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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 되어준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연구에 종사하는 내 또래 학자들 중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길이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걸어온 길과 거의 딱 들어맞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도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웹사이트에 의하면 재단은 1991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초의 대규모 지원금이 북미 지역에 전해지기 시작한 때는 재단 설립 후 1~2년 뒤의 일로 기억된다. 이 시기는 운좋게도 내가 대학원 1학년에 재학중이던 때였고, 물론 우리 대학원은 재단으로부터 한국전공대학원생 장학금 지원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하와이대학교에서 석사과정에 있던 때의 일이었고, 나는 곧 하와이를 떠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당시 나는 학교가 주는 장학금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한국학센터에서 참여했던 회의와 행사 등이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재단지원금 덕택이었다. 그것은 내가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를 위해 서울로 향하기 바로 2년 전의 일이었고, 서울에서의 연구는 재단의 체한연구펠로십 프로그램을 통해 실시했다. 그때 재단의 지원은 특히 고마운 일이었다. 영국인인 나는 당시 미국에서 주는 거의 모든 재정지원을 신청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따라서 재단의 국제적 프로그램으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논문을 끝낼 즈음 또 다시 우연히도 재단은 박사후과정 펠로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건강상의 이유로 펠로십을 사양해야만 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나는 나의 첫 일터인 뉴욕대학교에서의 자리가 북미에서는 재단의 지원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한국문학교수직이라는 것을 거의 자랑하다시피 하곤 했지만,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편하지 않았었나 보다. 왜냐하면 재단이 지원하는 토론토대학교 교수직으로 바로 얼마 전 이직했기 때문이다. 몇 년간의 공백 뒤에 나는 이렇게 옛 그늘로 다시 돌아와 있다.
나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길러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다. 또 한국학 분야의 그렇게 많은 활동이 단 하나의 기관에 의해 지원받는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놀랍기도 하다. 아무튼 재단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 초 학계에는 항상 한국학 교수직에 대한 위기감이 존재했다. 자리가 없어지게 될까?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이제는 한국학 교수직과 강좌가 자리를 잡았고, 도서관에 한국에 관한 책들이 비치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을 한가로이 관람할 때 반드시 한국컬렉션을 지나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설사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은 아닐지라도, 대개의 경우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제 문제는 한국학의 생존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어떤 종류의 한국학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집중화된 지원처는 다른 부문의 무관심을 초래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한국학 학자들이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현지의 지적 네트워크보다는 한국의 지원자들에게 좀 더 인상을 남기려고 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한국학계와 다른 나라 학술기관 사이의 관계를 강화시켜주는 놀라운 효과를 낳았지만, 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현지 환경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흥미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우리들을 새로운 수단과 프로젝트로 이끌어줄 곳이고, 한국학의 강력하고 영원한 미래가 놓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계속해서 유연성을 발휘하여 다양한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한국연구가 흥미진진한 것이 되게 해주는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국제회의나 기금교수직의 화려함이라기보다는 사람들?수업시간의 학생들, 강연회 시리즈의 교수진들, 혹은 영화관객이든 간에 ?사이의 일상적인 만남과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