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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tainment

여성 예능 바람이 분다

Entertainment 2022 SPRING 570

여성 예능 바람이 분다 남성 중심의 방송 환경과 낮은 시청률로 인해 부진하던 여성 예능이 최근 들어 한국의 TV 예능 편성에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성들 간의 유대와 공감 속에 펼쳐지는 도전과 상호 존중의 서사가 시청자들의 마음에 큰 여운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수들의 뒤에서 무대를 지켜왔던 무명의 댄서들을 조망한 케이블 TV 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는 2021년 8월 방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사진 속 그룹은 격전 끝에 최종 우승을 차지한 홀리뱅이다. ©Mnet 2021년 한국 TV에서 가장 뜨거웠던 콘텐츠 가운데 Mnet의 (街頭女戰士, Street Woman Fighter) 가 있다. 흔히 가수 뒤의‘백댄서’로 호명되던 여성 댄스 크루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경연을 펼친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8월 24일 첫 방영부터 화제를 모았다. 방영 기간 동안 꾸준히 비드라마 화제성 1위를 기록했고, 10월 26일 종영 이후에는 주요 참가자들이 다른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에 게스트로 초청받는가 하면, 여러 패션잡지의 연말 결산에서도 일제히 다뤄졌다.   의 무대는 한 명의 MC와 세 명의 심사위원을 중심으로 대결을 앞둔 양 크루가 바라보는 사각형 구조다. 그 주위로 나머지 크루 멤버들이 자리 잡고 응원과 호응을 해준다. ©Mnet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왼쪽)와 코카N버터의 리더 리헤이. 예고편은 ‘쎈 여자들’의 다툼이고 아찔한 갈등의 연속이었으나 본방에서 보여준 출연자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름답게 인정하는 멋진 모습이었다. ©Mnet 라치카(La Chica)는 애초에 한 가수의 안무를 짜기 위해 모인 일시적 모임이었는데, 작업량이 많아지고 다른 가수들의 안무도 담당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팀이 됐다. 원래 세 명이 팀원이지만 스우파 출연을 위해 피넛(왼쪽에서 두번째)과 에이치원(맨 오른쪽)이 객원 맴버로 참석했다. ©Mnet 새로운 트렌드 2010년 Mnet의 (Superstar K) 시즌 2와 2020년 TV조선에서 방영한 (Mr. Trot, 明天是)이 그러했듯, 는 단순한 인기 프로그램을 너머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역대 시청률을 갱신했던 두 프로그램과 달리 의 시청률은 가장 높았을 때도 3%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프로그램은 불특정 다수 시청자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 포털 등 TV 바깥에서 커다란 화제를 만들며 팬덤을 이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따져보려면 시청률이라는 지표에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긴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코미디언, 패션 모델, 배우 등 여성 유명인들이 2002년 월드컵 대표 선수들을 감독으로 축구팀을 만들어 경쟁한 SBS (Kick A Goal, 踢球的她们)이다. 2021년 6월 이후 계속 방영 중인 이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은 6~8%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같은 해 신작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 눈에 띄게 높은 수준이다. 최근 조작 논란이 있긴 했지만, 침체에 빠져 있었던 지상파 예능의 희망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 만들어낸 신드롬과 의 안정적인 높은 시청률이 지난 해 한국 여성 예능의 부흥을 이끈 두 가지‘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클리셰에 맞서다 두 프로그램에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형식을 갖췄으면서 동시에 여성 서바이벌 예능의 거의 모든 클리셰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TV 여성 서바이벌 예능에서 보여온 구도는 경쟁 자체보다는, 경쟁 과정에서 격화되는 감정싸움을 구경하거나 ‘여성 치고 잘하는’ 모습을 기특해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어 왔다. 는 다른 여성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그래왔듯, 강렬한 비주얼의 여성끼리 벌이는 ‘캣파이트’를 노골적으로 의도한 프로그램이다. ‘2021년 여름, 춤으로 패는 여자들이 온다!’는 방영 전 홍보 문구나 예고편도 여지없이 캣파이트를 연상시켰다. 또한 만만한 상대로 지목된 댄서가 옷에‘No Respect’ 스티커를 붙이고 배틀을 벌이는 첫 미션에서 연이어 아이돌 출신 댄서를 제압하는 모습은 마치 하이에나 무리가 손쉬운 먹잇감을 사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드롬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계급 미션’에서도 댄스 크루 웨이비의 리더 노제(No:ze, 盧智慧)가 만든 안무를 채택한 뒤 그 안무를 더 잘 소화해 메인 댄서가 되려는 다른 크루 리더들의 치열한 역공의 과정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프로그램 속에는 단순한 싸움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존감 높은 출연자들의 진짜 모습이 있었다. 아이돌 출신 댄서가 탈락하게 되는 마지막까지 모든 출연자들은 그에게 한없는 애정과 존중을 표시했다. 또한 노제가 만든 안무를 두고 한 출연자가 “저건 내가 좀 갖고 놀 수 있겠다. 외우기만 하면” 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그 춤이 쉽고 만만하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춤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가 내비쳤다. 출연자들 간의 경쟁을 감정적 캣파이트로 묘사하려는 편집에도 불구하고 춤을 향한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감춰지지 않았고, 바로 이 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탈락해야 했던 노제는 “항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담담하게 춤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떠났다. 바로 이때부터 모든 참가자에게는 승패 보다는 프로로서 얼마나 후회 없이 전문성을 증명하고 가느냐가 중요하게 됐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프라우드먼이 3차 미션에서 떨어졌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그들의 패배가 아니었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종전의 어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이 10%의 높은 시청률을 올리자 정규 편성에 들어갔던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이 모여 스포츠 경기를 벌이는 경우 종전에는 으레 출연자들의 부족한 실력과 실수가 주는 웃음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 반해, 이 프로그램은 그러한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파일럿 방송에서 우승했던 중년 스타 팀 FC 불나방은 정규 방송에서도 다시 리그와 토너먼트를 거치며 우승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었다. 평균 키가 월등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파일럿 단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던 모델 팀이 정규프로에서 가까스로 4강전에 올라 FC 불나방과의 결승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끈질긴 시도로 득점에 성공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YG엔터테인먼트 산하의 댄스 레이블 YGX는 주로 YG 소속 가수의 공연이나 연습생 트레이너로 활동하다 에 합류했다. 참가 그룹 중 가장 어리고 톡톡 튀는 이미지로 Z세대 여성의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주 고객층이 Z세대 여성들인 유명 패션 플랫폼의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Mnet 유대와 공감 남성 중심의 방송 환경에서 여성 예능이 하나의 큰 흐름으로 떠오르게 된 배경에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또 다른 방법, 즉 진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성실과 끈기, 그리고 상호 존중의 태도가 있었다. 의 최고 명대사로 꼽히는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는 감히 남자들은 끼어들 수 없는 강한 여성들의 도도한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러한 한국 여성 예능의 부상이 있기 까지는 2020년 방영이 시작된 E채널의 (Sporty Sisters, 愛玩的姐姐)나 2016년 7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방영된 MBC everyone의 처럼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온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2021년에 시즌 2로 이어진 에서는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박세리(Pak Se-ri, 朴世莉)를 비롯해 전‧현직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해 새로운 운동 종목이나 취미를 경험한다. 막강한 근육과 넓은 어깨로 화제가 됐던 수영선수 정유인(Jung You-in, 鄭唯仁)처럼 그 동안의 TV 속 젠더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 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에서 코미디언 김민경(Kim Min-Kyoung, 金敏璟)이 큰 체구로 수비수를 튕겨낼 정도의 저돌적인 드리블을 하는 통쾌한 장면도 서로 일맥상통한다. 최근까지 남성 진행자들만 있었던 MBC의 인기 토크쇼 의 마이너 버전 정도로 만들어졌던 (Video Star)의 존재도 중요하다. 이 쇼가 5년 동안 장수하는 동안 MC를 맡았던 박나래(Park Na-rae, 朴娜勑)와 김숙(Kim Sook, 金淑)은 각각 2019년 MBC 방송연예대상, 2020년 KBS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남성에 비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방송인들이 진행자로서 자리를 지키고 성장해 최고의 예능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송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관점에서 그려졌고 주변부로 밀려나기 일수였다. 그런 속에서도 새롭게 자신들의 영역을 개발해온 여성 연예인들이 있고, 또한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응원하고 지지하는 여성 시청자들이 있어 왔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싸움을 해온 유대감을 공유하며 또 한 번의 전진을 위해 투쟁을 각오한다. 이들의 성취는 아직 결말이 아닌 과정이다. 2022년에도 그들은 새로 보여줄 것들이 많아 보인다.

이념을 넘어 지켜야 했던 것

Entertainment 2021 WINTER 971

이념을 넘어 지켜야 했던 것 영화 는 30년 전 소말리아 내전에서 함께 살아남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실화를 생생하게 엮었다. 이념과 체제가 생존의 본능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파헤친다. 2021년 7월 개봉한 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합쳐 혼란의 도시를 함께 탈출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4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탄 양측 외교관과 그 가족들의 긴박한 탈출 장면이 영화의 백미이다. 소말리아와 풍경이 비슷한 모로코 에사우이라에서 거의 모든 장면을 CG 없이 실제로 촬영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미라클 작전도 영화로 만들 준비를 해야 하나.” 얼마 전 ‘미라클 작전’을 지켜보다가 촬영이 한창이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 감독에게 관련 기사를 보냈더니 ‘미소’이모진을 덧붙여 돌아온 대답이다. 지난 8월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재점령으로 아수라장이 된 카불에서 그 동안 한국 정부에 협력한 아프간 민간인과 그들의 가족을 탈출시킨 정부의 결정과 실행은 국제사회에서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작전을 지켜보면서 코로나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 속에서도 극장 관객 300만을 기록하며 장기 상영에 들어 간 류승완 감독의 영화 (逃出摩加迪休, Escape from Mogadishu; 2021)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운명 같은 인연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2년 전, 류 감독이 속한 제작사 외유내강(內柔外剛 Filmmaker R&K)이 제작한 재난 영화 (極限逃生, EXIT; 2019)의 시사회에서 잠깐 만났을 때 류 감독이 던진 말이다. 전작 (軍艦島, The Battleship Island; 2017) 이후 와신상담하던 그가 자신의 열한 번째 장편영화로 를 막 결정했던 즈음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라 그는 말을 아꼈지만 그 날의 짧은 대화에서 그가 어떤 배경과 분위기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 두 가지를 얻었다. 그것은 실화를 재구성한다는 것과 남북한 인물들이 총알 세례를 뚫고 함께 사막을 질주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일까 무척 궁금했었고, 극장 객석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지 2년이 걸렸다. 의 배경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기반한다. 1990년 12월 30일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바레 장군의 장기 독재를 거부하는 시위가 쿠데타를 불러 일으키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남북한 대사관이 동시에 주재하며 상호 비난과 공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모가디슈에서 두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모아 함께 혼란의 도시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류 감독이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던 이 사건을 스크린에 펼쳐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로 대치 중이던 남북한의 외교관들이 제3국에서, 그것도 머나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나란히 분투한 사건에서 단순한 흥미 이상의 어떤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류 감독은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 놀러온 후배로부터 1991년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與神同行, 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 시리즈를 제작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辣手警探, Veteran; 2015)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두어 해가 지난 뒤 덱스터 스튜디오가 그에게 연출 제안을 해 왔다. 류 감독은 “실화가 궁금해 당시 언론 보도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극적인 이야기라 누가 됐든 잘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과 영화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그가 이 사건에 매료된 건 무엇보다도 ‘함께 탈출한 남북한 외교관들이 특수 부대원이나 첩보 요원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흥미진진했고, 종전에 영화를 만들던 방식과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것이 나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는 게 류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실화를 다시 취재해 영화로 재구성했다. 모가디슈가 무장 군인과 반란군의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기 전 남북한 외교관들은 각기 자국의 UN 가입에 소말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남한 대사 역의 김윤식(전면 왼쪽)과 북한 대사 역의 허준호가 긴장된 관계를 보여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냉전 속 뜨거운 감동 영화는 1990년 12월 초부터 내전이 시작된 12월 30일을 거쳐 남과 북의 외교관들이 모가디슈를 벗어나는 1991년 1월 12일까지 약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다룬다. 류 감독은 역사적 사실의 배경과 진전, 그리고 결말을 충실히 끌어오되 캐릭터와 사건의 디테일을 영화적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그것은 그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기도 하다. 류 감독은 “그 기간은 소말리아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급변하던 시기라 이 격동적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대한한국 대사관 관저에서 12일을 함께 보냈는데 그 기간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채워넣는 게 관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에서는 크게 두 개의 전쟁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장중한 아프리카풍 음악을 배경으로 바다에서 바라보는 모가디슈 풍경— 이제껏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지는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남북간의 외교전이 펼쳐진다. 남북한 대사들은 앞다퉈 대통령, 장관 등 소말리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로비를 벌인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고, 나라에 국격이 있듯이 외교에도 격조가 있다” 지만, 각기 유엔 가입을 위한 회원국의 표만 끌어올 수 있다면 아슬아슬한 공작도 서슴지 않는다. 당시 냉전 말기에 힘의 우위에 있었던 건 영화 속 북한 대사의 말처럼 “남조선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아프리카에 기반을 닦은”북한이다. 남한 대사는 북한 대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어 번번이 허탕을 친다. 영화의 전반부는 주요 캐릭터들을 꼼꼼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소말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과정을 공들여 보여준다. 그 의도를 류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고 그들과 함께 내전 상황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는지 사실적으로 잘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너무나 잘 알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이 첫 경험이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봐 걱정됐다. 다행스럽게도 관객이 영화 속 내전 상황을 무리 없이 잘 이해한 것 같다.” 북한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는 반군이 진짜 전쟁을 일으키는 중반부부터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동요하며, 군부가 모가디슈로 진입해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 서사는 남과 북의 외교전에서 모가디슈 탈주극으로 전환된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목표는 탈출해 살아남는 것,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탈주극은 류 감독이 처음 시도한 장르가 아니다. 의 후반부에서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탈주한다. 하지만 그 탈출 신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판타지라면, 의 그것은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 (黑鷹計劃, Black Hawk Down; 2001)이나 미국 CIA 요원이 이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는 (逃离德黑兰, Argo; 2012) 역시 실화를 기반으로 한 탈주극이지만, 한 국가가 자국민을 구출하는 작전을 그려낸 앞의 두 영화와 달리 는 내전으로 인해 치안이 파괴되고 통신이 두절된 주재국 수도를 냉전 속에 대치 중인 적대국의 외교관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힘을 합쳐 탈출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류승완 감독은 로 11월 10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같은 시상식에서 촬영상, 음악상, 남우조연상도 받아 4관왕의 영예를 누렸다. 또한 내년 3월 개최되는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류승완식 휴머니즘 남북한 대사관 직원 20여명이 자동차 4대에 나눠 탄 채 화염병과 총알 세례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질주하는 후반부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고스란히 반영된 명장면이다. 포드 머스탱이 서울 명동 거리를 질주했던 류 감독의 전작 과 달리 이 영화 속 자동차들은 ‘모래주머니와 책을 매달아’ 속도를 내지 못해 아슬아슬한 묘미가 있다. 그런데도 서스펜스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관객이 함께 타고 있는 느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류 감독은 “진짜 같아야 한다는 원칙 안에서 신경 썼던 건 ‘스펙터클해서는 안된다’ 였다. 쏟아지는 총알과 화염병 속에 질주하는 인물들의 절박감이 전달되려면 스펙터클보다는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게 중요”했다며 “카메라가 자동차 외관보다는 차 내부 상황을 중점적으로 담아낸 것도 그래서다. 무엇보다 관객이 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느끼게 하려면 사운드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게 필요했다. 사운드팀이 녹음실에서 차 소리와 총격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4대가 사람을 가득 태워 느린 속도로 반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숨막히는 광경을 그 흔한 인물의 클로즈업숏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오케스트라 음악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 인상적이다. 또한 소말리아를 탈출한 비행기 안에서 남북한 인물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정갈하고 담백하게 묘사되었다. 류 감독은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을 찍을 때 배우들이 많이 울었다. 촬영 후반부라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된 상태로 함께 지냈겠나”라며 “그 장면이 과거에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힘을 가지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두가 그 상황이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남한 대사의 부인이 깻잎을 떼어내지 못하자 북한 대사의 부인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도와주는 장면이 뭉클했던 것도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연대를 보여준 덕분일 것이다. 아마 이 대목에서 박찬욱 감독의 (JSA安全地帶, Joint Security Area; 2000)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초코파이 하나로 우정을 나누던 장면이 절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의지, 또한 체제와 이념보다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휴머니즘 — 류 감독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메시지다.

밀리터리 콘텐츠의 새 풍경

Entertainment 2021 AUTUMN 1138

밀리터리 콘텐츠의 새 풍경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최근 특수부대 출신 출연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가 색다른 기획으로 화제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군대 소재 콘텐츠는 스테디셀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튜브 콘텐츠로 화제가 됐던 (虚假的男人, Fake Man; 2020)는 특수부대 훈련을 통해 불굴의 정신력을 기른다는 기획 의도 아래 지나치게 출연자들을 혹사시키는 장면들로 인해‘가학 논란’속에 방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니 ‘군대’라는 소재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던 상황에, 또 다른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작 전부터 우려 섞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올 3월부터 6월까지 케이블 TV 채널 A를 통해 방영된 는 여섯 개 특수 부대 예비역들이 출연한 서바이벌 밀리터리 예능이다. 각기 소속되었던 부대에 따라 특수 기술을 가진 출연자들이 극한의 대결을 펼쳐 최종 우승 부대를 가리는 방식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 채널 A 기대 밖의 열풍 하지만 올 3월 23일부터 6월 22일까지 3개월 동안 채널A가 매주 화요일 밤에 방영한 (钢铁部队, Steel Troops)는 시작과 함께 이런 우려들을 기대감으로 바꿔 놓았다.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로 팀을 꾸려, 최고의 부대를 가려낸다는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애초에 훈련 과정이 불필요했다. 철저히 준비된 출연자들이 부대별로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가학 논란도 개입될 수 없는 구성이었다. 대신 자신이 속했던 부대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스포츠맨십이 더해졌다. 차가운 밤바다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하고, 250kg 무게의 타이어를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계속 뒤집어가며 300m를 이동하거나, 40kg 군장을 한 채 10km 산악행군을 하는 혹독한 미션들은 단지 승패만이 아니라 완주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탈락이 결정된 팀마저 끝까지 함께 미션을 완수한 것은 부대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패자에게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여기에 남다른 체격에 잘 생긴 외모를 갖춘 출연자들이 벌이는 ‘대테러 작전’, ‘서울함 탈환작전’ 등은 마치 게임 같은 환상으로 여성 팬들까지 끌어 모았다. 레인보우식스나 배틀그라운드 같은 일인칭 슈팅 게임(FPS)을 실제 버전으로 보는 듯한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이 열띤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압도적인 피지컬의 출연자들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인기를 몰아갔다. 그 중 해군 특수전전단 UDT/SEAL 폭발물처리대대에서 하사로 전역한 육준서(陸俊書)는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출연자 중 한명이다. 그가 속한 UDT가 결국 우승팀이 됐다. © 채널 A 밀리터리 콘텐츠의 계보 이전에도 한국에는 다양한 밀리터리 콘텐츠들이 꾸준히 등장해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KBS 2TV 코미디 프로그램 의 한 코너로 방영되었던‘동작 그만’은 병영생활을 콩트 코미디 형식으로 다뤘다. 군대 경험에 대한 시청자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서열문화를 슬쩍 비튼 이 콩트 코미디는 한국인들이 군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중적인 감정을 잘 건드렸다. 즉 한창 나이인 20대에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던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힘겨움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그들만이 겪은 일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감정의 복합적인 심리상태로 이어진다. ‘동작 그만’은 그 힘겨움과 자랑스러움에 대한 공감과 함께, 병영 내 서열 문화의 불편함을 살짝 곁들여 웃음으로 전해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MBC TV가 방영했던 (友情的舞台)는 전형적인 군대 위문 공연 프로그램으로, 이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KBS 1TV가 방영한 같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만 해도 군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부와 격리된 환경이었고, 따라서 이런 위문 공연 방식의 프로그램들은 군인들과 일반인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시간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의 마지막 코너였던 ‘그리운 어머니는 군부대를 찾아온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는 장면이 늘 화제가 되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대는 외부에 공개되기가 쉽지 않은 공간이다. 하지만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시즌을 나눠 MBC TV에서 방영됐던 (真正的男人, Real Men)는 여러 부대에 연예인들이 단기 입소해 그 경험을 담는 파격을 선보였다. 당시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던 관찰카메라(일명 리얼리티쇼)가 군대 내무반까지 들어가 그 생생한 체험을 담았던 것이다. 물론 보안상의 이유로 어느 정도 ‘준비된 내무반’의 상황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에 비해 한국의 군대가 훨씬 개방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2013년 공군이 영화 (悲惨世界, Les Miserables)을 패러디해 홍보영상으로 만든 (Les Militaribles)은 영화에서 자베르 경감 역할을 연기했던 러셀 크로우가 언급하면서 국제적인 화제가 되어 영국 BBC에서보도되기도 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육군은 당시 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던 싸이의 (绅士, Gentleman)을 패러디한 (GentleSoldier)을 내놓았다. 한국의 군대가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3~4회에서 특수부대 예비역들이 IBS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은밀한 해상 침투나 정찰 등의 목적에 사용되는 고무보트 IBS는 무게가 250kg에 달한다. ⓒ 채널 A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만나다 시대가 바뀌면서 대중들의 감수성도 바뀌었다. 를 패러디한 는 ‘진짜가 되려는 가짜들의 도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경쟁을 통해 선발된 일반인들이 해군 특수전전단 (MUSAT) 훈련을 받는 혹독한 과정들을 담았다. 상대적으로 표현이 자유로운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특징 때문에, 가혹할 정도로 강도가 높은 훈련과정들이 가감 없이 공개되었고,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튜브 콘텐츠는 주로 1인 크리에이터들의 방송이라 알려졌지만, 는 여러 유명 유튜버들이 모여 함께 만든 통합적인 방송으로 유튜브에도 블록버스터급 콘텐츠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를 통해 대중에 알려진 일부 특수부대 출신 교관들은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 유명인이 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영국 Discovery Channel에서 2006년부터 2011년가지 방영된 (荒野求生, Man vs. Wild)의 베어 그릴스가 영국 육군 하사 출신 예비역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제 한국의 특수 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또한 지난 해 특전사 출신 여성 교관이 여성 연예인들의 유튜브 서바이벌 프로그램 (我還活著, I′m a Survivor)로 화제가 된 것은 이제 군대 소재 콘텐츠가 보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 는 바로 이 변화의 정점에서 이제까지의 군대 콘텐츠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정수를 성공적으로 엮어낸 경우다. 분단과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군대는 폐쇄적인 곳일 수밖에 없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쉽게 개방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기성세대들이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며 한국의 군대도 조금씩 변화를 겪고 있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고립되고 닫혀 있던 군대가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이제는 그 경험이 TV 프로그램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고 더 나아가 일상의 생존을 위한 노하우로도 소비되고 있으니 말이다. 꾸준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밀리터리 콘텐츠들의 변화 과정은 그래서 실제 군대의 변화 과정과 맞닿아 있다. 2회에서 최강대원 선발을 통한‘대진 결정권’을 두고 여섯 부대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메인 미션 사이에 베네핏을 건 서브 미션들이 함께 진행되었다. ⓒ 채널 A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넷플릭스와 한국 콘텐츠의 즐거운 상생

Entertainment 2021 SUMMER 1179

넷플릭스와 한국 콘텐츠의 즐거운 상생 한국 시장 진출 이후 5년– 넷플릭스는 그동안 한국 콘텐츠의 수준을 높였고,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순항의 이면에는 지속적인 투자와 과감한 도전, 그리고 우수한 제작자들의 협력이 있었다. 2016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OTT(over-the-top)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의 최강자 넷플릭스(Netflix)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양질의 외국 콘텐츠가 한국시장에 쏟아졌고, 한국의 우수한 콘텐츠도 해외 관객을 만났다. 넷플릭스 덕분에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이 세계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덕분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 구독자 수를 늘려나갔다. 콘텐츠 교류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윈윈’ 관계를 확실히 구축한 것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콘텐츠 시장은 전례 없는 격변을 맞았다. CJ ENM의 티빙(TVING), KT의 Seezn, SKT의 wavee가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 중이다. Disney+등 외국의 대형 OTT 서비스도 한국 시장 진출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이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파격적인 시작 넷플릭스는 한국 진출을 선언할 때부터 파격이었다. 74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투자해 제작한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대작 (玉子, Okja; 2017)를 한국 넷플릭스의 간판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국내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OTT와 극장 동시 상영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으나, 봉 감독은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눈 도장을 찍었다. 어찌보면 (寄生虫, Parasite; 2019)이 거둔 미국 아카데미 4관왕의 첫 단추는 넷플릭스와의 공조였던 셈이다. 넷플릭스는 이후 (甜蜜家园, Sweet Home; 2020), (灵能教师安恩英, The School Nurse Files; 2020), (乐园之夜, Night in Paradise; 2021)의 공개로 계속 라인업을 확장했다. 의 경우 지난해 12월 18일 공개한 이후 한 달 만에 2200만 계정이 시청했다. 이는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에 해당하며, 한국 콘텐츠의 잇단 흥행 성공에 힘 입어 전 세계 구독자수가 지난해 2억명을 돌파했다. 영화 에서 환경단체 ALF(Animal Liberation Front)의 목적은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숨겨진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다. © 넷플릭스(Netflix) 주인공 미자(우)는 잃어버린 친구 옥자를 되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대표 낸시 미란도를 만난다. 주목하는 이유 넷플릭스는 한국을 단순히 소비시장으로 보지 않았다. 인구 5000만명의 나라는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아시아에서 지사나 사무소를 둔 곳은 싱가폴, 인도, 일본, 그리고 한국 네 나라뿐이다. 인도는 12억 인구로 시장이 방대하다. 싱가폴은 동·서양을 잇는 교두보로 필요하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생산을 위해서 마련됐다. 지리적 위치도, 인구 수도 수익을 보장할 수 없어 보이는 한국에 넷플릭스가 뛰어 든 이유는 뛰어난 콘텐츠 제작능력이 있어서다. 우수한 드라마·영화 제작자들이 구미를 당기게 했다. 콘텐츠 생산 전초기지로 알맞아 보인 것이다. 넷플릭스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한 (尸战朝鲜/屍戰朝鮮, Kingdom;시즌 1 2019, 시즌 2 2020)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좀비 이야기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혼합한 콘텐츠로 주목을 끌었다. 김은희(Kim Eun-hee, 金銀姬) 작가의 필력도 한 몫했다. 미국에서는 조선의 양반들이 쓰던 모자 ‘갓’을 구매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넷플릭스는 해외 팬들이 K-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한류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한류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아시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선진국인 영국과 미국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해외 팬들이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한국 콘텐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영국인 소피 씨(Sophie Abdoul, 23)는 14살 때부터 K-팝과 한국 드라마, 그리고 영화를 꾸준히 챙겨 봤다. 아이돌 음악은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드라마만큼은 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최근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를 연달아 공개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넷플릭스로 인해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아졌다”면서 “우울할 때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한국 문화 전도사처럼 친구와 가족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고 했다. 미국인 첼시 씨(Chelsea Anosik, 18)는 한국 드라마 팬이다. 넷플릭스의 한국 콘텐츠 서비스가 시작되기 전부터 K-드라마를 즐겨 온 그는 요즘 더 많은 한국 드라마를 찾아 보고 있다. (奶酪陷阱, Cheese in the Trap; 2016)을 시작으로 , (虽然是精神病但没关系, It’s Okay to Not be Okay; 2020)까지 즐기는 장르도 다양하다. 그는 “한국 드라마는 너무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것도 인기 요소”라고 했다. 이어“넷플릭스가 한국 작가, 감독, 배우들에게 기존 TV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도전을 촉구하는 모습이 반갑다”면서 “한국 드라마는 로맨스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보다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아시아에서도 K-콘텐츠와 넷플릭스의 협업이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필리핀인 마리 (Marié Olivia Garcia) 씨는 “넷플릭스에 올라오는 한국 콘텐츠는 기존 TV 프로그램보다 더 많은 옵션을 제공한다”면서 “한류 팬들에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영화 (屍速列車, Train to Busan; 2016)으로 한국 콘텐츠에 빠져든 인도인 스라비카(Shravika Wanjari) 씨 역시 “좀비물·스릴러물이 굉장히 뛰어난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점령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2020년 9월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은 정세랑(Chung Serang, 郑世朗)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시즌 1은 총 6화로 러닝타임 298분이다. ©넷플릭스(Netflix) 조선 왕조를 위협하는 좀비가 등장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포물 중 하나이다. 두 번째 시즌은 첫 번째 시즌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김성훈(Kim Sung-hoon 金成勳) 감독은 곧 방영 예정인 스페셜 에피소드 이 세 번째 시즌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라 말했다. 올 해 공개될 드라마 은 주동근(Joo Dong-geun 朱東根)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도시 속 한 고등학교에 고립된 이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자들이 극한 상황을 겪으며 벌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4월 9일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한 박훈정(Park Hoon-jung 朴勋政) 감독의 영화 은 한국형 누아르에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까지 더해지며 스토리와 영상미를 함께 잡았다. 군대를 소재로 한 한준희(Han Joon-hee 韩俊熙) 감독의 는 평범한 이등병이 ‘군무이탈 체포조’가 되어 탈영병을 쫓으며 마주하는 혼란스러운 청춘에 관한 이야기다. 대규모 투자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콘텐츠 제작에 올해 5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다. 지난 5년간 누적 투자액이 7억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위해서 경기도 연천과 파주 두 곳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마련하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임대 계약을 체결한 두 스튜디오는 ‘YCDSMC 스튜디오 139’와 ‘삼성 스튜디오’다. YCDSMC 스튜디오 139는 6곳의 스테이지를 갖춘 총 면적 9000 제곱미터, 삼성 스튜디오는 3곳의 스테이지로 총 면적 7000 제곱미터에 이른다. 이 같은 전폭적인 지원으로 올해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면면이 화려하다. 의 프리퀄인 (屍戰朝鮮:雅信傳, Kingdom: Ashin of the North)은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올해 방영을 앞뒀다. 유품 정리사의 눈을 통해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Move to Heaven:我是遺物整理師, Move to Heaven)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제훈(Lee Je-hoon, 李帝勳)이 주인공을 맡아 한류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정해인(Jung Hae-in,丁海寅), 구교환(Koo Kyo-hwan, 具敎煥) 김성균(Kim Sung-kyun, 金聲均)이 주연을 맡은 영화 (D.P:逃兵追緝令)도 기대작이다. 탈영병들을 쫓는 군무이탈 체포조들이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보통 작가의 동명 웹툰이 군대 내 부조리와 가혹행위들을 여과없이 그려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코리안 좀비 시리즈는 올해도 계속된다. 바이러스가 퍼진 고등학교를 구하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殭屍校園, All of Us Are Dead)의 스틸컷이 최근 공개되어 학교 운동장에 가득한 피투성이 좀비떼들의 모습이 팬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한류 스타 공유(Gong Yoo, 孔劉)와 배두나(Bae Doo-na, 裵斗娜), 이준(Lee Joon, 李準)이 주연하는 영화 (寧靜海, The Silent Sea)>도 넷플릭스에서 선보인다. 세계적인 사막화로 물과 식량이 부족해진 지구가 배경이다.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벌어지는 정예대원들의 이야기로, 한국형 SF 기대작으로 손꼽힌다. 넷플릭스의 대규모 투자에 자극을 받은 국내 OTT 서비스 플랫폼들의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KT는 2023년까지 4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오리지널 대작 드라마 100편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상파 3사(KBS·SBS·MBC)와 SK Telecom이 만든 wavee는 3년간 3000억원을 콘텐츠 제작에 쏟아 붓는다. CJ와 JTBC 연합인 TVING도 3년간 4000억원 투자를 선언했다. OTT 플랫폼 공룡들의 전쟁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한류 팬들은 즐겁기만 하다. 넷플릭스는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과의 협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치열해져 가는 OTT 서비스 경쟁에서 더 많은 투자로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시즌 3는 스페셜 에피소드 에 이어 매우 기대된다. 스페셜 에피소드에서 전지현(Jun Ji-hyun 全智賢)은 좀비를 조종하는 것 같은 해적 여왕 아신으로 출연한다. Kwon Ki-bong Writer Ahn Hong-beomPhotographer

한국형 크리처물의 진화

Entertainment 2021 SPRING 1310

한국형 크리처물의 진화 웹툰 원작의 넷플릭스 드라마 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스토리와 영상의 높은 완성도로 한국 크리처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 관객까지 사로잡은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2020년 12월 넷플릭스로 전 세계에 방영된 10부작 드라마 의 인기가 연일 화제다. 공개된 지 4일 만에 홍콩, 싱가폴, 대만, 말레이시아, 페루 등 13개국에서 일일 랭킹 1위를 기록했고, 넷플릭스가 인기 순위를 알려주는 70개 이상 국가에서 모두 ‘탑10’안에 들었다. 세계 순위로는 3위까지 올랐다. 국내에서 최초로 제작된 크리처물이자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는 등 불리한 조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의 성공 배경에는 그동안 쌓아온 K-콘텐츠에 대한 넷플릭스의 신뢰가 있었다. 김칸비(Kim Carnby) 원작 스토리에 황영찬(Hwang Young-chan)의 그림을 입힌 동명의 원작 웹툰은 2017년 10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연재되며 이미 9개 언어로 서비스돼 글로벌 누적 조회 수 12억 건의 기록을 세웠다. 웹툰 속 다양한 괴물들의 영상화에는 앞서 공개된 드라마 이 한국형 아포칼립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다. 여기에 영화 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이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 4개 부문의 상을 받으며 K-콘텐츠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드라마 이 나설 자리는 이처럼 토양이 잘 다져지고 시의적절했다. 넷플릭스는 총 300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으며 개봉 전부터 대작(大作)의 출현을 예고했고, 뛰어난 CG 기술과 세트 퀄리티 등으로 관객이 기대했던 ‘보는 맛’을 충분히 충족시켰다. 지휘봉은 TV 드라마 으로 절절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미를 입증한 이응복 감독이 쥐었다. 이 감독은 한 인터뷰를 통해 “평소 크리처물을 잘 보지 않는데, 원작 웹툰을 보는 순간 한국 드라마의 소재를 확장하는 차원에서 도전하고 싶었다. 글로벌한 소재로도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칸비 글, 황영찬 그림의 웹툰 원작 한국 드라마 이 2020년 12월 18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었다. 작품 공개 이후 첫 4주 동안 전 세계 2200만 유료 구독가구를 기록했다. 방영된 시즌 1은 10회로 구성됐으며 러닝타임은 총 515분이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Netflix Original Series) 욕망의 감염 이야기는 은둔형 외톨이인 고등학생 현수(Hyun-su)가 홀로 이사 온 아파트 ‘그린홈’에서 시작된다. 현수를 비롯한 거주민들이 각양각색 괴물들과 대항하는 내용으로, 자신만 살아남으려는 자, 희생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 늘어나는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며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작품 초반부는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인해 인육을 탐하는 괴물이 등장하는 전형적 좀비 아포칼립스를 표방한다. 고립된 아파트 건물을 최후의 보루 삼아 벌이는 서바이벌 투쟁도 종전에 보아 온 익숙한 좀비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괴물에게 물린 이가 다시 괴물이 되어 그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간다’는 좀비의 감염 공식은 이 작품에서 과감하게 부정된다. 애초부터 이 드라마에서는 인간이 바이러스 감염 같은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닌 무언가로 말미암아 언제든 자아를 잃고 끔찍한 괴물로 변한다. 그 이유는 각기 자신의 욕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형태 또한 갖가지 개인의 음험한 내면을 구상화했다. 환자복을 입은 채 촉수를 뻗어 흡혈하는 괴물, 근육 덩어리 몸으로 연신 “프로틴”을 외쳐대는 괴물 등이 이 같은 원인을 증명하며, 좀비 아포칼립스와 선을 긋는 미지의 공포로 작동한다. 이 감독 역시 “욕망으로 인해 괴물이 된다는 발상 자체가 참신해 영상으로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고 말한 바 있다. 에 등장하는 크리처의 움직임 연구에는 안무가 김설진(金雪镇 Kim Seol-Jin)이 참여했다. 그는 동물의 본능적인 움직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시즌 1 2화에서 주인공 현수의 집에 들어오는 연근 괴물. 주인공 현수는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힌 히키코모리지만,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문 밖으로 나간다. 시즌 1 3화에서 현수가 무기를 들고 연근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 나서는 장면.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Netflix Original Series) 극 중 국어 교사 정재헌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과 달리 검도를 수련한 경험을 살려 진검을 무기로 크리처와 싸운다. 시즌 1 3화에서 그가 프로틴 크리처를 유인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다. 에서는 극 중 인물들이 감염이 아닌 개인의 욕망에 의해 괴물로 변한다. 시즌 1 3화에서 그린 홈 주민들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대통령의 담화에 놀라고 있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타적인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한국적 정서의 가족 드라마 누구나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구축한 전선은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간다. 사람들은 괴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이를 배척하고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심하며 창을 겨눈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이들의 신념을 끊임없이 흔들고 시험한다. 주인공 현수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인물이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가 괴물이 되다 만 채 누구보다 나약했을 자아를 다잡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서서히 이 드라마가 단순한 크리처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이타적인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감수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이 드라마는 십여 명 이상의 등장 인물 저마다에 사연을 부여하고 살아 있는 인간으로 그려내려 한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끝내 협력하는 험난한 과정은 당연히 극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과연 괴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는 이 감독의 이야기도 이와 맞닿아있다. 극중 대사가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도 세상도 신의 뜻도(I realized that what you see isn’t everything – people, the world and god’s will.).” 인물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은 각자의 드라마와 함께 인간성을 응원하는 작품의 주제와도 정확히 연결된다. 한국 드라마 특유의 ‘가족지향형 연대’마저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으로 그려낸 배경이다. 긴장과 쾌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 특유의 재미 또한 여느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생생한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 이 감독이 1년간 할리우드의 특수효과팀과 머리를 맞댄 결과다. 배우들의 실제 연기를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괴물들을 만들어냈고 이들의 움직임은 안무가 김설진이 구상했다. 이에 긴박한 상황 변화와 잘 짜인 액션이 긴장과 쾌감을 더해준다. 현관문을 두드리며 절규하는 여인이 섬뜩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아파트 정문에 나타난 괴물은 기다란 촉수를 뻗어 사람의 피를 빤다. 상악골이 절단된 채 청각에만 의존해 건물 안을 헤집고 다니는 괴물이나 거대한 근육질 괴물은 개중에도 더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해 각기 다른 형태의 스릴을 선사한다. 거대한 눈알 형상을 하거나, 거미를 연상시키는 등 괴물의 형태엔 애초에 정형화된 틀이 없다. 다양한 생김새에 기반한 각각의 습성 때문에 대응하는 인간들 또한 매번 임기응변을 펼칠 수밖에 없으니 서스펜스는 자연히 극대화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벌어지는 또 다른 인간 집단과의 싸움은 관객의 감정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그렇게 은 폐허에 가까운 외딴 아파트 단지 안에 온갖 드라마를 쓸어 담으며 두려움과 쾌감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 그 속에서 자라나는 유대감을 모두 아우르는 휴먼 스펙터클로 탄생했다. K-콘텐츠의 전과 후를 나누는, 기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19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영화

Entertainment 2020 WINTER 840

1990년대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영화 2019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의 주인공 소녀는 자신이 마주한 거대하고, 때로는 가혹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1초에 90번 날개짓을 한다는 벌새처럼.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찬찬히 담백하게 풀어낸 이 영화는 여러 나라에서 유료 개봉되었으며, 수많은 상과 함께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8월 29일은 영화 가 개봉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의 한 극장에서 이를 기념한 guest visit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보라(Kim Bo-ra [Bora Kim], 金宝拉) 감독이 한 말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제가 너무나 열심히 매달리는 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어요. ‘적당히 해, 왜 그렇게 열심히 해?’란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우리 사회엔 꿈을 꾸며 달려가는 사람을 보고 ‘정신 못 차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풍토가 있어요. 그래서 저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걸 오랫동안 숨겨 왔었어요.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저를 덜 부끄러워할 것 같아요. 혹시 이 자리에 꿈을 간직하고 뭔가 해보려는 분이 계시다면 자신의 그 진지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이 ‘부끄러움’ 뒤에 탄생한 영화가 바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무려 51개 상을 휩쓴 다. 지난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네레이션 14플러스 부문 대상(大賞)을 시작으로 트라이베카 영화제, 시애틀 국제영화제, 베이징 국제영화제, 넷팩 아시아영화제, 아테네 국제영화제 등에서 주요 부문 상을 거머쥐었고, 올해 6월 한국 백상예술대상에서 감독상과 함께 여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소소한 이야기 의 성과는 비단 다수의 영화제 수상에 그치지 않았다. 올 여름에는 미국 시장에서 유료 개봉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국가적 비극과 사건 뉴스, 친구의 고통 등을 통해 주인공이 서서히 알게 되는 삶의 진실을 관객이 함께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사려 깊게 균형 잡는다(Kim discreetly balances the personal and the social, bringing us close to Eun-hee while also letting us see the other realities and truths — a national tragedy, a news bulletin, a friend’s pain — that she is slowly starting to notice.)”고 호평했다. 영화 평론 사이트 「로저에버트닷컴(rogerebert.com)」은 이 영화에 만점을 매긴 뒤 “한국 관객들이 깊이 공감할 이야기이면서도 청소년기의 정서적 위기감과 우정을 묘사함에 있어 모든 문화권의 경계를 뛰어넘는다(Although there are doubtlessly aspects of the story that will resonate more deeply with Korean audiences (who will presumably be more primed for the major event that the story is building towards in the final scenes), she finds a way of recognizing and depicting the emotional perils of adolescence — especially the way in which seemingly unshakeable friendships can turn on a dime — in ways that cut across all cultural boundaries.)”고 상찬했다. 또 ‘영화 신선도 지수’로 잘 알려진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의 전문가 신선도 지수에서도 100%를 기록했다. 참고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받은 의 신선도 지수는 99%다. 감독이 1주년 행사에서 울먹이며 남긴 코멘트는 의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 자전적 성격이 짙은 이 영화는 감독 자신과 한국의 1990년대를 정직한 방식으로 응시한다. 1994년 서울,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은희가 가정과 학교, 동네 학원에서 겪는 우정과 폭력, 그리고 소외와 애정의 기록이 당시 한국의 사회상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사회적 참사를 주요 배경으로 10대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의 질서를 그린 다음 그 시절의 서울로 관객의 손을 잡아 이끈다. 그리고 그 정점에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부끄럽고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1994년 10월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등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이 주로 남성 감독들의 주도 아래 거대한 사회 담론에서 출발하는 서사를 이끌어 온 데 비해 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만을 전하면서도 당대 한국 사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을 ‘진지하게 사랑한’ 여성 감독의 힘이다. 1990년대 이후 뉴웨이브 영화를 이끈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이 주로 남성 감독들의 주도 아래 거대한 사회 담론에서 출발하는 서사를 이끌어 온 데 비해 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만을 전하면서도 당대 한국 사회의 공기를 고스란히 움켜쥐었다. 공감의 힘 영화 전반부에 은희가 오빠에게 심하게 얻어맞는 장면이 있다. 은희에겐 흔한 일이다. 저녁 식사 시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은희는 용기를 내 오빠가 자신을 때렸다고 말한다. 가족의 질서를 잡는 아빠를 향해 던진 말이었지만, 아빠는 답이 없고 엄마가 대신 나선다. “너희들 싸우지 좀 마.”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하게 구분되는 일방적 폭력이 마치 대등한 사이에서 벌어진 다툼처럼 무마된다. 아빠는 문제에 무관심하고, 엄마는 어려서부터 몸에 밴 가부장적 방식으로 사건을 봉합한다. 후반부엔 이런 장면도 있다. 은희가 고함을 지르며 부모에게 항변하자 오빠가 동생의 뺨을 세게 때린다. 이번엔 아빠가 소리친다. “어디 아빠 앞에서 동생을 때려!” 자신이 보지 않을 때 벌어진 폭행에는 뒷짐을 지지만, 자신의 눈앞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된다는 생각은 서열을 중시하는 1인자의 권위주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딸들이 당했을 이런 일들을 관객은 영화를 통해 다시 목격한다. 그래도 은희는 덤덤하게 학교에 나가고, 절친한 친구와 일상의 억울함을 나눈다. 여기에 동네 학원 선생님 영지가 은희의 마음에 기댈 곳을 내준다. 영지는 명문대를 다니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휴학하고 있는 상태다. 영화에서 설명되지는 않지만, 한국 학생운동의 기운이 쇠락하기 시작한 1990년대 전반부 운동권 학생의 표류 같은 것이 그녀의 눈빛에서 엿보인다. 영지에게 마음을 의지하게 된 은희가 묻는다. “선생님은 자기가 싫은 적이 있어요?” 영지는 아주 많다고 대답한다. 은희는 자신에게는 대단하게만 보였던 영지에게도 사정은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슬픔을 겪는 자에게 도움이 되는 위로란 뭔가 대단한 사람에게서 건네받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와 함께 옆자리에 앉아 나누는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비롯해 최근까지도 잇따르고 있는 일련의 사회적 참사를 집단 기억으로 안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의 날갯짓은 그렇게 오래도록 울림을 전한다. 관객을 향한 질문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기였던 1990년대는 앞서 언급한 뉴웨이브 영화부터 K-pop의 역사를 태동시킨 그룹 서태지(徐太志)와 아이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대하 드라마 (1991)나 격동의 현대사를 다룬 TV 드라마 (1995) 등 새롭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가득했다. 그런 이유로 최근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대중문화 상품들이 잇따라 등장해 인기를 모으고 있다. TV 드라마 (2012), (2013), (2015)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 시절 인기 가요들도 유튜브에서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는 다른 방식으로 1990년대를 기억하며 관객을 향해 묻는다. 그 시절의 당신은 어땠나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나요? 학교에서는 맞는 아이였나요, 아니면 때리는 쪽이었나요? 성수대교 붕괴와 바로 몇 달 후에 일어났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요? 멀지 않은 과거, 즉 영화의 캐릭터 영지 선생님이 대학에 입학할 즈음, 권력을 비판하는 영화를 몰래 제작하다 당국에 들켜 투옥된 영화인들이 있었다. 이제 이처럼 우리의 과거를 정직하게 기억하는 영화가 세계 곳곳에서 찬사를 받는 것을 지켜보고 이를 소개하는 일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Entertainment 2020 AUTUMN 807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연예인들이 본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뜻밖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며 대중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방송가에 불고 있는 이른바‘부캐 열풍’이다. 과연 이 현상은 개인의 다양성에 눈떠 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게임 유저들은 본래 캐릭터가 더 이상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하거나 게임을 보다 전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다른 캐릭터를 만들곤 한다. 이 2차 캐릭터를 가리키는 ‘부캐’는 오랫동안 게임계에서 사용되던 용어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부캐가 등장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개념을 방송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접목시킨 주인공은 20년 가까이 온갖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능수능란한 진행 솜씨를 발휘하며 이미 ‘국민 MC’로 불리고 있던 개그맨 유재석(劉在錫)이다. TV 예능에 부캐 열풍을 몰고 온 이는 ‘국민 MC’로 불리는 개그맨 유재석(劉在錫)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하프 연주자 등 다양한 캐릭터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어 냈다. ⓒ MBC 새로운 트렌드 2019년 7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MBC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를 연출하는 김태호(金泰浩) PD는 유재석을 출연시켜 드럼 연주, 하프 연주, 트로트 부르기 등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게 했다. 유재석은 단 한 번도 쳐 본 적 없는 드럼을 무작정 배운 후 독주회를 열었고, 비틀즈의 링고 스타를 빗댄 ‘유고 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프 연주도 잘 소화해 낸 그는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자신의 이름을 합친 ‘유르페우스’라는 캐릭터로 불리게 되었다. 더 나아가 트로트 신곡을 취입해 정식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데뷔하기까지 했다. 유재석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다양한 캐릭터로 분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시청자들은 그의 여러 캐릭터들을 ‘부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비롯된 부캐 콘셉트는 곧바로 연예계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부캐 바람 속에 정상의 인기를 또 다시 확인하고 있는 연예인이 있다. 결혼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해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가수 이효리(李孝利)다. 일찍이 1세대 걸그룹 멤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그가 요즘 널리 알려진 소탈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미국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엄청난 재력가가 된 후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인물 ‘린다 G’로 변신한 것이다. 한편 개그맨 추대엽은 노래를 카피한다는 의미의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고, 개그우먼 김신영(金信英)은 ‘김다비’라는 캐릭터로 트로트 곡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1998년 데뷔한 걸그룹 핑클의 리더 이효리는 결혼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해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최근에는 호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린다 G’라는 캐릭터를 통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다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 MBC 부캐 열풍은 개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관점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개그맨 추대엽은 ‘카피추’라는 캐릭터를 통해 B급 유머를 날리며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유튜브 캡처 개그우먼 김신영은 트로트곡 를 발표하며 자신의 부캐릭터 ‘둘째 이모 김다비’를 데뷔시켜 화제를 모았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이처럼 유명 연예인들이 본래의 캐릭터보다 가상으로 만들어 낸 캐릭터로 더욱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투영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개인의 확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가족 또는 공동체의 이익이 더 중요시됐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은 1990년대 외환 위기에 이어 2000년대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개인주의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입사한 직장에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바쳤던 이른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이제 한국인들에게는 조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이 더 중요해졌다. 성장주의 신화가 깨지면서 미래의 성공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현재의 확실한 행복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다. 2020년 3월, 취업 지원 서비스 업체 잡코리아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직장인 4명 중 3명은 직장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평상시와 다르다고 대답했으며, 직장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일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퇴근 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고 대답했다. 일이 삶의 전부였던 과거 세대들에게는 그 일을 하는 하나의 캐릭터만이 존재했지만, 일 외에 다른 것들도 중요해진 요즘 젊은 세대는 그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탐험할 부캐들이 필요해졌다. 이들은 퇴근 후 직장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활동을 하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부캐로 인식한다. 때로는 부캐와 본래 캐릭터의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취미로 시작한 활동으로 발생하는 수입이 직장에서 받는 연봉보다 더 높은 경우도 있다. 특히 유튜브 같은 디지털 공간이 부캐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양한 정체성 부캐 열풍은 개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관점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2020년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트렌드 키워드 ‘멀티 페르소나’는 ‘가면을 바꿔 쓰듯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다층적 자아’를 의미한다. 부캐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일부 연예인들이 소위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으로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가수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입담을 과시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음반을 내는 사례도 종종 있어 왔다. 그런가 하면 연기에 도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연기력 논란에 휘말리는 사례도 흔히 있어 왔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멀티태스킹이 현대 직업인의 생존 전략으로 떠오른 것도 이미 생소한 일은 아니다. 한편 최근의 부캐 열풍 현상이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는 전문성이 개입되는 ‘일’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취미나 유희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캐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완벽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중도 부캐가 얼마나 흥미롭고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지를 더 눈여겨보는 듯하다. 한국 사회가 현재 ‘부캐 놀이’에 푹 빠져든 것은 그간 집단에 의해 억압되었던 개인들이 자신의 또 다른 면모들을 드러내고픈 욕망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재난을 다루는 방식

Entertainment 2020 SUMMER 1406

영화가 재난을 다루는 방식 한국인들은 왜 재난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그들은 어떻게 COVID-19로 벌어진 글로벌 팬데믹 속에서 상대적으로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최근의 재난 영화들을 통해 대답을 찾아본다.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2006년작 은 개봉 전 괴수물로 알려졌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재난 영화의 코드들을 담고 있었다. 영화는 한강변에 출몰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괴물보다는 그로 인해 야기되는 상황에대처하는 정부의 태도에 더 집중하며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미온적인 정부의 대처 때문에 결국 힘없는 소시민이 괴물과 대결할수밖에 없는 설정은 봉준호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 방식이다. 이 영화가 누적 관객수 1,300만 명을 넘기며 당시로서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하게 된 것은 그해 여름 집중호우로 발생한 수재의 영향도적지 않았다. 수천억 원의 재산 피해와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재난을 겪으며 사람들은 ‘진짜 괴물은 재난 자체가 아니라재난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 더욱 공감할수 있었다. 봉준호(奉俊昊) 감독의 2006년 작 의 한 장면. 이 영화 이후 한국형 재난 영화의 성공 방정식이 만들어졌다. ⓒ영화사 청어람(Chungeorahm Film) 한강 둔치에 괴수가 나타나자 이곳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강두(康斗)가 딸 현서(玄舒)의 손을잡고 황급히 도망치는 장면. 은 무능한 정부와 허술한 재난 대응 국가 시스템을 비판하는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성공 방정식 이후 국내 재난 영화에는 새로운성공 방정식이 만들어졌다. 2009년 개봉한 윤제균(Yoon Je-kyoon 尹濟均) 감독의 는 부산의 바닷가 해운대를 덮친 쓰나미를 소재로 다뤄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이 영화는 해외의 재난 영화들과 달리 시각적 스펙터클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감정과 갈등을더 부각시켰다. 바로 이 점이 한국형 재난 영화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후에 만들어진 재난 영화들도 대부분 이 공식을 좇아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적요소가 강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재난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영화가 연상호(延尚昊 Yeon Sang-ho) 감독의 (2016)이었다. 부산행KTX에 갑자기 출몰한 좀비떼들과 시민들의 사투를 그린 이 영화는겉으로는 좀비 장르를 표방했지만, 한층 진화된 재난 영화의양상을 보여 줬다.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KTX에 비유하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좀비들을 통해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한성장 일변도의 한국 사회를 풍자했다. 디지털 민주화 2014년 수학 여행을 떠난 고교생들을 포함해 수백 명의 승객이 희생된세월호 참사는 재난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불가항력적 사고가아니라 컨트롤 타워의 부재로인한 인재임이 드러나면서 당시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촛불시위로 이어졌고, 마침내대통령 탄핵의 중대한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탄핵 소추안이 발의됐던 2016년에는 을 비롯해 터널 붕괴 사고를 소재로한 과 원전 사고를다룬 등 다른 해보다재난 영화가 더 많이 개봉되었다. 대통령탄핵 같은 중대한 민주적 절차의 경험이 한국에서 가능했던 것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디지털민주화’의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의민주화 운동이 서울역이나 광화문광장 같은 물리적 공간에서 벌어졌던 데 반해 2000년대에 접어들어 그 무대가인터넷 공간으로 옮겨지며 사회적이슈가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 한층 빨라진 통신 속도와 넓어진가상공간, 모바일 보급률은 정치적 주화뿐만 아니라재난까지도 보다 적극적인 비판과 대안의 제시를 가능하게 했다. 연이은 재난 영화들이 비판적으로 담아냈던 메시지, 즉 ‘무능하고 불투명한 컨트롤 타워’의 문제는 소셜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여론을 통해 현실적개선과 변화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좀비로 변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연상호(延尚昊) 감독의 2016년 작 은 표면적으로 좀비 장르를 표방하고 있으나, 과속 성장에 매몰된 한국 사회를 풍자한 재난 영화의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 Next Entertainment World 유독 가스가 도시 전체에 퍼진 위급 상황을 유머 코드를 섞어 그린 이상근(李相槿) 감독의 2019년 개봉작 는 재난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 줬다. ⓒ CJ ENM 백두산 화산 폭발을 막기 위해 남북한이 협력해 한반도의 위기를 함께 극복한다는 가상의 내용을 다룬 2019년 개봉작 . 이해준(李海准), 김병서(金丙书) 공동 감독 작품으로 장르적 재미를 내세우며 흥행에 성공했다. ⓒ CJ ENM 장르적 재미 한국에서 재난 영화는 계속 흥미로운 장르이고, 재난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2019년엔 유독가스가 뒤덮인도시에서의 탈출을 그린 가 누적 관객수 940만 명을 기록했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란 가상적 상황을 통해 남북한의 공조를 다룬 은 총 825만 명이 관람했는데, 이 두 영화는 모두 사회 비판적요소 대신 장르적 재미를 전면에내세웠으며 유머 코드를 장착했다. 이 같은 흐름을 통해 재난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한국인들의 의식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유능한 컨트롤 타워와 투명한 정보 공개의 요구와 같은 주제 의식은 그간 한국인들이 겪었던 무수한 재난 상황들의 아픈 경험들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COVID-19로 재평가된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김성수(金性洙) 감독의2013년 작 . 영화 포스터 속 마스크를 쓴 시민들의 모습이 이제 일상적인 현실이 되었다. ⓒ CJ ENM 전 세계로확산된 COVID-19는 마치 이를 예고한 듯한 재난 영화들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을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중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가 김성수(金性洙) 감독의 2013년 작 다. 이 영화는 호흡기로 감염되는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가 서울 근교 도시에서 발생해전국으로 퍼져나가며 야기되는 혼란의양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감염자의 재채기로 난사되듯 날아가는 비말 장면은 COVID-19를 현실의 공포로 마주한사람들에게 섬뜩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생존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감염 확산을 우려해 감염자들을 살처분하는 영화적 연출이 매우 끔찍하다. 이 영화 역시 바이러스의 공포보다는 정부의 통제와 감시에 대한 비판에 무게를 두고 재난 상황에서 국가의 진정한 역할이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젠더의 차이를 가로지르다

Entertainment 2020 SPRING 761

젠더의 차이를 가로지르다 한국 사회에서 미투 운동이 폭발한 상황을 감안하면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특정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혐오 정서를 자극하기도 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가을 한국의 미투 운동에 목소리를 더했다. 소설은 한 여성이 태어나서 어머니가 될 때까지 차별로 인해 어떤 좌절을 겪었는지 해부하고 있고, 이는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하지만 동시에 반사적으로 여성 혐오와 비판을 촉발했다. 소설 출간 후 3년이 빠르게 지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나왔지만, 초기의 상반된 반응은 여전히 만연하다. 민음사가 2016년 발간한 조남주(Cho Nam-joo 趙南珠) 작가의 장편 『82년생 김지영』의 표지. 우수한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시리즈 중 하나로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며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 민음사 베스트셀러 원작 영화 반페미니즘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2019년 10월 개봉 시작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2018년 후반까지 소설이 백만 부가 팔린 걸 감안하면 놀랍지 않다. 소설 판매는 그 자체로 드문 개가를 올린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은 열성적인 독자가 아닌 걸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책을 사지 않은 경우에는 빌려서 볼 텐데 국립중앙도서관에 따르면 『82년생 김지영』은 2018년과 2019년 도서관 희망 도서 1위를 차지했다. 방송작가 경력이 있는 조남주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데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가정과 학교, 일터와 공공 영역에서 경험하는 암시적인 혹은 노골적인 성차별과 젠더 이슈를 한 인물의 연대기를 통해 보여준다. 소설은 중국과 일본, 대만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과 유럽 국가에도 판권이 팔렸다. 주인공 지영(‘지영’은 인기 있는 한국 여자 이름이다)은 할리우드 영화의 여주인공들처럼 부정의와 싸워 이기지 않는다. 그녀는 30대 여성으로 딸아이를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집에만 있는 게 점점 불만스러워지면서 지영은 자신이 꿈을 갖고 자랐던 옛 시절과 최근까지만 해도 커리어우먼이 되려고 했던 상황을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지영의 기억이 온전히 희망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 그녀의 남동생과 학교의 남자 동급생들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먼저 급식을 받았다. 10대에는 “스토커가 따라오게 유도했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고, 성인이 되어서는 회사 화장실에 성범죄자가 설치한 불법 카메라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어느 날 그녀는 아기와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을 편하게 쓰고 있다고 말하는 통행인의 조롱을 듣기도 한다. 지영의 이런 경험들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한국의 평균적인 딸, 엄마, 여형제, 아내, 그리고 이웃의 경험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용히 분개한다. 지영을 비롯해 한국 사회의 많은 다른 지영들에게 이러한 차별적 경험은 삶의 일부이다. 그녀의 삶이 너무 일반적이라는 사실이 강하게 어필했다. “지영의 삶은 제가 살았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라고 작가는 말한다. 2019년 10월 개봉한 동명의 영화 장면들. 여성 감독 김도영(Kim Do-young 金度英)의 첫 번째 장편 영화로 제작 소식이 알려진 때부터 젠더 문제에 예민한 한국 젊은 세대들 사이에 또 다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공통의 좌절 영화에서 지영의 다정한 남편(좀비 영화 에서 아이를 돌보는 아빠 역의 공유가 배역을 맡았다)은 아내가 점점 더 우울해지고 화를 잘 내는 걸 알아차린다. 그는 아내가 감정적으로 편치 않음을 깨닫자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국 사회는 크게 봤을 때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 규범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2020년 글로벌 젠더 격차 지수에서 한국을 153개국 중 108위로 평가했다(젠더의 공정함이 가장 보장되는 나라가 1등). 2013년 유엔 마약범죄국 보고에 따르면 한국은 남녀 살인 비율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이 52.5%로 세계적인 평균보다 훨씬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사실 미국에서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이 촉발한 미투와 타임즈업 운동이 폭발하기 전에 한국은 이미 그 자체로 선례 없는 페미니즘 저항 운동이 시작되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되기 몇 달 전 한 젊은 여성이 강남역 근처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법정에서 피의자는 범행 동기가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시민들은 여성 혐오 범죄에 응대해 강남역에 수만 개의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 죽음을 추모했다. 이후 2018년 5월에 1만 2,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여성 차별과 폭력에 항거하기 위해 혜화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열리기 얼마 전에 일련의 유명 팝스타들이 스파이카메라 포르노에 연류되었는데 이들은 파트너 여성의 동의 없이 성관계 비디오를 만들어 유포했다. 늦어진 폭로 젠더 이슈를 다루는 영화는 한국 주류 영화계에서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던 이유가 영화 제작자들이 부정적 효과를 두려워해서였다면 그 우려가 잘못된 건 아니다. 지영 역을 맡은 정유미 배우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많은 악성 댓글이 달렸다. 영화 상영을 금지하라는 청원이 돌고 웹포털 사이트는 영화가 상영되기도 전에 악의적인 평가로 가득했다. 비평가들은 소설과 영화의 줄거리가 왜곡되었으며, 지나치게 일반화된 성차별 시선으로 남성을 보고 있고, 젠더 갈등을 더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영화가 여성의 판타지일 뿐이며 여주인공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효과는 이미 느껴지는데 이는 한국이 영화 관객 수가 많은 나라 중 하나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미디어는 고용률에 있어서 젠더 격차가 결혼 후 그 차이가 2%에서 28%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하면서 ‘김지영’을 인용하게 되었다. 2019년 12월에 여성가족부는 출생과 양육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계획을 고시했다. 많은 언론 기자들은 이런 변화가 ‘김지영 효과’ 덕분이라고 본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를 배우 겸 감독인 김도영이 주도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할리우드에서처럼, 한국의 영화 산업에서도 카메라 뒤에서의 성평등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김도영은 한국에서 주류 스튜디오 영화를 감독하는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명이다. 사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참여율은 2018년에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김지영 효과’가 고질적인 남성 편중을 바꿔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시대극 영화에서의 사실과 허구

Entertainment 2019 WINTER 869

시대극 영화에서의 사실과 허구 역사 드라마는 한국의 크고 작은 스크린에서 주요한 장르로, 연출가나 감독은 종종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변화를 주어 창작을 시도한다. 하지만 상상의 나래가 지나치다 싶으면 관객은 이를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1, 4. 2019년 여름 큰 기대를 모으며 개봉한 "나랏말싸미"는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비난에 휩싸이며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 Megabox Plus M 2, 3. 2012년 개봉작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역사에 허구적 상상력을 입혔지만,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어 크게 흥행했다. ⓒ CJ ENM 한글 창제를 자세하게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올해 7월 말에 개봉하자 바로 매표 순위 2위를 차지했다. "알라딘", "라이온 킹", "스파이더맨과 같은 할리우드 대표작들과 경쟁해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그 다음 주에 8위로 미끄러졌고 결국 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불티나게 표가 팔리는 대신 한국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 중 하나인 한글을 독특한 관점으로 다뤄 뜨거운 논쟁에 불을 지폈다. 사실 문제 시대극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장르다. "명량"(2014)이 역대 최고의 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아 있다면 "대장금"(2003)은 큰 인기를 누리고 해외로 수출된 드라마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하지만 이런 영화나 드라마들이 그에 못지않게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지나치게 왜곡하기 때문이다.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주인공 역의 배우에게 찬사가 쏟아졌지만 영화 "덕혜옹주"(2016)는 조선의 옹주인 덕혜의 전기적 사실이 과장되고 왜곡되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조선 왕조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 션샤인"(2018) 또한 크게 성공한 텔레비전 드라마였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더 철저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좀 더 최근에 큰 기대를 받으며 개봉된 "나랏말싸미"의 처참한 실패는 한국 관객들이 영화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믿을 생각이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15세기 전반부에 한글 창제를 진두지휘한 세종대왕 역에 최고의 배우인 송강호를 내세우는 등 흥행 성공의 모든 조건을 갖춘 듯 했다. 송강호는 한국에서 가장 몸값이 비싸고 존경받는 배우이며 오스카상을 시상하는 기관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회원이 된 첫 한국 영화인이다. 올해 5월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기생충"에서도 열연한 그에게 올해는 최고의 해이지만, 이미 2014년에 대중적 인기와 평론가들의 찬사를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둔 영화 "사도"에도 조선의 왕으로 출연했다. 게다가 "사도"의 각본가 중 한 명인 조철현이 "나랏말싸미"에서 감독으로 지휘하며 송강호와 다시 만난 상황이었다. 성군을 폄하하다 송강호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세종대왕에 대해 말이 많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백성에게 지식을 전파하고자 하는 소망과 애민정신으로 한글을 창제한 성군의 위대한 업적을 그려왔다. 좀 더 민주적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고안한 것은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한자는 너무 복잡해서 일반 백성이 배우기가 어려웠고, 엄격한 계급 사회인 조선 시대의 지도층만이 누린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이 아니라 한글 창제에 관여한 스님을 포함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입증되지 않은 소문에 집중한다. 영화에서는 신미스님이 한글 창제의 주축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세종대왕은 문자 체계를 열렬히 주문하고 창제의 모든 단계를 조심스럽게 감독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구경꾼 역할로 격하된다. 영화에서는 신미스님이 실제로 문자의 음성적 조합을 위해 점과 선의 사용이라는 독특한 구상을 한 인물로 그려진다. 게다가 신미스님은 언어 전문가 그 이상이다. 그는 윤리적 척도가 되어 도덕적 발언을 하고 세종을 비판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왕에 맞서는 스님 역에 배우 박해일이 캐스팅되었다. "덕혜옹주" 같은 인기 있는 영화를 여러 번 찍은 경험이 있는 박해일을 선택했다는 점은 상호보완적이면서 대립하기도 하는 두 주역을 나란히 세우려는 제작진의 노력을 반영한다. 초점의 이동 권력자에게 서슴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영화적, 허구적 인물이 한국 영화에 없었던 건 아니다. 역대 한국 흥행 영화 상위 10편 중 하나인 "광해"(2012)는 논란이 분분한 17세기 군주 광해를 "왕자와 거지" 식으로 풀어낸다. 한류 스타 이병헌이 왕 역할과 암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대역으로 뽑은 평민 역할을 함께 연기한다. 영화는 미천한 어릿광대가 엄격한 궁중 법도와 미묘한 외교의례를 배우기 위해 애쓰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대담해지고 억압받는 백성을 위해 거침없이 변화를 추진한다. 보통의 사람도 기회가 주어지면 폭군보다 더 나은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열쇠나 다름없다. 평론가들은 순전히 오락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나랏말싸미"도 두 명의 대조적 인물을 병치한 극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신미스님이 뻔뻔하게 왕을 나무라는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가져오기보다 역사 의식이 있는 관객을 불쾌하게 만든 것 같다. 영화 시작 전 “훈미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고 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주류 엔터테인먼트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영감은 무한해 보이나 실제로 관객이 정서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 보인다.

[리틀 드러머 걸], 해체된 경계들

Entertainment 2019 AUTUMN 1006

[리틀 드러머 걸], 해체된 경계들 스파이 소설의 고전으로 알려진 존 르 카레(John le Carré)의 1983년도 작품 이 지난 해 6부작 TV 미니시리즈로 다시 태어났다. 영국 BBC One 과 미국 케이블 채널 AMC에서 방영된 후 올해 3월 감독판이 국내에서도 공개된 이 작품은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 감독이 연출한 최초의 TV 시리즈라는 점에서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국내외 팬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영국 BBC와 미국 AMC가 공동 제작한 첩보 스릴러 드라마 포스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배경으로 한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 co-produced by the BBC and AMC. The TV miniseries is based on John le Carré’s novel by the same name, set against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냉전 시대 유럽의 첩보 전쟁이 주요 배경이었던 존 르 카레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에서는 소설의 무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으로 옮겨졌다. 또한 소재도 첩보 경쟁이 아닌 테러의 폭력적 행위와 그 이면에 내재된 양면성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으로 부각되면서 로맨스의 비중이 한층 높아졌다. 그 자신 한때 영국 정보국에서 비밀 요원으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한 르 카레는 이 작품의 출간을 계기로 스파이 소설의 범위를 넘는 문학성을 인정 받았다. 이 작품은 1984년에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다이앤 키튼과 클라우스 킨스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번 TV 시리즈는 시대를 앞선 감각을 가진 박찬욱 감독의 손에서 여러 모로 이색적인 시도를 거치며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박찬욱 감독이 굳이 먼 나라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소재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내의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며 “나도 분단 국가에서 살아왔기에 남의 일 같지 않았고, 한국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미 판문점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병사들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인간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을 그린 영화 (2000)를 만든 경험이 있다. 그의 이 말은 분단 국가의 예술인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속에 던져진 개인들의 혼돈스런 삶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이 얼마나 르 카레의 여러 작품들을 탐독해 왔으며 이 작품을 읽는 순간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임을 확신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가상과 현실 박찬욱 감독의 관심이 단지 한국적 상황과 유사한 분쟁 지대의 정치적 상황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에서 특히 그를 매료시킨 것은 그런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주인공의 내면이었다.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본진에 들어가 정보를 캐내는 이스라엘 정보국의 이야기 속에서 그 임무를 맡은 인물이 첩보원이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매우 독특한 설정이면서 박찬욱 감독의 흥미를 유발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1979년 독일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관저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정보국 고위 요원인 마틴 쿠르츠는 이 문제를 융단 폭격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공습 대신 팔레스타인 혁명군의 심장부로 들어가 테러의 요인들을 제거하는 ‘예술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며, 그 침투 작전에 무명의 젊은 영국 여배우 찰리를 끌어들인다. 연기 오디션인 줄 알았다가 이 임무에‘캐스팅’된 찰리는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의 비밀 요원 가디 베커의 연기 지도를 받으며 팔레스타인 혁명군 속으로 침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며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죽은 팔레스타인 혁명 전사의 연인 역할을 하게 된 찰리의 연기를 돕기 위해 가디는 그 혁명 전사의 역할을 하며 연기 지도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찰리는 점차 혼돈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 역할 속의 실제 인물인지 아니면 대역을 해 주는 가디인지 헷갈릴 뿐 아니라 자신이 과연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느 편이 옳은 것인지 갈등에 빠진다. 박찬욱 감독은 찰리의 이런 복잡한 심리 변화에 섬세한 묘사를 더하며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동시에 이 고도의 작전을 연출하고 지휘하는 쿠르츠 역시 ‘현실 속 드라마’(theater of the real)의 감독이라는 역할에 심취해 있는 모습으로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다. 찰리 역의 Florence Pugh와 베커 역의 Alexander Skarsgard가 처음 만나는 아크로폴리스 배경의 스틸컷. 찰리는 점차 미묘한 감정의 변화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최초의 TV 시리즈이다. 존 르 카레의 팬이기도 한 그는 이 드라마를 연출하며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허구적 경계를 넘어 이 드라마는 훌륭한 원작에 기초한 스파이 첩보 액션물인 동시에 박찬욱 감독이 제시하는 일종의 ‘연기학 개론’처럼 느껴진다.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 과연 연기인가 실제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가 하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의 예술적 가정이 단순히 허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국가주의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사실상 얼마나 해체되기 쉬운 자의적인 것들이었는가 하는 것도 이 드라마가 주는 중요한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배우의 연기는 그 많은 자의적 경계 중 하나일 뿐인가. 국적이 다르고 언어와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생존의 이름 아래 총칼을 들고 대립해 온 것도 바로 그 자의적인 경계들 때문이 아닌가. 분단 국가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경계의 살벌함과 허망함’은 일상적 경험이다. 박찬욱 감독이 영국과 미국 방송사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이 드라마를 전 세계 관객들이 동시에 보게 되는 과정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소위 ‘글로벌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국가주의 아래 고착된 허구적 경계와 선입견들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한류 콘텐츠’가 ‘한류’의 개념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 무대로 과감하게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호탄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능 프로그램에 투영된 투어리즘

Entertainment 2019 SUMMER 663

예능 프로그램에 투영된 투어리즘 1983년 제한적으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해외 여행은 1989년이 되어서야 완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요즘에는 매년 해외로 나가는 출국자 수가 무려 3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해외 여행이 보편화되었다. 국내외 여행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변화하는 한국인들의 여행 문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행이 TV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KBS가 2007년 8월에 방영을 시작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 <1박 2일>이 처음이었다. 몇 명의 유명 연예인들이 단체로 전국의 숨은 여행지를 찾아다니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은 이 프로그램은 ‘아웃도어 라이프’라는 새로운 여행 문화를 만들었다. 특히 복불복 게임을 통해 지는 편이 한겨울에도 텐트에서 자는 이른바 ‘야외 취침’은 전국의 야영지들을 텐트의 물결로 채워 놓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당시 텐트는 물론이고 각종 아웃도어 장비 및 의류에 이르기까지 관련 산업이 들썩했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역사 유적지나 경치가 뛰어난 명소를 찾아 사진을 찍어 남기는 ‘관광 여행’이 실질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체험 여행’으로 바뀌었다. 2019년 3월까지 거의 12년에 걸쳐 장수한 이 프로그램은 한국의 TV 여행 예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영석(Na Young-seok 羅䁐錫) PD의 작품이다. <1박 2일> 시즌 1 이후 지상파 공영방송 KBS에서 케이블 채널 tvN으로 이적한 그는 후배 PD들과 함께 소위 ‘나영석 사단’을 만들어 여행을 소재로 한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한국 TV 여행 예능의 트렌드를 이끌며 대중의 여행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관광에서 체험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또 단체에서 개인으로 바뀌고 있는 여행 문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는 노인들의 배낭여행을 주제로 한 TV 리얼리티 여행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사들인 미국 NBC는 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 tvN 여행 예능에 담긴 정서 2013년, 70세를 넘긴 대여섯 명의 노배우들이 팀을 이루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가 등장하며 다시 한번 시청자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낭여행은 대학생들이 선호하는 여행 문화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자못 신선하게 다가왔다. 노인들의 배낭여행이 TV 예능의 주제가 될 수 있었던 건 해외 여행 러시와 함께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은 중장년층과 노년층의 해외 여행 욕구를 촉발시켰다. 그런가 하면 젊은 연예인 두어 명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오로지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는 과중한 업무와 사람 관계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던 도시인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2014년 시작해 2017년 시즌 7까지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도시에서는 일상적으로 쉽게 해결되는 ‘한 끼’를 만들기 위해 출연자들이 좌충우돌하는 장면들이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 냈다. 잠시 도시를 떠난 출연자들은 지인들을 불러 한 끼 식사를 같이 차려 먹는 것으로 여행의 색다른 행복감에 젖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런 여행 방식 혹은 친환경적인 라이프스타일이 극단화되어 나타난 게 이른바 ‘오프그리드’ 트렌드다. 나영석 사단은 2018년에는 전기나 가스 같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는 외딴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놓고 거기서 지내는 일상을 들여다보는 이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고립된 곳이어서 더 잘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깜깜한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은 해외에서 한식당을 열어 현지인 및 관광객들에게 음식을 팔며 소통하는 프로그램이다. Ⓒ tvN 소통을 통해 느끼는 행복 해외에서 한식당을 열어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한식을 판매한다는 설정의 은 한국을 떠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픈 창업의 욕망과 더불어 외국인들과의 일상적 소통 욕구를 담아 냈다. 여행이란 본질적으로 타인의 삶과 공간을 둘러보는 일이다. 해외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아진 건 그만큼 더 넓은 세상에 존재하는 타인들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7년과 2018년 두 시즌에 총 20회 방영되어 큰 호응을 얻은 이 프로그램은 그러한 시류를 잘 반영했다. 2019년 3월 방영을 시작한 도 마찬가지로 인기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정착형 여행 프로그램인데 한층 더 진화된 의도와 구성을 보여 준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하숙집을 차려 놓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순례길의 하숙집이라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그 동네 주민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그곳을 찾는 한국인뿐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소통을 담아 낸다. 얼핏 한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여행이라는 소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곳에서, 어떤 인물들과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나영석 사단은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의 여행 문화가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앞으로 한층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때는 여행에도 획일화와 집단주의가 두드러졌던 시대가 있었다. 모두가 간다고 하면 나도 꼭 떠나야 할 것 같았던 여행의 시대는 지나갔다. 패키지 투어에서 자유 여행으로, 나아가 개별적으로 계획하는 ‘취향 여행’이 점점 여행 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게 되었다.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들이 방송가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이렇게 달라진 시대의 공기를 말해 준다. 가장 최근 방영된 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하숙집을 차려 놓고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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