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살기 위한, 내집같은 한국학

한국 사람들이 나한테 자주 하는 질문들 중 하나는 “왜 한국학을 선택 했느냐”이다. 나는 항상 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지금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나중에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면 읽어보라”고 하였다.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나는 이 글을 쓸 때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14살 때 나는 갑자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도 못 참을 정도로 아픔이 심했고, 그로인해 병원에 입원해서 18개월을 보냈다. 이 18개월 동안 나는 줄곧 누워 있기만 했다. 걷지도 못하고 앉아 있지도 못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누워있던 기간은 청춘 시절의 가장 아름다웠던 14살부터 16살까지였다. 조그마한 병실 안에서 18개월 동안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던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동양화 화집을 보게 되었다. 첫 순간부터 그 동양의 낭만적인 모습에 남김없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그 때 당시 의사들이 말하기를 나와 같은 병이 있으면 앞으로 제대로 취직은 물론 사회생활도 못 할 정도라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하게 된 동양을 배우기 위해서 의사 말을 듣지 않고, 병원에서 준 서류를 병이 없는 것처럼 다른 서류로 바꾸고, 허리 전용 체조도 하며 아픔을 참으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양학부에서 중국역사를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인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는 ‘조선역사’나 ‘한국역사’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5년에 한 번 조선어 과정 학생들을 뽑았고, 조선역사 과정은 비정규적으로 일본역사 겸 조선역사 전공을 갖고 있는 교수(L.V. Zenina 교수) 지도 아래 가끔 뽑기도 했다.
1982년에 중국역사를 공부했던 나와 동창이었던 A.N. Lankov 씨(현 국민대 교양과정부 교수)와 개인 프로그램으로 중국역사를 배우면서 학교 측으로부터 한국(조선) 역사를 (즉 거의 90% 독학으로) 동시에 배울 것을 제안 받았다. 한국역사 과정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연구 논문도 일본과 중국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을 좋아한다. 그 잊혀진 것을 다시 찾아내고 빛을 보게 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학교 측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1982년에 나의 한국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병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한국학은 내 삶의 중심이 되었고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가 없으면 못 사는 것과 같이 나에게 뗄 수 없는 나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역할은 특별했다. 나를 안아주고 지켜주는 ‘한국 어머니’로 비유하고 싶다. 1992년 5월 레닌그라드 아이스발레 공연 때 서울에 통역관으로 왔던 나는 발레단원들이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당시 서울역 쪽에 사무실이 있었던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들러서 즉석에서 1993년 체한 펠로십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기다리지도 못하게 선정 과정을 통과하여 1993년 7월말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때 구 소련시대의 사고방식을 (초청한다면 모든 책임을 짓는다는 사고방식) 가지고 있던 나는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들고 서울역 쪽 한국국제교류재단 사무실에 바로 갔었다. 오전 12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재단의 직원 두 분이 함께 점심을 들자고 초청하였다. 그 중 한 분은 현재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 소장으로 계시는 윤금진 소장님이었고 또 다른 분은 현재 정보화지원부장으로 계신 황오석 부장님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점심 식사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평생토록 항상 나와 함께 남아 있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대표적 인상이다.

1995년에 다시 한번 재단의 한국어 펠로십을 받았다. 그 해에는 서울에 장맛비로 수재민들이 많았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내가 하숙집에서 빌렸던 반 지하 방에 물이 새서 바닥이 흙탕물로 가득 찼다. 그 사실은 알게 된 그 때 당시의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님은 나를 특별히 불러 힘을 내라시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재단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나의 첫 러시아어 판 한국학 책도 (참고로 나의 첫 한국어판 책은 1990년에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출간된<조선일기>이다.) 출판되었다. 그 책은 628쪽에 달하는 <한국통사특강, 고대부터 2000년까지>로, 당시 2000년대 초로 볼 때 출판사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의 한국사 책을 왜 출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결국 재단을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출판된 지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 같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우리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교사들에게 계속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그 지원이 아니었다면 100년 전통의 우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의 한국학은 지금처럼 활발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왜냐하면,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서는 살기 힘들어 학교를 버리고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국제교류재단 사무실에 올 때마다 냉정한 공공기관에 오는 느낌이 없고 아주 가까운 친구, 그 보다는 가까운 친척 집에 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재단이 나와 같은 모든 한국학자들에게 가까운 친척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만 재단을 통해서 전 세계 해외 한국학자들은 하나의 가정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