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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과 만날수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한국미술입니까?”
몇 년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받아 본 질문이다. 때로는 ‘한국에 그런 게(미술) 있기는 해요?’라는 회의적인 질문이 뒤따라 나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흔하지 않은 직업으로 여겨지는 길을 가다 보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난 호기심 어린 관심, 화가 나게 하는 질문, 짜증나는 심문 등이 뒤섞인 반응을 받게 된다. 비내리는 여름날 서울에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처음으로 한국미술과 만나게 된 것은 계산된 직업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히 나의 미래를 결정짓게 된 운좋은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으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지역의 물질문화보다는 언어에 매력을 느껴서 였다. 중등학교 교과과정에 미술사가 들어있지 않은(불행히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에서 학교를 마친 나는 사물, 형태, 색 등을 공부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대신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자리를 제안 받기도 했으나 나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SOAS 입학 첫 해에 6개월간의 일본연수 기회는 물론 흥미로운 과정으로 이루어진 집중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3, 4학년 시절에는 일본어 과정과 함께 미술고고학과의 강좌를 함께 수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한국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수강한 박영숙 교수의 한국미술과 고고학 강좌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일부분을 형성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전에 봤던 그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달라 보였던 문화에 대해 매력적인 통찰을 갖게 해 주었다. 나는 한국의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답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질문들에 푹 빠져버렸으며, 이것은 앞으로 연구해야 할 많은 것을 제시해 주었다. 박영숙 교수의 변함없는 격려와 지도 하에 1993년 가을 나는 SOAS에서 한국미술과 고고학으로 대학원 학위 과정을 시작했다. 한국미술 강좌를 듣는 학생수가 적다는 사실뿐 아니라 SOAS 도서관이 소장한 관련 도서의 수도 비교적 적다는 사실을 볼 때 이 분야의 연구가 덜 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책과 학술지는 한국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 독해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시급하고도 분명한 일이었다.

SOAS는 서구에서 가장 발전된 한국학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대학 중 하나이며, 윤재훈 교수와 로스킹 교수 밑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일주일에 여섯 시간 수업을 하고, 매일 숙제를 하면서 언어공부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며 일년 동안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학원 연구에 필요한 수준의 어학실력을 갖추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1995년에 한국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 10개월간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어 고려시대 청동거울에 대한 박사과정 연구와 한국에서의 현지조사 역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시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소장학자 지원은 한국학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나는 재단이 이러한 지원을 재단 사업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계속 시행해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