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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의자가 만들어 낸 경이로운 메세지

국내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연극 「보이첵」이 지난 1월 21일부터 27일에 걸쳐 열린 런던마임축제에 초청되어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의 퀸엘리자베스홀 무대에 올랐다. 헤럴드에인절상, 토털시어터상을 수상한 연극 「보이첵」은 런던마임축제에서 피아졸라의 음악과 배우들의 아름다운 퍼포먼스로 관객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의 연극을 세계 관객들에게 알렸다.

장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런던에서 우리를 환영해준 것은 역시나 빗줄기였다. 한국처럼 코끝 시린 추위는 아니더라도, 뼛속으로 런던만의 추위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싶어 윗옷을 잔뜩 움켜진 배우들의 손에는 작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튿날 오른쪽으로 런던의 새 천년 명소로 자리 잡은 세계 최대의 회전관람차인 ‘런던 아이(London Eye)’가 보인다. 아! 런던이구나. 런던의 문화명소인 사우스뱅크센터에서의 공연이라니…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오래전 유럽 배낭여행으로 지나쳐간 런던을 떠올리며, 처음 방문하는 설렘으로, 또 누군가는 지친 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런던의 공기를 깊이 마신 채 극장의 리허설 룸으로 향했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보이첵」이 런던마임축제에 초청되었다. 2007년 에든버러에서 좋은 리뷰와 함께 헤럴드에인절상, 토털시어터상 수상과 더불어 BBC가 선정한 페스티벌 출품작 톱10 중 하나로 뽑힌 「보이첵」은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의 퀸엘리자베스홀에서 2008년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에든버러에서 「보이첵」을 본 런던마임축제의 예술감독은 현대무용과 연극을 결합시켜 만든 작품이 갖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주저 없이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런던마임축제 개막작으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보이첵」을 꼽았다.
런던마임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비전 있는 공연예술축제 중 하나로 프랑스의 미모스 마임축제와 함께 대표적인 마임축제다. 런던마임축제의 성격은 그 슬로건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Eye-popping visual theatre for the digital age!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비주얼 연극!). 런던마임축제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판토마임’이 아닌 신체연극, 비주얼 연극, 오브제 연극, 움직임 연극, 뉴 서커스 등 움직임의 텍스트를 중요시하는 새롭고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을 수용하고 있으며 매년 1월 바비칸ㆍBACㆍ퀸엘리자베스홀ㆍ퍼셀룸ㆍICA 등 런던의 세계적인 극장과 공동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다. 2008년 런던마임축제에는 영국ㆍ독일ㆍ러시아ㆍ벨기에ㆍ스페인ㆍ일본ㆍ포르투갈ㆍ프랑스ㆍ한국에서 16편이 초청되었다. 축제 30주년이 무색하지 않게 티켓은 이미 크리스마스 이전에 80% 이상이 매진된 상태였으며,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공연예술 관계자들도 새로운 조류의 작품을 찾기 위해 런던마임축제를 방문하고 있다.



축제의 개막작을 포기하고 대신 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공연하게 된 「보이첵」을 준비하면서 대극장의 객석 규모만큼이나 큰 설렘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에든버러에서의 큰 성공으로 유럽에 제대로 난 입소문 때문에도 긴장감은 더했다. 에든버러에서 「보이첵」을 본 관객과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이 오직 「보이첵」만을 위해 런던으로 달려오겠다는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셋업과 리허설을 모두 마치고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미 객석 대부분이 찼다는 주최 측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관객은 얼마나 올까? 「보이첵」은 한국어 대사가 많은데, 혹시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관객이 작품을 좋아할까? 공연 시작 전 배우들은 마치 처음 서는 무대인 양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영국 관객과 만날 마지막 채비를 하였다. 서서히 채워지는 객석과 점점 분주해지는 입구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대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가 관객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 앉을 때나 사용되는 의자가 「보이첵」과 함께 어떤 환상을 만들어줄지 모른 채, 무대 위 의자는 점점 관객의 눈동자 속으로, 관객은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피아졸라의 음악과 함께 배우도 의자도 관객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간간이 터지는 관객들의 웃음소리, 격정적인 음악과 몸짓에 터져나오는 긴장된 숨소리가 작품에 몰입되어 있는 관객을 느끼게 해준다. 공연의 유일한 소품인 의자는 때로는 군악대의 행진도구로, 남녀간 사랑의 도구와 공간으로, 보이첵의 심정으로, 보이첵 실험대로, 때로는 거대한 술잔으로 마법처럼 시공간을 만들어준다. 마리의 죽음 이후 보이첵과 코러스들은 피아졸라의 격정적인 음악과 함께 격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공연장 전체를 압도하며, 관객은 호흡할 시간조차 없이 「보이첵」의 라스트댄스에 빠져든다. 암전 후 무대 위에 남아 있는 텅 빈 의자들. 관객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공연 후 많은 관객이 돌아가지 않고 무대 위 의자를 살펴보기도 하고, 공연자들이 언제나 나올까 하는 궁금증으로 극장 안과 로비를 맴돌았다. 극장에서 만난 몇몇의 관객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빠른 배우와 의자들의 변형과 뛰어난 앙상블에 감탄하며, 한국어 대사가 많은데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고, 전체 작품을 이끌어가는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대해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끊임없이 “Congratulations!”를 연발했다. 런던에서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공연 모두 관객은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 온 보이첵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2008년 런던마임축제를 시작으로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보이첵」은 한국의 동시대 연극으로 세계를 향해 새로운 만남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