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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기술, 사람을 위한 가치

Features 2023 WINTER

기술, 사람을 위한 가치 문화예술 분야가 현재 기민하게 반응하는 환경적 요인 중 하나는 기술이다. 디지털 중심의 콘텐츠들이 상상력을 현실화하며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한다. 뛰어난 기술력을 기반으로 문화예술 콘텐츠의 생태계를 한층 성장시키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다. 뮤직테크 스타트업 버시스(Verses)의 ‘메타 뮤직 시스템’은 인공지능으로 만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음악 감상자들이 메타버스 공간에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뮤지션의 음악을 제어할 수 있다. CES 2023 최고 혁신상(CES 2023 Best of Innovation Award)을 받은 이 애플리케이션은 감상자가 뮤지션의 음악을 변화시키고 상호 작용하는 방향으로 음악 감상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 버시스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제 디지털은 문화예술 콘텐츠가 싹트고,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어떤 콘텐츠가 주류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이 필요하겠지만, 그중 중요한 것으로 대중과 만나는 방법을 꼽을 수 있다. 근래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공간 개념이다. 문화예술 콘텐츠의 상당 부분은 이미 무대를 디지털 세상으로 옮겼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일상을 경험하면서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 중심에는 모바일과 메타버스가 놓여 있다. 가상 세계 현대자동차가 2022년 제페토(ZEPETO)에 구축한 브랜드 체험관 현대 모터스튜디오에서 사용자들의 아바타들이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다.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가상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놀이, 쇼핑, 업무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서비스로 2018년 8월 출시되었다. ⓒ 현대자동차그룹 K-pop은 요즘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콘텐츠다. 뮤지션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전 세계 팬들이 반응하기 때문에 무대가 더욱 정교하게 꾸며지는 추세다. 또한 단지 공연을 위한 배경이 아니라 상상을 표현하는 매개체 역할도 한다. 여기에는 확장 현실(XR, eXtended Reality)이 적용된다. XR은 스튜디오에 거대한 LED 디스플레이를 설치해서 무대 배경에 가상 환경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뮤지션들은 해외 명소는 물론이고 우주나 상상 속 미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카메라 이동에 따라 배경도 움직이며, 실제로 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실감형 콘텐츠 제작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 메타로켓(Metalocat)은 MBC TV의 예능 프로그램< 쇼! 음악중심 > ,< 복면가왕 >등에서 가상 무대를 이질감 없이 꾸며 내 주목받았다. 덕분에 제작진들이 무대 세트를 여러 개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으며, 카메라 촬영 기법도 과감해졌다. XR 기반의 가상 공간은 콘텐츠 제작 현장에서 크게 성장 중이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CJ ENM 스튜디오 센터 내에는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가 있다. 벽면과 천장을 모두 대형 LED 스크린으로 꾸민 스튜디오로, 영상물 촬영에 필요한 다양한 배경을 LED 스크린에 구현해 촬영하는 최첨단 시설이다. 로케이션 촬영 없이도 실제 같은 배경이 담기기 때문에 제작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최종 콘텐츠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콘텐츠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한편 콘텐츠 자체의 가상화 현상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그래픽 기반의 가상 캐릭터와 배경에 쓰이는 기술은 이미 일반적이지만, 정교한 묘사는 제작자들에게 늘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콘텐츠 기획 및 제작사 덱스터 스튜디오)는 조성희(Jo Sung-hee, 趙圣熙)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승리호(Space Sweepers) > (2021)와 최동훈(Choi Dong-hoon, 崔東勳) 감독의< 외계+인(Alienoid) > (2022)을 비롯해 최근 김용화(Kim Yong-hwa, 金容華) 감독의< 더 문(The Moon) > (2023)에 이르기까지 자사의 VFX 기술을 톡톡히 입증한 바 있다. SF 장르의 핵심은 상상력에 달려 있지만, 이를 수준 높은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아이디어를 얼마나 핍진하게 그려내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 기업이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가상화 바람도 무시할 수 없다. 2018년 처음 등장한 제페토는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이곳은 네이버 제트(NAVER Z)가 운영하는 3D 아바타 기반 소셜 플랫폼으로, 가상 공간에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아바타를 만들어 공간 제약 없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된 사용자들이 20~30대 젊은 층인 만큼 국내외 기업들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제페토의 가상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다. 창의적인 인공지능 메타로켓은 실감형 콘텐츠 제작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2022년 1월 MBC 방송국 사내 벤처로 선정된 후 1년간 육성 과정을 거쳐 2023년 독립했다. 사진은 메타로켓이 제작에 참여한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 > 의 한 장면. 3차원 게임 엔진을 활용해 가상 무대를 만들었다. ⓒ 메타로켓 컴퓨터의 등장 이후 사람이 만들어 내는 많은 것들이 디지털로 전환되어 왔다. 종이가 화면으로, 연필이 키보드와 디지털 펜으로 바뀌었다. 아날로그 입력 방식을 디지털로 옮기는 것이 그동안의 현상이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회화는 지난해부터 일기 시작한 생성 AI 열풍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분야이다. 수많은 그림을 학습한 머신러닝 모델이 이미 유명 작가들의 명작을 흉내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원하는 화풍대로 잘 그려줄 뿐 아니라 때로는 사진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사실적인 그림을 뽑아내기도 한다. AI 기술 기업 카카오브레인(Kakao Brain)이 출시한 칼로(Karlo)는 국내 기술로 만들어 낸 인공지능 그림 모델이다. 이 서비스는 수준 높은 회화 작품을 척척 그려내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카카오브레인은 칼로만의 독자적인 이미지 제작을 위해 직접 생성 모델을 개발했고, 이 모델을 학습시키는 자체 데이터셋 ‘코요(COYO)’도 직접 개발해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인공지능이 그려낸 그림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창의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칼로의 그림들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연유로 칼로뿐 아니라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을 두고 저작권이 인공지능 개발업체에 있는지 또는 이용자에게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하며, 심지어 작품으로 인정받고 수상하는 일도 벌어진다. 한편 버시스(Verses)는 메타 뮤직 시스템이라는 인공지능 중심의 음악 플랫폼을 서비스하는 기업이다. 이용자들은 메타버스 공간 안에서 아티스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면서 음악을 즐긴다. 단순히 정형화된 음악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에 직접 참여해 음악을 진화시키는 서비스다. 코드를 지어내고, 작곡과 편곡을 직접 해내는 생성 AI의 형태에서 한 발짝 진화해 참여와 성장이라는 개념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음악의 중심을 감상에서 참여로 확대시킨 것이다.   기술의 가치 CJ ENM의 버추얼 프로덕션 스테이지에서 영상 콘텐츠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 이곳에는 지름 20미터, 높이 7미터의 타원형 메인 LED 월과 길이 20미터, 높이 3.6미터의 일(一)자형 월이 설치되어 있다. 영상물 촬영에 필요한 다양한 배경을 LED 스크린에 구현할 수 있어 세트 설치와 철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큰 장점이다. ⓒ CJ ENM 문화예술 콘텐츠가 기술과 결합하는 목적은 결국 더 풍요로운 창의성의 표현에 있다. MIDI 음악을 통해 음악에 대한 장벽이 사라졌고, 웹이 대중화되면서 누구나 웹툰을 그려 작가로 데뷔할 수 있게 됐다. 유튜브는 평범한 사람들도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메타버스는 예술 작품을 눈앞에서 제한 없이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기술의 흐름은 명확하다. 일부 전문가들과 애호가들만 창작하고 누릴 수 있는 예술이 아닌, 누구나 참여해서 만들고 즐길 수 있도록 제작과 향유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애초 인터넷 서비스의 목표도 계층과 장벽을 허무는 데 있었다. 그 영향력이 여느 산업처럼 문화 콘텐츠 분야로 넘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창작자와 감상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두가 자유롭고 동등하게 표현할 기회가 열린다는 것은 문화예술의 존재 의미와도 관계가 깊다. 결국 모든 작품과 콘텐츠는 사람을 통해서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접하고 창작자의 의도를 이해하며 이를 다시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는 순환이 이루어져야 문화예술의 생태계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함께 엮어 내는 협업의 에너지

Features 2023 WINTER

함께 엮어 내는 협업의 에너지 < The Factory > . 팀보이드. 2021. Robotic arm, conveyor, drawing machine, PC, display, AL frames. 가변 설치.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원앤제이 갤러리(ONE AND J. Gallery)에서 2022년 10월부터 11월까지 열린 팀보이드(teamVOID)의 개인전< Factories >전시 중 일부. 공장 생산 시스템이 자동화, 고도화되면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변화하고 있는 최근 흐름을 반영했다. ⓒ 원앤제이 갤러리 가재발(사진 왼쪽)과 장재호(張宰豪)가 의기투합해 2008년 결성한 태싯그룹(Tacit Group)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서 예술적 영감을 발견하고 이를 멀티미디어 공연, 인터랙티브 설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알고리즘 아트 등으로 표현하는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그룹이다. ⓒ 허동욱 다양한 토대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팀을 이루고, 영역 간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하는 시도가 부쩍 늘고 있다.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감각과 사유 방식을 보여 주는 동시대 예술가들을 만나 본다. 태싯그룹, 모호함이 작업의 원동력 태싯그룹(Tacit Group)은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그룹이다. 클래식과 전자 음악을 전공한 장재호(Jang Jae-ho), 대중음악과 전자 음악을 오가며 활동하던 가재발(Gajaebal)이 2008년 결성했다. 이 그룹의 주요한 목표는 신개념 알고리듬 아트를 실험하는 것이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알고리듬을 활용해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더 새롭고 혁신적인 시스템을 창조하려 한다. 이들은 동시대 테크놀로지 환경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찾고 이를 멀티미디어 공연, 인터랙티브 설치, 알고리듬 아트로 구현한다. 또한 이들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발견하곤 한다. 그 결과 거대한 디지털 화면에서 한글 자모가 모였다 흩어지며 군무를 추거나 테트리스 게임이 즉흥곡으로 재탄생한다. 태싯그룹의 결성 배경은? 우리는 원래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키네틱아트가 막 떠오르던 시기에 둘 다 알고리듬 아트에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에도 너무 난해한 장르였기 때문에 우리는 물론이고 대중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업을 해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2008년 활동을 시작해 벌써 15년이 흘렀다. 긴 세월 동안 태싯그룹을 이끌어 온 비전은 무엇인가? ‘태싯’이라는 그룹명은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 4분 33초 > 에서 착안했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고 현장의 침묵과 소음을 음악화한 이 작품의 악보에는 침묵을 뜻하는 음악 용어 ‘타켓(tacet)’만 적혀 있었다. 20세기에 한 획을 그은 케이지처럼 우리도 21세기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싶었다. 15년 전에는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생소했다. 우리 작업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 말의 개념부터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그때만큼 낯설어 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뿌듯하다. < 모르스 쿵쿵(Morse ㅋung ㅋung) > 은 한글 자모(字母)가 소리로 치환되는 작품으로 글자가 일그러지면 소리도 따라서 이지러진다. 각각 LED 전구 2000개가 달린 166 × 166 ㎝ 크기의 대형 화면 세 개에서 글자와 소리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태싯그룹의 작업은 난해한 알고리즘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관객들은 쉽고 재미있게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태싯그룹 제공 알고리듬 아트라는 개념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 작업의 모티프는 쉽고 대중적이다. < 훈민정악(Hun-min-jeong-ak) > 과< 모르스쿵쿵(Morse ㅋung ㅋung) > 은 한글이 소리를 바탕으로 창조된 문자라는 점에 착안해 작업했다. 보통 한글이 건축적 구조를 지닌다고 말한다. 한글이 일종의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시스템을 연구하는 그룹인데 한글도 그러하니, 여기에 사운드를 결합해 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음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이론보다 영감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 어느 날 문득 일상에서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다.< 게임 오버(Game Over) > 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테트리스 게임의 형태가 악보와 겹쳐 보였다. 그래서 테트리스를 하는 퍼포머, 게임 이미지, 블록의 높낮이에 따라 전자음이 달라지는 사운드를 만들었다. 2021년에는 NFT 작품< CRYPTO 헐헐헐 > 을 무려 4,200만 원에 판매해 화제를 모았다. 한글을 활용한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구상한 작품이다. 우리는 주식이 상승할 때도 “헐!”, 폭락할 때도 “헐…”이라고 말한다. ‘헐’은 양방향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는 감탄사이다. 그 온갖 감정의 특징이 NFT와도 딱 들어맞았다. ‘헐’은 그 자체로 소리이기도,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이기도, 악보이기도, 음악의 재료이기도 한 글자이다. 또 어떨 땐 글자이지만, 모양이 조금만 흐트러지면 도형처럼 보이기도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태싯그룹에게 알고리듬이란 어떤 의미인가? 알고리듬 아트를 설명할 때는 처마 끝에 다는 풍경(風磬)만큼 좋은 비유가 없다. 풍경을 만드는 이가 있고, 그걸 쳐서 소리를 내는 존재가 있다. 바람이 풍경을 만들 줄은 몰라도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를 낼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관객이 우리 작품의 시스템은 몰라도 연주는 할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그걸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누가 연주할지, 어떤 음이 탄생할지 예측할 수 없어도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과물보다 작업을 제작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지난 15년간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우리 두 사람의 개인적인 입장은 사뭇 다르다. 하지만 태싯그룹으로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작업의 원동력이 ‘모호함’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작업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음악인지 미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딘가에 속해 있는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의미 있다. < 게임 오버(Game Over) > 의 공연 장면. 태싯그룹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테트리스 게임에서 영감을 얻었다. 연주자들이 게임을 시작하면 그 과정이 시각화되는데, 블록이 쌓이는 위치와 형태에 따라 다른 소리가 생성된다. 태싯그룹 제공 < 훈민정악(Hun-min-jeong-ak) > < 모르스 쿵쿵 > 과 마찬가지로 한글 창제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며, 한글 자음과 모음에 소리를 생성하는 알고리듬을 심었다.   업체, 기술 환경에 대한 통찰 업체eobchae는 2017년 탄생한 오디오 비주얼 프로덕션 콜렉티브이다. 대학에서 만난 김나희(Kim Na-hee), 오천석(Oh Cheon-seok), 황휘(Hwang Hwi)가 멤버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기술적, 문화적 환경을 주제로 영상, 웹아트, 사운드, 퍼포먼스 등을 제작한다. 업체eobchae의 주된 관심사는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을 규정하는 ‘디지털 프로덕트’이다. 스마트폰, 스마트 워치, 태블릿, AI 스피커처럼 현대인의 일상과 업무를 편리하게 도와주는 도구들을 말한다. 하지만 소수 기업이 이것을 독점하면 대중이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업체eobchae는 가상의 디지털 프로덕트를 개발한다. 거대 기업과 경쟁하는 가짜 상품을 상상해 사회 현상을 비평적으로 조망하려는 의도이다. ‘업체’는 ‘기업체’를 뜻하는 보통 명사이다. 세 명의 멤버가 어떻게 팀을 조직하게 됐는가? 김나희와 오천석은 대학 친구였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문법에서 벗어나 재밌는 일을 모색하던 중 한 수업에서 황휘를 만나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당시에는 미술에 최소한의 관심만 두고 있었고, 순수 예술 작업보다 실제 프로덕션을 만들 의도로 시작했다. 상업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자며 이름도 ‘업체’로 지었다. 그런데 누군가 의뢰해 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 우리끼리 먼저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해 봤다. 우리는 세 멤버가 개인 활동과 팀 활동을 병행한다. 벌써 7년 차 콜렉티브가 됐다. 업체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멤버들이 기술 관련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디지털 프로덕트에 관심을 모으게 됐다. 그런데 우리는 실재하는 프로덕트가 아니라 현실과 경쟁하는 가짜를 만들고 싶었다. 주변의 휴대용 디바이스나 소셜미디어에서 볼 수 있듯 특정 디지털 프로덕트가 시장을 빠르게 독점하면 사용자들은 그 생태계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렵다. 전화, 문자, 결제 시스템 등 현대인의 생활 양식 전부를 표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등에 업고 운영되는 빅데이터 회사와 경주해 보자. 그 페이스에 맞춰 한번 달려 보자” 하고 의기투합했다. 실제로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으니 ‘가짜 제품’을 사용하는 ‘가짜 사용자’를 상상하며 달걀을 던지는 제스처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가짜 프로덕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재밌는 포인트는 ‘거짓말’이다. 무언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작동하지 않는데 작동하듯 보여 주는 것, 이런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을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이렇게 메타 인지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다. 업체eobchae의 작업은 최첨단 기술과 맞닿아 있다. 암호화폐, 블록체인, 오라클 등을 소재로 다룬다. 반면 작업 내용은 굉장히 근원적이다. 우리는 철학보다 인류학, 사회 과학에 흥미를 느낀다. 다시 말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는 선과 악은 무엇인지 하는 논제보다 기술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현대인이 어떤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활용해 욕망을 추구해 나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오늘날 기술적인 환경은 또 다른 자연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 너머, 무엇이 현대인을 지금처럼 행동하게 하는지 그 맥락과 배경을 파고들어 관찰하려 한다. 신기술을 도구 삼아 예술 분야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업체eobchae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기술이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지 포착하는 데 열중한다. 가짜 프로덕트는 현실을 흉내 낼 뿐인데, 예술은 이러한 무용한 행위에 유용한 시간과 공간을 내준다. 그래서 현실적 위험에 맞부딪히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며 활동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작업을 미술 언어로만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미술계에서 계보가 없는 작업이기도 하고…. 우리는 작품을 만든다기보다 오늘날 기술적인 환경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콜렉티브이다. 다만 이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시도하는 과정에서 예쁜 것, 재밌는 것, 끔찍한 것들이 두루 생기는 것 같다.   2022년 두산갤러리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영상 작품< eoracle > 의 한 장면. 매력적인 그래픽과 사운드, 특유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신기술 환경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업체eobchae 제공 업체eobchae는 김나희(金娜希), 오천석(사진 오른쪽, 吳天錫), 황휘(사진 왼쪽, 黃徽)로 구성된 오디오 비주얼 프로덕션이며 서로의 비평적 관점을 존중하되 각자의 관심사와 기술을 활용해 독창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 허동욱 팀보이드는 배재혁(사진 왼쪽, 裵在赫)과 송준봉(宋俊奉)이 결성한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으로 인터랙티브 미디어, 키네틱 조형, 라이트 조형, 로봇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시스템적 관점에서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 낸다. ⓒ 허동욱 팀보이드, 균형 잡힌 예술 시스템 팀보이드(teamVOID)는 미디어 아트 그룹이다. 공과 대학 출신의 배재혁(Bae Jae-hyuck)과 송준봉(Song Jun-bong)이 2014년 결성했다. 이들은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인터랙티브 미디어, 키네틱 조형 등 다양한 작업을 시도한다. 산업용 로봇을 재료 삼아 한 편의 연극을 연출한 작업< The Malfunction > 이 대표적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시스템이다. 일반적인 속성을 비롯해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 현상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는 ‘관계’와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가려면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가 저마다 규칙을 준수하며 서로 균형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처럼 팀보이드도 주제, 장치, 데이터, 로직 등이 조화롭게 구성된 ‘예술 시스템’을 꿈꾼다. 멤버들이 모두 공대 출신이다. 어떻게 예술 분야로 진입하게 되었나? 우리 둘 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은 있었다. 공대생에게는 누구나 창작 욕구가 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손으로 무언가 만들 기회가 매우 적었다. 2014년 배재혁이 먼저 재밌는 구상을 하던 중 학교 연구소에서 우연히 송준봉을 만나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됐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면 어떤 작업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많지만, 뜻이 맞는 사람과 어울리면 혼자일 때보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보이드’는 무언가 비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팀명의 의미는? ‘보이드’는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비어 있는 만큼 굉장히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미술 전공자가 아무도 없으니, 우리 자체가 보이드이기도 하다. 그래서 빈 만큼 채워 나가자는 의미로 작명했다. 우리가 화가나 조각가만큼 작업하지는 못하겠지만, 미디어 기술로는 미술에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산업용 로봇을 작품 재료로 사용한다. 로봇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는가? 로봇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어떤 ‘객체’의 움직임이 신기했다. 인간은 완벽한 직선을 그리지 못하지만, 로봇은 정교하게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24시간 동안 계속 움직일 수 있다. 도구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2차 산업혁명의 상징인 컨베이어 벨트에는 대량 생산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로봇은 동시대 시스템을 대표하는 사물이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생산 도구는 바로 로봇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 대부분이 로봇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로봇은 인간의 어떤 욕망을 대변하는가? 바로 일하기 싫은 욕망이다. 이처럼 우리는 도구로서의 기계를 넘어,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 전반을 조망하고 작업으로 표현한다. 미디어 아트는 다른 장르보다 ‘뒷면’이 중요하다. 기계의 고장과 오작동에 취약한 만큼 내부 설계에 가장 큰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 숭고한 노동은 대개 뒷면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겉면에는 작가가 한 땀 한 땀 쏟아부은 노력이 잘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그 뒤에서 작업을 향한 애정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작품의 뒷면을 보며 “아, 이 작업할 때 이런 생각을 했지”, “우리가 이런 고민을 했었지” 하며 감회에 젖고는 한다. 첨단 기술을 작업에 활용하고 있다. 다양한 신기술 이슈에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기술은 없다. 요즘 어떤 기술이 주목받고 떠오르는지 웬만하면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새 기술을 작업에 섣불리 적용하지는 않는다. 유행하는 기술을 사용하는 데 의의를 두기보다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내용과 부합하는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그래서 오래전 출시된 기술을 몇 년 뒤에야 사용한 작업도 있다. 어떤 기술을 도입해서 관심 받아야겠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팀보이드에게 가장 중요한 비전과 작업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경험과 균형감을 꼽을 수 있다. 먼저 경험은 호기심 해소와 유사하다. 내가 몰랐던 일을 실제로 겪으면서 궁금증을 풀고, 또 새로운 작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일을 시도해 보는 추진력을 제공한다. 균형감은 팀을 지속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 있다. 우리가 10년을 함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팀워크도 있지만, 작업과 일의 균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팀보이드가 10년 후에도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기업이 예술과 손잡은 이유

Features 2023 WINTER

기업이 예술과 손잡은 이유 국내 기업들이 기업 철학을 실천하거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예술가들을 지원하거나 협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예술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실현할 수 있으며, 또한 대중들은 새로운 예술 경험을 통해 일상을 환기하게 된다. < A Guest in Paradise > . 전병삼(Jeon Byeong Sam, 全丙森). 2023. 사진 원형 적층 위에 프로젝션 영상 맵핑. 지름 300 ㎝. 2023년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에 전시된 작품으로, 가상의 외계 생명체를 약 30억 배 확대하여 지름 약 3미터 크기로 선보였다. 파라다이스 아트랩은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이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즐거움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품들을 공모해 진행하는 행사다. ⓒ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텔레비전을 미술 도구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가 된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은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말했다. 기술 매체에 의존한 예술은 더 발전된 기술이 등장하면 한 세대 안에서도 그 수명을 다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더 이상 독보적이고 영원한 기술 혹은 예술이란 없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 그 말처럼 지금은 기술이 예술과 손잡았고, 예술이 기술에 올라탔다. 미디어 아트라는 이름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고 업종의 한계를 지운다. 때로는 기업이 그러한 예술적 혁신에 동참하기도 한다. 기업 철학 인천광역시 영종도(永宗島)에 위치한 파라다이스시티는 화려한 휴양 리조트이다. 2023년 9월 어느 날, 이곳 실내 광장으로 운석이 떨어졌다. VR 고글을 쓰면 운석을 더 가까이 살펴보며 우주의 광활한 공간감을 느껴볼 수 있다. 운석을 이루는 광물의 파장을 분석해 음악과 빛을 경험할 수도 있다. 김동욱과 전진경으로 구성된 팀 룸톤의< 에코스피어 > 와 박근호(참새)의< 운석 감정 > , 그리고 윤제호의< 우주로 보내는 파동 >얘기다. 이들은 2023년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은 2018년부터 ‘파라다이스 아트랩’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의 현재를 탐색하고 미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인터렉티브한 작품의 창작, 제작, 유통을 지원한다. 리조트 회사가 왜 미디어 아트를 후원할까? 파라다이스 그룹이 생각하는 휴양이란 그저 놀고 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양지에서 접하는 예술적 경험이 영감을 일으키고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업 철학에 스며 있다. 새로운 체험 < 운석 감정(Meteorite Appraisal) > . 박근호(참새). 2023. 크리스털 비즈, 철 프레임, 모터, LED. 600 × 240 × 240 ㎝. 가상의 운석이 떨어진 상황을 가정하고, 이 운석이 에너지를 어떻게 방사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에너지 입자와 공명하는 크리스털과 빛 모듈을 설치했다. 2023년 파라다이스 아트랩 참여 작품이다. 박근호(참새)는 물성으로 공간을 채우는 미디어 작업을 주로 선보인다. < 에코스피어 > . 룸톤. 2023. VR, 비디오 설치. 4분. 김동욱(Kim Dong-wook, 金東昱)과 전진경(Jeon Jin-kyung, 田珍卿)으로 구성된 룸톤의 VR 신작은 2023년 파라다이스 아트랩 전시작 중 하나로, 인간과 우주의 상호 연결성과 존재의 의미를 은유적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통해 풀어낸다. 룸톤은 가상현실과 디지털 게임을 매체로 삼아 실제 감각과 가상 감각 사이에서 발생하는 몰입 경험에 주목한다. 같은 시기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는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Frieze Seoul)과 키아프 서울(KIAF Seoul)이 한창이었다. 고가(高價)의 명화들 수천 점 사이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작품이 관람객들의 눈에 들어왔다. LG전자의 올레드(OLED, 유기발광다이오드) TV로 다시 태어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Kim Whanki, 金煥基, 1913~1974)의 점화(點畵)였다. 붉은 점이 겹겹의 동심원을 이루는< 14-III-72 #223 > 이 초대형 무선 올레드 TV 위에서 영롱하게 빛났고, 선명도와 거리감의 한계를 뛰어넘은 몰입감으로 관객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생전에 색과 형(形)이 만드는 파장과 소리, 움직임에 주목했던 김환기가 이 작품을 봤다면 무척 놀랐을 성싶다. LG전자의 LG 올레드는 올해 프리즈 서울의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했다. 상당히 놀라운 사건이다. 20년 역사의 프리즈와 줄곧 메인 스폰서로 동행한 글로벌 금융 기업 도이치뱅크가 이례적으로 자리를 내줬기 때문이다. 아트 바젤은 UBS, 프리즈는 도이치뱅크처럼 아트페어의 오랜 파트너는 대부분 은행이다. 미술품 구매층과 은행의 VIP 고객이 고액 자산가로 겹치며, 투자 자산으로서 미술품의 가치가 높은 까닭이다. 금융기업이 아닌 전자 회사이자 기술 기업인 LG 올레드는 왜 예술과 손잡게 됐을까? 제조업의 대전환을 가져온 4차 산업혁명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더 이상 제품만 파는 기업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기업의 고유한 문화를 팔아야 합니다. 제품만 파는 기업은 문화를 파는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다고 말한 경제학자도 있죠.” 미디어 아트로 특화한 울산시립미술관의 개관을 이끈 후 부산시립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서진석(徐眞錫) 관장은 ‘네오-바우하우스(Neo-Bauhaus)의 시대’를 주장하며 이같이 말했다. 심미적 예술과 기능적 기술을 접목하려 했던 20세기 초 바우하우스가 신기술 시대에 다시 등장했다는 의미다. 그는 “기술 발달이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우리 삶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다”면서 “테크놀로지가 물리적 기기 등으로 구현될 때 기술적·기능적 역할만 갖는 게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과 함께 우리 삶에 침투하면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술 발달 자체는 기능적 환경만 만들 뿐 여기에 예술이 더해져야 문화적 환경이 조성된다.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최첨단’이라는 진부한 표현 대신 ‘새로운 체험’을 부르짖는 이유다. 얇고 투명한 올레드가 활용된 사례는 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올해 5월부터 10월까지 개최했던<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 는 고대 신라와 가야 시대의 무덤 부장품이던 토기를 대거 선보인 전시였다. 박물관 측은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LG의 투명 올레드를 제공받았다. 진열장 유리인 줄 알았던 두께 17㎜의 모니터에서 1600년 전 사람들의 생활상이 영상으로 투사될 때 어른들은 감탄하고 어린이들은 신기한 듯 가까이 다가섰다. 이 박물관의 상설전시관 그리스·로마 전시실에서도 번개가 번쩍이는 구름 사이로 제우스 흉상이 나타나는 장면을 LG 올레드의 기술력으로 만날 수 있다. 첨단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지원하며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LG전자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2027년까지 향후 5년간 ‘LG-구겐하임 글로벌 파트너십)’을 맺고 ‘LG 구겐하임어워드’를 신설했다. 매년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혁신적 예술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를 선정해 10만 달러를 시상하기로 한 것이다.   환경의 진화 홍콩의 대형 쇼핑몰 하이산 플레이스에 위치한 샤우트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이 삼성전자의 라이프스타일 TV ‘더 프레임(The Frame)’을 활용한 디지털 아트 전시회< 더 프레임 디지털 아트 갈라(The Frame Digital Art Gala) > 를 관람하고 있다. 이 전시는 삼성전자와 샤우트 갤러리가 협업해 2022년 11월부터 12월까지 열렸다. < 진동클럽 2020 > . 오도함(Oh Do-hahm, 吳嵞闞). 2020. PVC 에어볼, 촉각 변환기, 베이스 셰이커, 앰프 가변 크기. 현대자동차그룹이 후원하는 창의 인재 플랫폼 제로원(ZER01NE)이 2020년 진행한 오픈 스튜디오의 전시작 중 하나. 음악, 공연 기획, 미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오도함은 진동을 통해 음악을 촉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장치를 선보였다. 침대 매트리스에 스피커를 붙이고 진동으로 음악을 느끼는 한 청각 장애인의 감상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삼성전자는 기술력을 이용해 유명 미술관의 명화를 안방으로 갖고 들어왔다. 삼성전자의 라이프스타일 TV 라인 중 하나인 더 프레임(The Frame)을 이용해 예술 작품을 구독하는 서비스 ‘삼성 아트스토어’가 그것이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과 갤러리가 소장한 명화들을 비롯해 사진·일러스트·디지털 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 약 2,300점을 4K 화질로 제공한다. TV 기술력을 통해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일상 속에서 더 가까이 예술향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전략이다. 미디어아트와 손잡은 기술 기업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현대자동차다. 이 기업은 ‘아트랩’이라는 별도 부서를 두고 초국가적 관점과 시대적 변화에 대한 담론을 공유한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과 협력한 ‘라크마 아트 앤 테크놀로지랩’, 블룸버그 미디어와 협업한 프로그램 ‘아트 앤 테크놀로지’를 운영한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창작과 전시를 지원하는 ‘VH어워드’와 창의 인재 플랫폼 ‘제로원’, 미디어 아트 큐레이터 지원 프로그램인 ‘현대 블루 프라이즈 아트 앤 테크’도 명성을 쌓아가는 중이다. 이 같은 후원에 대해 현대자동차 측 관계자는 “기술이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그 자체로 진화하고 있으며 인간과 기계의 관계 또한 재정립이 필요한 시대적 요구가 있다”면서 “최근 인공 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얼마나 창의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된 만큼 예술과 기술의 접점에서 현재를 검토하고 인류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기술력으로 경쟁하던 기업들이 이제는 기술 너머의 변화를 주목한다. 소비자 심리와 아트 프리미엄 효과를 연구해 온 한여훈(韓餘薰)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는 “2000년 이전의 기업들은 성능으로 경쟁했지만, 이제는 기술 격차가 미미해졌기에 ‘완벽한 혁신’만이 차별화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동시대 예술가들은 더 이상 테크닉이 강조된 기술적 재현에 몰두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을 새로운 형태의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업의 혁신 개념과 접점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그는 “올레드 기술을 제품에 적용하면 TV로 한정되지만, 작품에 접목할 경우 더 큰 가능성을 갖게 된다”면서 “기술 혁신이 매력적으로 정립되려면 그 기술을 쓸 수 있는 상상력과 창조적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이 역할을 한다면 기술의 활용 범주는 무한해진다”고 덧붙였다. 기술과 손을 맞잡은 예술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조형 예술 장르가 생존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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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예술 장르가 생존하는 방법 시각 예술에서 기술은 언제나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 정의까지 바꾸기 때문이다. 디지털 생태계가 공고해진 지금, 아날로그 제작 방식에 의존하던 회화, 조각, 공예 같은 예술 장르들도 이제는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술을 수용하며 변신 중이다. 2016년, 서울 서초동의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렸던 잭슨 홍의 개인전 < Autopilot > 전시 전경. 작가는 디자인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가 만들어 내는 오브제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로운 의미들을 발생시킨다. ⓒ 페리지갤러리 < (황금 인어) > . 김한샘. 2022. 유리,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사금석(砂金石). 7.5 × 7.5 × 6 ㎝. < 덤벼 > . 김한샘. 2022. 유리,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무카이트(mookaite). 5 × 9.5 × 8 ㎝. < 철 속의 악마 > . 김한샘. 2021. 알루미늄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97 x 80 x 11 cm. < 숲속의 보석 > . 김한샘. 2021. 아크릴, 금박, 피그먼트 프린트, 레진. 54 x 31 x 16 cm. 김한샘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했던 하위문화, 그 중에서도 중세 판타지 서사를 픽셀 그래픽으로 구현하며 이 과정에서 데이터가 촉각적인 물성으로 변환한다. ⓒ 김한샘 조형 예술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기 시작한 시기는 애플사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널리 보급하던 1990년대이다. 2000년대에는 CNC 기술과 3D 프린터가 수용되었고, 2020년 이후에는 이미지 인공지능(AI image generator) 상용화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디지털은 세상을 정보화하고 탈(脫)사물화한다. 그래서 사물화를 통해 물질성을 부여하는 데 집중하는 조형 예술 작품은 일견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전적인 예술 장르들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비평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해법을 모색한다. 특히 데이터에 의존하는 디지털 기술은 작업의 효율성을 높여 주고 노동 강도를 줄여 주기 때문에 동시대 작가들의 기술 수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80~90년대에 출생한 젊은 작가들 중에는 디지털 기술의 한계를 실험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는 이들이 상당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술 수용으로 인해 장르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통적 미술 장르의 존립에 위협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며 예술의 존재 조건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회화는 조각이 되고, 조각은 데이터가 되며, 공예는 회화가 된다. 재료와 기법이 중요했던 전통적 미술의 규범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사물을,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자유롭게 오가는 작업들은 이 시대 전통 장르들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 김한샘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낯설었다”고 밝혔다. 디지털 세대인 그에게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16비트 RPG 그래픽 게임 형식으로 자신의 디지털 드로잉을 디자인한다. 우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그림을 그린 후 이 데이터를 종이에 출력한다. 그리고 인쇄물을 돌이나 크리스털, MDF 같은 물질적 매제와 결합함으로써 데이터를 디지털 세계에서 아날로그 환경으로 옮겨 온다. 그는 출력물을 부착할 액자나 태블릿도 직접 제작하는데, 이것 또한 그림과 함께 작품의 서사를 구성한다. 그의 수공예적인 작업 방식은 보는 이들에게 촉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만질 수 있는 데이터’라는 매우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잭슨 홍은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물의 가변성,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또한 사물이 제조되는 방식을 시각화하는 데도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기초가 데이터이기에 가능하다. 작가는 산업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처럼 데이터를 먼저 구축한 후 이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데이터는 장인 정신과 기술이 필요한 제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철판은 데이터에 따라 CNC 기계를 통해 재단되고, 기술자의 손길을 거쳐 절곡(折曲), 용접되면서 형태를 드러낸다. 잭슨 홍의 작품에서 데이터는 완벽한 도구인 동시에 엄격한 질서와 규범을 비껴가려는 작가의 의지도 표출한다. 예를 들어 < Cross Hatching > 연작의 경우 의도적인 디지털 오류를 활용하여 도면을 제작했다. 규격화와 오차 없음에 저항하며 다른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도면은 단순한 직능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작품이며 상상 속의 엑스레이라고 할 수 있다. 3D 프린팅 방식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2018년 열린 < 잭슨 홍의 사물 탐구 놀이 > 전시 풍경.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 전시에서 작가는 사물의 용도를 뒤바꿈으로써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사진 김상태(金相泰) < 만족이 프로젝트 > . 김지민. 2021. PLA 필라멘트, 스테인리스강선. 가변 설치. 2021년,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유아트스페이스에서 열렸던 김지민의 개인전 <𝑬𝑵𝑽𝒚⁷>의 전시 모습. 그는 최근 3D 프린팅을 적용해 현대 사회의 소비 욕망을 풍자하는 작업들을 보여 준다. 김지민 제공 김지민은 조각을 전공했는데, 브랜드 라벨을 노동집약적인 바느질 수공으로 이어 붙이던 제작 방식을 오랫동안 선보였다. 최근 소비 사회의 심리 현상을 작품 주제로 삼으면서 작업 형태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했다. 특히 < 만족이 >프로젝트는 3D 프린팅이 매우 유효한 전략이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동일한 형상의 아이콘들을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기에 군집 표현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주제 의식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3D 프린팅이 만능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통적인 조각 제작 방식도 결합한다. 예컨대 < Skull >연작에서는 전통적인 조소 기법으로 원본을 제작했고, 이 원본을 3D 스캔을 통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여 또다른 작품인 < Coloring N. 108 > 을 출력했다. 작가는 < Inside Out >같은 대형 작업에도 동일한 데이터를 적용했다. 디지털 데이터는 얼마든지 다른 스케일로 출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동양화와 금속 공예를 공부한 오세린은 다양한 요소와 기술을 결합하여 초현실적인 시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지난해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바이파운드리에서 열렸던 개인전 < 숲 온도 벙커 > 는 도자(陶瓷) 작업과 3D 프린팅 출력물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구성한 전시였다. 환경 문제를 대하는 인간의 모순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전시작들은 ‘모방과 속임수’라는 초기 작업의 주제 의식과 여전히 맞닿아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멀리서 봤을 때 어느 부분이 도자 작업이고 어떤 부분이 3D 프린팅으로 제작되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작가는 이 작업의 3D 프린팅을 위해 인터넷상의 오픈소스 공간 모델링 데이터를 사용했다. 3D 소프트웨어를 통해 데이터를 결합 및 변형했고, 이 데이터를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재료를 녹는점 이상의 온도로 녹인 후 일정한 두께로 선을 그리면서 형상을 제작하는 방식) 타입의 프린터로 출력했다. 결과물은 초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이는 해상도가 다른 요소들을 동일한 조건으로 출력했기 때문이다.   직조된 픽셀 오세린은 ‘원본’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복제되고 변형되는지를 관찰해 온 작가이다. 최근에는 전통 공예 기법과 최신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주제 의식을 확장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이태원 바이파운드리에서 2022년 열렸던 개인전 < 숲 온도 벙커 > 의 전시 장면. ⓒ 노경(Roh Kyung, 盧京) < Sudden Rules-Bay-2 > . 차승언. 2017. 폴리에스테르사(絲), 염료. 230 × 455 ㎝. 차승언의 작품은 언뜻 보면 평면 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직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20세기 미술의 유산을 되돌아보는 한편 동양과 서양, 시각과 촉각, 정신과 물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오늘날 의미 있는 추상회화가 무엇인지 탐구한다. ⓒ 차승언 차승언은 전통적인 직조 기술을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한다. 섬유예술과 회화를 전공한 작가는 “직조(織造)의 방법으로, 20세기 추상회화 중 관심 있는 작품들을 다시 만들어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의 < The Bay > 와 한국 이성자 작가의 < 갑작스러운 규칙 > 을 뒤섞은 < Sudden Rules-Bay-2 > 가 대표적이다. 그는 컴퓨터로 이성자 작가의 작품을 데이터화하여 픽셀의 면 구성에 따라 직조 데이터로 다시 설계한 다음 자카드 직기로 출력했다. 그런 다음 출력된 직물에 프랑켄탈러의 캔버스 얼룩 빨아들이기 기법을 적용했다. 이는 직조와 염색을 통해 질서와 우연이 한 화면에 공존하도록 의도한 실험이었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언어와 직조의 관계에 대한 질문도 중요하다. 작가는 언어를 데이터화하고 코드화하여 직조 대상으로 사용했다. “Before your birth”와 “Your love is better than life.” 같은 문장을 변환기로 코드화하고, 이를 직조 도면으로 설계한 후 이를 토대로 직조했다. 언어와 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인 셈이다.

누가 한국의 미디어 아트 신을 만들었나?

Features 2023 WINTER

누가 한국의 미디어 아트 신을 만들었나? 수십 년 전 미디어 아트는 그것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하는 낯선 개념이었고, 예술 분야에서 변방에 위치했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더불어 어느새 미디어 아트는 문화예술의 중심부에 서 있다. 이 장르가 주류가 되기까지 단지 첨단 기술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으로서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탐색해 온 각계각층의 노력이 한국 미디어 아트의 오늘을 만들었다. < 딜리버리 댄서의 구 > . 김아영. 2022. 단채널 비디오. 25분. 택배 서비스 회사에 다니는 한 여성이 또 다른 자신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김아영(Ayoung Kim, 金雅瑛)은 주로 이주와 난민,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주제로 삼아 영상, VR,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풀어내는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 김아영 올해 6월, 오스트리아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지닌 페스티벌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에서 김아영 작가가 < 딜리버리 댄서의 구(Delivery Dancer’s Sphere) > 로 골든 니카상을 받은 것이다. 이 상은 1987년 신설된 국제 경쟁 부문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의 대상 격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첫 수상이기에 의미가 한결 더했다. 비슷한 시기, 강이연 작가는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가 진행하는 ‘메이드 오브 메이커스(Made of Makers)’에 선정되었다. 190년 역사를 지닌 시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가 주목받는 창작자 및 장인들과 협력해 진행하는 행사다. 그녀는 올해 주제였던 ‘황금비율’에 대해 < 오리진(Origin) > 이라는 작품으로 응답했는데 아시아 작가가 선정되기는 처음이었다. 최근 들어 한국의 미디어 아트 작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일어난 일은 아니다. 생소한 분야였던 미디어 아트를 개척한 선구자들을 비롯해 창작자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한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일구어 낸 토대는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창작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선구자들 < 무제(TV 돌탑) > . 박현기. 1980. TV, 돌 17조각. 가변 크기. ‘한국적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박현기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자연과 인공, 실재와 허구의 이분법적 경계를 구조화한 작품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 칭기즈 칸의 복권 > . 백남준. 1993. CRT TV 모니터 1대, 철제 TV 케이스 10대, 네온관, 자전거, 잠수 헬멧, 주유기, 플라스틱관, 망토, 밧줄,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LD. 217 × 110 × 211 cm. 동양과 서양을 연결했던 과거의 실크 로드가 현대에는 광대역 전자 고속도로로 대체된 상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 Nam June Paik Estate,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누구보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영향을 준 작가를 꼽는다면 단연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일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공부하며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을 세상에 드러낸 것이 독일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선보였던 <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 (1963)이다. 그는 이 전시를 시작으로 미디어 아티스트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TV를 조작하고 영상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일방적 정보 송출과 수용이라는 매스미디어가 가진 독점적 위계를 무너뜨렸다. 이후 그는 비디오 영상과 조각, 설치를 결합했고 비디오 신시사이저(synthesiser)라는 그만의 독창적인 이미지-영상 리믹스 기계를 개발하는 한편 음악과 신체를 연결하는 작업 같은 독보적 행보를 지속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며 상호 영향 관계를 가진 사이버네틱 세계를 예견했다. 또한 다자간 소통과 연결을 시도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대해서 연구했는데,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자연과 기술의 공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융합을 이루어 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예견을 풍자하며, 뉴욕과 파리를 연결한 인공위성 생중계 TV 쇼 < 굿모닝 미스터 오웰 > 이 송출되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의 활동과 선언은 예언에 가까운 예측이었지만, 미래와 명백한 접점을 만들었기에 지금까지도 소환되며 계속 이야기된다. 한편 1970년대 국내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 중 하나인 박현기(Park Hyun-ki, 朴炫基)는 백남준과는 다른 방식으로 TV를 활용했다. 그는 TV를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물과 함께 쌓는 설치 작업을 보여 줬다. TV 화면에는 돌이나 나무가 송출되며 현실과 가상이 연결되는 상황을 연출했다. 이를 통해 그는 ‘실재’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확장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쌓기’라는 한국의 전통적 축조 방식, 즉 건축적 방법론을 접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명과 자연이라는 두 매체 간 충돌을 통해 새로움을 주고 환기시키는 전략이 내재한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의 미디어 아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문 기관의 등장 < 보편의 조적(組積) > . 진기종(Zin Ki-jong, 陳起鍾), 차동훈(Cha Dong-hoon, 車東訓), 강지영(Kang Ji-young, 姜志詠). 2023. 단채널 비디오. 6분 36초.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KF XR갤러리에서 열린 <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 의 전시작 중 하나. 가상의 최첨단 3D 프린터와 전통 도자기를 매개로 생물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고찰한 작품이다. XR갤러리 개관을 기념해 열린 이 전시는 환경을 주제로 삼아 VR, AR, 인터랙티브 아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 한국국제교류재단 < 아르고스(Argos) > . 김윤철(Yunchul Kim, 金允哲). 2018. 가이거 뮐러 튜브(Geiger Müller tube),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48 × 40 × 40 ㎝. 올해 9월, 아트센터 나비가 미디어 아트의 켈렉팅을 목적으로 개최한< 일시적인 것의 방 – 컬렉팅 미디어 아트(Cabinet of the Ephemeral – Collecting Media Art) > 전시작 중 하나. 이 작품은 41개의 채널로 구성된 뮤온 입자 검출기이며, 우주에서 방출된 뮤온 입자를 검출할 때마다 플래시를 터트리며 반응한다. 김윤철은 유체역학과 메타 물질의 예술적 잠재성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아트센터 나비 제공, 사진 서울특별시, (사)서울특별시미술관협의회 2000년은 한국 미디어 아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Seoul Mediacity Biennale), SK 워커힐 미술관을 재개관한 아트센터 나비, 그리고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에 위치했던 일주(一洲)아트하우스(Ilju Art House)가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명칭을 달고 출발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올해로 어느덧 12회를 맞았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미술의 동시대성과 실험성에 주목하며 오늘까지 이어진 공공 행사이다. 개최 당시에는 한국의 정보통신기술과 빠른 기술 발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정책적 목적으로 인해 다소 부침이 있었지만, 현대 미술의 한 영역인 미디어 아트의 의의와 흐름을 일반에 인식시키는 데 일조했다. 같은 해 출범한 아트센터 나비는 전통적 미술 장르를 다루던 기존 워커힐 미술관을 미디어 아트 전문 기관으로 재개관한 곳이다. 최신 기술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창작자를 지원한다. 미디어 아트가 생소하던 21세기 초, 새로움을 추구하던 선구자들이 모여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힘을 얻으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네트워크의 장으로서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이곳의 지원으로 조성된 미디어 아트 커뮤니티 INP(Interactivity & Practice)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중견 작가들 상당수가 거쳐갔을 정도다. 오늘날 미디어 아트가 가지는 다양성의 토대를 다진 중요한 토양이라 할 수 있다. 역시 같은 해 개관한 일주아트하우스는 아트센터 나비와 유사하게 그 당시 토대와 이해가 부족했던 미디어 아트 영역에 자원과 네트워크를 제공한 기관이었다. 디지털 문화에 대한 해석을 보여 주는 미디어 갤러리, 미디어 아트 관련 영상 자료와 간행물을 수집하여 열람할 수 있도록 조성한 아카이브, 그리고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웠던 미디어 장비에 대한 지원과 해당 기술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스튜디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2006년 폐관하기 전까지 미디어 아트의 공공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무게중심을 두었으며, 창작자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진행했다. 이곳에서 운영했던 신진 작가 발굴 및 지원 프로그램 ‘미디어 레이더스(Media Raiders)’는 역량 있는 작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다양한 지원 사업 < 드로잉 수트 02 > . 이인강(Inkang Lee, 李寅康). 2022. 착용형 외골격 기술을 이용한 원격 다중 연동 드로잉 수트, 퍼포먼스, 3채널 영상. 15분.< Drawing Suit 02 > . Inkang Lee. 2022. Interactive Drawing Performance, 3 Channel Video. 15min. 아마추어 권투 선수이기도 했던 이인강은 자신이 겪었던 부상(負傷) 경험에서 착안해 기계를 결합해 신체를 확장하는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문화재단이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예술 창작의 현주소를 제시하는 페스티벌 ‘언폴드엑스 2022(Unfold X 2022)’의 전시작. 동작 데이터를 코드화하여 아티스트와 참여자의 협업으로 새로운 드로잉을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 서울문화재단 아시아 문화 교류와 연계를 취지로 2015년 전라남도 광주에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문화창조원 창∙제작 센터라는 융복합 창작 기관을 운영 중이다. 이곳은 첨단 기술, 문화적 다양성, 아시아 전통을 창의적으로 연계 및 표현하는 문화예술 콘텐츠를 연구, 제작, 전시, 유통한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엔지니어, 그리고 연구자들이 각자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한편 ‘다빈치 아이디어 공모’는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예술 창작 공간 중 하나인 금천예술공장에서 2010년 시작되었다. 기술 기반 창작 아이디어 지원 사업으로, 다른 기관의 지원 사업들과 달리 산업화가 가능한 기술 아이디어를 대상으로 공모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2014년부터는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표방하며 해외 작가 초청을 비롯해 강연, 개막 행사, 워크숍 등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구성했다. 현재는 첨단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예술 창작의 현주소를 제시하기 위해 금천예술공장에 한정하지 않고 서울문화재단이 주축이 되어 ‘언폴드 엑스(Unfold X)’로 개편 운영하고 있으며, 융합 예술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백남준아트센터, 현대자동차의 제로원데이,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의 파라다이스 아트랩 등이 국내 미디어 아트 현장을 한층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중이다. 미디어 아트의 규모가 급격하게 커진 지금, 일시적 유행으로 지나가거나 키치한 창작물이 양산되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각에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술에 대해서 동시대적 의미와 가능성, 그리고 위험성 같은 본질적 문제를 탐색하는 일은 중요하다. 미디어 아트는 그러한 탐색 과정과 결과를 가시화하는 예술 활동으로서 여전히 의미 있다. 미디어 아트는 예술의 최전선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긴밀히 기능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일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Features 2023 AUTUMN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한국의 전통시장은 17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과거에는 특정 기간에만 열리는 시장이 일반적이었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현재와 같은 상설 시장이 보편적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길게는 수백 년에서 짧게는 수십 년까지 저마다의 역사와 특징을 지닌 채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전통시장을 소개한다. 국내 최대 수산물 전문 시장인 자갈치시장의 모습. 회를 비롯해 갖가지 수산물을 판매한다. 특히 이곳을 대표하는 먹거리인 곰장어 구이는 고추장으로 매콤하게 양념한 곰장어를 석쇠에 구워 먹는 음식으로, 큰 인기에 힘입어 전국의 포장마차로 확산되었다. ⓒ 한국관광공사(Korea Tourism Organization) 과거에는 관청 소재지, 수도, 지방 등 장터가 열리는 장소에 따라 각각의 시장을 가리키는 명칭이 달랐다. 또한 언제든 이용할 수 있었던 상설 시장과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렸던 정기 시장처럼 장이 열리는 시기에 따라서도 구분했다.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농경 사회에서는 물품에 대한 수요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상설 시장보다는 정기 시장이 더 일반적이었고, 정기 시장 중에서는 닷새마다 열리는 오일장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한편 대부분의 시장에서는 거래 품목에 제한이 없었지만 가축이나 곡물, 땔감, 약재 등 특정 상품만 거래하는 특수 시장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중 17세기에 개설된 대구(大邱) 약령시(藥令市)는 지금까지도 존속해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처음 나타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에는 신라 제21대 왕인 소지왕(炤知王)의 명령으로 490년 수도 경주(慶州)에 상설 시장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그즈음 또는 그 이전에 시장의 형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1392~1910) 시대 초기에는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시장도 부흥하기 시작했다.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는 정기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근대화를 거치면서 상설 시장이 전국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 말에는 국민 소득 증가의 여파로 상설 시장이 700개를 넘어서면서 정기 시장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Small Enterprise and Market Service)이 2022년도에 발표한 ‘전국 전통시장 현황’을 보면 상설 시장과 오일장을 합쳐 현재 약 1,400개의 전통시장이 존재한다. 한국의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으로 경쟁력을 잃었지만, 시설을 현대화하고 시대에 맞는 운영 방식을 도입하면서 활로를 모색 중이다. 남대문시장 서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남대문시장은 하루 평균 30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약 1만 개의 점포가 밀집해 있으며 식품, 잡화, 농수산물, 화훼, 공예품 등 1,700여 종에 달하는 상품이 판매된다. 사진은 남대문시장의 주방 용품 가게이다. ⓒ 서울관광재단(Seoul Tourism Organization) 과거에는 관청 소재지, 수도, 지방 등 장터가 열리는 장소에 따라 각각의 시장을 가리키는 명칭이 달랐다. 또한 언제든 이용할 수 있었던 상설 시장과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렸던 정기 시장처럼 장이 열리는 시기에 따라서도 구분했다.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농경 사회에서는 물품에 대한 수요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상설 시장보다는 정기 시장이 더 일반적이었고, 정기 시장 중에서는 닷새마다 열리는 오일장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한편 대부분의 시장에서는 거래 품목에 제한이 없었지만 가축이나 곡물, 땔감, 약재 등 특정 상품만 거래하는 특수 시장이 발달하기도 했다. 그중 17세기에 개설된 대구(大邱) 약령시(藥令市)는 지금까지도 존속해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처음 나타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에는 신라 제21대 왕인 소지왕(炤知王)의 명령으로 490년 수도 경주(慶州)에 상설 시장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그즈음 또는 그 이전에 시장의 형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1392~1910) 시대 초기에는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시장도 부흥하기 시작했다.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의하면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는 정기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근대화를 거치면서 상설 시장이 전국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 말에는 국민 소득 증가의 여파로 상설 시장이 700개를 넘어서면서 정기 시장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Small Enterprise and Market Service)이 2022년도에 발표한 ‘전국 전통시장 현황’을 보면 상설 시장과 오일장을 합쳐 현재 약 1,400개의 전통시장이 존재한다. 한국의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으로 경쟁력을 잃었지만, 시설을 현대화하고 시대에 맞는 운영 방식을 도입하면서 활로를 모색 중이다. 동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은 1990년대 들어 두타몰(Doota Mall), 밀리오레(Migliore) 등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점차 현대화되었으며, 2002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관광특구(觀光特區)로 지정했다. 이곳의 하루 유동 인구는 100만 명으로 추정한다. ⓒ 셔터스톡(Shutterstock) 일반적으로 종로5가부터 청계8가까지 약 2㎞ 구간에 위치한 전통시장과 대형 상가들을 한데 아울러 동대문시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18세기에 번성했던 배오개시장이 원류이다. 난전 상인들에 의해 개척된 배오개시장은 초기에는 상업용으로 재배된 채소들이 주로 거래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실향민들이 이 일대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구호물자로 옷을 만들어 팔면서 의류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초에는 섬유와 의류를 취급하는 평화시장이 개장했고, 1970년에는 원단부터 의류 부자재, 액세서리를 비롯해 혼수품을 판매하는 동대문종합시장이 문을 열었다. 2002년에는 ‘동대문패션타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전통시장과 현대적 쇼핑센터가 공존하는 패션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동묘(東廟) 벼룩시장 1980년대 상권이 형성된 동묘벼룩시장은 구제 옷과 골동품, 중고 가구, 고서(古書) 등 다양한 물품을 판매한다. 사진은 이곳에 자리한 장난감 가게로, 오래된 피규어와 게임기들이 가득해 복고 감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다. ⓒ 서울관광재단(Seoul Tourism Organization) 서울 숭인동(崇仁洞)에 위치한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삼국 시대의 장군인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이며, 보통 줄여서 ‘동묘’라고 말한다. 동묘 담장을 따라 형성된 벼룩시장에서는 의류, 신발, 골동품, 잡동사니 등 중고 물품이 거래된다. 과거에는 노년층이 주로 찾았지만, 최근 개성 있는 패션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방문하면서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이곳에 장터가 형성된 시기는 15~16세기로 채소를 팔던 소규모 시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과 같은 모습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고, 2000년대 초반 청계천 복원 공사로 터전을 잃은 인근 황학동(黃鶴洞) 벼룩시장 상인들이 동묘로 몰려들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통인(通仁)시장 서울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마을) 지역에 위치한 통인시장은 전형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으로 7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엽전으로 시장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재미있는 서비스를 운영해 젊은 층에 인기가 높다. ⓒ 한국관광공사(Korea Tourism Organization) 서울 경복궁 근처 주택가에 자리 잡은 통인시장은 1940년대 초 공설(公設) 시장에서 출발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 지역에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옛 공설 시장 주변에 상점과 노점들이 들어서면서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통인시장은 이른바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 유통되던 동전을 모티브로 엽전을 제작하여 이 엽전으로 시장 음식을 구매해 먹을 수 있도록 한 서비스이다. 또한 간장과 고춧가루 양념을 바른 떡을 기름에 볶아 먹는 ‘기름 떡볶이’도 이곳의 명물이다.  자갈치시장 우리나라 최대의 해양 물류 도시 부산(釜山)의 남쪽 해안가에 조성된 자갈치시장은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다. 국내 최대 수산물 전문 시장이기도 한 이곳에서는 각종 어패류와 활어류를 비롯하여 건어물류가 판매된다. 시장 안에는 싱싱한 횟감을 먹을 수 있는 횟집들도 조성되어 있다. 자갈치시장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과거에 어민들이 작은 고깃배를 띄워 잡은 생선을 팔기 위해 자갈이 깔려 있던 해변에 좌판을 벌였던 것이 시초로 알려졌다. 이 시장은 1920년대 초반 상설화되었고 1970년대에 정식 시장으로 개장했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자갈치시장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이기도 하다.  서문(西門)시장 현재 4,0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는 대구 서문시장은 오랫동안 원단(原緞) 시장으로 명성을 크게 얻은 곳이다. 최근에는 금, 토, 일 저녁 7시부터 늦은 밤까지 운영되는 야시장(Seomun Night Market)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대구광역시 중구청 대구(大邱)광역시의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 평양(平壤), 강경(江景)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큰 3대 시장 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매월 두 번 장이 서는 정기 시장 형태였으나, 1920년대 공설 시장으로 운영되면서 상설화되었다. 주단(紬緞)이나 포목(布木) 등 직물이 주로 거래되는 이곳은 국내 섬유 산업의 발전을 이끈 것으로도 평가된다. 근래에는 2016년 개장한 야시장이 유명하다. 총 350m 길이의 거리에 늘어선 80여 매대에서 다양한 먹거리와 상품을 판매해 먹을거리는 물론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TV 드라마 < 김비서가 왜 그럴까(What's Wrong with Secretary Kim, 金秘書爲何那樣) > (2018)에도 이곳의 야시장 풍경이 등장한다.

늘어나는 청년 상인들

Features 2023 AUTUMN

늘어나는 청년 상인들 창업을 하거나 가업을 잇는 방식으로 전통시장에 뛰어드는 젊은 상인들이 늘고 있다. 개성과 창의력을 앞세운 그들은 유튜브와 SNS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품질 제고와 디자인 고급화로 시장 상품의 브랜드화에 나서는 등 전통시장의 혁신을 주도하는 중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1913송정역시장은 11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2010년대 중반 지자체와 현대카드, 브랜드 컨설팅 기업 필로비블론 어소시에이츠가 힘을 합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했고 그 결과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재기발랄한 청년 상인들의 입점은 오래된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 현대카드, 필로비블론 어소시에이츠(Hyundai Card, Philobiblon Associates) 오랫동안 전통시장은 고령의 상인들과 중장년층 고객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젊은 소비층과 구매력이 큰 고객들에게 외면받던 전통시장에 전에 없던 활력이 감지된다. 창의력과 마케팅 능력을 겸비한 젊은 상인들이 늘어나고, 시장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콘텐츠까지 더해지면서 젊은 고객층이 유입되고 있다. 특히 젊은 상인들의 증가는 이들이 전통시장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시장을 단순히 생업의 장소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의 개성과 아이디어가 담긴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위기에 빠진 전통시장을 되살리려는 기존 상인들의 적극적 구애, 그리고 자신들만의 비전과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전통시장에서 젊은 상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되었다. 물론 도전에 나선 청년 상인 대다수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시장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며,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다. 활성화되는 청년몰 전주 남부시장의 상가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청년몰에는 서점, 소품 가게, 공방 등 기존 전통시장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침체된 전통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2012년 전국 최초로 조성한 이 청년몰은 현재까지도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전통시장에 청년몰을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 트윈키아(Twinkia) 전라북도 지역의 대표 전통시장인 전주 남부(南部)시장에는 청년들이 힘을 합쳐 삶의 터전을 일궈 가는 ‘청년몰’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청년 상인들을 위한 집합 상가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침체된 전통시장을 살려 보고자 마련했다. 2012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이곳 청년몰에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각자의 개성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음식점과 술집, 카페, 서점, 기념품 가게 등 다양한 업종의 상점 수십 개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청년 상인들은 공간 운영부터 청소까지 공동으로 관리한다. 청년몰 입구에 내걸린 ‘적당히 잘 벌고 아주 잘 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청년 상인들의 인식을 대변한다. 이곳 청년 상인들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넘치는 공간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청년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시장 분위기도 바뀌었다. 상인들이 이전과는 다른 서비스 마인드로 고객을 맞이하게 되었고, 배달ㆍ택배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최신 트렌드도 적극 반영했다. 여기다 필요한 원자재를 모두 시장 내에서 구입하고, 동료 상인들은 저렴한 가격에 원자재를 공급하며 상생을 도모한다. 남부시장 청년몰에서 성공한 젊은 상인들이 다른 곳에서 새롭게 점포를 열어 확장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기존 청년몰 상인들은 뒤이어 입점한 후배 상인들에게 멘토 역할도 자처한다. 자신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으로 장사 이상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통시장이 지역의 필수 관광 코스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이 있다. 강원도 속초에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두 동네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갯배’가 있다. 사람이 직접 와이어를 끌어당겨 이동하는 독특함 덕분에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주변에 있는 중앙시장 한쪽에는 ‘갯배st 청년몰’이 있다. 옛 수협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 공간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레트로 문화를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 속초 시민들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관광객들에게는 갯배 탑승과 함께 꼭 들러야 하는 관광 코스가 되었다. 이처럼 청년몰은 시장의 기능뿐 아니라 지역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가업을 잇는 젊은이들 충청남도 서산의 동부전통시장에는 7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노포가 있다. 3대째 이어 온 이 건어물 가게는 김과 감태를 파는 점포로, 현 주인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고향인 서산을 떠나 다른 직종에 종사하다가 가업을 잇게 되었다. 그는 가업의 생리를 파악하기 위해 생산부터 유통, 납품, 배달에 이르는 전 과정을 10여 년 동안 배웠다고 한다. 이 시장에는 이렇게 가업을 물려받은 청년들이 20여 명에 달한다. 닭집부터 수산물 가게, 정육점 등 업종도 다양하다. 가업을 계승하겠다는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시장에는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경기도 의정부 제일시장에도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거쳐 손자에게 이어진 반찬 가게가 있다. 50년 세월을 한자리만 지켜온 이 가게의 현 주인은 어머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가 점포를 물려받았다. 그 역시 자신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치를 비롯한 여러 반찬들을 직접 만들고 있다. 전통시장에서 가업을 잇는 청년들이 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지못해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전통에 자신들의 현대적 방식을 결합함으로써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다채로운 영업 방식 부산 망미중앙(望美中央)시장의 대현상회는 젊은 여성이 운영하는 방앗간이다. 이 가게는 새로운 판로 개척을 위해 최고의 품질을 고수하는 한편 고급스러운 패키지 디자인과 온라인 판매망을 통해 시장 제품을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했다. 중소기업중앙회(KBIZ) 제공 뚜렷한 가치관을 갖고 전통시장을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으로 인식하는 청년 상인들의 영업 방식도 다채롭다. 인터넷과 SNS에 능숙한 이들은 점포가 크고 번듯하지 않더라도 고객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는 일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고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로워 전통시장에 어울리는 업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상북도 상주의 중앙시장은 오랫동안 지역 경제의 중심지로 큰 역할을 해 왔지만, 해마다 감소하는 인구와 지역 소멸 위기가 겹치면서 존폐 위기에 있었다. 그러던 중 수년 전 열 명의 청년 상인들이 시장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플라워숍, 비건 디저트 카페, 풍선 스튜디오 등 전통시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업종을 선택했다. 업종뿐 아니라 운영 방식도 남달랐다. 예를 들어 이곳에 위치한 옷가게 ‘라운지주(Lounge_ju)’는 전문 쇼호스트가 라이브 방송을 한다. 상주의 역사성과 의미를 담은 굿즈를 비롯해 소품, 잡화뿐만 아니라 의뢰받은 타사 제품의 판매 대행까지 도맡고 있다. SNS와 라이브커머스, 유튜브 등 홍보 채널이 많아진 요즘, 청년들은 브이로그처럼 일상을 공유하는 친근한 콘텐츠를 앞세우기도 한다. 이 같은 영업 방식은 자신들의 성장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의 변화도 이끌어 내고 있다. 매력적인 선택지 강원도 정선(旌善)에 위치한 사북(舍北)시장 내 청년몰은 과거 탄광 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특색 있는 콘텐츠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사진은 청년몰에 입점해 있는 소품 가게 다희마켓의 인기 아이템인 연탄 모양 열쇠고리. ⓒ 다희마켓(Dahee Market) 동해안의 대표적 관광 도시 삼척(三陟)에 위치한 중앙시장의 청년몰도 근래 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 아기자기한 공방,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전통시장의 낡은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진은 슈슈 마카롱 가게에서 판매하는 귀여운 마카롱 선물 세트. ⓒ 슈슈 마카롱(Chou Chou Macaron) 독립적인 경제 활동과 창업에 관심이 높은 청년 세대들에게 전통시장은 이제 매력적인 선택지로 떠올랐다. 그들은 전통시장을 구심점 삼아 온라인 쇼핑몰이나 포털 사이트의 플랫폼을 이용해 지역 밖 고객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접근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고객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고,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통해 시너지 효과도 만들어 낸다. 여기에 임대료 감면과 창업 자금 융자, 교육 컨설팅 등 청년 상인들을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역시 큰 힘이 되고 있다. 물론 주차 시설 등 부족한 인프라와 중도 이탈 등 해결이 필요한 과제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의 유입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 전통시장의 지속적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청년 상인들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통해 젊어지고 있는 전통시장의 미래가 기대된다.

전통시장에서 탄생한 음식들

Features 2023 AUTUMN

전통시장에서 탄생한 음식들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 가운데 특정 전통시장을 기원으로 하는 것들이 여럿 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이 향토 음식들은 전국적 명성을 얻어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거듭나기도 하고, 고유명사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밀가루를 반죽해 길게 늘어뜨린 다음 두 가닥으로 꼬아서 기름에 튀겨 내는 꽈배기, 반죽한 밀가루를 둥글게 빚어 팥소를 넣고 튀기는 단팥 도넛은 전통시장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먹거리이다. ⓒ 셔터스톡(Shutterstock) 시장 음식은 일반 음식점에 비해 저렴하고 푸짐하다. 그런 이유로 전통시장은 퇴근길 직장인들이 하루의 회포를 풀기 위해 저녁 식사를 겸해 술 한잔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사진 맷 로저스, 언스플래시(Photo by Matt Rogers on Unsplash)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같은 상설 시장 이외에 3일 혹은 5일에 한 번 열리는 비상설 시장을 통상 오일장(五日場)이라 부른다. 조선 시대(1392~1910) 중엽 이후 크게 번성한 오일장은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장이 열리는 날에는 지역 특산물과 갖가지 먹거리가 시장을 가득 메운다. 팔 물건을 이고 지고 온 장사꾼들과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장날에는 활기가 넘쳐흐른다. 이런 장날의 흥취는 상설 시장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시장 나들이에 나선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잊히지 않는 추억 한 보따리를 챙기곤 한다. 오일장이든 상설 시장이든 전통시장의 백미는 역시 먹거리다. 장날에만 먹을 수 있거나, 그 시장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자동차와 랜선 덕분에 특정 시장을 벗어난 유명 먹거리들은 전국에 분점 형태로 터를 잡았다. 안동 구(舊)시장의 안동찜닭, 전주 남부(南部)시장의 전주콩나물국밥, 나주 오일장의 나주곰탕, 포항 북부(北部)시장의 물회 등 수많은 시장 먹거리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로 진출했다. 통닭 대신 찜닭 안동은 오래전부터 찜 요리가 발달했다. 16세기에 편찬된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안동 지역의 토착 음식을 정리한 조리서인데, 이 책에도 간장으로 양념하여 조리는 닭 요리가 등장한다. 안동 구시장의 상인들이 개발한 안동찜닭 역시 갖가지 재료를 간장에 조려 먹는 음식이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경상북도 안동은 조선 시대의 사설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이나 양반들의 고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다. 지금도 유교 제례 의식인 제사를 1년에 수십 번 지내는 종가가 여럿 있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안동을 대표했던 음식은 조리가 복잡하고 가짓수가 많은 제사 음식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이 지역을 상징하는 음식이 바뀌었다. 안동 구시장에서 탄생한 ‘안동찜닭’이 전국적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안동찜닭은 닭을 먹기 좋게 손질하여 감자, 당근, 양배추, 표고버섯 같은 여러 가지 채소와 당면을 양념에 조려 먹는 음식이다. 특히 양념장의 배합이 관건이다. 간장 한 컵, 물엿 반 컵, 설탕 1큰술, 다진 마늘 2작은술, 생강 1작은술, 적은 양의 후춧가루가 재료다. 밀가루옷을 한 번 입힌 양파, 대파도 맛을 내는 데 한몫한다. 각종 채소에서 우러나는 단맛은 안동찜닭을 달짝지근하면서도 그리 맵지 않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식감이 이 음식의 미덕이다. 채소 특유의 아삭함과 닭고기의 쫀득함, 감자와 당면의 부드러운 식감이 한데 어우러진다. 본래 안동 구시장에는 1970~80년대만 해도 닭을 기름에 튀긴 통닭집이 많았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상인들은 양념치킨이 유행하면서 통닭이 잘 팔리지 않자 자구책으로 찜닭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제는 전국에서 원조 안동찜닭의 맛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을 정도로 그 명성이 높아졌다. 상인들의 해장국 비빔밥과 더불어 전주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은 찬밥과 데친 콩나물에 뜨거운 육수를 부어서 말아 먹는 음식이다. 전주 남부시장의 콩나물국밥은 일종의 전채(前菜) 요리인 달걀 반숙이 딸려 나오는 게 특징이다. 달걀 반숙에 국밥 국물을 떠 넣고 김 가루를 섞어 먹는다. ⓒ 게티이미지코리아(gettyimagesKOREA) 경상북도에 안동찜닭이 있다면 전라북도에는 전주콩나물국밥이 있다. 전주콩나물국밥은 멸치를 우려낸 물에 콩나물을 삶아 국물을 만든다. 여기에 밥, 살짝 데친 후 간장 양념한 콩나물, 새우젓국을 넣어 끓여 먹는 음식이다. 국밥이 끓어오르면 볶은 김치, 깨소금, 고춧가루 등을 조금 넣어 마무리한다. 전주콩나물국밥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시기는 꽤 오래전이라고 알려졌다. 1926년 창간된 생활 잡지 「별건곤(別乾坤)」에전주콩나물국밥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국밥이 지금처럼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데는 전주 남부시장의 역할이 컸다. 1800년대에 이미 시장의 꼴을 갖췄던 이 시장은 1960년대에 건물을 재정비해 지금에 이른다. 전주는 과거 전라도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런 이유로 전주 남부시장에는 경상도, 충청도 심지어 제주도에서 올라온 상인들까지 모였다. 상인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주로 찾은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밥이었다. 특히 전주 남부시장 콩나물국밥에는 수란(水卵)이 따로 나왔다. 수란은 우리 전통 음식 중 하나로, 조리가 까다로워 귀한 음식으로 여겼다. 국자에 달걀을 깨 넣어 끓는 물에 잠기지 않을 정도로 넣고 달걀흰자만 익히는 음식이다. 전주 남부시장 말고는 수란이 나오는 곳은 드물다. 슴슴하고 담백한 맛과 한 그릇 다 비우면 땀이 맺힐 정도로 개운한 맛 때문에 대표적 해장국으로 손꼽힌다. 시간이 준 보양식 나주곰탕은 국물이 맑고 고기가 푸짐하다. 또한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밥을 데우는 토렴도 특징이다. 과거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던 나주는 오일장이 열리면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이들은 나주곰탕으로 허기를 달래고 기력을 보충했다. ⓒ 뉴스뱅크(NewsBank) 곰탕도 한국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음식이다. 기력이 예전만 못하거나 병치레할 때 우리는 버릇처럼 곰탕을 찾는다. 뜨끈한 곰탕 한 그릇이면 ‘힘이 솟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곰탕만큼 영양 만점인 음식도 없다. 조리 과정만 봐도 정성이 가득한 먹거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탕에 들어가는 소고기는 무와 함께 미리 익혀 양념해 둔다. 이것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대파 등 갖은 채소와 함께 다시 푹 끓인다. 6시간 넘게 끓이기에 영양소가 국물에 자연스럽게 배어난다. 곰탕은 우리나라에서 오일장이 최초로 선 전라남도 나주가 본고장이다. 장날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은 고픈 배를 채우려고 곰탕집의 문을 두드렸다. 곰탕에는 도축한 소의 자투리 부위인 머릿고기나 내장 등이 푸짐하게 들어갔고, 가격도 저렴했다. 나주 일대는 곡창 지대였기에 경작용 소를 키우는 집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축산업이 발달했고, 도축하고 남은 부위들은 곰탕의 재료가 됐다. 하지만 지금 나주에 가면 예전처럼 부산물만 가득 넣은 곰탕을 만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나주곰탕집들은 사골을 푹 고아 만든 기본 국물에 양지머리, 사태, 목살 등을 넣어 다시 끓여 국물을 만든다. 여기에 잘 익은 깍두기를 얹어 먹으면 어떤 보양식도 부럽지 않다. 이 음식의 이름이 곰탕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리법 때문이다. ‘고기나 뼈 등을 진액이 빠지도록 끓는 물에 푹 오래 삶다’는 뜻을 가진 ‘고다’란 단어에서 온 말이다. 오래 삶고 끓이는 그 시간이 곰탕의 요리사요, 비법인 셈이다. 어부의 소박한 한 끼 물회는 생선회에 채 썬 배와 채소를 넣고 고추장과 마늘, 설탕, 참기름 등 갖은양념을 섞어 비빈 후 얼음물을 넣어 말아 먹는 음식이다. 포항 북부시장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1980년대부터 이곳의 물회가 입소문이 나면서 별미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들었다. ⓒ 한국관광공사 경상북도 포항에 위치한 북부(北部)시장의 명물은 물회다. 본래 물회는 어부의 음식이었다. 먼바다로 고기잡이 나간 어부가 배에서 잡은 생선을 밥과 비벼 먹은 것이 유래다. 흠집이 나 팔 수 없는 생선을 추려 먹었던 뱃사람들의 밥상을 이젠 전국 어디에서든 받아 볼 수 있게 됐다. 어부의 소박한 한 끼를 최초로 상품화한 곳은 1960년대 초 문을 연 영남(嶺南)물회로 알려졌다. 이후 물회는 포항 일대로 퍼졌는데, 특히 1980년대에는 포항 북부시장에서 크게 번성했다. 도톰하게 썬 활어, 넉넉한 밥, 얇게 채 썬 오이를 한 그릇에 담아 고추장으로 비벼 먹다가 나중에는 맹물을 부어 먹게 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밥 대신 국수가 들어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흰 살 생선을 넣다가 고등어 같은 붉은 살 생선으로 재료를 바꾼 집들도 생겨났으며, 음식 위에 고소한 콩가루를 뿌리는 식당들도 있었다. 2000년대에는 맹물이 매실 진액이나 설탕, 배나 사과를 간 물, 식초 등을 배합한 육수로 변신했다. 이렇게 맛의 변주가 끊임없이 이어져 온 물회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여름철 별미가 됐다.

새로운 ‘시장 문화’를 즐기다

Features 2023 AUTUMN

새로운 ‘시장 문화’를 즐기다 소비자들이 구매할 식재료와 가공품을 둘러보면서 생산자이자 판매자인 농부들과 교감할 수 있는 도심형 파머스 마켓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사단법인 농부시장 마르쉐가 운영하는 마르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고히 뿌리를 내리며 생산자와 판매자, 소비자가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유형의 시장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23년 5월, 서울 국립극장 광장에서 열린 ‘아트 인 마르쉐(Art in Marché)’. 이 행사는 사단법인 농부시장 마르쉐가 지난 2021년부터 국립극장과 협업하여 진행해 왔다.   마르쉐@의 개장을 알리는 입간판과 상징물들. 마르쉐@에서는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재배된 농작물들이 주로 판매된다. 봄과 가을이 되면 매월 셋째 주 토요일마다 서울 장충동(獎忠洞)에 위치한 국립극장 본관 앞 광장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채소와 먹을거리를 구입한 이들은 장바구니를 안고 앉아 광장 중앙에 마련된 임시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도 즐긴다. 사단법인 농부시장 마르쉐가 국립극장과 협업하여 2021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아트 인 마르쉐(Art in Marché)’의 풍경이다. 농부시장 마르쉐는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 작가 등이 참여해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도심형 장터 ‘마르쉐@’를 운영한다. 국립극장뿐 아니라 이 단체의 설립 취지에 공감하는 다양한 브랜드들과 함께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한다. 201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을 기념해 협업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키운 농작물을 장터에 직접 들고나온 농부는 소비자와 경험을 공유하기에 바쁘고, 소비자는 장바구니를 채우며 연신 질문을 쏟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대화와 소통 마르쉐@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닌, 상인들과 소비자들의 즐거운 대화를 통해 일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꿈꾼다. “농부들이 아침에 수확한 채소를 그날 오후에 도심 한복판에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 있는 시장이죠. 그래서 그런지 조리 후 음식의 풍미도 다른 것 같아요. 또 덤으로 색다른 조리법이나 재료 보관법 같은 유용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요.” 종로구에 거주하는 한 주부의 얘기처럼 마르쉐@는 신선도 높은 물건을 거래한다는 이점 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다. 단순한 상거래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 시장에서는 직거래와 소통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깊은 유대와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다양한 플랫폼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농부의 손으로 소비자들에게 직접 농작물을 건넨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현장에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시장만의 특성이겠죠.” 농부시장 마르쉐의 한 관계자는 마르쉐@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 같은 형식의 시장이 비단 소비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건 아니다. 생산자 역시 자신이 정성껏 키운 농작물을 고객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큰 성취감을 얻기 때문이다. “저희는 토종 콩으로 만든 후무스나 비건 소스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데, 이런 곳이 아니라면 소비자와 만날 자리가 없기 때문에 매우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사에 참가한 한 농부의 얘기다. 공동체의 가치 ‘아트 인 마르쉐’에서 4인조 모던록 밴드 호아(HOA, 好我)의 공연을 즐기고 있는 방문객들. 아트 인 마르쉐는 마르쉐@와 국립극장이 함께하는 문화 장터이다. 마르쉐@는 2012년 10월 서울 혜화동(惠化洞)에서 시작됐다. 장터란 뜻을 가진 프랑스어 ‘마르쉐(marché)’에 장소 앞에 붙는 전치사 ‘at(@)’을 더해 지은 이름은 ‘언제 어디서든 열릴 수 있는 시장’이란 뜻이 담겼다. 당시 서울을 떠날 수 없어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꾸리고 있던 여성 3명이 귀농, 농장 직거래, 자연농 같은 주제로 수다를 떨다가 나온 아이디어가 이 시장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사람, 관계, 대화가 있는 공간을 꿈꾸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마르쉐@는 전국의 농부들이 자신의 밭과 부엌에서 정성껏 키우고 만든 먹거리들을 들고나와서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고 판매하는 꽤나 크고 활기찬 시장으로 성장했다. 출발지인 혜화동에서 열리는 장터는 ‘농부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이곳에는 새로운 시장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방문한다. 또한 주민들의 일상에 더욱 밀착하기 위해 기획한 ‘채소시장’은 서울 서교동(西橋洞)과 성수동(聖水洞)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 장소에 따라 시장의 분위기와 콘셉트가 달라지지만, 형형색색의 장바구니를 들고 모인 사람들이 자유롭고 진취적인 대화를 이어 가는 모습은 어디나 한결같다. 마르쉐@는 판매하는 물품을 직접 기르고 제작한 생산자가 참여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는 물품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단체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데는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한몫했다. ‘마르쉐 친구들’이라 불리는 운영진이 기획과 운영을 담당하는데, 이들은 시장의 운영뿐 아니라 다양한 기획을 통해 농업의 진정한 가치를 전달한다. 농작물이 어떻게 농법이나 토양, 주변의 동·식물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소개하는 간행물을 발간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농부들의 농가로 시민들이 여행을 떠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농부와 요리사, 시민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들도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다. “우리는 공동체 관계의 장이었던 시장의 본래 모습에 주목합니다. 삶의 토대를 이루는 먹거리를 통해 관계 맺고 대화하면서 단절되어 있던 삶을 다시 ‘연결’합니다. 우리의 다른 삶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농부시장 마르쉐는 2017년 지속가능성 보고서 『말이 씨앗이 되다』를 발간하면서 “마르쉐의 원동력은 ‘연결’이다. 삶의 중심인 먹거리, 먹거리를 둘러싼 생태계,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대화를 통해 도시와 농촌,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장을 펼친다”라고 밝혔다.   매력적인 프로그램과 디자인 마르쉐@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바구니를 비롯해 음료와 음식을 담을 용기까지 준비해 온다. 농부시장 마르쉐가 추구하는 가치는 일정 정도 공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쉐@를 즐겨 찾아오는 사람들은 장바구니는 물론이고, 음료와 음식을 담을 텀블러와 그릇까지 챙겨 온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마르쉐@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자신의 소비 행위가 생태계와 어떤 형태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도심형 파머스 마켓은 대규모 생산으로 인해 불거지는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만들어졌다.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비영리단체 로컬 퓨처스(Local Futures)를 만들어 활동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녀는 지역 경제와 사회의 회복을 위해 지역 중심 농업 체제의 복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소규모 농장의 다품종 재배가 권장되고 지역 안에서 소비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도 파머스 마켓을 낯설게 또는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규모가 작은 농가의 다양한 농작물은 여전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전통적 시장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파머스 마켓의 등장과 지속적 성장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형태의 파머스 마켓이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아직은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파머스 마켓의 확산과 지속성을 위해서는 농업 관련 다양한 주제들을 매력적인 프로그램과 디자인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마르쉐@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즐길 거리가 가득한 체험 공간

Features 2023 AUTUMN

즐길 거리가 가득한 체험 공간 백화점과 대형마트, 온라인 쇼핑몰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던 전통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 같은 변화가 옛 명성을 되찾은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통시장이 새롭고 흥미로운 장소로 인식되면서, 시장이 갖고 있던 정체성이 재정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5월, 서울 광장시장에 마련된 제주맥주의 팝업 스토어 가판대에서 방문객들이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팝업 스토어가 열린 약 3주 동안 5만 명의 방문객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 제주맥주 가판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직접 키운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저녁 장을 보려는 주부들의 분주한 발걸음, 늦은 저녁 값싼 안주에 하루의 회포를 푸는 중년 남성들…. 한국인들이 전통시장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제주맥주가 팝업 스토어 기간 동안 판매한 세트 메뉴. 시장 내 인기 먹거리들을 꼬치안주로 개발해 큰 인기를 끌었다. ⓒ 제주맥주 그런데 최근 변화가 포착되고 있다. 일례로 2023년 5월 제주맥주는 서울 예지동(禮智洞)에 위치한 광장(廣藏)시장에 팝업 스토어를 오픈했다. 제주맥주가 백화점이나 핫플레이스가 아닌, 오랜 시간 한복의 메카로 유명했던 광장시장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최근 제주맥주뿐만 아니라 국내외 굵직한 브랜드들이 전통시장에 콘셉트 스토어를 열거나 행사를 개최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브랜드들이 대형마트에 밀려 이제는 사양길에 접어든 전통시장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장년층의 근린 생활 시설이었던 시장이 젊은 세대의 놀이터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맛의 성지 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망원시장은 1970년대 조성된 전통시장이다. 최근 유동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인근의 한강공원, 복합문화공간인 문화비축기지(The Oil Tank Culture Park), 홍익대학교 앞 거리 등을 잇는 관광 벨트가 형성되었다. ⓒ 서울관광재단(Seoul Tourism Organization) 20~30대에게 전통시장은 미각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진다. 특히 광장시장은 낮술의 성지로 통한다. 녹두 빈대떡, 김밥, 찹쌀 꽈배기, 순대 등 메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지만, 주인장의 손맛이 뛰어난 노포에서는 훌륭한 술안주가 된다. 또한 이곳은 육회 골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육회 맛집이 많은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망원시장은 전통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먹거리 외에도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개발하여 미식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 서울관광재단(Seoul Tourism Organization)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望遠)역 근처에 있는 망원시장도 맛집들로 명성을 얻고 있다. 홍익대학교가 위치한 인근의 서교(西橋)동과 함께 젊은이들이 붐비는 지역이다 보니, 떡볶이나 만두처럼 전통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 외에도 유행을 타는 먹거리가 많은 편이다. 최근에는 고추튀김이 인기다. 고추튀김 또한 여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지만, 이곳의 고추튀김은 크기가 압도적이다. 그런가 하면 기존 호떡에 치킨용 양념을 뿌린 호떡이나 토치로 구운 마시멜로 안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넣은 마시멜로 아이스크림 등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춘 독특한 먹거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새로운 경험 공간 2022년 9월, 광장시장 초입에 문을 연 카페 어니언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세대에게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디자인 스튜디오 패브리커(Fabrikr)가 향수(鄕愁)를 콘셉트로 조성한 이 공간은 박스 테이프, 플라스틱 의자 등 시장 상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디자인에 활용했다. ⓒ 어니언(Onion) 젊은 세대에게 시장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시장 초입에 위치한 카페 어니언(onion)은 노천카페로 운영되는데, 종이 상자를 찢어 만든 메뉴판과 박스 테이프를 칭칭 감은 플라스틱 의자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60년 된 금은방을 개조해 만든 내부 공간에는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빈티지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어 시장 분위기와 겉돌지 않는다. 노상(路上)에서 떡볶이를 먹는 시장 감성으로 커피를 즐기는 것이다. 한약재 전문 시장인 경동시장은 그동안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주로 찾았지만, 2022년 12월 ‘스타벅스 경동 1960’이 오픈하면서 20~30대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 스타벅스 코리아(Starbucks coffee Korea Company) 서울 제기(祭基)동 경동(京東)시장의 ‘스타벅스 경동 1960’에서도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커피숍이 위치한 공간은 1960년대에 극장 용도로 지어졌으나, 폐관 이후에는 상인들이 오랫동안 창고로 사용했다. 약재상과 인삼 가게가 즐비한 특유의 분위기와 복고 감성이 가득한 커피숍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경동시장은 금세 20~30대가 한 번쯤은 방문해야 하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스타벅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하루 1,000명 이상, 주말에는 2,000명 이상의 손님들이 찾는다고 한다. 스타벅스 경동 1960을 가기 위해서는 1~2층에 자리한 ‘금성전파사 새로고침 센터’를 지나야 하는데, 이곳은 LG전자가 2022년 말 문을 연 브랜드 체험 공간으로 레트로 콘셉트로 꾸며져 있다. 과거에 LG전자가 출시했던 흑백 TV와 냉장고, 세탁기 등을 전시하고, 한쪽 벽면에는 LG LED 사이니지 월을 조성해 경동시장의 옛 모습과 계절별 테마 영상 등을 상영한다. 중장년 소비자에게는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2021년 10월 광장시장에 오픈한 식료품 잡화점 ‘365일장’의 전경. 광장시장의 유명한 음식들을 재해석한 밀키트를 비롯해 로컬 브랜드 상품을 판매한다. 전통시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롭고 색다른 경험을 제공해 광장시장의 명소로 떠올랐다. ⓒ LMNT & Allaround 한편 앞서 말한 광장시장에도 요사이 입소문이 돌고 있는 콘셉트 스토어가 있다. 2021년 10월 오픈한 식료품 잡화점 ‘365일장’이 그곳이다. 처음부터 젊은 소비자를 겨냥해 기획된 이 공간은 기존 전통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품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방문자들이 이곳에서 느끼는 색다른 즐거움은 전통시장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기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시대를 경험했고, 혹자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종말을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엔데믹에 접어들면서 오프라인은 더욱 활기를 띠는 모양새다. 특히 시장으로 젊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그 이유는 ‘경험’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 시장은 이미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다. 이들에게 시장은 관광·문화·엔터테인먼트가 결합된 놀이터로 기능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일상의 지루함을 돌파할 수 있는 열쇠가 비일상성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한 바 있다. 그동안 대형마트와 온라인 유통의 기세에 밀려 외면받았던 전통시장이 소비자들에게 비일상적 재미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면, 향후 전통시장에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각 전통시장만의 독특한 매력과 콘텐츠를 개발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사양길에 접어든 줄로만 알았던 전통시장은 이제 기회를 맞이했다.

시장에서 찾은 서사와 유토피아

Features 2023 AUTUMN

시장에서 찾은 서사와 유토피아 화가 최은숙(Choi Eun-sook, 崔恩淑)은 전통시장이라는 현재의 일상적 공간에 과거의 인물들을 중첩하는 작품들을 주로 선보인다. 작가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방식, 그리고 동양화의 특성을 통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다. 서울 신천동(新川洞)에 위치한 BGN갤러리에서 작가를 만났다. < 난 그들과 함께 있었다 > . 2012. 장지에 혼합 채색. 130 x 388 ㎝. 최은숙은 동양화의 기본 재료인 먹과 서양화의 주된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기존 동양화 기법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풍속화를 그린다. 그림 속 단골 소재는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이 담긴 전통시장이다. 오늘날의 전통시장 풍경과 조선 시대(1392~1910) 풍속화 속 인물들이 공존하는 그녀의 그림은 신비롭고 평안한 가상의 안식처로 우리를 인도한다.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동양화의 전통 재료인 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물의 양으로 농담을 조절하는 먹을 사용하면서 동양화가 서양의 수채화와는 다른 양태로 풍부한 색감과 깊이를 표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동양화과로 편입하게 되었고, 이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먹에 아크릴 물감을 접목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수용성 재료가 물과 만났을 때 나타나는 다채로운 색의 변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언제부터 전통시장에 관심을 가졌나? 어려서 엄마 심부름을 자주 했다. 귀찮아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심부름을 무척 좋아했다. 심부름 가서 전통시장을 구경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시장 골목을 따라 늘어선 파라솔만 봐도 가슴이 마구 뛰었고, 바구니에 담긴 알록달록한 과일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엄마는 분명 급한 마음에 두부를 사 오라고 시켰을 텐데, 나는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 했을 정도였다.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유년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최은숙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전통 시장을 즐겨 그리는데, 시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한 반응이다. 어린 시절 내가 시장에서 느꼈던 기분을 관람객들이 공감해 줄 때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한국인의 ‘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긴말할 것 없이 가까운 전통시장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본래 시장이란 곳이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지만, 특히 한국의 전통시장은 한국인 특유의 정을 체감하게 한다.   < 공존 > 시리즈에 조선의 풍속화 속 인물들을 겹쳐 놓은 의도가 궁금하다. 대학교 4학년 때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문득 눈앞의 풍경 위로 조선 시대 풍속화 속 인물들이 겹쳐 보이는 착시를 경험했다. 순간 이걸 한번 그림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때 시작한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어떤 작품들에선 과거의 인물을 컬러로, 현대의 인물을 흑백으로 표현했다. 한마디로시공을 초월한 형상들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다. 과거의 인물들은 조선 시대 화가인 신윤복(申潤福, 1758~?)과 김홍도(金弘道, 1745~?)의 풍속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자주 차용하는 편이다.  자세한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우선 그리고 싶은 전통시장을 방문해 사진을 찍은 뒤 후보정 작업을 통해 사진 위에 옛 풍속화 속 인물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 이야기 구성이 끝나면 장지(壯紙) 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한다. 단, 그림을 그리기 전 먹이 제멋대로 번지지 않도록 아교와 명반(明礬)을 물에 녹여 혼합한 수용액을 종이에 바르는 밑작업을 먼저 하는데, 작업에 앞서 종이의 질감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표면이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그림에 쓰인 재료는 무엇인가? 동양화 재료 중 수정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있다. 이것을 아교물과 섞어 종이에 바르면 표면이 반짝거리는 효과가 난다. 동양화는 서양화와 달리 먹, 돌가루 같은 자연 안료를 자주 사용한다.  그림 속 전통시장은 모두 실재하는 곳인가? < 심상(心想) 풍경 > . 2020. 장지에 혼합 채색. 53 x 45 ㎝. 그렇다. 하지만 작품 속 시장들이 실제 모습과 같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 심상풍경(心象風景) > 은 홍콩의 한 시장이 배경인데, 이 그림 속 과일 가게 위에 놓인 동상은 홍콩이 아닌 마카오 MGM호텔에 있는 황금 사자상이다. 이처럼 나는 실재를 기반으로 하되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의 요소들을 뒤섞어 새롭게 구성하곤 한다.  두께가 다른 종이를 중첩시켜 배경 일부를 흐릿하게 처리한 그림도 눈에 띈다. < 어느 가을날 그들과 함께 > . 2011. 장지에 혼합 채색. 30 x 120 ㎝. 풍속화 속 배경을 옮겨 그린 장지 위에 현재의 풍경을 그린 얇고 투명한 한지를 겹쳐 올려 신비한 느낌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장소를 마음대로 바꿔 그려도 전통시장을 좋아하는 관람객들은 그림에 등장하는 곳이 어디인지 다 알아보더라. 언젠가 한번은 시장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만 보고 “전라남도 구례(求禮)에 있는 시장이네” 하고 바로 알아맞히는 분도 계셨다.  다른 사람들보다 전통시장을 많이 방문했을 것 같다. < 공존의 시간들 > . 2011. 장지에 혼합 채색. 130 x 162 ㎝. 지난 10년 동안 시장 구경 위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는 전통시장이 정말 많다. 어디는 고추가 유명하고 어디는 한우가 유명한 식으로 특산물도 다양하고, 같은 시장이라도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서 늘 새로운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요즘 전통시장이 점차 사라지거나 옛 모습을 잃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그래서 그림으로 더 많이 남기고 싶다.  향후 계획이 있다면? 최근 신작을 발표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아 이를 지속해 보려고 한다. 사각의 큐브 안팎에 풍경과 인물을 배치해 내 안의 심상을 인위적인 세트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신작에서는 전통시장이라는 배경은 사라졌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다루는 건 변함없다.

고품격 문화 체험장이 된 궁궐

Features 2023 SUMMER

고품격 문화 체험장이 된 궁궐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궁궐 체험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기존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느끼지 못했던 이색적 매력을 전통문화에서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궁궐은 단지 역사가 남긴 유산을 넘어 동시대인들과 소통하며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창덕궁 달빛기행’ 참가자들이 대조전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2010년 시작한 궁궐 체험 프로그램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권역을 탐방할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중앙일보 북적이던 관람객들이 모두 퇴장하고 문이 굳게 닫히면, 어둠이 내린 궁궐에는 시간이 멈춘다. 그리고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이는 궁궐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낮에는 느낄 수 없는 이색적 풍경을 경험할 수 있기에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궁궐 야간 탐방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궁궐 야간 탐방은 한국문화재재단 홈페이지에서 사전 온라인 예매를 실시하는데, 불과 1~2분 만에 전 회차가 매진될 정도다. 이렇게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궁궐’과 ‘티케팅’이 합쳐진 ‘궁케팅’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다. 관람객들의 연령대는 30대 이하가 80%를 차지하며, 특히 덕수궁에서 진행되는 ‘밤의 석조전’은 10대와 20대 여성 비중이 매우 높다.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경험 젊은 세대가 궁궐 체험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제한적 기회와 대체 불가의 고품격 프로그램, 그리고 활발한 SNS 활동 등에 있다. 전 과정을 야외에서 진행해 공간 제약을 덜 받는 ‘창덕궁 달빛기행’의 연간 참여 가능 인원은 최대 9,000명이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2,560명이며 ‘밤의 석조전(石造殿)’은 그보다 적은 2,300여 명에 불과하다.이렇게 예매에 성공한 소수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투어 전 과정을 해설사가 안내한다. 궁궐의 유래와 전각에 대한 설명 등 세세하고 재미있는 해설이 곁들여진다. 관람객들에게 제공되는 공연과 궁중 문화 체험, 음식 등은 최고 수준이며 특히 음식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메뉴들이다.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평소에는 접근 불가능한 공간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체험 프로그램들의 모든 순간이 관람객들에 의해 SNS에 공유된다. 그리고 이를 접한 사람들이 다시 예매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난다. 궁궐 체험 프로그램 중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은 창덕궁 달빛기행이다. 2010년 시작한 이 행사는 보름달이 뜨는 창덕궁 후원(後苑)을 밤에 조용히 걸어 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초기에는 보름달이 뜨는 날을 전후로 한 달에 약 5일 내외로 진행됐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횟수를 늘렸고 현재는 대표적인 궁궐 행사가 되었다. 창덕궁 달빛기행 창덕궁 달빛기행은 궁궐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봄과 가을에 약 70일간 진행한다. 일몰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저녁 7시 전후에 행사를 시작한다. 이 시간이 되면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이 열리고, 25명이 한 조가 되어 6개 조가 시차를 두고 입장한다. 쾌적한 관람을 위해 하루에 최대 150명에게만 창덕궁의 내밀한 공간을 허락한다. 100분 남짓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야간 투어와 공연 관람으로 짜여졌다. 해설사가 동행하는 야간 투어는 창덕궁 내 가장 아름다운 공간인 후원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전각을 둘러보도록 구성됐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면 야간에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장소들을 탐방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투어 과정에서 조선 시대 왕과 왕비로 분장한 연극 배우들을 만나 기념 촬영을 하기도 한다. 또한 두 곳의 전각에서는 대금과 거문고, 아쟁 등의 전통 악기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 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연경당(演慶堂)에 도착하면 전통차와 다과를 체험하면서 공연을 관람한다. 이 공연은 두세 종류의 궁중 무용과 악기 연주 그리고 궁중 성악으로 이뤄진다. 이 공연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연경당이 실제로 조선 시대에 공연이 펼쳐졌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창덕궁 달빛기행의 모든 일정이 끝난다. 한밤에 누리는 호사 경복궁 별빛야행은 2016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봄가을에 40일간 실시하며 회당 32명, 하루 2회 실시한다. 가장 큰 특징은 궁궐 전각 안에서 식사를 하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점이다. 경복궁 외소주방(外燒廚房)에서 식사를 하는데, 이곳은 조선 시대에 궁중 연희 음식을 만들던 주방이었다. 궁중 음식을 보급하는 ‘한국의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을 외소주방에서 4단 유기(鍮器) 도시락에 담아 제공한다. 궁궐에 앉아 임금님 수라상을 앞에 두고 전통 악기 연주에 취하는 밤은 1년에 단 2,560명에게만 허락된 시간이다. 식사를 마치면 약 60분에 걸쳐 경복궁 북측 권역을 투어한다. 야간 비공개 지역을 관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덕수궁 밤의 석조전(石造殿)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비교적 최근인 지난 2021년에 시작됐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석조전이 핫플레이스로 인식되면서 여타 프로그램들보다 인기가 더 높다. 덕수궁은 대한제국(1897~1910)의 황궁으로 전통적 전각과 서양식 건축물이 혼재돼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밤의 석조전은 1910년에 완공된 서양식 전각인 석조전이 주요 무대다. 다른 야간 탐방처럼 봄가을에 진행하며, 48일간 회당 16명으로 하루 3회 실시한다. 석조전 또한 밤에는 개방하지 않는 공간으로,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특별 공개한다. 밤의 석조전은 해설사와 함께하는 석조전 전시 관람, 2층 테라스 임시 카페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즐기는 커피 타임, 그리고 대한제국 배경의 뮤지컬 넘버 공연으로 구성된다. 특히 서울 야경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 테라스는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 일상의 문화 공간이 된 궁궐 참가자들이 경복궁 향원정에서 명상과 아로마테라피를 체험하는 모습. 한국문화재재단이 진행하는 ‘심쿵쉼궁’은 궁궐을 휴식과 치유, 사색의 공간으로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야간 시간대에 궁궐 투어가 인기라면 낮 시간대에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이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행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콘텐츠로 기획됐다. 조선 시대 수문장은 궁성문의 개폐를 관장하며 궁성을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역사•의례•군사•복식•의장물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문헌과 사료를 찾고 유물을 확인하는 과정을 수차례 거치면서 재현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 결과 조선 전기 궁궐 호위 문화를 집대성한 행사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거나 유물이 발견되면 수시로 행사에 반영하여 개선하는 중이다. 이 의식은 경복궁 휴궁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실시한다. 임금이나 군대가 행진할 때 연주하는 취타(吹打)를 포함해 100여 명으로 구성된 군사들이 수문장의 지휘 아래 교대 의식을 진행한다. 매일 오전 9시 35분과 오후 1시 35분에는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교대 의식을 볼 수 있다. 교대 의식을 마친 수문군은 광화문에 배치되어 관람객들과 사진 촬영을 한다. 매일 실시하는 개방 행사이기 때문에 별도의 예매 절차가 필요 없고 언제라도 경복궁을 방문하면 궁을 호위하는 수문장들을 만나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2002년 시작된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은 조선 시대 왕실 호위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통 문화 행사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이 외에도 전통과 현대 장르를 융합한 ‘고궁음악회’, 궁중 음악과 발레의 컬레버래이션 공연, 왕이 원로 대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던 과거 연희를 재현한 창경궁 ‘야연(夜宴)’, 궁중 문화 종합 예술 축제인 ‘궁중문화축전’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궁궐은 단순한 역사의 현장이 아닌, 공연장이자 전시장이며 의례를 재현하는 거대한 무대로 일상에 녹아들고 있다. 조진영(Cho Jin-young, 曺珍榮)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활용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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