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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6월 ~ 2024년 8월

Arts & Culture 2024 SUMMER

Arts and Culture Calendar 2024년 6월 ~ 2024년 8월 필립 파레노: 보이스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파레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이다. 작가의 활동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 및 신작으로 구성되며, 대형 신작 (2024), 최초의 작품 (1987)을 비롯해 40여 점을 선보인다. 기간 : 2024. 02. 28.~2024. 07. 07. 장소 : 리움미술관 홈페이지 : leeumhoam.org 소원을 말해봐 전시는 가벼움의 시대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회복해야 할 것들에 주목한다. 8인의 작가는 관람객에게 이야기와 지혜를 전하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일종의 ‘영적 여행’으로 구성된 전시에서는 가벼움이 삶을 흩어놓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성과 정신적 자유를 누리는 조건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기간 : 2024. 04. 23.~2024. 08. 04.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관 홈페이지 : sema.seoul.go.kr 서울의 젊은이와 대중가요 평범한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야기하는 서울생활사박물관에서 대중음악을 선도한 젊은이들이 불렀던 노래와 장소를 전시한다. 1930년대 종로 다방, 1950년대 명동 음악감상실, 1980년대 신촌 라이브카페, 1990년대 홍대 앞 클럽, 2000년대 온라인 공간 등 각 시대를 이끈 젊은이들이 즐겨 들은 음악부터 그 시절 낭만과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기간 : 2024. 05. 03.~2024. 09. 22. 장소 :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 : museum.seoul.go.kr/sulm/index.do 한국의 신발, 발과 신 이 전시는 발로부터 시작된 한국 전통 신발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신발이 가진 다양성과 문화사를 소개한다. 한국 신발과 복식 문화에 관한 것으로 발의 진화, 신발의 탄생부터 신분과 기후, 패션에 따른 신발,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신발 등 7부로 구성됐다. 기간 : 2024. 05. 14.~2024. 9. 22. 장소 : 국립대구박물관 홈페이지 : daegu.museum.go.kr MMCA 기증작품전: 1960-70년대 구상회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가운데 한국 구상화단의 형성과 성장에 자양분이 된 1960~1970년대 구상회화를 재조명한다. 자기 반영적이며 사적인 재현에서부터 장소와 일상,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풍경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공감하는 독특한 서정성을 띤 33명의 작가, 1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기간 : 2024. 05. 21.~2024. 09. 22.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홈페이지 : mmca.go.kr 80 도시현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이 드러나는 작품 전시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가나아트 컬렉션과 소장품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 및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다. 기간 : 2023. 05. 25.~2024. 08. 04.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홈페이지 : sema.seoul.go.kr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시아 최고 판타스틱 장르영화제인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오는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부천 일대에서 개최된다. 올해 역시 영화제의 정체성인 ‘이상해도 괜찮아’ 슬로건을 유지하는 동시에 메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AI와 관련해 국내 최초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도 도입하여 AI 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할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4.~2024. 07. 14. 장소 : 경기도 부천 일대 홈페이지 : bifan.kr 2024 여우락 페스티벌 국립극장이 지난 2010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여우락은 우리 음악과 다양한 예술 장르가 만나 새로운 무대를 선보이는 자리다. 올해 역시 정해진 틀 없이 한국음악 기반의 과감한 시도로 주목받는 음악가들과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독보적이고 새로운 차원의 무대를 펼칠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4.~2024. 07. 27. 장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하늘극장, 문화광장 홈페이지 : ntok.go.kr 여자야 여자야 시대와 사람을 고찰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해 가는 안무가 안은미(Ahn Eun-me 安恩美)가 를 통해 근현대를 살았던 신여성을 표현한다. 작품에는 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용기 있게 나섰으나 시대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면서도 자기만의 삶을 살았던 여자들의 면면과 움직임의 변화, 의복과 같은 상징적 요소들과 그 시대 유행어, 신조어 등이 등장해 무대를 더 풍성하게 꾸밀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05.~2024. 07. 06. 장소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홈페이지 : acc.go.kr Sync Next 세종문화회관 컨템퍼러리 시즌 ‘Sync Next(싱크 넥스트)’는 매년 여름 세종문화회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가장 트렌디한 예술 경험이다. 올해도 10주 동안 재즈, 코미디, 회화, 설치미술, 합창 등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한데 모여 장르에 대한 규정 없이 예술의 내일을 고민하고 관객과 소통한다. 기간 : 2024. 07. 05.~2024. 09. 08. 장소 : 세종문화회관 세종S씨어터 홈페이지 : season.sejongpac.or.kr/portal/season/syncnext24.do 평창대관령음악제 대한민국 대표 클래식 음악 축제인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올해 21회째를 맞는다. 오는 7월 24일부터 평창 알펜시아 일대 및 강원도 일원에서 개최된다. 올해는 ‘루트비히(Ludwig!)’를 주제로 콘서트, 찾아가는 음악회&가족음악회, 부대행사 등이 풍성하게 열릴 예정이다. 기간 : 2024. 07. 24.~2024. 08. 03. 장소 : 평창 알펜시아 일대 및 강원도 홈페이지 : mpyc.kr 2024 글로벌 웹툰 페스티벌 오는 9월 ‘2024 글로벌 웹툰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번 행사는 웹툰 종주국 입지를 다지기 위해 올해 처음 열리는 것으로, 팝업의 성지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 형식으로 진행된다. 팝업스토어 외에도 토크콘서트,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을 활용한 전시, 웹툰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콘서트 등을 다채로운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기간 : 2024. 09. 26.~2024. 09. 29. 장소 : 서울 성동구 성수동 에스팩토리 D동 일대

한국의 특별한 여름 별미, 물회

Arts & Culture 2024 SUMMER

한국의 특별한 여름 별미, 물회 물회는 과거 불을 피울 수 없던 목선에서 어부들이 간편하게 만든 뒤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였다. 하지만 그 탄생 배경은 그리 가볍지 않다. 밥이 주식으로 하는 오랜 전통, 갓 잡은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독특한 활어회 문화, 그리고 고추를 발효시켜 만든 고추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절묘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물회는 세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음식이다. 싱싱한 회와 각종 해산물, 아삭한 식감을 더해줄 야채와 고추장을 베이스로 한 시원한 육수가 어우러진 물회는 한국인들이 여름철 즐겨 찾는 보양식이자 별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발간하는 세계수산양식현황(SOFIA)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해산물 소비량은 매년 세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국토의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라는 환경 탓도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국의 많은 해산물 소비량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보다 더 넓은 바다를 가진 나라도 많기 때문이다. 해산물 소비가 많은 한국 한국인의 해산물 소비량이 매년 세계 순위권에 드는 이유에는 한국인의 독특한 식문화도 한몫한다. 우선 한국인은 김, 미역, 다시마 등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해조류를 먹는다. 심지어 수출도 많이 한다. 해조류는 바다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바다에 해조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생물이 사는 건강한 바다라는 증거다. 한반도의 바다는 육지와 가깝고 수심도 너무 깊지 않아 해조류 자생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햇볕이 닿지 않는 너무 깊은 바다나 육지와 멀리 떨어져 무기물이 충분하지 못한 바다에는 해조류가 자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한국인은 예로부터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조류를 활용해 다양한 요리를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바다의 잡초로 인식되었던 해조류가 한국인에게는 요긴한 식재료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한국인의 건강한 밥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생선을 익히지 않고 먹는 식문화를 들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이 일반화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가 유일하다. 서구의 경우 남미(특히 페루)에서 시작된 세비체(ceviche)라는 음식을 통해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문화가 일부 남아있다. 그런데 세비체는 엄밀히 따지면 생선을 전혀 익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비체는 라임이나 레몬에 해산물을 재웠다가 먹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열 대신 산(acid)에 의해 생선의 표면이 익는다. 날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것이 아닌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과 일본은 생선을 비롯한 다양한 해산물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을 오래전부터 이어오고 있으며, 이는 한일 양국 식문화에서 중요한 장르로 굳어졌다. 이렇게 생선을 날것 그대로 먹는 방식을 한국에서는 ‘생선회’, 일본에서는 ‘사시미’라고 부른다. 복합적인 맛을 즐기다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방식에서 있어 한국과 일본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일본은 날생선을 손질한 후 충분한 숙성을 거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부드러운 질감과 풍부함 감칠맛을 즐겼다. 숙성을 거쳐 부드러워진 사시미는 밥과 잘 어울렸다. 밥에 식초를 섞어 부패를 방지한 다음 사시미를 얹어 만든 음식이 스시다. 한국은 생선회를 먹는 포인트가 일본과 달랐다. 숙성된 생선회보다는 사후경직이 진행 중인 생선, 즉 단단한 질감을 선호했다. 대신 다양한 양념과 채소를 곁들였다. 일본이 간장과 고추냉이(와사비) 등 최소한의 소스를 사용해 생선이 가진 본래의 맛을 끌어내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한국은 간장, 된장, 고추장, 참기름, 마늘, 고추 등 다양한 부재료를 곁들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상추나 깻잎 등에 싸서 함께 먹었다. 얼핏 일본보다 덜 섬세해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미각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의도된 방향으로 발달한다. 생선과 소스 그리고 채소의 조화를 추구했던 한국인의 미각은 복합적인 맛을 즐기는 쪽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사시미를 먹는 일본인의 테이블은 단조로운 반면, 생선회를 먹는 한국인의 테이블은 매우 복잡하고 푸짐하다. 한국 어부의 패스트푸드, 물회 조선시대(1392~1910년)까지 한국의 어업은 나무로 만든 목선과 노를 젓거나 바람을 이용하는 무동력선에 의지했다. 근대 이후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동력선이 도입되었으나, 선박의 재질이 나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동력선이 도입되자 이전보다 훨씬 먼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먼 바다로 나갈수록 조업 시간은 길어졌다. 배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매콤하면서 새콤달콤한 육수는 무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기에 제격이다. 각종 회와 해산물, 그리고 야채를 덜어 먹은 후 남은 육수에 취향에 따라 밥 또는 면을 말아먹어도 좋다. 한국인의 주식은 전통적으로 쌀이나 보리 등을 익힌 밥이었다. 밥은 곡물의 껍질만 벗겨 낱알 그대로를 익힌 음식이다. 밀이나 메밀을 분쇄해 가공한 분식(粉食)에 비해 조리가 간편하고 영양 손실도 적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쌀과 보리에 함유된 탄수화물은 아주 단단한 구조로 결합 되어 있다. 여기에 열과 수분을 가하면 단단 구조가 깨지면서 부드럽게 변한다. 이를 겔화(gelation)라고 한다. 즉 쌀의 겔화가 진행되면 밥이 된다. 그런데 밥을 상온에 두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다시 딱딱해진다. 과거 한국 어부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이른 아침 먼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나면서 밥 한 덩어리를 챙겼을 것이다. 고된 바닷일을 하다 보면 금방 허기를 느끼게 된다. 집에서 가져온 밥은 이미 차갑게 식었고 그냥 먹기에는 딱딱하다. 불을 피워 물을 끓이면 딱딱한 밥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지만, 나무로 만든 목선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게다가 배 위에서는 여러 가지 반찬을 늘어놓고 여유 있게 식사할 상황이 아니었다. 차가운 물에 밥을 말았고 반찬으로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을 듬성듬성 썰어 넣었다. 여기에 고추장 한 숟가락을 곁들여 밍밍한 맛을 보완했다. 조업 중 잠깐 짬을 내어 밥과 생선회를 물에 말아 그릇째 들고 후루룩 마시듯 먹던 물회는 어부들이 배 위에서 쉽고 빠르게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고안한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 뚜렷한 지역별 특색 시원한 육수에 싱싱한 횟감의 조화가 일품인 물회는 어부의 음식에서 발전해 오늘날 바다 주변 관광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시원한 육수에 취향별로 고른 횟감과 아삭한 채소, 밥 또는 면을 선택해 후루룩 말아먹는 물회는 무더운 여름을 달래줄 별미가 되었다. 최근에는 몇몇 바닷가 주변에서 관광지 음식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소박한 음식으로 출발한 물회는 점점 화려하고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절에 따른 생선이나 해산물, 채소 또는 과일을 사용하는 것엔 크게 다를 것 없지만, 한국에서 물회는 ‘물회’라는 하나의 형식만 존재할 뿐 지역마다, 음식점마다 개성이 다른 음식으로 분화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와 달리 된장을 넣어 만든 육수로 물회를 만든다. 자리돔을 뼈 채 썰어 꼬들꼬들하고 담백한 회와 구수한 된장의 조화가 일품이다. ⓒ 비짓제주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시작된 일명 강원도 물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의 물회다. 냉수나 차가운 육수에 초고추장과 식초,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양념이 더해져 매콤 새콤한 맛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대중적인 맛이다. 횟감으로는 주로 담백한 물가자미 등을 사용하며 강릉에서는 길게 채 썬 오징어를 넣은 오징어 물회도 유명하다. 또 속초에서 시작해 전국 체인을 두고 있는 청초수 물회에서는 활전복, 해삼, 멍게, 문어, 날치알과 계절에 따른 여러 가지 횟감, 사골육수 등이 어우러진 ‘해전물회’ 메뉴가 인기다. 사람들은 이 물회를 맛보기 위해 사시사철 긴 대기시간도 기꺼이 감수한다. 고추장을 베이스로 하는 또 다른 물회에는 포항식 물회도 있다. 이 물회의 가장 큰 특징은 언 육수를 갈아서 슬러시 형태로 그릇에 담는 것이다. 각종 횟감과 야채 위에 팥빙수처럼 수북하게 쌓인 고추장 베이스의 매콤달콤한 육수를 함께 버무려 먹는 방식이다. 동해식 물회가 식초의 맛을 살린 육수라면 포항식 물회의 육수는 고추장의 맛을 살린 진득함이 두드러진다. 얼핏 보이엔 물회보단 비빔회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슬러시 육수 덕분에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원하게 먹을 수 있다. 다른 지역의 물회가 대부분 고추장을 기본으로 하는 육수를 쓰는 반면, 제주도에서는 된장을 사용한 육수를 썼다. 지리적인 특성으로 고추가 귀했기 때문이다. 물회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고추장보다는 된장으로 맛을 내는 음식이 많다. 주로 자리돔을 넣은 자리물회가 유명하다. 된장으로 양념한 물회에 제피나무 잎을 약간 넣어 특유의 향을 살리고 생선 비린내를 없앴다. 또 톡 쏘는 빙초산 한 방울을 넣은 뒤 보리밥을 말아서 먹었다. 뼈째 썰어 투박하지만, 담백한 회와 구수한 된장의 조화가 돋보이는 제주 물회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특징과 매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계절과 지역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생선을 사용하고, 고추장에 설탕, 참기름, 식초, 콩가루 등을 더해 특별한 소스를 만들기도 하고 물 대신 전용 육수를 만들어 사용하는 곳도 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저마다 ‘물회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회는 그 어느 곳도 원조가 아니면서, 그 모든 곳이 원조가 될 수도 있는 미스터리한 음식이다. 이것은 한국 음식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단조로워 보이는데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섬세하다. 아무튼 한국의 여름은 물회가 있어 행복하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Arts & Culture 2024 SUMMER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신세계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이 불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이돌 그룹으로 여느 아이돌처럼 앨범을 내고 SNS로 일상을 공유하며, 팬들과 소통한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의 실체를 궁금해하기보다 이들의 음악과 춤에 집중한다. 지금 버추얼 아이돌은 현실 세계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며 새로운 생태계로 주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VLAST 2024년 2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백화점 더현대 서울이 온통 가상의 존재로 뒤덮였다. 오픈 이래 최대 규모라는 미디어 아트도 대단했지만, 백화점 지상과 지하를 모두 점령한 버추얼 아이돌의 기세가 놀라웠다. 이 날 참여한 버추얼 아이돌은 6인조 걸그룹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과 5인조 보이그룹 플레이브(PLAVE), 그리고 6인조 걸그룹인 스텔라이브(StelLive)까지 무려 세 팀의 버추얼 아이돌이 동시에 대형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가로 33m, 세로 5m 규모의 LED를 통해 30분간 송출된 이들의 공연은 팬은 물론 그날 현장을 찾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도록 무료로 진행되었다. 또 지난 3월 9일에는 플레이브가 인기 걸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 가수 비비(BIBI) 등을 제치고 MBC 음악방송 < 쇼! 음악중심 >에서 1위를 차지했다. 버추얼 아이돌이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3월 9일 플레이브는 버츄얼 아이돌 최초로 국내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브는 팬들을 위해 1위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 VLAST 버추얼 아이돌 신드롬 버추얼(Virtual), 즉 ‘가상’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이 현실에서 얻는 인기까지 가짜라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들의 인기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부 마니아 문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좋아하는 팬들의 팬심은 결코 버추얼이 아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2023년 9월,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는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 페스티벌인 ‘이세계 페스티벌’이 열렸다. 버추얼 걸그룹인 이세계아이돌과 버추얼 유튜버, 버추얼 아티스트를 비롯해 현실 아티스트 등 총 16팀의 아티스트가 음악으로 가상세계와 현실을 연결했다. 메타버스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메타버스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페스티벌을 찾은 현장 방문객은 20,000여 명에 달했으며, 극장 동시 상영 객석률은 95.7%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또 2023년 12월 28일, 국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는 이세계아이돌 관련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 단행본 펀딩이 진행됐다. 목표 금액은 2천만 원이었다. 펀딩이 시작된 지 24시간 만에 25억 원이 모였고, 한 달 뒤 최종 모금액 41억 9,889만 원을 달성했다. 텀블벅에서 진행한 국내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고 모금액이었다. 이제 데뷔 갓 1년을 넘긴 버추얼 보이 그룹 플레이브의 사례도 놀랍다. 2024년 2월 발표한 이들의 두 번째 미니 앨범 < ASTERUM : 134-1 >은 발매 첫 주에만 56만 9,289장이 팔렸다. 이는 버추얼 보이 그룹이 거둔 최초이자 최고 기록이었고, 그 비교 대상을 일반 보이 그룹으로 넓혀도 그룹별 최고 기록 17위에 달하는 상당한 수치였다. 2023년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엔데믹 분위기 속 오프라인이 다시 강조되며 케이팝 아이돌 그룹 초동(발매 첫 주 판매량)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에 들어선 가운데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이들이 케이팝계에서 주목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3년 발표한 데뷔 앨범 < ASTERUM : The Shape of Things to Come >은 초동 판매량 20만 장을 넘기며 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2024년 현재, 한국의 버추얼 아이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지표가 이들이 자신만의 생태계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다는 증거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현실과 가상세계가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는 컨셉으로 열린 이세계페스티벌(ISEGYE FESTIVAL)은 국내 최초 메타버스 연계 오프라인 뮤직페스티벌이다. 해당 무대에서 공연하는 이세계아이돌(ISEGYE IDOL)의 모습. ⓒ 패러블 엔터테인먼트 버추얼 아이돌의 시작 버추얼 아이돌이 문화산업계에 이토록 빠르게 자리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 걸친 팬데믹은 문화예술계 대부분의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AI(인공지능), 메타버스 등 기술을 중심으로 한 흐름에 있어서만은 21세기의 지난 모든 시간을 합해도 부족할 만한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기술은 개척할 수 있을 만한 모든 업계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마침 세상은 IP(지적재산권) 소유자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술과 IP를 결합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도전이 그렇듯 살아남은 일부를 제외한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추얼 아이돌은 그렇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가운데 하나였다.   특색 있는 버추얼 아이돌 사실 버추얼 아이돌, 나아가 버추얼 휴먼에 대한 산업과 대중의 욕구는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아마 버추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사이버 가수 아담(Adam)을 떠올릴 것이다. 1998년 1월 데뷔한 그는 당시 대세를 이루던 세기말 감성과 호응하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20년 등장한 걸 그룹 에스파(aespa)는 데뷔 초 현실 멤버 4명에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그들의 아바타 4명을 합한 8인조 그룹이라며 자신들을 홍보했고, 2021년에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없이 사람을 닮은 비주얼을 자랑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은 과거의 버추얼 휴먼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버추얼 휴먼의 경우 크게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형과 3D로 구현된 실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선 사례들이 사람에 가까운 실사형이었다면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 대부분은 캐릭터 형이다. 더현대 서울 팝업에 참여한 세 그룹 역시 멤버 모두 캐릭터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실사형의 경우 그래픽 기술 구현을 하기 까지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소요된다. 팬과 빠르고 가깝게 교류할수록 호감을 얻는 아이돌 산업의 기본 규칙을 생각하면 꽤 치명적인 단점이다. 또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지나치게 닮은 경우 느끼는 불쾌한 감정을 뜻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도 무시할 수 없다. 실사형과 캐릭터형으로 이들의 외양을 나누고 나면, 이제는 속성을 따져볼 차례다. 최근 버추얼 아이돌계 가장 큰 성공 사례로 주목받는 이세계아이돌과 플레이브를 보자. 흔히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쉽게 말해 이세계 아이돌은 ‘버추얼’에 플레이브는 ‘아이돌’에 방점을 찍으며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나가고 있다. 버추얼과 유튜버의 합성어인 ‘버튜버(VTuber)’ 멤버를 앞세운 이세계아이돌은 그룹 결성 및 운영, 활동 방식까지 자신들이 속한 버튜버 세계의 공식을 기본으로 한다. 서바이벌을 통해 아이돌 그룹으로 탄생시킨 팀 서사부터가 버추얼과 아이돌 사이의 새로운 연결 고리 그 자체다. 이 연결 고리는 비단 아이돌 뿐만이 아닌 앞서 언급한 ‘이세계 페스티벌’ 같이 음악계 전반을 아우르는 페스티벌 영역까지 확장되는 중이다. 한편 플레이브는 단지 외양만 캐릭터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보이 그룹과 전혀 다르지 않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플레이브는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앨범을 내고 음악 방송 무대에 서며 라디오에 출연한다.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팬 이벤트도 열고 팬들과 소통하는 실시간 라이브 방송도 주기적으로 제작한다. 플레이브의 이 같은 특징은 이들의 소속사가 버추얼 캐릭터 전문 회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원천 기술은 버추얼 캐릭터와 인간 사이의 감도 높은 결합이다. 인간의 매력과 버추얼 캐릭터의 매력이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시너지로 승화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하는 등 활발히 참여하며 실력파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지금껏 없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 아이돌, 캐릭터, 유튜버, 음악이 혼재하는 세상. 그곳에 버추얼 아이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현시점에서 이들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실제로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조차 자신들이 사랑하는 세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아직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 하나만은 명쾌한 사실이다.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이 어떤 세계에서 왔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중요하지 않다. 또 멤버 뒤에 있는 실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버추얼 아이돌의 모습 그대로와 그들의 음악, 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실존하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반 팬심이나 덕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버추얼 아이돌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기 위해선 결국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을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게 가장 쉬운 지름길일 것이다.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Arts & Culture 2024 SUMMER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고래』 천명관(千明官) 작, 김지영(金知暎) 번역, 365쪽, 22달러, 아키펠라고 북스(2023) 운명의 베틀로 짠 태피스트리 천명관의 『고래』는 세대를 넘나들며 운명의 실타래에 얽힌 두 엄마와 두 딸의 이야기다. 소설은 유난히 큰 체구로 태어난 금복의 딸인 소녀 춘희가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 후 몇 녀 만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춘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에 살았던, 자신에게 잔인했던 세상을 저주하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일제 강점기와 춘희의 어머니인 금복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복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외모와 암내를 타고났지만, 남자들의 욕망에 희생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녀가 손을 대는 일은 모두 성공을 거둔다. 해안 마을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그녀는 자신이 더 크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후 평대로 이사한 그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횡재하게 되면서 벽돌 공장을 열고 자신의 궁극적인 꿈을 이룬다. 그 꿈은 그녀가 해안 마을에서 처음 본 거대 생물인 고래 모양으로 영화관을 짓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예언의 얽힘이 그녀를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스스로 지은 무대에서 그녀의 최후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래』는 깔끔하게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삶은 모두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떠난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도 종종 변화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운명에 얽매여 있다. 운명은 이 소설의 서사 전반에 시계추처럼 소설의 서사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운명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결국 뜻대로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우선, 다양한 인물들에게 닥칠 사건에 대한 끊임없는 전조가 있다. 화자는 또한 사랑의 법칙, 반사의 법칙, 어리석음의 법칙, 이데올로기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심지어 자만의 법칙과 같은 다양한 ‘법칙’의 관점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연결된 이야기 세계, 즉 인간의 의도와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결과를 갖는 세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군사독재 시대까지 한국 역사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십 년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전조와 법칙의 사용은 시대를 초월한 느낌을 준다.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붕괴한다. 분명히 사건의 순서와 사건의 진행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대한 이야기가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신비를 엿본 듯한 느낌을 들게 된다. 『날개 환상통』 김혜순(金惠順) 작, 최돈미(崔燉美) 번역, 208쪽, 18.95달러, 뉴디렉션즈북스(2023) 복화술사가 하늘을 향해 노래하다 김혜순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새를 보며 우아하게 날아다니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하지만, 이 시에서는 새-시인(혹은 시인-새)은 하이힐을 신고 땅 위를 걷고,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부끄러워하고, 새장 같은 옷을 입는다. 새들은 종종 새장에 갇혀 사람들의 관찰 대상이 된다. 또한 많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비극을 경험하고 큰 슬픔에 빠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적절해 보인다. 영문판에 추가된 시집 말미의 에세이에서 시인은 복화술의 기법을 재활용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동안 남성 시인들이 여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기법이다. 복화술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배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적인 영감이나 홀림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나 적절해 보인다. 시인은 우리를 위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홀린 무당처럼, 하늘의 숨결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우리를 고양시킨다. < The Gleam > 성혜인(Seong Hye-in, 成惠仁) / 음악평론가 빛의 은유 박지하(朴智夏)의 < The Gleam >(2022)은 제목 그대로 어슴푸레한 빛의 잔상을 쫓는다. 상태이자 순간이고, 이미지이자 감정인 빛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가 이 음반에 담겨있다. 가장 먼저 뚜렷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인 피리(觱篥), 생황(笙簧), 양금(洋琴)이다. 악기의 모양만큼이나 독특한 음색이 단숨에 귀를 사로잡는다. 악기 본연의 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 산란하는 빛으로, 긴 잔향으로 아득한 시공간을 빚어낸다. 음을 길게 지속할 때 미세하게 변화하는 진동과 호흡,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섬광과도 같은 노이즈, 아스라이 멀어지는 잔향, 섣부르게 몸집을 키우지 않고 섬세하게 고안된 공간감은 깊은 고요, 내면의 침묵으로 우리를 이끈다. 박지하는 가야금 연주자 서정민(徐廷旼)과 함께 ‘숨(suːm)’이라는 듀오로 9년간 활동하며 한국 전통음악의 문법에 보다 깊게 천착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솔로 음반을 발매한 이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영토로 선회해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 < The Gleam >도 넓게 보면 < Communion >(2016), < Philos >(2018)의 연장선에서 음악적 재료와 패턴을 반복하고 중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그는 양금의 현을 활로 연주하거나 손톱으로 긁어 예리한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연주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감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참신한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악기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의 다이내믹을 확장해 이질적인 감각을 조형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이 음반을 이해하는 데 또 한 가지 유효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박물관인‘뮤지엄 산(Museum San)’은 이 음반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do)가 설계한 이 공간에서 진행됐던 2020 The Art Spot Series ‘Temporary Inertia’ 공연의 일부를 발전시켜 음반으로 엮었다. 공간의 음향적 측면을 세심하게 고려해 개별 악기의 응축된 소리를 미니멀하게 배치한 흔적이 음악 도처에서 발견된다. 박지하에게 공간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음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이자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로 기능한다. 빛의 여러 형태와 잔상을 포착한 음악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빛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질까.

기능에서 비롯된 유기적 아름다움

Arts & Culture 2024 SUMMER

기능에서 비롯된 유기적 아름다움 더_시스템랩(THE_SYSTEM LAB)을 이끄는 김찬중(Chanjoong Kim, 金贊中)은 독특한 건축 미학으로 주목받는 건축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 건축에서 보기 어려운 위트가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다. 2016년, 영국 라이프스타일 잡지 『월페이퍼(Wallpaper*)』가 선정한 ‘세계의 떠오르는 건축가 20인’에 선정된 바 있다. 더_시스템랩의 김찬중 대표는 ‘합리적인 혁신’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는 건축가이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오늘날, 건축이 시대의 흐름에 반응할 수 있는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강석(Gangseok Lee) “ 형태는 기능을 따릅니다.” 김찬중에게 자신의 철학을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경구(警句)라 진부하게 들릴 거라는 말투였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너무 고전적인 얘기라 식상하겠지만, 저희 작업에 사용된 모든 곡선과 유기적 형태들은 제각각 고유한 기능을 가집니다.”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기에, 기능에 맞추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미적 탐닉보다 건축 방식을 먼저 따지는 게 숙명이다. 머큐어 앰배서더 서울 홍대(Mercure Ambassador Seoul Hongdae)는 대로변에 면하는 부분에 투과성 차폐막이 설치되었다. 이는 도로의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심미적 측면에서 개성 있는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기능을 고려한 디자인 서울 강서구 마곡동(麻谷洞)의 삼진제약 연구센터(2021)는 살짝 불어든 바람에 팔랑 들린 커튼 자락을 닮은 건물이다. 각종 실험이 진행되는 연구소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연구원들이 종일 연구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가끔 기지개 켜고 창밖도 내다봐야 숨통이 틘다. 펄럭이는 듯한 입면(facade)은 이런 점을 고려하되, 오후 햇빛이 눈을 찌르는 서향 건물의 난제를 풀 해법이었다. 건축가는 연구원들의 개인 책상을 가장자리에 두고, 공동 업무 공간인 실험실은 중앙부에 배치하도록 설계했다. 개별 공간에서는 집중력 있게 자기 연구에 빠져들고, 실험실에서는 트인 생각으로 머리를 맞대는 구조다. 그는 창가에 놓인 책상으로 햇빛이 너무 세게 들이쳐도, 외부와 단절된 채 꽉 막혀 있어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빛을 막으면서도 도시와의 관계는 열어 두기 위해 벽을 들어 올렸다. 얇은 천 느낌의 곡면 외벽은 80mm 두께의 초고강도 콘크리트(UHPC, Ultra-High Performance Concrete)로 제작했다. 형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강도는 일반 콘크리트를 압도한다. “외벽 콘크리트 패널을 곡면으로 만들어 직사광선은 가리고, 살짝 열린 틈으로 간접 광이 들어올 수 있게 했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곡면의 열린 틈으로 도시를 내다볼 수도 있어요. 직사광선과 무관한 북향이었다면 이런 시도를 안 했을 겁니다. 모든 것들은 기능과 연관된 선택입니다.” 한 블록 옆에 위치한 IT 기업 엑셈 마곡연구소(2022)도 이들이 맡은 프로젝트였는데, 마찬가지로 서향이다. 외벽에 특수 알루미늄 차광판을 45도 기울인 상태로 줄지어 붙였다. 삼진제약 연구센터와 마찬가지로 오후 서쪽 하늘의 강한 빛을 차단하고 반사된 빛이 부드럽게 내부로 흘러들게 하는 역할이다. 그는 모니터와 스크린을 중심으로 일하는 IT 회사의 특성을 고려해 균질한 실내 빛 환경에 신경 썼다. 외부 차광판과 유리 벽 사이는 직원들이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발코니형 쉼터로 조성했다. 실험적 시도 ‘어금니 빌딩’이라 불린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2011)는 바닥 면적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공간에 대한 의뢰인의 요구를 모두 담다 보니, 머핀처럼 위쪽이 부풀었다. 가우디의 작품 카사 밀라(Casa Mila)와 닮았단 소리를 듣는 한남동 오피스 빌딩(2014)은 구불구불한 외벽에 곡선형 창을 내고 발코니를 만들었다. 발코니는 실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로감을 줄여 주는 역할을 맡는다. 강남구 도산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는 고급 브랜드 매장이 밀집된 주변 환경 속에서 해당 브랜드를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인지시킬 것인지 고민한 끝에 탄생했다. 그 결과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해석이 가능한 건물이 되었다. 현재는 헤리티크뉴욕(HERITIQUE NewYork) 매장으로 사용된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삐죽하게 솟은 송파구 오금로(梧琴路)의 다세대 주택 다락다락(DARAK DARAK, 2016)은 건축물의 면적과 층수에서 제외되는 다락의 특성을 이용해 연면적과 높이를 확대했으며, 녹과 얼룩에 강해 오랫동안 깨끗하게 쓸 수 있는 컬러 강판을 사용한 덕에 눈에 띄는 건물이 됐다. 까다로운 조건과 제약이 김찬중에게는 실험적 시도의 원천이 됐다. “새로운 소재에 관심이 많습니다. 형태나 물성이 바뀌면 사람들의 접근이 달라져요. 다가와 두드려 보고 만져 봅니다. ‘스머프집 같다’, ‘문어 빨판 같다’는 식으로 별명도 지어 부릅니다. 이처럼 각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투영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건축이란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물, 그리하여 사람들의 창의성을 북돋우고 건조한 도시에 활력도 불어넣는 것이라 믿거든요.” 부산 구도심에 위치한 PLACE 1 BUSAN은 하나은행 빌딩을 리모델링한 프로젝트이다. 건축가는 바빌론 시대의 공중 정원에서 모티브를 얻어 건물 상층부를 독특한 방식으로 디자인했다. ⓒ 유청오(Cheong O Yu)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 코오롱그룹의 의뢰로 울릉도에 지은 코스모스 리조트(2017)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건축 같지 않은 건축에 대한 도전이었다. 바다 위 절벽에 놓인 이 호텔은 건물이라기보다는 한 점의 오브제다. 보티첼리의 이 연상되는 이 건물은 비너스를 실어 온 조개껍질처럼 희고 단아한 모습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는 봉오리 벌어지는 꽃잎 같고, 옆에서 본 곡선은 넘실대는 파도를 닮았다. 2015년 리조트 설계를 의뢰받은 김찬중은 예닐곱 시간 뱃길을 따라 울릉도로 들어갔다. 섬에 밤이 내리자 별과 하늘의 움직임이 보였고, 해가 뜨자 파도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천문기상대에 자료를 요청해 해와 달의 궤적을 받았고, 자연이 그린 포물선에서 건물의 곡선들을 추출했다. 건축물의 모든 부분이 자연을 닮은 이유다. “수만 년 동안 추산(錐山)을 중심으로 형성된 울릉도의 자연에 인위적인 표현을 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밖에서건 안에서건 건물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담길 바랐거든요.” 코스모스(KOSMOS) 리조트는 원시적인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울릉도에 위치한다. 건축가는 대지에 건축물을 설계하기보다는 자연을 담는 그릇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그는 이곳이 별들의 궤적을 관조하는 일종의 천체 관측 도구가 되기를 희망했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살포시 자연을 파고든 건축물이니 육중해서는 안 된다. 날렵하고 가벼우면서도 외벽의 단단함을 갖추고, 염분 많은 바다의 풍파를 견딜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다. 토목에 주로 사용되던 UHPC를 건물 전체에 적용하기로 했다. 누구도 한 적 없는 시도다. 일반 콘크리트는 30cm 두께지만, 12cm로 얇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강도는 다섯 배나 더 세다. 극한 조건을 충족할 콘크리트를 제작해 울릉도까지 실어 나르는 게 문제였다. 거푸집으로 현장 타설(打設)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그 또한 세계 최초였다. 그렇게 탄생한 유기적 형태는 자연이 낳은 것처럼 어우러졌다. 그의 어머니는 화가다. 어머니는 누드 크로키로 종종 전시회를 열었다. 인체 곡선이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손재주와 눈썰미 등의 감각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아버지는 그가 효율적인 실용주의자로 성장하게끔 자극을 주었다. 기능주의자면서도, 예술가 못지않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건축가가 된 배경이다. 미래를 위한 건축 “건축은 오래된 산업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변화가 느릿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기술 혁신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우리가 땅을 확보해 설계하고 짓기까지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까지 걸리는데, 그 사이 기술과 트렌드, 건물의 역할까지도 급속히 바뀌거든요. 건축가로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숙제입니다.” 성수동 연무장길에 자리하고 있는 우란(友蘭)문화재단은 지역적 맥락에 흡수될 수 있도록 설계된 건축물이다. 주변에 위치한 소규모 공방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작은 덩어리들이 집합을 이룬 듯한 형태로 디자인됐다. ⓒ 김용관(Kim Yong-kwan, 金用官) 건물의 형태적 혁신은 기능의 변화를 반영한다. 김찬중의 신작들은 이제 지역성과 공동체, 역사를 파고든다. 그는 2021년 울산광역시 울주군(蔚州郡) 외고산(外高山) 옹기마을의 쇠락한 구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맡았다. 외고산 옹기마을은 전통 옹기의 제조 기술과 미학을 지켜가고 있는 곳으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옹기의 50퍼센트 이상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카페와 맛집으로 주말만 북적이는 명소가 아닌, 젊은 사람들이 일하며 생활하는 정주형 오피스를 통해 진정한 지역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지난해에는 서울시의 의뢰로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종로구 옥인동(玉仁洞) ‘윤씨 가옥’의 리모델링을 맡았다. 이 집은 대한제국(1897~1910) 시대 친일파 관료였던 윤덕영(尹德榮)이 자신의 소실을 위해 지은 한옥이다. 당대 최고로 화려했던 집이었지만, 권력의 몰락과 함께 빈집으로 쇠락해 방치돼 있었다. 그는 내년 상반기 공개를 목표로, 이곳을 시민들을 위해 열린 공간으로 바꿔 놓을 계획이다. 그는 미래를 짓는다.

단청으로 재해석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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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으로 재해석된 세상 건축 미술의 일종인 단청(丹靑)은 목조 건축물의 보존을 위해 오래전부터 활용되었으며,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근덕(Park Geun-deok, 朴根德)은 20년째 문화재 복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단청 전문가이다. 동시에 전통 단청에서 얻은 모티프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해 보여 주는 창작 단청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 Goldgarden Ⅱ >. 2018. 비단에 채색, 금박, 금분. 25 × 38 ㎝. 박근덕 제공 한국의 궁궐과 사찰에서는 꽃 피는 계절이 아니어도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 다채로운 문양과 빛깔로 건물을 아름답게 꾸민 단청 덕분이다. 본래 단청은 기후 변화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을 더위와 추위, 습기 등으로부터 보호해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나아가 문양의 사용과 채색 방식을 통해 왕실의 권위나 종교적 신성함을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단청은 건물이 입고 있는 옷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왕과 신하의 의복이 구별되는 것처럼 단청도 건물의 용도와 중요성에 따라 문양과 색을 달리합니다.” 박근덕 씨의 설명이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단청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불교 문화권인 몽골, 일본, 중국, 티베트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양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붉은색 위주의 채색이 특징이고, 중국은 청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한다. 그에 비해 한국 단청은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청(靑), 적(赤), 백(白), 흑(黑), 황(黃)의 오방색(五方色,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을 보색 대비로 채색하되 난색과 한색을 교차해 밝고 어두운 명도 차이를 줌으로써 화려함을 극대화한다. 박근덕 씨는 전통 단청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으로 2022년 첫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며, 이후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녀는 전통 단청에 흔히 쓰이는 문양 외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꽃을 즐겨 그린다. 문양과 색의 조합 단청 작업은 채색이 잘되도록 하기 위해 아교(阿膠, 전통 접착제)를 바르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먼저 단청할 부재(部材)의 틈새나 구멍을 메우고 사포질로 정리한 다음 아교를 2회 이상 바른다. 그다음에는 뇌록(磊綠)이나 석간주(石間硃) 같은 천연 안료로 밑칠을 한다. 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문양의 외곽선을 따라 촛바늘(草針)로 일정 간격으로 구멍을 낸 다음, 단청할 부재 면에 도안을 대고 조갯가루를 담은 분 주머니로 선을 따라 두드려 문양이 나타나도록 한다. 단청할 색을 만들어 도안대로 채색한 다음 조갯가루를 털어내고 들기름칠을 해서 마무리한다. 단청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우선 아무런 문양을 넣지 않고, 색도 한 가지만 칠하는 방식이 있다. 이는 가장 낮은 등급의 단청 양식으로, 위계가 낮은 건축물이나 일반 주택에 사용한다. 그러나 조선(1392~1910)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종묘처럼 최고 품계의 전각에도 이러한 방법이 시공되는 경우가 있다. 공간의 엄숙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로 바탕색을 칠한 다음 그 위에 선을 긋는 방식이 있다. 주로 사당 같은 부속 건물에 적용하는데, 선을 넣는 것만으로도 격식이 갖춰지는 효과가 있다. 초록색 천연 안료는 단청 작업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재료이다. 모든 안료는 색을 칠하기 전 막자사발에서 간 후 체에 걸러 사용한다. 입자가 고울수록 채도가 낮아진다. 또한 보나 도리 같은 부재의 양쪽 끝에만 문양을 그리고, 중심부는 채색만 하는 경우도 있다. 사찰의 부속 건물을 비롯해 궁궐 전각이나 서원, 정자 등 일반적인 건축 단청에 두루 사용되는 형식이다. 이렇게 부재의 끝부분에만 넣는 무늬를 ‘머리초(草)’라고 하는데, 건물 품계에 따라 머리초가 화려해지기도 하고 간소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부재의 모든 부분에 빼곡하게 문양을 넣어 화려함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있다. 대웅전 같은 사찰 주요 건축물에 활용하는 최고 등급의 양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유생들이 ‘사가(私家)에서 단청을 못 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단청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궁궐에서조차 최고 등급의 단청은 하지 않았죠. 유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단청 원료가 비싼 원석들인 탓도 있죠.” 단청 문양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연화(蓮花)머리초다. 연꽃, 석류, 녹화(綠花, 녹색으로 그린 꽃무늬) 등의 조합으로 이뤄진 연화머리초는 사찰과 궁궐뿐 아니라 향교, 서원 같은 유교 건축물의 단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저도 연화머리초를 많이 응용해서 그립니다. 기본에 충실하게 그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중심에 위치하는 연꽃 대신 민들레, 고마리 같은 토종 들꽃을 문양으로 만들어서 그리기도 해요.” 박 작가는 모시, 비단, 삼베를 직접 천연 염색하여 사용한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직물의 특성상 색이 잘 표현되기 어려우므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색을 입히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 박근덕 씨는 2022년 갤러리 이즈(Galley IS)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 Goldgarden > 이후 매년 전시회를 통해 전통 단청을 새롭게 형상화한 창작 단청으로 호평받고 있다. 지난해 갤러리 한옥(Gallery HANOK)이 주관한 불화∙민화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무우수갤러리(MOOWOOSOO GALLERY, 無憂樹) 초대전 에서는 동식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이 전시에서는 연꽃과 민들레로 머리 장식을 한 코끼리를 비롯해 선사 시대 유물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Petroglyphs of Bangudae Terrace in Daegok-ri, Ulju)에 그려진 고래가 단청으로 소환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불꽃 대신 물결무늬 날개를 단 봉황, 멸종위기종인 자생 식물 문양을 입은 물고기, 비단 위에 단아한 자태로 누운 제주 토종 무와 당근 등이 단청을 입고 색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통 단청에는 연꽃, 모란과 같이 상징성이 있는 꽃들이 문양으로 많이 쓰이는데, 제 개인 작업을 할 때는 좋아하는 꽃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을 문양으로 만들어 봅니다. 그리고 전통 단청에서는 각종 문양들이 서로 엮여 있는데, 저는 이 문양들을 하나씩 풀어낸 뒤 제가 표현하고 싶은 형태로 다시 엮어 봅니다. 이런 시도가 재미있어요.” 그녀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문화재 복원 작업에서 오는 갑갑함을 자신만의 세계를 담은 작품을 통해 해소한다고 말한다. “문화재가 위치한 장소들은 대개 주변 풍광이 좋아요. 작업 현장에서 벗어나 주변 자연 속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눈길이 가고 작은 꽃잎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죠. 한참을 들여다보면 각각의 세계가 눈에 들어와요. 그 순간의 이미지를 문양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을 하게 됐죠. < Goldgarden ― 황(凰) >. 2018. 캔버스에 아크릴. 40 × 26 ㎝.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작가는 봉황의 날개를 파도와 물결 모양으로 표현했다. 박근덕 제공 창작의 원천 문화재수리기술자인 그녀는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된 작업 현장을 진두지휘한다. 문화재수리기술자의 역할이 문화재수리기능자들의 작업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덕 씨는 1999년 동국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해 불교 미술을 전공했다. 졸업과 동시에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틈틈이 공부해 자격증을 따고 2022년부터 단청 감리를 해오고 있다. “드센 공사판에서 바닥부터 일을 배웠지만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대학원에 다니며 단청기술자 자격증을 땄어요. 대부분 도제식으로 일을 익힌 작업자들은 대학 전공자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요. 첫 대면에 ‘누구 밑에 있었냐’, ‘스승이 누구냐’부터 물으니까요. 어느 스승의 초(草), 즉 밑그림을 받아서 수련했는지에 따라 유파가 갈리거든요. 그래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네트워크가 발달해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다양한 기술과 기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문화재 복원은 주로 관급 공사다 보니 철저히 설계도 안에서 작업이 이뤄진다. 간혹 작업 중에 설계 단계에서 놓친 하자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때 보수부터 재설계 여부까지 발주처와 현장 사이를 조율하는 것도 그녀의 주요 역할이다. “안료와 접착제를 섞는 비율만 해도 회화나 금박 작업에는 교과서와 같은 매뉴얼이 있어요. 하지만 단청은 건축물의 위치나 기후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폭넓은 경험이 중요합니다.” < Goldgarden Ⅶ ― 20190421. > 2022. 면에 천연 염색 후 채색, 금박, 금분. 116.8 × 72.8 ㎝. 궁궐이나 사찰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청 문양으로 코끼리의 귀와 코를 장식했다. 작가가 스리랑카 여행 중 보게 된 코끼리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박근덕 제공 단청은 회화는 물론 서예, 드로잉, 공예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기량이 필요하다. 그가 특별히 단청에 끌린 이유다. “단청기술자는 탱화도 보수해야 합니다. 불교 미술에는 탱화도 있지만 산수화도 있어요. 산스크리트어가 들어간 그림도 있고, 호랑이가 등장하는 산신도도 있죠. 그래서 단청기술자는 글씨와 탱화, 화조도, 수묵화 모두 공부해야 합니다.” 그녀는 오래된 건축물에 남겨진 옛사람들의 붓 터치를 보면 전율이 온다고 말한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다. 그 행복감이 바로 창작의 원천이다.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문화유산

Arts & Culture 2024 SUMMER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문화유산 콜린 진[Collin Jin, 본명 소진호(So Jin-ho, 穌進鎬)]은 레고 아티스트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레고 블록으로 재치 있게 해석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지난해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데 이어 올해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10월까지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작업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소진호 작가가 고증을 거쳐 재현한 종묘제례악.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1년 반에 걸쳐 제작했다. 소진호 제공 2023년 10월, 서울 소공동에 자리한 모리함 전시관(Moryham gallery, 慕異函)에서 열린 전시가 언론에 보도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악이 레고로 만들어져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1392~1910)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 무용을 통틀어 종묘제례악이라 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으로 전통문화를 표현했다는 점도 이색적이었지만, 한국적인 조형 의식과 미감을 섬세하게 구현한 솜씨가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콜린 진의 첫 전시 이야기이다. 종묘제례악뿐만 아니라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소재로 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전시되어 관람객들이 전통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소재규(So Jae-gyu, 穌在圭) 회장은 아들이 태어나던 해인 1974년 장난감 회사 한립토이스(Hanlip Toys)를 차렸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신기한 장난감을 가장 먼저 갖고 놀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이십 대 중반부터는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해 오고 있다. 장난감 박물관 한립토이뮤지엄을 운영하는 소진호 작가는 이십 대 중반부터 자신만의 레고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일상적인 사물을 비롯해 문화유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난해 첫 전시 < 콜린 진의 역사적인 레고 >는 어떻게 열게 되었나? 레고 아트는 취미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작가로 여긴 적이 없었고, 전시회를 열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내 작품들을 집에만 그냥 두기는 아깝다고 전시회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으리으리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레고 아티스트들이 많아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지인들의 격려로 용기를 냈다. 전시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나도 깜짝 놀랐다. 전시에서 특히 종묘제례악이 큰 화제였다.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공부한다. 어느 날 아내가 승무(僧舞)를 주제로 레고 작품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승무로 끝내기에는 아쉬워서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묘제례악까지 왔다. 기존 레고 부품만을 사용해 종묘제례악을 재현하는 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전통문화를 작품으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했다. 고증을 위해 자료 조사를 많이 했고, 『종묘의궤』 같은 책도 구입해 읽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인 승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업이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진호 제공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주로 레고 팬들이었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전통문화 해설사, 국악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한국 무용 전공자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있었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옛것을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주변 시선 때문에 종종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멋지게 표현한 작품을 만들어 줘 고맙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뭉클했다. 전시장인 모리함 전시관 근처에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있는데, 그곳 직원분들이 점심시간에 방문한 게 인연이 되어 기획 전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지난 5월 종묘에서 열린 이 전시를 위해 나는 를 재현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궁중기록화 중에서 종묘제례악의 연행 현장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유서 깊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상설전에 참가하게 되어 무척 뜻깊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 가면인 하회탈을 변형해 제작한 작품이다. 소진호 제공 레고 마니아들의 반응은 어땠나? 보통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찾는 일이 많고, 대개는 작품을 보면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마련이다. 내 전시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아이가 원해서 부모가 함께 온 경우가 많았고, 기존에 출시된 레고 시리즈의 어떤 부품이 내 작품에서 어떻게 응용되었는지를 아이들이 부모에게 설명해 주고 있더라. 아이들이 신이 나서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또 내 작품을 보고 자신도 한번 도전해 보겠다는 아이들도 많았다.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아 흐뭇했다.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 일상생활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다. 예를 들어 한번은 이라는 TV 교양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나주 소반(小盤)에 밥을 차려놓고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소반도 레고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시도해 봤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필통, 연필깎이, 책상 램프 같은 것들…. 작가는 필통, 볼펜, 연필깎이, 스테이플러 등 딸아이가 필요로 하던 모든 것들을 레고로 만들어 주었다. 아이의 자랑이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소진호 제공 레고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친구분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나를 데려가셨는데, 친구분께서 레고 샘플을 보여 주셨다. 당시는 레고가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이었다. 집에 너무 가져가고 싶은데 그냥 두고 올 수밖에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완구 매장에서 일을 도와드리다가 어느 날 스타워즈 레고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희열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스타워즈 마니아였기 때문에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구입해서 매뉴얼대로 만들며 학습 과정을 거쳤고, 결국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단계로 나아갔다. 레고 아트는 기존 블록들만 사용해야 하므로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형태를 변형하거나 도색하지 않고 기존 부품을 그대로 쓰는 것이 레고 아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철칙이다. 제한된 조건과 한정된 재료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점이 바로 레고 아트의 매력인 것 같다. 그리고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수많은 제품을 조립해 봤기 때문에 어떤 부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립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끼워 보며 설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도면을 따로 그리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이미 해리 포터의 빗자루가 선비의 붓이 되고, 동물 이빨이 버선코가 되며, 오리발이 관모(冠帽)가 된다. 다만 재료가 제한되어 있어 완전한 고증이 어렵기는 하다. 그럴 때는 내 나름대로 단순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문가들은 그 차이점을 바로 알아보더라. 디테일을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공부를 많이 한다. 한립토이뮤지엄 내 마련된 작가의 작업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종류별로 따로 분류해서 보관한다 가족들이 작업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의 비결이 무엇인가? 우리 가족은 식사를 오래 하는 편이다.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식탁에 머무르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된다. 가족들이 모두 픽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개봉하면 꼭 같이 보러 다니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가정생활과 작업이 분리되었으면 해서 집에서는 거의 작업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완성하면 아내와 딸에게 보여 주기 위해 꼭 가져간다. 그때 의견을 많이 주는데 작업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를 본 적이 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비롯해 여러 행사들을 치렀던 장면을 담은 기록화이다. “이걸 레고로 만들면 정말 멋지겠다”라고 혼잣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이 해보라고 부추기더라. 이 그림에는 최소 2천 명의 인원에 말, 소, 가마 등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레고 부품들이 엄청나게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 꼭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만의 디자인으로 레고 제품을 출시해 보고 싶은 꿈이 있다.

K-패션의 새로운 지형도

Arts & Culture 2024 SUMMER

K-패션의 새로운 지형도 탄탄한 중견 브랜드들의 컬렉션이 해외에서 스포라이트를 받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활약이 K-패션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들은 신선한 시도와 온라인을 활용한 감각적인 스토리텔링 등 전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성장 중이다. 롯데월드타워에 자리한 마르디 메크르디 매장. 프렌치 감성을 표방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이며, 감각적이면서도 친숙하고 편안한 디자인으로 20~30대 여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언라벨 제공, 사진 한성훈(Sunghoon Han, 韓成鑂) 지난 2월, 영화 를 홍보하기 위해 할리우드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서울을 방문했다. 체류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특히 공식 행사에서 입었던 의상과 개인적인 쇼핑 목록은 연일 화제였다. 콘래드 서울(Conrad Seoul) 호텔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준지(JUUN.J)와 포르쉐가 협업한 미래적인 점프 슈트를 입은 데 그치지 않고, 서울 강남에 위치한 준지 플래그십 스토어를 직접 찾아가 제품을 구입했다. 우영미(禹英美) 디자이너의 편집숍 맨메이드 도산(Manmade Dosan)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준지를 이끄는 정욱준(鄭旭峻)은 글로벌 패션 교육 기관 에스모드 서울을 졸업한 뒤 유명 패션 기업들에서 일하다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는 정도를 밟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로 2007년 파리 패션위크를 통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준지는 현재 삼성물산 패션 부문(Samsung C&T Fashion Group)에 속해 있다. 한편 준지가 해외에서 각광받기 이전 K-패션의 물꼬를 튼 디자이너가 바로 우영미였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한 우영미는 1980년대 말 부티크를 열어 성공시키며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초 파리에 진출한 이후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국내 디자이너로 평가된다. 준지(JUUN.J)가 2023년 6월,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선보인 2024 SS 컬렉션 중 일부. ‘스킨(Skin)’을 테마로, 실루엣의 대비를 극대화했다. ⓒ 준지 K-패션의 계보 K-패션은 현재 국적을 넘어 동시대성을 지닌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젊은 디자이너들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며, 해외에서도 이들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K-패션의 계보를 간략하게 훑어보자. K-패션의 출발점은 19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들의 모임인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Seoul Fashion Artists Association)의 주도로 1990년 가을부터 시즌마다 정기적인 패션쇼가 열렸다. 이 단체는 국내에 컬렉션 개념을 도입해 디자이너들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이후 서울패션위크(Seoul Fashion Week)를 비롯해 다양한 컬렉션들이 개최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국내 디자이너들이 해외 컬렉션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국내 유명 디자이너였던 이신우(李信雨), 이영희(李英姫)가 1993년 3월 함께 파리 패션계에 진출했다. 이신우는 전위적인 디자인으로 관록을 보여 줬으며, 이영희는 한복의 선과 색감을 응용한 양장으로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패션계 대모’라 불리는 진태옥(陳泰玉)이 한국적 정서를 담은 간결한 디자인을 내세우며 이신우, 이영희와 함께 파리 무대에 섰다. 이들은 한국 패션사에서 컬렉션 시대를 연 1세대에 해당하며, 이들의 노력을 통해 K-패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한섬(Handsome), 형지(Hyungji) 같은 패션 회사에서 만든 로컬 브랜드가 백화점이라는 공급망을 통해 붐을 일으켰다. 한섬의 시스템(SYSTEM), 타임(TIME) 등과 형지의 크로커다일 레이디(Crocodile Ladies)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로컬 브랜드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외국 패션 브랜드들이 수입되는 한편 동대문 공장에서 생산된 로드숍 제품,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 차례차례 밀리면서 한동안 정체기를 겪게 된다. 민주킴이 바리공주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2022년 한 해 동안 지속한 ‘BARI’ 컬렉션 중 일부. 민주킴은 동화적 요소를 현실감 있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 민주킴 그러나 최근 우영미, 준지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가 해외에서 공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2014년 뉴욕 패션위크 무대를 통해 출발한 혜인서(HYEIN SEO), 2015년 브랜드 출시 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인 민주킴(MINJUKIM)처럼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높인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역수입되면서 K-패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온라인의 영향력 과거 K-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정규 교육을 밟은 후 도제식으로 일을 배워 브랜드를 만들었다. 반면에 최근에는 정형화되지 않은 방법을 통해 브랜드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존에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반적 방식인 카탈로그와 잡지 광고, 패션쇼를 대신해 인플루언서나 셀럽의 언급을 통해 하루아침에 브랜드가 널리 알려지는 세상이 된 것이다. 또한 시즌별로 공들여 만들던 패션 필름은 이제 숏폼 형태로 하루에도 몇 개씩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온라인을 통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얘기다. 물론 의상 디자인을 위해 기본기를 다지고 해외로 나가 더 넓은 경험을 하는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만큼 파리 패션위크의 위상 또한 여전하다. 김인태(Kiminte Kimhekim)가 이끄는 브랜드 김해김(KIMHĒKIM)은 파리 무대에 컬렉션을 올리는 방법을 고수한다. 그는 파리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며 발렌시아가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2014년 자신의 성씨인 ‘김해(金海) 김’을 브랜드 이름으로 삼아 론칭했다. 2019년에는 프랑스 패션협회(FHCM, Fédération de la Haute Couture et de la Mode)에 이름을 올렸는데 우영미, 정욱준에 이어 세 번째 한국인 멤버이다. 파리 패션위크를 주관하고 있는 이 협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어야 하며, 패션계 전문가들의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김해김이 ‘블랙 앤 화이트(Noir et Blanc)’라는 타이틀로 파리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2024 SS 컬렉션. 김해김은 시적이면서 심플하고, 여성적이면서도 내면의 강인함이 엿보이는 디자인을 구현하는 브랜드이다. ⓒ 김해김 김해김은 우영미처럼 파리에 숍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준지처럼 대기업을 배경으로 두고 있지도 않다. 대신 이 브랜드는 SNS를 통해 유명해졌다. 2019년 파리 컬렉션에서 김인태는 ‘관종’을 주제로 무대를 구성했다. 모델들이 링거 폴대를 끌며 워킹하거나 셀카봉을 들고 무대 위에 섰다. 그의 표현 방식은 큰 화제가 되었고,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섬세한 테일러링을 통해 완성된 과감한 의상은 쿠튀르로서 가치도 높고, 보는 재미도 크다. 김해김의 약진은 인터넷상의 ‘좋아요’ 수와 판매량이 비례하지 않더라도 SNS가 글로벌 디자이너에게 어떤 수단이 되는지 보여 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독자적 방식 신진 디자이너들은 때로 색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마뗑킴(Matin Kim)은 일반적인 디자이너 브랜드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마뗑킴은 심플하고 자유분방한 디자인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젊은 층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 중 하나인 네이버(NAVER)의 블로그 마켓에서 출발했다. 시작이 블로그였던 만큼 구독자, 구매자들과 끈끈하게 소통했고 견고한 팬층을 얻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지난해 도쿄를 시작으로 올해 일본 곳곳에서 연이어 진행한 팝업 스토어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올해 하반기에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중화권 지역에 오프라인 매장을 새롭게 오픈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현지 비즈니스와 브랜딩 강화에 나설 계획이다. 온라인으로 출발했지만, 오프라인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은 마뗑킴은 지난해 매출 1,000억 원을 기록했고, 현재 14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는 진정성 있는 소통이 빛을 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ON THE PATH’를 주제로 한 마뗑킴의 2024 봄 컬렉션. 봄 햇살의 따뜻함에서부터 도시의 현대적인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다양한 관점으로 자유롭게 표현했다. ⓒ 마뗑킴 2018년 권지율, 조영민 두 사람이 합심해 만든 브랜드 떠그클럽(THUG CLUB) 또한 비상한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직접 모델로 활동하고 SNS에 사진을 올리는 등 틀에 박힌 방식을 지양하고, 브랜드에 자유분방한 감성을 담는다. 2021년에는 도발적인 문구가 적힌 언더웨어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표출하기 힘든 태도와 철학을 대리 만족하려는 마니아들의 심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떠그클럽은 더 정제된 브랜드로 거듭나며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국내외 내로라하는 힙한 뮤지션들이 이들의 옷을 입고 브랜드를 언급하면서, 떠그클럽은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스트리트 브랜드로 정착했다. MCM, 젠틀몬스터 같은 브랜드와 협업하며 더 큰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떠그클럽의 2024 SS 컬렉션 ‘하이브리드 카우보이(Hybrid Cowboy) 중 일부. 영상 매체로만 접한 카우보이 문화를 상상력을 더해 재해석했다. 떠그클럽은 자신들의 감성을 거침없이 그려내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 떠그클럽 팬덤의 형성 돌고 도는 유행의 쳇바퀴 안에는 ‘국민 티셔츠’라는 영역이 항상 존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데이지꽃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옷을 입은 젊은 여성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혹시 어디서 옷을 나눠주는 것이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장악력이 대단하다. 이 데이지꽃은 마르디 메크르디(Mardi Mercredi)의 시그니처 심볼이다. 프랑스어로 화요일, 수요일을 뜻하는 이름처럼 프렌치 캐주얼을 표방하는 브랜드이며, 패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던 디자이너들이 의기투합해 2018년 만들었다.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플라워 그래픽은 원래 한 시즌을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론칭한 지 1년 만에 대유행하게 되자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자리 잡았다. 누가 봐도 부담 없는 꽃무늬가 신의 한 수였지만, 플랫폼의 힘 또한 한몫했다. 이 브랜드는 10대부터 30대까지 이용하는 대표적인 온라인 패션 스토어 무신사(MUSINSA)와 29CM에 입점하며 세를 확장했다. 온라인을 이용하는 대다수 타깃에 맞춰 가격대를 설정하고, 기억하기 쉬운 로고로 대중성을 획득한 것이 마르디 메크르디의 성공 요인이다. 온라인 파워에 힘입어 낸 한남동(漢南洞) 플래그십 스토어 앞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그런 점에서 마르디 메크르디의 플라워 그래픽은 지금 K-패션을 상징하는 로고라 할 수 있다. 과거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통상적인 과정을 밟으며 차근차근 브랜드를 성장시켰다면, 최근 신진 브랜드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담아내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현재 K-패션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비어 있는 공간의 감각, 건축가 최욱

Arts & Culture 2024 SPRING

비어 있는 공간의 감각, 건축가 최욱 원오원아키텍스(ONE O ONE architects) 대표인 건축가 최욱(Choi Wook, 崔旭)은 서양의 건축이도상학적인 반면 한국의 건축은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적 표현 방식을 건축에 구현하려고 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각적인 형태 미학에 관심을 두는 대신 경험과 직관을통해 한국 고유의 공간 형식을 꾸준히 탐색한다. 최욱은 건축물의 시각적인 조형성보다는 공간 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가이다. 건물과 대지(垈地)의 관계, 건물 내부와 외부의 소통,질감과 색감 등을 통해 공간 내에서 감성적 체험이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2021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새로 조성된 ‘사유의 방’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되어 각각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두 점의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위한 공간이다. 어두운 진입로를 돌아 흙빛의 공간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미륵의 미소를 만난다. 쇼케이스를 벗어난 국보의 안전성에 대한 고려,360도 관람이라는 과감한 시도, 불상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전시 방식을 구현한 ‘사유의 방’은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공간감을 보여 준다. 관람객들이 불상을 접하는 공간의크기는 배우의 표정을 잘 읽을 수 있는 소극장의 내부 길이인 24m로 하고, 두 개의 불상을 어긋나게 배치해 타원형 좌대 위에 올렸다. 1도 정도 기울어진 바닥과 천장은 불상들을 향하고 있으며,벽은 빛을 흡수하는 흙과 숯 같은 자연 재료로 마감했다. 덕분에 내부에서는 금동 불상만이 빛을 뿜는다. 천장은 소방법을 고려해 검고 평활한 면 대신 알루미늄 봉을 선택했다. 빼곡한알루미늄 봉들 덕분에 천장은 광활한 밤하늘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각적인 투시화법을 깨뜨리고 싶었어요. 시각적 중심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죠. 탑돌이를하듯 말이죠. 엄정한 기하학적 논리보다 영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어요. ” 이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최욱은 서양의 투시도법에서 벗어나 공간의 감각을 구체화하는 접근방법을 보여 줬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은 전시 방식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물을 360도로 관람할 수 있게 공간을 조성했으며,유물과 관람객들 간 거리도 치밀히 계산했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Kim In-chul, 金仁哲) 한국 건축에 대한 탐색 “베니스 건축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당시 유럽에서 주목받는 대학 중 하나였어요. 당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건축계의 석학들이 모여 있었죠. 논리적이고 이성주의에 근거한 서양 건축을 배우다보니 우리와 굉장히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면 투시화법적인 공간이 생기는데, 그러면 파사드가 중요해지거든요. 그런데 한국 건축은 파사드가 중요치않은 것 같았어요. ‘우리는 다른 체계가 있을 것 같다’라는 의구심이 들었죠.” 유학 시절 비첸차의 안드레아 팔라디오 도서관 계단에서 만난 현대 음악가의 질문도 흥미로웠다. “한국의 음악은 정말 이상하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서양 음악은 서로 교류하며 화음을 만드는데, 우리나라 음악은 5개 음이 질주한대요. 만나질 않는다고요. 나중에 저는 그것을병치의 세계라고 이해했어요. 서양의 컴포지션과 극명하게 다른 거죠.” 한국 건축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갈증은 유학에서 돌아온 후 건축 답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해소되었다. 그는경사지가 많은 우리 땅에서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배치된 기단(基壇)의 존재에 주목했다. 작은 필지가 모여 만드는 군집의 풍경도 매혹적이었다. 도심 개발로 인해 북촌 한옥들이 급격하게 사라져가는 풍경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2000년대 초반에는 북촌에 자리한 한옥에 사무실을 꾸렸다. 한옥의 특징을 체험하고 관찰하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탐색의 시간은 곧 결과로 이어졌다. 2012년의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Hyundaicard Design Library)와 2016년의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Hyundaicard CookingLibrary) 등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시리즈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등 공간 자체가 주는 감각에 주목했다. 또한 2013년 작업한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HyundaicardYeongdeungpo Office Building)의 경우 로비 바닥면을 외부로 확장시켜 건물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다. 여러 고층 빌딩에서는 주변 땅의 흐름을 고려한 섬세한저층부가 기단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상층부는 그 존재감을 없애 파사드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고자 했다. 로비에서는 여러 방향에서 빛이 들어와 공간 내부에 그림자가 지지 않는양명(陽明)한 빛을 만들었다. 서양 건축의 체계로 구현되는 현대 건축에서 그는 경험을 통해 체감하는 동양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서울 가회동에 위치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최욱이 기존 갤러리 건물을 간결하게 레노베이션하여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린 공간이다.중정을 둘러싼 삼면에 유리창을 두어 밝은 빛을 실내로 끌어들였고, 나무∙철∙스테인리스 같은 소재를 사용해 각각의 물성을 대비시켰다. 원오원아키텍스(ONE O ONEarchitects) 제공, 사진 남궁선 현대카드 영등포 사옥은 건물이 주변 환경에 스며들도록 설계되었다. 1층 로비 바닥을 건물 외부로 확장시켜 안팎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으며,건물 외피에 입힌 커튼월은 고층 빌딩의 존재감을 약화시켜 주변 다른 건물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게 만든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南宮先) 공간의 흐름 “우리 전통 건축은 터의 단면과 기단이 공간의 성격과 크기 그리고 사람의 움직임을 만들었어요. 일반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땅과 주변 상황을 먼저 이해하려고 합니다.그리고 건물이 놓이는 대지와 주변의 관계, 즉 단면의 연속적 시퀀스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바닥의 질감, 공간의 온도와 색감을 맞추는 게 중요한 주제예요.” 화장품 제조 기업아모레퍼시픽의 헤리티지 브랜드 설화수(雪花秀)는 2022년 서울 가회동(嘉會洞)에 플래그십 스토어 ‘설화수의 집’을 열었다. 이곳은 최욱이 추구하는 건축의 접근법을 잘 보여 준다.1930년대 지어진 대로변의 근대 한옥과 1960년대의 양옥을 레노베이션한 이 프로젝트는 시대와 형식이 다른 두 건축물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채가 군집을 이룰 때공간의 흐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는 기존 한옥의 터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땅의 흐름을 만들고, 전면 한옥의 중정과 뒤편에 길게 들어선 양옥을 잇기 위해6m에 달하는 옹벽을 털어 냈다. 양옥에 지하층을 만들어 한옥의 중정과 연결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이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어떻게 하면한옥의 장점을 극명하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한옥에 투명한 유리문과 창을 설치하고 채와 채 사이 공간에서 시선이 사선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를 통해 한옥에서 양옥으로 이르는길에서는 각기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최욱은 이를 일보일경(一步一景)이라고 부른다. 몸의 감각이 경험하는 산책로인 셈이다. ‘설화수의 집’은 한국적인 공간 구현에 대한 건축가의 탐색이 잘 드러난 곳이다. 그는 기존에 있던 한옥과 양옥을 하나의 공간으로 합치기위해 두 집을 가로막고 있던 옹벽을 없애고 그 자리에 중정을 만들어 서로 연결시켰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 고유한 DNA 현대카드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건축 디자인 잡지 『도무스(domus)』의 로컬 에디션인 『도무스 코리아(domus Korea)』를 발행하면서 건축에 대한 최욱의 시각은 점차 구체화되었다.2018년 11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2021년 가을호까지 총 12권이 발행된 이 잡지는 그가 오랫동안 탐색했던 한국 건축의 특성을 여러 비평가와 작가, 건축가들과 함께 고민해 보는 좋은기회였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땅, 그라운드, 병치, 군집, 공(空)감각(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감각)과 같은 키워드를 길어 냈다.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존중의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이라는 거창한 개념을 말하려는 것보다는 이 땅의 dna, 고유한 문화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최욱은 땅에 대한 이해에서출발해 그것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주제를 건축으로 풀어낸다. 이는 논리적인 체계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과 직관의 영역에 속한다. 자칫 모호한 언어로 남을 수도 있는 경험과직관을 그는 구체적인 수치와 정교한 구축 방식으로 구현하고, 공간의 경험을 통해 설득한다. 서울 부암동(付岩洞)에 있는 그의 자택 ‘축대가 있는 집’이나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에 위치한‘바닷가의 집’은 그가 만들고자 하는 건축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원형에 가깝다. “한국 건축은 터의 조건, 빛의 관계, 쓰임새 등을 해석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물의정면이 아닌 공간의 분위기가 중요해요.’라는 그의 말처럼 이 집들은 건축의 외형적 형태가 극대화되는 대신 채와 채 사이의 공간이나 햇빛과 바람, 새소리, 파도 소리 같은 주변 감각이 먼저다가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설계한 김태수(Tai Soo Kim, 金泰修) 선생님이 오래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 거장의 시대가 끝나고 모더니즘 시대가되었다지만, 1980년대는 모더니즘은 끝났고 오토 파운데이션의 시대라고요. 각자 자신의 토대를 만드는 시대라는 거죠. 제게도 어린 시절의 고유한 기억들이 남아 있어요. 원오원 식구들에게도취향보다는 자신만의 중요한 기억, 개인적인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해요. 자기 서사를 통해 작업을 읽고 만들어 가는 거죠.”  서울 부암동에 위치한 최욱의 자택 ‘축대가 있는 집’은 그가 지향하는 건축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지은 이 집은벽을 최소화해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사진은 부부가 사용하는 다이닝 공간이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남궁선 최욱의 세컨드 하우스인 ‘바닷가의 집’은 이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어촌 마을의 다른 집들과 이질감 없이 융화될 수 있도록 아담한 크기로지어졌으며, 건물 벽면도 미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기능적 고려보다는 곳곳에 창을 크게 내서 바다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데 중점을 둔 집이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김인철 서울 호텔신라 5층에 자리한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라운지(GENESIS Lounge)는 한옥 마당과 대청에서 얻은 모티브를 구현한공간이다. 층고가 낮은 호텔의 실내 공간이라는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천장에는 반사 성질이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원오원아키텍스 제공, 사진 김인철 임진영(Lim Jin-young, 任鎭咏) 오픈하우스서울(OPENHOUSE Seoul) 대표

꽃을 만들어 피우다

Arts & Culture 2024 SPRING

꽃을 만들어 피우다 궁중채화(Royal Silk Flower, 宮中綵花)는 궁중 연희나 의례 목적에 맞게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제작한 꽃을 말한다. 명맥이 끊어진 조선(1392~1910) 왕실의 채화를 되살린 황수로(Hwang Suro, 黃水路) 장인은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황 장인의 아들 최성우(Choi Sung-woo, 崔盛宇)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궁중채화 제작과 연구에 힘쓰고 있다. 궁중채화는 염색, 다듬이질, 마름질, 인두질 등 숱한 손놀림을 거쳐야 비로소 꽃 한 송이가 완성된다. 궁중채화 이수자 최성우는 정교한 수작업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꽃을 구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통의동(通義洞) 길은 경복궁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을 마주 보고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현대식 건물 사이로 2층짜리 낡은 건물이 눈에 띈다. 옛날 형식 그대로인 간판에는 ‘보안여관’이라는 상호가 적혀 있다. 1936년 생긴 이 숙박업소는 2004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이후에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통의동 주변 일대는 도시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낡은 건물이 부수어지고 새것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안여관도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이곳을 인수한 최성우 대표는 더 이상 사람이 머물 수 없는 공간을 문화예술이 숨 쉬는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도심 한복판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남은 건물의 울림은 의외로 컸다. 보안여관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새로운 가치를 보여 주었고,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 최 대표가 오늘날 통의동을 비롯한 서촌 일대의 부흥을 견인한 문화 기획자로 인정받는 이유다. 궁중채화의 복원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 이수자인 최 대표의 작업실은 보안여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신관 4층에 자리한다. 그의 어머니는 전승이 끊어지다시피 했던 궁중채화를 되살려 낸 황수로 장인이다. 한 개인의 집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문화유산을 되살려 냈다. 2013년 궁중채화가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채택될 때 황 장인이 첫 번째 기능보유자가 된 이유다. 채화는 비단이나 모시 등으로 만든 꽃을 말하며, 궁중에서 왕실 연회나 주요 행사에 사용되던 것을 궁중채화라 한다. 궁궐에서는 항아리에 꽂아 어좌를 장식하는 준화(樽花), 연회 참석자들의 머리에 꽂는 잠화(簪花), 잔칫상에 올리는 상화(床花) 등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조선 시대 각종 행사를 정리해 기록한 의궤(儀軌)에 보면, 왕의 어좌 좌우로 홍벽도화준(紅碧桃花樽) 한 쌍과 꽃으로 꾸민 무대인 지당판(池塘板) 등이 그려져 있고, 연회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왕이 하사한 홍도화(紅桃花)를 머리에 꽂고 있다. 문헌에는 꽃의 종류와 크기, 만드는 과정, 개수, 비용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정조(재위 1776~1799)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8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이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채화 1만 1,919송이가 사용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화가 유물로 전하는 것은 없지만, 황 장인은 이러한 문헌들을 교과서 삼아 복원에 성공할 수 있었다. 채화는 염색과 조립, 설치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우선 꽃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비단을 홍화(紅花), 치자(梔子) 등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로 염색하여 풀을 먹인다. 그런 다음 홍두깨로 두드려 윤기와 탄력을 더한다. 그러고 나서 꽃잎을 마름질한 다음 불에 달군 인두에 밀랍을 묻혀, 꽃이 피어 있는 모양새대로 하나씩 다려서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 송홧가루를 묻힌 꽃술을 끼워 고정한다. 준비한 가지에 완성한 꽃들을 잎, 꽃봉오리와 함께 설치하면 끝이다. 채화는 염색부터 마무리까지 손으로만 작업하기 때문에 한 종류의 꽃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빛깔과 형태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내 만든 조화(造花)와 다른 점이다. 홍벽도화준(紅碧桃花樽)은 궁중 의례 시 정전(正殿)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는데, 붉은색과 흰색의 복숭아꽃을 어좌 좌우에 각각 하나씩 배치했다. 높이가 3m에 이르러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황수로 장인이 1829년 창경궁에서 열렸던 잔치에 쓰인 지당판(池塘板)을 재현한 작품이다. 지당판은 궁중 무용이 펼쳐지는 무대를 꾸몄던 도구로, 받침대 위로 좌우에 연꽃을 놓고 그 주변에 모란 화병 7개를 배치했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어머니의 제자가 되다 최 대표는 1960년 황수로 장인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외가인 부산 초량동(草梁洞) 적산가옥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그의 외조부는 국내 최초로 코르덴이라는 직물을 생산한 태창(泰昌)기업 창업자 황래성(Hwang Rae-sung, 黃來性) 회장이고, 아버지는 도쿄대 출신의 농학자로 외조부의 뒤를 이어 회장을 지낸 최위경(Choi Wee-kyung, 崔胃卿)이다. "어머니가 무남독녀라 저는 거의 외조부모님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어요. 깐깐하기로 소문난 제 어머니도 꼼짝하지 못할 만큼 엄했던 외할아버지였지만, 제겐 자상한 분이셨죠. 제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문화 경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80년대 초, 그는 연극과 마당극 등을 통해 현실 참여 활동을 하며 대학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제1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문화부 연구 단원으로 뽑혀 2년간 연수 기회를 가졌다. "13개국에서 한 명씩 뽑아 유럽 최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박물관 수장고와 시스템들을 원하는 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여러 축제들을 비롯해 문화 기관들을 방문하고 연구해 볼 기회도 가졌습니다. 이때 전통적 가치를 동시대인의 삶에 융합하는 문화 경영에 눈을 뜨게 됐죠.” 1993년 그는 7년 반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사정으로 가업을 떠맡게 됐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지 10여 년 만에 그는 보안여관으로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고, 이 무렵 눈에 들어온 것이 궁중채화였다. "2007년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한국공예대전에 어머니를 도와 처음으로 화준(花樽, 꽃항아리)을 출품했을 때였어요.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저희 쪽으로 일제히 몰려드는 거예요. 꽃은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인류 공통의 언어였던 거죠.” 궁중채화에 대한 열렬한 반응은 2013년 밀라노 한국공예대전에서도 이어졌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서 채화가 익숙하긴 했지만, 그에게 계승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머니에게 채화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이수자가 되어도 수요가 거의 없으니, 결국에는 모두 떠나곤 했죠. 그래서 제가 전수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14년 < 아름다운 궁중채화전(Beautiful Royal Silk Flower)>을 준비하면서 그제야 채화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순조(재위 1800~1834)의 40세 생일과 등극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29년 창경궁에서 열렸던 당시의 잔치를 재현해 화제가 됐다. 이후 그는 염색부터 시작해 황 장인에게 본격적으로 전수를 받았고, 2019년 이수자로 인정받았다. 황 장인이 사재를 털어 경상남도 양산(梁山)시에 건립 중이던 한국궁중꽃박물관이 같은 해 완공돼 문을 열었다. 그는 이듬해 궁중채화의 교육과 발전을 위해 ‘궁중채화서울랩’을 열었고, 현재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국궁중꽃박물관장을 겸하고 있다. "궁중꽃박물관이 변하지 않아야 할 전통적 가치를 보존한다면, 궁중채화서울랩은 현대적 확장을 모색하고 실험하기 위한 연구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중채화서울랩(Royal Silk Flower Seoul Lab)에서 채화 제작을 가르치고 있는 최성우 이수자. 그는 궁중채화의 전통적 가치가 동시대에 공명(共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확장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환으로 궁중채화서울랩을 창설했다. ⓒ 한정현 현대적 조형물 최 대표는 2023년 9월부터 11월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진행된 < 공예 다이얼로그 > 전시에서 전통적인 홍벽도화준과 함께 채화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작품도 보여 주었다. "궁중채화의 조형적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자연이 선사하는 아날로그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채화의 전통적 가치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기법, 수단, 방법이 활용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언어로 표현된 창조적 조형물이 궁중채화의 전통성과 함께 구현되어야 하죠." 채화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쓰일 것인가의 문제는 이수자이자 문화 기획자로서 그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2023년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진행된 < 공예 다이얼로그 > 전시 모습. 최 이수자와 궁중채화서울랩 작가들이 함께 제작했으며, 궁중채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제공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인플루언서가 된 한국의 캐릭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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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가 된 한국의 캐릭터들 국내 캐릭터 콘텐츠 산업은 캐릭터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는 전략을 통해 지식재산권 산업의 핵심으로 부상 중이다. 기존에는 아이들과 키덜트에 한정되었던 캐릭터 소비문화가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으며, 한국산 캐릭터들의 인기가 국내를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2022년 5월,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타임빌라스(Time Villas)에서 15m 크기의 초대형 벨리곰을 구경하고 있는 방문객들. 벨리곰은 롯데홈쇼핑이 2018년 제작한 캐릭터로,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캐릭터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 벨리곰 휴대전화 메신저의 이모티콘 서비스는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또한 집 앞 편의점에서 캐릭터 인형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요즘은 캐릭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캐릭터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가리키는 용어에 불과했다 캐릭터 시장의 발전 캐릭터 개념이 확장된 시기는 국내 팬시 용품 산업이 발달하면서 캐릭터 시장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1980~90년대이다. 특히 만화가 김수정(Kim Soo-jung, 金水正)의 (1983~1993)는 만화 잡지 『보물섬(Bomulseom)』에 10년간 연재되었는데, 독특한 캐릭터들과 감칠맛 나는 대사가 큰 인기를 끌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완구, 문구를 비롯해 의류, 전자 제품, 바닥재 등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되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은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던 시기로, 당시 등장했던 인터넷 기반의 플래시 애니메이션들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들을 대거 선보이면서 캐릭터 향유층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그중 김재인(Kim Jae-in, 金在仁) 작가의 주인공인 마시마로(Mashimaro)는 ‘엽기 토끼’로 불리며 폭발적 인기를 누렸고, 미국과 일본에 진출했다. 같은 시기, 캐릭터 디자인 기업 부즈클럽(VOOZCLUB)이 제작한 뿌까(Pucca)는 유럽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었다. 마시마로와 뿌까는 그동안 해외 캐릭터들 위주로 소비되었던 국내 시장에서 국산 캐릭터의 점유율을 높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한편 2010년대에 들어 스마트폰 도입은 캐릭터 산업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KakaoTalk)은 자체 개발한 이모티콘 캐릭터 카카오 프렌즈(Kakao Friends)를 2012년부터 서비스했는데, 큰 인기에 힘입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조사한 캐릭터 선호도 조사에서 2017년 1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소통의 도구였던 카카오 프렌즈는 사용자들이 캐릭터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캐릭터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지니며, 국내 캐릭터 산업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팬덤 형성 현재 한국의 캐릭터 콘텐츠는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기업에서 자체 캐릭터를 개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1월 서울 성수동(聖水洞)에 자리한 플래그십 스토어 ‘GS25 도어 투 성수(DOOR to seongsu)’ 앞은 팝업 스토어 기간 동안 무무씨(MOOMOOSSI)를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무씨가 그려진 입간판 앞에는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늘어섰다. 무무씨는 편의점 브랜드 GS25를 운영하는 GS리테일이 티베트 여우를 의인화해 2022년 론칭한 캐릭터로, 인스타그램에서 2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확보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GS리테일은 무무씨 굿즈의 1년 누적 판매량이 100만 개가 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밝혔다. 2018년 롯데홈쇼핑이 사내 벤처를 통해 제작한 캐릭터 벨리곰(Bellygom)은 기업에서 만든 자체 캐릭터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캐릭터는 유튜브에서 몰래카메라 콘텐츠를 통해 인지도를 확보하며 팬덤을 모았으며, 2022년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콘텐츠대상에서 캐릭터 부문 대통령상을 받았다. 최근 벨리곰의 인기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롯데홈쇼핑은 벨리곰 IP의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무무씨와 벨리곰은 이제 캐릭터가 전면에서 소비자를 모으고 팬덤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공공 영역에서도 캐릭터를 활용한 소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추세다. 지자체가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캐릭터를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으로 당시에는 마스코트 이상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경기도 고양특례시가 시 홍보를 위해 2011년 개발한 ‘고양고양이’가 성공하면서 캐릭터를 통한 지역 발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경기도 용인특례시의 대표 캐릭터 ‘조아용’이 주목받고 있다. 2016년 첫선을 보인 이 캐릭터는 유튜브와 이모티콘 등 콘텐츠를 다변화하고, 신규 디자인을 꾸준히 개발한 점이 인기 유지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에버랜드와 협력하여 제작한 상품은 출시 2주 만에 4천 개가 넘게 팔려 공공 기관의 캐릭터도 상품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GS리테일이 2022년 론칭한 무무씨는 인스타그램에서 2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확보하며 인지도를 높였고, 50종에 달하는 관련 굿즈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 GS리테일 서브 캐릭터의 등장 서브 캐릭터가 주목받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잔망 루피(Zanmang Loopy)가 대표적이다. 이 캐릭터는 유아용 TV 애니메이션 의 등장인물 중 하나다. 2003년 E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이 작품은 주인공 뽀로로를 ‘아이들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정도로 흥행했다. 뽀로로 캐릭터 상품도 불티나게 팔려 국산 캐릭터가 수입 캐릭터 점유율을 처음으로 앞지르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 캐릭터 산업의 역사를 바꾼 주역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원작에서 뽀로로의 친구로 등장하는 비버 캐릭터 루피(Loopy)가 인터넷 밈을 통해 화제가 되고, 2020년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도 출시되었다. 원작의 뽀로로가 유아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데 반해 잔망 루피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이 캐릭터는 젊은 세대에게 각광받는다. ‘잔망(孱妄)’은 행동이 얄밉고 맹랑하다는 뜻이지만, 속시원하게 할 말을 하는 야무지고 귀여운 캐릭터로 인식되면서 젊은 층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 캐릭터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의 앰버서더로 활동하거나 『보그 코리아』 화보 모델이 되는 등 캐릭터 컬레버래이션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잔망 루피의 인기가 중국에까지 확산되는 중이다. 2023년 5월 중국 SNS 플랫폼인 샤오훙수(Xiaohongshu, 小紅書)에 개설된 공식 계정은 7개월 만에 팔로워 수가 440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20~30대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잔망 루피는 2003년 EBS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TV 애니메이션 의 등장인물 중 하나다. 인터넷 밈을 통해 화제가 되면서 인기 캐릭터로 부상했고, 국내외 유명 브랜드들의 앰버서더나 모델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2023년에는 생수 브랜드 제주삼다수와 컬래버레이션하여 친환경 메시지를 전했다. ⓒ I/O/E/SKB 다양한 플랫폼 캐릭터 산업은 이제 단순한 굿즈 판매를 넘어선다. 캐릭터가 팬덤을 형성하는가 하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플루언서로 활동한다. 이는 캐릭터 향유층의 세대 변화가 주요한 원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와 게임을 통해 캐릭터 소비가 익숙했던 세대가 어른이 되면서 캐릭터 산업의 주요 소비층이 된 것이다. 아이들이나 일부 키덜트의 문화로 여겼던 캐릭터 소비가 어른들의 문화로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더불어 각자의 취향과 취미를 존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젊은 세대의 성향은 캐릭터 콘텐츠가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때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토대가 된다. 캐릭터의 세계관을 확장하며 시대에 부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예전에는 캐릭터 콘텐츠 소비가 TV 같은 전통적 매체에서 주로 이루어졌지만, 최근에는 자체적으로 구축한 채널을 비롯해 유튜브, 틱톡, SNS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각적으로 유통된다. 이에 따라 콘텐츠 표현과 제작 방식이 더욱 자유로워졌고, 젊은 세대의 감성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는 캐릭터로 어떤 파생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제는 캐릭터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의하면 국내 캐릭터 IP 시장은 매년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2025년에는 16조 2천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일본과 미국 중심이었던 캐릭터 콘텐츠의 패러다임이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K-캐릭터도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몰랑이(Molang)는 일러스트레이터 윤혜지(Yoon Hye-ji, 尹憓智)가 2010년 온라인을 통해 발표한 캐릭터로, 프랑스 애니메이션 제작사 밀리마주(Millimages)가 2015년부터 TV 시리즈로 제작하고 있으며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큰 인기에 힘입어 여러 브랜드들과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연남동에 자리한 갤러리 몰랑(Gallery Molang)의 내부. ⓒ 하얀오리(Hayanori)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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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나목』 김금숙 작, 자넷 홍 번역, 320쪽, 29.95달러, 드론 앤 쿼털리(2023) 사랑받은 소설을 다시 상상하다 크로스미디어의 각색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글이나 그림 작품, 즉 소설이나 만화가 영화나 TV 드라마로 각색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유명 작가인 고 박완서(1931-2011)의 데뷔 소설 『나목』을 각색한 김금숙 작가의 『나목』은 그래픽 소설이라는 시각적 매체를 통해 원작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박완서의 원작 소설 『나목』은 한국전쟁 동안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던 화가 박수근(1914-1965)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예술적 비전과 천재성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인정 받지 못했다. 박완서 작가의 분신인 경아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소설은 한국인과 주둔한 외국군 사이의 문화 충돌과 한국전쟁 동안 사회적 가치가 변화하는 신생국의 특징을 다루기도 한다. 그 격변의 시대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비판함으로써 호평을 받은 소설은 여성 작가에게 수여하는 여성동아 문학상을 받았다. 김금숙의 그래픽 소설은 이 유명한 작품의 역사에 또 다른 장을 추가한다. 그녀는 원작에 충실히 하고자 했지만, 점차 그녀만의 색을 넣어 새로운 서사를 끌어냈다. 핵심 서사는 동일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박완서와 그녀 남편의 분신으로 재탄생한 인물이 도입되면서 원작의 이야기에 맥락을 더한다. 김금숙은 박수근의 여러 작품을 모작하여 핵심 서사와 맥락 부분에 집어넣었다. 이는 이야기에 더 많은 층과 깊이를 더하면서 실제 인물들의 삶과 이들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인물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독자 각각의 마음속에 이미지가 생성되지만, 그래픽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예술가의 독특한 비전을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다. 작가는 악몽 같고, 정신 없고, 고통스러우며, 아름다울 수도 있는 한국전쟁 기간의 서울을 흑백 드로잉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그래픽 표현을 넘어 자신이 선택한 매체를 최대한 활용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만화 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가 말하는 “출혈을 일으키고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 탈출하는” 것을 표현할 때 보통의 칸보다 확장된 칸을 활용한다. 확장된 칸은 때때로 시간의 확장을 암시하면서 서사에서의 전환을 예고한다. 또 다른 경우로는 한국전쟁의 외부적 혼란 혹은 인물들의 내적 혼란을 묘사한다. 작가는 그래픽 소설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기본 적인 칸에서도 그것들을 기발하게 활용한다. 경아가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릴 때 그녀 가족에 대한 묘사는 실제로 칸의 경계를 뚫고 나온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는 시각적 표현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인물들이 장면의 일부인 것처럼 칸 가장자리에 팔이나 손을 얹고 있다. 박수근의 작품 전시회를 묘사하는 장에서는 작품 자체만을 위해 칸이 이용되고 인물들은 그림 주변에서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활보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 받은 소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재창조하는 작가의 기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직접 탐험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남겨둔다. 박완서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든 처음으로 접하게 되든 이 그래픽 소설은 작품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창이다. 『 당신의 죄는 내가 아닙니까 』 최지인 작, 스텔라 김 번역, 142쪽, 10,000원, 아시아 출판사(2023) 한 시인의 쟁투 최지인의 새 시집은 ‘사건들’이 벌어진 세상의 장소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제주, 오키나와, 타이베이, 마닐라, 싱가포르,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아이티, 홋카이도’.(‘커브’). 이 시집의 모든 라인에는 전쟁과 갈등이 엮여 기억과 역사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커브’)라고 고백하면서 이를 통해 의미를 찾지만, 자신의 탐구가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신세계’). “세상의 죄를 짊어진 지구의 고양(羔羊)이여”(‘성장의 끝’)와 같은 성경 주제에 대한 눈에 띄는 언급은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공자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지혜를 뒤집는다. “감히 삶에 대하여 / 묻습니다 / 죽음을 모르는데 / 어찌 삶을 알겠습니까”(‘파종’).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여전히 사랑을 선택한다. 어떤 희망을 품든지 간에 아마도 그 희망은 이 선택과 우리가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 모른다. 최지인 시인이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기억들이다.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www.liveinkorea.kr 한 지붕 아래의 세상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 웹사이트는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13개의 언어로 제공한다. 영어와 러시아어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언어들이다.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누리’는 ‘많은’ 혹은 ‘다수의’라는 한자어 ‘다(多)’와 ‘세계’를 의미하는 순수 한국어 ‘누리’의 조합이다. 이 사이트는 다문화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디자인되었고, 주 대상자는 한국에 사는 여성 결혼이민자이다. 하지만 다른 이민자들도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정보는 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두 개의 파일, ‘결혼 이민자를 위한 웰컴북’과 ‘한국생활 가이드북’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한국에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주요 정보를 요약한 짧은 이중 언어 책자이다. 후자는 각각의 언어 한 가지로 되어 있고 이민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책자이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다문화가족과 결혼이주민들을 위한 것이지만 내용의 많은 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이 사이트는 가끔 검색이 힘들기는 하지만 신중하게 준비되고 선별된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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