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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문화유산보호

북한은 1998년 10월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협약의 새로운 당사국이 되어 협약의 이행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동북아시아는 과거 문화교류가 매우 활발하였으며 따라서 훌륭한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적이 별로 많지 않은 실정이다. 북한은 자국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국제적 협력을 받기 위해서 일부 문화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 등재를 희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는 2000년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전문가들을 북한에 파견하여 고구려 고분의 보존 및 관리 계획을 수립하는 데 대한 각종 기술 자문을 제공케 하였다.

고구려 시대(37 BC∼AD 668)는 단순한 원추형 돌무덤에서부터 토루로 덮인 보다 정교한 석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수천 개 남겼다. 석실의 경우 때때로 화려한 벽화로 장식되기도 했는데 이 벽화들은 4세기에서 7세기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석실 무덤은 중국 집안, 길림성지역의 압록강 양변, 중국 북동쪽의 요동반도 지역, 그리고 북한의 평양 근교 등에 산재되어 있다. 중국 지역에 있는 고분까지 포함하여 벽화가 있는 고구려 고분은 지금까지 총 90개 정도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 약 70개의 고분이 평양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10년간 한국과 중국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고구려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권의 범위와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교류에 대해서도 기존의 인식들이 새롭게 바뀌어 가고 있다. 고구려를 비롯해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 및 여러 다른 나라 왕조들의 문화적 배경은 예술적, 종교적, 문화적 영향의 복층적 현상과 더불어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 왕조 당대의 역사적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벽화는 동북아 지역의 회화전통에 대한 초기의 고증자료이며 또한 고구려 왕조 시대의 지배적 종교에 대해서도 귀중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벽화는 한반도에서 알려진 가장 초기의 도교적 형상이며 동시에 점성학적 표현물 중의 하나이다.

최근의 남북한간 화해 분위기와 상업적 교류 활동 및 금강산 관광개발과 같은 관광산업 교류 등이 확대되면서 조만간 관광객들에게 북한 내 여러 유적지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고구려 고분은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들도 방문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유적지다(고구려의 초기 수도들은 중국의 요녕성과 길림성 지역 등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이들 지역에는 상당수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이번에 유네스코가 전문가 그룹을 파견하여 고구려 고분을 보존하고 소개하는 데 필요한 정책 수립을 도우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등재 가능성을 검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파견단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센터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자인 양민자 여사의 인솔하에 문화유산 보존 및 관리 분야의 국제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는 법률문제 전문가, 도시계획 전문가, 이탈리아 국제문화재 보존복원 연구센터(ICCROM)의 벽화 보존 전문가, 영국문화재청(English Heritage)의 관리 전문가, 그리고 한국미술학예관 등이 포함되었다. 나는 박사논문의 주제로 벽화가 있는 고구려 고분을 다루고 있어 고구려 왕조의 역사 및 고고학에 대한 자문역할로 파견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북한의 문화유물보존국과 문화재보존연구소의 전문가들과 함께 수 차례 회의를 가졌는데, 문화재보존연구소는 1990년부터 1996년에 걸쳐 현재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유적유물도감 시리즈 20권을 편찬한 기관으로 이 중 4권이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평양, 남포, 안악 지역의 여러 고구려 고분과 개성 근처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및 고분 유적지에 대한 현장답사 일정이 포함되었다.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북한의 법률 및 행정체계가 논의되었으며, 특히 벽화의 보존 문제와 고구려 고분 유적지의 관리 계획을 집중 검토하였다. 유적의 역사적 전후관계 비교(contextual comparison) 및 그 진위의 기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명왕릉이나 왕건릉 등 몇몇 고분은 현대에 와 심각한 정도로 개축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협약의 인증절차를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북한의 역사가들은 자주성을 강조하는 그들의 주체사상에 따라 외부세계와 접촉하거나 교류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특히 고구려가 외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과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북한의 역사편찬에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데 작용하는 이와 같은 심각한 정치적 편견은 단군의 능과 같은 역사적 증거물을 위조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유네스코 파견단은 고구려의 이웃 중국 요녕성(한나라, 위나라, 진나라 시대의 중요한 문화교류지역이면서 동시에 이전 고구려의 영토였던 지역) 및 산동성 지역과의 문화적 교류를 언급하면서 고구려 왕조를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지리적 전후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비문이 있어 그 연대의 정확한 추정이 가능한 유일한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처럼 그 역사적 가치를 고려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수준을 고려하여 우수한 것으로 인정된 20개의 고구려 고분을 선정하여 예비등재목록의 초안을 구성하였다. 이중 안악 3호분, 약수리, 수산리, 강서삼묘 중 대묘와 중묘, 덕흥리 고분 등 6개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수산리고분을 제외한 5개 고분을 방문하였다. 히라야마 재단이 기증한 고분내 온도변화측정장치 3벌이 안악 3호분과 강서대묘, 덕흥리 고분에 설치되었다.

벽화는 약 1500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초기 한반도에서 사용된 도료를 분석한 연구가 지금까지는 없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보존문제에 대해 관심이 증대되면서 최근에는 도료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강서대묘 및 중묘,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의 매장실에는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 구조물이 세워져 있는데, 몇몇 벽화는 이 유리 위에 맺힌 물방울들 때문에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분의 좁은 공간으로 인해 한 번에 5, 6명 이상은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 밖에도 1042년에 창건되었고 팔만대장경목판 한 벌이 소장되어 있는 고려 왕조 사찰 보현사를 둘러보았으며, 개성 성균관, 개성 고려역사박물관 등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고려 왕조 시조 왕건릉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의 매장실도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왕건릉은 1995년에 개축되었는데, 고분의 대좌를 장식하고 있던 12지신 석상들은 새로 옮겨져 매장실로 연결되는 통로를 따라 다시 배치되었다. 유리판 벽에 맺힌 물방울들로 인해 벽화는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는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훌륭한 자연경관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능이었는데, 전체 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주 탁월한 위치에 있었다. 매장실에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대신 고분내부를 설명해 놓은 작은 모형이 별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 고분은 1975년에 폐쇄되었다.

나에게 이번 북한여행은 1988년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 10년간 급격하게 변화해 온 중국과는 달리, 평양은 장식 없는 벽이라든가 저녁에도 조명이 부족한 거리, 많지 않은 교통량, 줄지어 걷고 있는 시민들 등 별로 달라지지 않은 조용한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역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유네스코의 이번 조사활동은 나에게 북한의 고구려고분들을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고 이를 통해 1998년 6개월 동안 했던 중국 동북 지역 현지조사의 내용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북한당국과 유네스코 파견단 양 측은 이번 조사활동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단히 만족하였으며, 북한의 전문가들과 직접 토론하고 의견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북한의 전문가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인데도 활동 수행에 필요한 각종 문서들을 준비하고 번역하는 데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북한 당국은 그들의 문화유산 보호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잘 관리되고 있는 유적들의 아름다움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관광객을 위한 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더라도 이러한 높은 수준의 보존·관리 활동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