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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난 한국 춤, 남미를 달구다

삼바와 탱고의 고장인 남미에서 한국 춤 공연을 한다면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업을 처음 기획했을 때 품었던 불안감은 서울시 무용단과 10월 18일부터 11월 3일까지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4개국 순회공연을 마친 후에야 없어졌다. 결과는 물론 대성공. 20시간이 넘도록 비행기 좌석에서 뒤척이면서 지구촌 시대에도 역시 남미는 먼 곳임을 실감했지만,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는 공연단 모두의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재단의 정종문 이사를 대표로 서울시 무용단의 임학선 단장, 15명의 무용단원, 2명의 스태프, 필자 등 20명으로 구성된 공연단은 멕시코시티의 Teatro Julio Castillo(10.20-21), 부에노스아이레스의 Centro Cultural General San Martin(10.25-26), 몬테비데오의 SODRE(10.28), 상파울로의 Teatro Popular do SESI(10.31)에서 총 6회 공연했으며, 특히 상파울로에서는 한-브라질 수교 40주년 기념일에 공연함으로써 행사의 의미를 더해 주었다.
이번 공연의 레퍼토리는 태평성대, 살풀이, 강강술래, 진도북춤, 부채춤, 태평무, 천도, 장고춤 등 한국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으로 구성되었다. 흔히 한국 전통무용이라고 하면 부채춤과 장고춤, 살풀이 등을 연상하게 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런 춤들은 모두 20세기에 안무된 창작무용이고 강강술래, 진도북춤 정도가 전통적인 한국의 공동체 문화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깨의 춤사위, 의상과 배경음악 등의 전통적인 요소가 ‘한국무용’이라는 말을 모든 레퍼토리들에 적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서울시 무용단의 임학선 신임 단장이 안무한 「천도」는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달램으로써 산 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춤으로 주제, 무대미술, 조명 등 모든 면에서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서정적인 움직임보다는 빠른 템포의 움직임과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민속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최대한 살린 이 작품은 소도구, 무대장치, 조명 면에서도 관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무당굿에서 사용되는 무당방울과 신대, 긴 무명천, 꽹과리, 서낭당을 연상시키는 여러 색상의 기다란 천과 도깨비 모양의 배경막, 현란한 조명, 거기에 왕무당 역을 맡은 무용수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무대를 아예 굿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전체 3부분 중 중반부만을 선보였는데, 신을 청해 들이는 청신무(請神舞)와 신을 청해들인 후 즐겁게 노는 오신무(娛神舞)가 왕무당의 신대춤과 소무당들의 무당방울춤, 베가름춤으로 활기차게 이어졌다. 베가름춤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망자의 넋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제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왕무당이 소무당들이 들고 있는 하얀 베를 가르고 나가는 순간,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의 입에서는 탄식에 가까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천도와 함께 관객들이 가장 열광적인 호응을 보인 레퍼토리는 부채춤과 장고춤이었다. 무용수의 화려한 의상과 나비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한 부채들의 현란한 움직임에 관객들은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마지막을 장식한 장고춤은 타악과 춤이 이렇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점점 빠른 리듬과 몸짓으로 관객들을 압도했으며 15명의 무용수들이 일제히 장구채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순간 관객들은 기립박수와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한국 춤 공연에 대한 현지 방송과 언론의 관심도 대단하여 멕시코, 우루과이, 브라질에서는 공연 실황을 녹화하여 방영했고 미처 실황을 녹화하지 못한 아르헨티나에서도 우루과이에서 녹화한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공연단을 인솔한 재단의 정종문 이사와 무용단의 임학선 단장은 리허설과 공연 준비에 바쁜 중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 때문에 더욱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루과이에서는 공항에서 TV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비행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다음 나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신문에 난 공연 사진과 기사를 돌려 읽으며 보람을 느끼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관객들은 당연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겠지만 막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많은 스태프의 땀과 무용수들의 피나는 연습이 있었다. 특히 무용에서는 조명의 역할이 중요한데, 줄거리와 무용수들의 위치에 맞는 분위기 연출에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조명 속에서 무대 배경과 소품들은 살아 움직이고 무용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신명이 깃들이게 된다. 조명기기들을 하나하나 매달고 무대 각 부분을 비추며 각도, 초점을 결정하는 포커싱 작업을 거쳐 레퍼토리별로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콘솔 메모리에 조작 순서를 기억시키는 과정은 기계적인 정밀함과 예술적인 섬세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일이다.
멕시코에서는 기압이 낮아서 산소 부족으로 몇몇 단원들이 고생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잦은 항공 스케줄 지연으로 공연 준비 시간이 줄어들어 짧은 시간에 공연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일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연단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으고 대사관 관계자 분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무용단원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리허설과 공연을 해내는 프로정신을 보여 주었다.

해외에 공연단과 함께 나가 현지 관객들의 갈채와 환호를 지켜볼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동시에 국내에서 우리 문화와 예술이 받는 대접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춤과는 다른 분야지만 세계적 미술전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98년 구호는 “이제 중심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로 현대의 예술이 지역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음을 대변해 주었고, 실제로 브라질의 카니발 문화를 중심으로 행사가 기획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면에 외국에서 인정받는 우리의 고유한 예술작품이 국내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히려 외국에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일부 서구 편향적인 작품이 국내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우리 시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반성하게 해준다.
서로 다른 문화권 간에 문화 교류가 필요한 이유는 서로 다른 문화를 상호간에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한편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 사람들끼리도 상대방 문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예술적 감동이 인류에게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교류의 내용은 각 문화권에 고유한 것이면서도 예술로서도 질적 완성도를 가진 것이 적합할 것이다.
공연의 성공을 재는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번 순회공연은 관객 참여와 호응, 언론 보도 면에서 보면 분명히 성공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공연단의 대표로서 냉철한 판단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정종문 이사, 공연의 예술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공연마다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애쓰신 임학선 단장, 어려운 여건에서도 마지막 무대까지 한국의 춤을 유감없이 보여준 단원들, 매번 밤늦게까지 설치작업을 하던 조명감독과 무대감독, 대사관 직원분들과 통역을 맡아 애써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오케스트라의 한 귀퉁이에서 가끔 낮은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되고 싶다던 어느 수필가의 말이 떠오른다. 필자도 이번 공연과 관련된 모든 분들께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처럼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