다 장구를 치는 것이 보통이다. 두 장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이은관씨의 인기 때문에 ‘배뱅이굿’은 남성이 공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씨 자신은 한때 여성 가수인 김계철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었다.



‘배뱅이굿’은 과거에 무당이었던 최정승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의 아내는 오랜 기도 끝에 임신을 하고 딸을 낳는다. 이 딸은 자라서 집에 온 탁발승과 사랑에 빠지고, 며칠간 자신의 침실에 이 중을 숨겨두고 사랑을 나누지만, 중은 그녀를 떠나 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중이 그녀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딸은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슬픔에 빠진 부모는 저승에 있는 딸의 넋과 이야기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무당이 있다면 자신들의 전 재산을 주겠다고 하는데, 한 가난한 부랑자가 이 소문을 듣고 무당 행세를 하기로 결심한다. 조선 팔도의 무당들이 최정승 집을 찾아와 굿을 벌이지만, 이들은 모두 최정승 내외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부랑자는 뛰어난 기지로 시험을 통과하고 최정승 내외와 군중을 모두 속이는 데 성공하여 상금을 받는다.
‘배뱅이굿’은 음조와 감정이 매우 풍부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유교와 불교, 그리고 무당의 도덕성을 비웃는 유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는 호주국립대학교(ANU)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국제교류재단에 연락을 했는데, 재단에서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혔다. 재단의 지원 약속을 염두에 둔 나는 지난 2001년 훌륭한 공연을 보여준 박준영씨에게 연락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내 계획에 관해 듣자 기꺼이 호주에 오겠다고 말했다. 5개월 후 나의 개인적 우상 중 한 사람을 실은 작은 비행기가 캔버라 공항에 착륙했다. 박씨와 그의 동료 음악가들을 맞이하는 것은 나에게 매우 이상하면서도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 그의 일에 관한 수많은 글을 쓰게 만든 사람이었으며, 이제는 서도소리의 가장 중요한 소리꾼 중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순간을 축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우리는 그날 밤 한국과 호주의 좋은 관습에 따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개인적 배경, 한국 민속예술의 보존, 그리고 호주문화의 놀라운 점 등을 이야기했다.



박씨와 그 일행은 민요 외에 사물놀이 스타일의 장구 독주와 전통무용인 ‘살풀이춤’과 ‘교방국거리춤’을 공연할 예정이었다. 나는 가능한 광범위한 범주의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동료인 킴 그랜트와 함께 네 차례의 행사를 준비했다. 첫번째 행사는 10월 18일 나라분다(Narrabundah) 칼리지에서 열렸으며, 이 학교와 인근 몬테소리 초등학교의 직원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지만, 곧바로 공연자들의 커다란 에너지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공연이 끝난 후 많은 학생들이 악기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어 하거나 손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같은 날 ANU의 버그만 채플(Burgmann Chapel)에서 두 번째 공연을 했는데, 이것은 주로 나의 동료와 학생들을 위한 공연으로 준비된 것이었고,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한국 민속예술의 초현실주의와 이 공연의 다양한 종교적 언급을 즐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캔버라에서 열린 마지막 공연이자 유일하게 모든 것이 망라된 공연이 10월 19일 금요일 스트리트 극장에서 열렸다. 다른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씨와 그의 동료 음악가들은 무대의 한계에 적응하는 데 있어 매우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느 순간, 좀 혼란스러운 음향기사가 마이크로폰이 더 필요하지 않은지 물었을 때, 박씨는 처음에 몇 행을 매우 크게 부르는 것으로 대응했으며, 곧이어 침착한 표정으로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만일 들을 수 없다면 제가 좀 더 가까이 가죠”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공연은 멜버른에서 열렸는데, 모나쉬(Monash) 대학교의 한국학 동료인 조영아 박사와 앨리슨 토키타 박사가 자신들의 일본센터강당(Japan Centre Auditorium)에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멋진 피날레를 준비해주었다.
내가 관객들에게 어떤 공연이 가장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다양한 답변이 나왔다. 어린 학생들은 장구 연주를 더 좋아한 반면, 내 동료들은 대부분 노래와 춤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공연자들에게 어떤 공연이 가장 즐거웠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마지막 공연이었다고 답변하며 그 이유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러한 반응에 좀 놀랐는데, 그것은 이들의 공연이 너무나 완벽했고 우리가 함께 보낸 기간 내내 이들 중 누구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행사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공연자들의 프로 근성과 유머감각 덕분이었다. 이들은 한국 민속예술의 아름다움과 다재다능함을 잘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매 공연마다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좀 더 많은 것을 바라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2009년에 이번 공연과 비슷하지만 보다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할 계획인데, 박씨와 그 일행이 다시 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만일 박씨가 주저한다면,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잘 안들린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