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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와 뛰어난 연출이 돋보인 무대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이 ‘피치 오페라 페스티벌’이라는 표제 아래 <아이다>(베르디)와 <투란도트>(푸치니)를 세종문화회관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레날도>와 <라 트라비아타>로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여 국내에서도 명성을 날린 피에르 루이지 피치가 그의 수제자 마시모 가스피론과 함께 꾸민 두 공연은 단연 이채로웠다. 또한 국내 오페라단이 합창과 연주를 맡아 성공적인 공연을 펼침으로써 한국 오페라의 밝은 미래를 전망해볼 수 있었다.



두 작품을 한 무대에서 매일 번갈아가며 공연하는 방식은 한국 초유의 일이다. 이탈리아 마체라타 시에서 스페리스테리오 극장의 오페라 페스티벌이 2006년 ‘엑소시즘과 먼 여정’이라는 주제로 펼친 공연 방식을 그대로 옮겨온 독특한 공연이었다. 계단식 무대를 중심으로 <아이다>는 피라미드를, <투란도트>는 중국풍의 왕성 외곽을 상부에 교대로 설치함으로써 신속한 무대 전환이 가능했다. 가스피론의 공연은 음악의 역동성에 비해 전체적으로 단조롭게 진행된 반면, 피치의 공연은 흐름이 원만하면서도 스펙터클한 요소를 잘 살려냈다. 두 연출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엿보이기는 하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피치의 솜씨가 좀 더 돋보였다. 피치는 작품 해석과 표출에서 정통성을 유지하면서도 참신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투란도트>는 원래 아랍권에서 18세기 초에 프랑스로 전해져 유명해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수록된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결혼을 거부하는 미모의 투란도트 공주가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맞히는 구혼자와는 결혼하고 그렇지못한 구혼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단순한 이 이야기는 유럽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재창조되었다.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고치가 발표한『투란도트: 5막의 희비극 동화』(1762년)가 그 하나인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가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투란도트: 중국의 공주』로 출판했다(1807년). 쉴러는 아랍세계의 공주 투란도트를 중국화했는데, 그 이후 투란도트는 중국 공주로 고정되었다.



<투란도트>에 담긴 사회적・정치적 의미
<투란도트>가 투란도트-칼라프-류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삼고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특히 세 가지 수수께끼를 모두 풀고 났어도 약속 이행을 거부하는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칼라프가 던진 조건, 즉 동이 트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면 공주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아도 좋음은 물론 자신을 참수하라는 요구로 인해 공주가 북경시민 전체에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고통 받는 백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적 요소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실제로 서사극의 대가 브레히트는 1950년대 중반에 동독에서 자행된 사회주의 정권의 압제와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항거를 목격한 뒤 1932년에 모스크바에서 박탄코프 극단의 <투란도트>를 보고 자신의 희곡을 써보려고 했었던 계획을 구체화했다. 여기에서 그는 연극적 요소와 이국적인 분위기에 더해 정치성, 즉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권력지향성을 비판하면서 농부로 하여금 “여기에서 파는 사상은 썩은 냄새가 난다”라고 외치게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아주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를 일부 남겨놓았다. 희극적으로 묘사된 세 대신들과 마치 예수에 대한 군중의 태도처럼 기회주의적인 군중의 모습 그리고 달맞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횡포에 시달리는 중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는 평화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군중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것에서 그런 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 무대
고정된 무대이기에 조명의 역할이 무엇보다 긴요했는데, 연출가 피치의 이에 대한 감각은 매우 뛰어났다. <아이다>가 흑백의 대조에 급급하여 단조로움을 면치 못한 반면, <투란도트>는 장면들이 요구하는 심리적 효과를 고려하여 색감을 좀 더 다채롭게 구사했다.
그러나 공주가 칼라프의 고백으로 그의 이름을 알아낸 후 황제와 백성 앞에서 이를 밝히려는 장면에서 있음직한 긴장이 좀 더 극적으로 묘사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공주는 그의 이름을 댈 것처럼 행동하다가 “그의 이름은 나의 사랑”이라고 선언하는데, 이 부분의 처리가 너무나 밋밋하여, 관객들은 그녀가 이미 그와 같은 선언을 할 것이라고 눈치 채고 만다. 이는 물론 원작과도 연관되는 결함이다. 하지만 푸치니는 류가 자결한 후 병정들이 그 시신을 떠메고 나가는 장면까지밖에 쓰지 못했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이 부분은 그의 원작이라고 할 수 없다. 토스카니니가 그의 사후 이 작품을 공연하기로 마음먹고 푸치니의 제자 알파노에게 나머지 부분을 작곡하도록 했는데, 스승의 작곡기법을 익히 알고 있고, 토스카니니의 세세한 주문에 따라 이미 올려졌던 주제들을 활용했으므로 큰무리는 없었지만, 앞에서 말한 극적 긴장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듯해 조금은 아쉽다.
그러나 세부적인 주문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럽다는 감회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특히 제각각 모여 짧은 연습 기간에 세계적인 대가와 그의 스태프들의 까다로웠을 주문들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 합창단원들 및 연주단원들 그리고 국내 스태프들의 기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과이기에 한국 오페라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한국 오페라단의 향후 공연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