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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놓는 파란 눈의 한의사

아직 많은 이들에겐 한국의 전통의학인 한의학이 낯설다. 그런데 이 한의학에 푹 빠져, 마침내 한의사가 된 오스트리아인이 있다. 라이문트 로이어 씨가 그 주인공이다. 로이어 원장에겐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외국인 한의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제2, 제3의 라이문트 로이어’는 멀기만 한 걸까? 이는 로이어 원장의 바람이기도 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한약 특유의 은은한 향기다. 매연에 찌든 대도시 한복판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부드러운 향기다. 그 향기가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는 듯하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진료실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잠시 기분 좋은 향기에 젖어있는데, 키가 훤칠한 ‘파란 눈’의 한의사가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것도 유창한 한국말로. 그가 바로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트 로이어 원장이다.

한의학과의 운명적인 만남
라이문트 로이어 원장이 한국을 처음 찾은 건 1987년.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양의 신비를 찾아 무작정 아시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너무 많이 알려져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고, 또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라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한국을 택하게 된 이유였다.
“3개월간 배낭여행을 하면서 태권도장에 다녔어요. 좀 더 한국을 알고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운동을 하다가 발목을 다쳤어요. 그때 서울의 종로에 있는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았어요. 그냥 바늘 같은 것으로 찔렀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더군요. 참 신기한 경험이었죠.”
그와 한의학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국에 돌아간 그는 2년 후인 1989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한의학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말이 통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법. 그래서 우선 연세대 어학당에서 일년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자와 생소한 동양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동양철학과 한문학도 배웠다. 그리고 1991년, 드디어 대구한의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한의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한국에서 생활한 지 올해가 19년째. 한국 속담 중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세월이면 강산이 두어 번은 바뀌었을 시간이다. 그래서일까, 유머감각까지 곁들인 그의 유창한 한국어가 더 이상 신기하거나 낯설지 않다. 그 스스로 ‘한국어가 모국어’라고 할 만큼 한국말이 능숙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 진짜 오스트리아인 맞아? 하는 생각조차 든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언제 자신을 한국인처럼 느낄까?
“요즘은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런 것 같아요. 특히 음식이 그래요. 아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집에서는 대부분 한국음식을 먹는데 요즘은 묵은 김치 맛에 푹 빠져 살아요. 얼마 전에 아내가 김장을 담갔는데 묵은 김치를 버리려고 하더군요. 그런데 먹어보니 너무 맛있는 거에요. 요즘은 그 김치만 있으면 밥 한 그릇 뚝딱 비워요.”
특별히 좋아하는 한국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청국장!”이라고 말한다. 정말이지 이 대목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청국장은 그 독특한 냄새 때문에 한국인들도 안 먹는 사람이 많다.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한국음식이 청국장이라고! 이 사람, 정말 한국사람 맞다. 음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의사로서 한국음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국음식은 단순히 혀끝에서만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에요. 한국음식에는 음양오행에 따른 다섯 가지 맛이 다 들어있죠. 사람의 몸을 작은 우주로 보는 한의학의 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지요. 음식을 먹었을 때 혀에서부터 발끝까지 느껴지는 기운이 있다는 얘기예요.”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고국이 독일이고 또 대한한의사협회 홍보위원도 맡고 있는 터라 그는 유럽 출장이 잦은 편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럽에선 한의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유럽에서도 중의학 특히 침의 효과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뜨거워요. 실제로 독일에서는 의사 6명 중 1명이 침을 사용하는데, 그 수가 2~3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왔어요. 한국의 전체 한의사 수가 2만 명이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죠. 하지만 한의학에 대한 인식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는 중국의 중의학이나 일본의 화한의학 , 유럽의 대체의학보다 훨씬 뛰어난 한국의 한의학이 세계로 뻗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한의학의 세계화를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터라 더욱 그렇다.
“한의학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이 부족하고 홍보가 미흡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일단 한의학의 우수성을 접하게 되면 저처럼 빠져드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어요.”
그에 따르면, 서양에서 행해지고 있는 동양 의술은 아직 침에만 국한되어 있다. 때문에, 틈새를 공략해서 한의약과 같은 새로운 분야를 선보인다면 그 수요와 경제적 가치는 상당할 것이라고 한다. 단, 보통 탕제(湯劑)로 마시는 한약을 먹기 좋게 알약이나 가루약으로 만드는 등 한약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체계적인 노력도 뒤따라야 하겠지만.

‘제2의 라이문트 로이어’를 기다리며
현재 그가 근무하고 있는 자생한방병원 인터내셔널 클리닉에는 주한 외국대사들의 출입이 잦다. 주한 외교사절단장인 엘살바도르 대사 알프레도 웅고, 주한 파나마 대사 다니엘 엔리케 아브레고, 주한 멕시코 대사 린드로 아레야노 등도 한의학에 매료돼 있다. 마침, 인터뷰를 위해 로이어 원장을 찾아간 날도 빌헬름 돈코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진료를 받고 있었다. 이 밖에도 로이어 원장을 찾는 사람들은 많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한의원 찾기를 꺼려했던,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나 유학생들이다. 전체 환자 중 50%가 외국인이라고 한다.
그의 꿈은 3년 안에 오스트리아 빈에 한의원을 여는 것이다. 그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혹시 아는가? 몇 년 후 여러분들 중 누군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가 발목을 다쳐 찾아간 곳이 그가 운영하는 한의원일지. 또 그곳에서 누군가는 그 ‘신기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한의학을 배우러 한국을 찾아올지도. 그래서 ‘제2의 라이문트 로이어’가 나올지도.

“한의학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중시하는 의술입니다. 병을 치료하기 전에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 한의학이죠. 특히 스트레스가 맣은 현대인들에게는 무엇보다 마음 치료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