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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환상과 언제나 요원한 근대적 선진화의 꿈

인류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환상적이고 딱 들어맞는 질문이라는 완전한 도구로 무장하고 연구 대상지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근대적인 ‘사회과학적 상상’을 너무 과하게 발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질문하고자 하는 충동과 이에 수반되는 부지런한 연구 작업은 준비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깜짝 놀라게 되는 것과 종종 관련이 더 많다. 왜냐하면 그것은 통일된 주제를 고집하며 독자와 저자 모두를 발견과 발전이라는 꿈으로 밀어붙이는 종종 뜬금없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선진화와 근대화의 끊임없는 추구
10여 년 전 한국에 처음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미국유학 준비를 하던 한 한국인 친구가 내게 간단한 질문을 하나 했다. “한국은 근대적인 국가인가?(Is Korea a modern country?)” 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랐다. 분명히 짧기는 했지만, 당시 서울 체류기간 중 처음으로 호출기를 샀고, 이어서 시티폰도 샀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일상적으로 택시를 불러타며 나 자신이 마침내 진정한 도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한국이 근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사실 한국은 나를 근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 하나로 내가 근대화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가진 미국인 권위자가 된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란 그 순간, 세계화의 매혹적인 아이러니, 미국산 근대화 이론의 지리적으로 민감한 개발 패러다임, ‘근대적(modern)’이라는 용어가 정치ㆍ문화 같은 단어에 들러붙어 규범을 유발시키는 형용사가 될 정도로 널리 만연되는 방식 등이 더욱 분명해졌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질문들은 더 오래도록 악화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몇 년을 건너뛰어 2005년의 일이다. 나는 서울대학교 졸업식장에 있었다. 졸업생 한 명(엘리트 대학교육을 받고 이제 곧 엘리트 대열 속으로 들어갈) 이 졸업 동기들에게 “한국은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라고 다소 즉흥적으로 말했다. 다시 한 번 그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기술의 확산, 높은 수준의 도시화, 높은 문자해독률, 문화수출(한류), ‘선진’이라는 표현을 상기시킬 만한, 나라를 이끌어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졸업생이 어떻게 한국이 ‘선진화’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단 말인가? 근대성이란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듯이 ‘선진국’이라는 위치도 갖기 힘든 것으로 남아 있다. 선진화와 근대화는 전 세계 역사 질서에서 그 위치를 반영하거나 평가하는 프로젝트와 방법을 동원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같은 학자들은 ‘근대적’이라는 형용사가 시간 속의 어느 특정한 혁명, 즉 규칙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단절—승자와 패자와의 싸움을 가리킨다—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러한 단절의 지점은 전진과 후퇴를 규정하고, ‘선진화’ 가능성을 위한 수사적 지지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모든 지지대가 그러하듯 이 지점은 제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의심을 떨쳐버리기 힘든 질문들처럼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1년 전 동아일보 ‘오피니언난’에 실린 글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한국은 갈림길에 서 있다.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현재에 머무르며 아무런 전진을 하지 못할 것인가?” 그로부터 대략 1년쯤 건너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선진화를 향한 전진의 필요성을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한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체한연구펠로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볼 때 점점 더 분명해지는 한 가지는 바로 끈질기게 나타나는 이 ‘근대화와 선진화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