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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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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1 AUTUMN 203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작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 통계청에 의하면 2019년 11월 현재 전국 1천 813만 호의 주택 가운데 62.3 퍼센트가 아파트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대표적 주거 형태를 이루는 아파트에는 입주민의 안전을 돌보고, 분쟁이나 민원을 해결하며 건물을 관리해주는 등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관리소 직원들이 있다. 이상용(李相龍) 씨는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510세대로 구성된 아파트 단지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급한 민원이 들어와 인터뷰 시간을 30분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오후 네 시 반에 관리사무소에 들어섰다. 단지 옆 신축 건물 공사로 인해 소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급한 민원이었고, 회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언쟁이 오가나 했더니 잠시 후 입주자 대표와 공사 현장 담당자 등이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마주한 이상용 씨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분들이 저를 찾아오시니, 늘 이래요.” 민원을 해결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것은 관리소장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이상용씨는 2009년 육군 예비역 대령으로 전역한 뒤 지금은 서울 마포구 강변힐스테이트 아파트 관리소장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양한 민원 “이야기가 잘 되면 괜찮은데 가끔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도 있죠. 지난봄에는 109동 사는 분이 민원을 계속 넣었는데, 그 동이 가라앉고 있다는 거예요. 모든 세대가 냉장고를 같은 자리에 놓아두고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그 무게 때문에 침하한다, 베란다 뒤에 균열도 보인다고 주장해요.” “우리 아파트는 3년에 한 번씩 정밀 점검을 받고 있고, 2019년에도 점검을 받았지만 문제가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자 결국 입주자 대표회의에 안건을 올려서 세 군데 전문업체한테 문의를 했다. 결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상용씨는 “내년에 또 정밀 점검을 하니 이상이 있으면 조치하겠다”고 겨우 설득에 성공했다. “아무리 황당한 민원이어도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반드시 처리한 다음 결과를 이야기해주어야 해요.” 가장 빈번하고 골치 아픈 민원은 소음이다. 몇 주 전, 위층에서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밤 열 두 시쯤 들어왔다. 당직하던 경비원이 위층에 인터폰을 넣어서 사정을 말했지만, 밤 늦게 연락을 했다고 한참 욕을 먹었다. 이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보고 받은 이상용 씨는 무척 속이 상했다. “그분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경비원은 무슨 죄예요. 층간소음의 경우에는 솔직히 방법이 없을 때가 많아요. 바로 위층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기도 해요.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면 나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조심스럽게 말하라고 직원들을 교육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드나드는 차소리가 시끄러우니 해결해달라는 주민도 있었다. 공용시설은 경비용역업체가 관리하고 개인시설은 입주자 각자가 관리해야 하는데,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있고 입주자 입장에서는 다 공용시설이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상용 씨는 경비원과 미화원을 포함해 총 열 세명의 직원들을 통솔한다. 그는 입주민은 물론 직원들과의 소통 역시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반복적이면서도 규칙적이다. 아파트 단지 전체에 안내방송을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안내 방송이 더 잦아졌다. 입주민들은 매일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상용씨를 찾아온다. 그는 민원을 꼼꼼하게 듣고, 입주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도우려 노력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하루 종일 조용할 틈이 없다. 직업군인에서 관리소장으로 이상용 씨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딴 것은 2011년, 지금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온 것은 2019년이었다. 주택관리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500세대 미만의 주택에서 3년 이상 경험을 쌓아야 500세대 이상주택의 관리를 맡을 수 있다. 그는 2012년에 250세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자격증 시험이 없었다. 아는 사람에게 맡겨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다. 지금은 해마다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이 있고 1,500~2,000명이 합격한다. 자격증을 딴다고 모두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직이라서 적성이 맞아야 한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대처를 잘못하면 쉽게 감정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의 좋은 점은 정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두 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나이가 많다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입주자들이 싫어할 수 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많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기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지만 뭘 바꾸려고 하지 않죠. 장단점이 있어요.” 주택관리사가 되기 전에 이상용 씨는 32년 간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2009년 6월 중령으로 제대해 지인이 하는 군 관련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 그러다 한 선배가 적성에 맞을 거라며 권유해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일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지휘관으로 근무할 때 원칙 중 하나가‘1% 지시, 99퍼센트 확인’이라는 것이었다. ‘지시는 짧게 하고 확인은 철저하게 하라’는 군대의 지휘 체계가 관리 업무에도 잘 적용된다.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그의 하루는 8시 5분에 시작된다. 오전 6시에 기상했던 군대 시절의 습관 때문에 5시면 눈이 떠진다. “집에서 전철을 타고 여기 오면 정확하게 8시 5분이에요. 월, 화, 금요일에는 사무소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우선 단지 안을 한 바퀴 둘러봐요. 월요일에는 주말 동안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화요일에는 분리수거 업체가 오는 날이니까 수거 후 청소 상태 를 확인하고, 금요일에는 주말 동안 쉴 테니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죠.” 이해심과 참을성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는지 묻자 “없다고는 못하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이 힘들기 보다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해달라고 하는 입주민은 으레 감정이 나빠지면 “우리가 봉급 주는데”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비애감이 든다. 이상용 씨는 그럴 때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다스린다. 서로 마음이 풀린 다음에 이야기하면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 일하는 아파트에는 심한 갑질이 없다. 대신 자랑할 것이 많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과일 행상이 온다. 그 행상에게 매주 경비원 6명, 미화원 5명의 과일 값 6만원을 지불하는 입주민이 있다. “1년은 52주인데 작년에 그 행상이 51번 왔어요. 1년이면 삼백만원이 넘죠.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하신 일이라는데, 처음에는 부모님이 하다가 지금은 따님이 한대요.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더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하세요. 우리가 청소를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으면 빵이나 음료수를 사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6시 50분 전철로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TV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저녁 10시 반에는 잠자리에 든다. 주말에는 맛있는 걸 먹으러 가거나 바둑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서울 외곽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텃밭을 가꾼다. 이상용 씨는 뭔가를 돌보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지금도 텃밭에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관리소장에게 필요한 적성으로 그는 이해심과 참을성을 꼽았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니 이해하고 배려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작년에는 아파트 정문 쪽이 휑해 보여서 꽃을 심기로 했어요. 같이 꽃을 심을 분들은 나오시라고 방송을 했더니 아이들 데리고 여러 분이 오셨어요. 함께 꽃을 심고 나서 광장에서 막걸리 한잔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로사항이 있어도 얘기 못하는 분도 많거든요. 그럴 때 듣는 거죠. 순찰을 돌고 있으면 때로는 그에게 다가와 “소장님, 그때 고마웠어요, 도움을 받았어요, 수고하셨어요”라고 말해 주는 주민이 있다. “이분들이 내가 한 일을 알아주는구나. 이 일을 하기를 잘했구나.”그가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그의 일상과, 마을을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배려에 의해 오늘도 차곡차곡 돌아가고 있다. 고즈넉한 한강변에 자리한 이 아파트 단지는 510세대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지만, 주위에 다른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건축된 서울 도심 서쪽 주거지역의 일부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하지권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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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1 SUMMER 501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추억을 선물하는 가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젊은층에게는 새로움을 안겨주는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옛 도심 종로의 레트로 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이며 작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893~1982)가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반면 어려운 형식의 구조는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키고 흥미와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은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것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꿈꾸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기대한다. 레트로스펙트(retrospect), 또는 요즘 ‘레트로’라고 줄여서 쓰이는 말은 회상, 추억이라는 의미지만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 등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본뜨려는 성향’이란 의미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새것은 헌것이 되고 헌것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움이 된다. 노년은 젊음을 그리워하고 젊음은 노년이 누렸던 것을 동경한다. 역시 인간은 복잡하다. 레트로 감성이 한껏 풍기는 턴테이블이 돌고 LP판 위에 스타일러스를 올리는 순간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서울레코드를 채운다. 요즘처럼 깨끗한 음질은 아니지만 턴테이블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사운드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황승수 대표 역시 오프라인 레코드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다만 세대를 뛰어넘어 서울레코드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클래식, 재즈, 국악, 트로트, 로큰롤, 올드팝, 뮤지컬, OST, K-팝 등 장르별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새롭게 주목받는 LP 제2의 성황기를 맞은 서울레코드는 항상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추억에 젖고 누군가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매력에 빠진다. 1980년대 CD가 보급되기 전까지 비닐은 20세기 음악 재생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CD와 MP3, 음원 생산으로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비닐이 주는 따뜻한 감성을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서울레코드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적으로 꾸며졌지만, 단층짜리 옛 건물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로3가 거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에 있는 ‘서울레코드’는 낯설고도 익숙하고, 오래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이다. 1976년에 문을 열었고 지금의 황승수(黃昇洙) 대표는 이곳의 네 번째 주인이다. LP와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바뀌고, DVD가 반짝 성황을 누리다가 사라진 이후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음반업계의 전망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 와중에 45년을 한자리에서 버틴 40평 남짓한 레코드가게는 그 어떤 레코드보다 희귀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사장님이 2000년까지 하다가 mp3가 나오면서 가격경쟁이 안 돼서 정리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음반은 소유하는 것보다 듣기 위한 게 목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더 이상 앨범을 사지 않을 것 같았죠. 당시 직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인수하면서 두 번째 사장님이 됐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한류가 시작되면서 외국손님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운영을 하다가 세 번째 사장님에게 가게를 넘겼어요. 두 번째 사장님 밑에 있던 부장님이 가게를 계속 운영했는데 그때 제가 직원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3년째 되었을 때 세 번째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갑자기 인수받게 되었어요.” 2015년의 일이었고 그는 40대 초반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잘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형이 비디오 유통업체에 있었어요. 비디오, CD, DVD 같은 것들은 유통구조가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전축 시스템 가져오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10대 때는 형을 따라 레코드 회사에도 가봤어요. 그러면서 이쪽 세계를 잘 알게 되었어요.” 처음 직원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손님의 연령대가 꽤 높았다. 가게 뒤에는 세운상가(1968년 완공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길 건너에는 종묘(宗廟 1394년에 착공한,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옆에는 탑골공원(塔골公園 1897년,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의 설계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젊은 세대들은 보기 힘든 동네이기도 하다. LP를 찾는 40, 50대가 그나마 젊은 쪽이었고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노인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힙(hip)’하다는 의미에서 ‘힙지로’로 불리게 된 을지로, 새로운 핫스팟으로 떠오른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음반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LP가 신선한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추억의 공유 “우리 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 게 중요했어요. 지금은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으니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음반업계는 소멸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제 듣는 것보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스마트폰 화면에 음반 재킷 하나 떠 있는 걸로 성이 안 차는 거죠. 그래서 LP를 사는 게 아닐까요? 젊은 사람들이 와서 LP에 바늘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랐어요. 조금 더 깨끗한 소리를 위해 CD가 나온 거잖아요. 세상은 이렇게도 바뀌고 저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어요.” 이제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이곳을 찾는다. 딸들이 아버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려와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고른다. “어릴 때 듣고 좋아하던 곡인데, 가사도 조금 알고 멜로디도 기억하는데 제목은 모른다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혼자 사시는 분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찾아드리면 감동하시고, 그걸 보면 저도 기분이 좋죠.” 1960년대에 유명세를 떨쳤던 밴드의 곡이 혹시 있느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곡을 찾아서 틀었는데 놀랍게도 노래를 부른 사람과 손님의 목소리가 흡사했다. 혹시 본인이 부른 곡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음반을 찾아다녀도 없어서 듣고 싶어도 못 들었던 곡이라 했다.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던 분인데, 집안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니고 영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했다는 손님도 있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밥을 굶고 영화를 봤다는 거예요.” 길고도 복잡한 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님으로 왔다가 추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온기를 품고 돌아가고, 사탕이나 귤, 음료수 같은 걸 들고 다시 찾아와 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배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서울레코드의 셔터가 올라간다. 문은 아내가 열고 황대표는 영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나와서 교대한다. 저녁 일곱 시 반에 문을 닫는데, 장사가 안 되는 날은 더 늦게까지 열어두기도 한다. 저녁 일곱 시 반 이후, 셔터가 내려진 레코드가게 앞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내일의 신청곡’ 시간이다. “가게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신청곡을 써서 넣으면 틀어드려요.” 하루 동안 들어온 신청곡을 비롯해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더해서 파일을 만들고, 가게 문을 닫은 후 틀어 놓는다. 음악은 밤 열두 시까지 흘러나온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한다. 어둠이 내린 밤의 거리,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삶은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 놀거리를 찾는 거예요. 일주일에 일요일 하루 쉬는데, 그날도 음악 듣고 오디오 만지작거리고 영화 보고 그래요. 어떻게 보면 취미를 다 여기 가져다놓은 거예요. 아내가 그래요. ‘너 놀려고 이거 차린 거지?’”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사장님의 놀이터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한마디 거든다. “처음부터 크게 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저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여기서 놀고 손님들은 찾던 음악을 구해가고요.” 어쩌면 손님들은 물건이 아니라 추억을 구하러 오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세상에서 익숙한 것을 구하고, 익숙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흘러간다. 그 흐름 안에 아름답고 정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Ahn Hong-beom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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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1 SPRING 612

마음을 다려 드립니다 새하얗게 피어 오르는 김 사이를 요령 있게 움직이는 투박한 손. 김이 걷히면 구깃하던 옷은 어느새 반듯해져 있다. 온기를 머금은 깨끗한 옷을 손님에게 건네는 오기녕(吳基寧) 씨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진다. 서울의 동네 한켠을 20년 간 지켜 온 작은 세탁소는 오늘도 따뜻한 김이 가득하다. 서울시 마포구 신수로 골목의 작은 세탁소 ‘현대 크리닝’을 운영하는 오기녕 씨는 8평 남짓한 공간에서 하루 열 네 시간을 일한다. 집집마다 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는 봄철이 그에게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쌓여 있을 때,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Haruki Murakami 村上春樹)가 말했다. 나라마다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덴마크에서는 ‘휘게(hygge)’, 스웨덴에서는 ‘라곰(lagom)’, 프랑스에서는 ‘오캄(au calme)’, 요즘 한국에서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인‘소확행(小確幸)’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널리 쓰인다. 동네 골목에서 일 년 내내 하얀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세탁소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따뜻함을 주는 장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울시 마포구 신수로의 골목 세탁소‘현대크리닝’을 운영하는 오기녕 씨의 하루는 오전 8시부터 시작된다. “출근하면 우선 세탁물을 정리해서 분류하고 종류별로 세탁합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수선 들어온 옷을 모아서 수선해요. 그 후에 다림질이 시작되죠. 밤 9시에는 배달을 나가야 해요. 근처 아파트 다섯 단지 정도 돌고 오면 밤 10시쯤 됩니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은 봄이다. 집집마다 봄옷을 꺼내고 겨울옷을 정리하면서 세탁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봄철에는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없다.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다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한다. 요즘은 일감도 많이 줄었다. 많을 때는 하루 40집에 배달을 했는데 지금은 많아봤자 10집 정도다. 그렇다 해도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주일에 6일을 줄곧 서서 일 해야 한다. 한쪽 팔로 다림질을 하다보니 팔꿈치가 변형되기도 했다. 꾸준히 운동을 해도 완치 없는 직업병이다. 오기녕 씨는 모든 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세탁물을 손질한다. 대부분 오래된 단골들이 찾는 그의 세탁소는 20년 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리를 잡기까지 그는 이십 대 초반에 옷과 인연을 맺었다. 옷 만드는 공장에서 빗질을 하고 실밥을 뜯으며 일을 배웠다. 그곳에서 재단사 업무까지 배운 뒤, 서른 살 무렵 공장을 차렸다. 5년 정도 운영하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만났다. “주문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일주일에 이틀, 사흘밖에 일을 못하니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이 공장을 접었습니다. 막내동생이 용인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어서 가봤다가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를 먹어도 체력이 닿는 데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니 먹고살 수 있겠구나 싶었죠.” 마침 아내의 친구가 세탁소를 운영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일을 해주며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3개월 간 보수 없이 종일 기계 다루는 법, 일하는 방식 등을 배웠다. 세탁 방법은 원단에 따라 달랐다. 공장에서 옷을 만들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세탁소를 차렸지만 안정된 운영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첫 번째 장소는 구로동이었다. 처음이라 기술이 부족해서 힘은 들고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며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다. 몇 달 못 버티고 자리를 옮겼다. 새로 지은 아파트 상가였다. 당시 대부분 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세탁소 하나가 들어서면 다른 세탁소는 못 들어간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1,300세대의 세탁물이 그의 세탁소로 몰려왔다. 이번에는 일이 너무 많아 반 년 만에 손을 들었다. 욕심 부리지 말자 생각하고 다시 터를 잡은 곳이 지금의 마포구 신수로다. “제 고향이 마포예요. 처음 세탁소 차리려고 했을 때에는 이 곳에 아파트가 없었어요. 두 번 째 가게 팔고 와보니 주변에 아파트도 많이 생겼고 마침 빈 가게가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이 곳에 터를 잡은지 20년쯤 되었네요.” 노동의 양은 줄었지만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함께하던 아내가 건강악화로 쉬게 되면서 혼자 가게를 떠맡았다. 세탁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각종 기계와 미싱 등이 빼곡하게 들어찬 가게는 8평 남짓. 잠시 짬이 나도 몸 눕힐 공간이 부족해 의자를 붙여두고 쉰다. 다양한 세탁 프랜차이즈와 첨단 어플리케이션이 쏟아지고 있지만, 오기녕 씨는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한다. 매일 손수 세탁물에 붙일 태그를 정리하고 체크한다. 변화하는 환경 시대가 바뀌며 세탁업도 예전 같지 않아졌다. 젊은 세대들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탁앱을 사용하거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랜차이즈에 옷을 맡긴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줄고 재택근무가 많아지면서 세탁물의 양도 더욱 줄었다. 힘들고 고된 일이라 배우겠다는 사람도 갈수록 찾기 힘들다. 동네 세탁소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주인이 나이가 들어 더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그대로 문을 닫는 것이다. 하지만 오기녕 씨는 손님 한명한명에게 최선을 다하는 장인(匠人)이다. 그의 가게를 찾는 고객의 대부분은 40대, 50대의 주부들이고 오래된 단골들이다. 새 옷처럼 깨끗해진 옷을 받아들고 솔직하게 기뻐하고, 어떤 이들은 빵이나 과일을 건네며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꺼려지는 손님도 있다. 없었던 얼룩을 묻혔다며 누명을 씌우는 사람도 있고, 다짜고짜 하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깔보듯이, 천대하듯이 말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일을 하니까 험하게 말 해도 된다는 식이죠. 그런 사람이 제일 힘들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안 오셔도 괜찮다고 분명하게 얘기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내가 스트레스 받거든요.” 오래 일하다 보니 기억에 남는 손님도 많다. 한 번은 40대 남자 손님이 망태기에 속옷부터 셔츠, 바지, 수건까지 모두 쑤셔 넣어 주기적으로 가져왔다. 젖은 수건까지 넣으니 당연히 악취도 심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게가 잠깐 쉴 때 다른 세탁소로 가져갔더니 너무 비싸게 받더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알았습니까?”그가 한 대답이었다. 그는 이제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배워 알고 있다. 나쁜 일은 마음에 두고 계속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나쁜 손님은 안 받으면 되고, 좋은 손님은 늘 주위에 있으니 괜찮다. 좋은 손님에게는 더 잘해주지 못하는 게 항상 미안함으로 남는다. 어려운 상황이 끝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손님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는 뜨겁고 무거운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노력하는 장인 하루 종일 옷과 씨름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유행에도 민감해지기 마련이다. 새로 산 옷을 수선하러 들고 오는 손님이 많으면‘요즘은 이런 스타일이 유행이구나’하고 느낀다. 소재에 따라 세탁법도 변해야 하니 그에 따른 공부도 필수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에는 아울렛을 돌아보며 옷을 구경한다. 옷의 상태나 가격을 직접 보고 알아두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한 옷들을 많이 입었는데, 요즘엔 스포츠웨어 같은 기능성 옷이 많다. 옷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단시간 안에, 중성세제만으로 세탁해야 한다. 요령을 모르면 옷이 망가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근무인데 일요일에 옷을 보러 간다니. 다른 취미는 없을까? 오 씨는 활짝 웃으며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자전거도로를 따라 국토종주를 하고 있어요. 코스마다 부스가 있어서, 통과하면 수첩에 스탬프를 찍어줘요. 한동안 일요일마다 갔어요. 새벽에 가서 자전거로 달리고, 버스 타고 돌아오고. 긴 코스를 조금씩 끊어서 달리는 거죠. 이제 딱 한 군데 남았어요. 쉬는 날 운동도 하고 힐링도 할 수 있고, 그게 제 낙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끝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손님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는 뜨겁고 무거운 다리미를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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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0 WINTER 413

달인의 담백한 행복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에게 싸고 맛난 길거리 군것질은 그 자체가 일상의 작은 위로다. 올해로 43년째 넉넉지 못한 이웃들이 즐겨 찾는 전통 시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땀흘리며 서민 간식 꽈배기를 튀겨 팔고 있는 임춘식(林春植) 씨의 매일매일은 자신이 만드는 소박한 과자만큼이나 담백하다. 서울 도심의 한켠을 지키고 서 있는 독립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모금 캠페인을 통해 1897년에 건립되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국민의 뜻을 담아 세운 소박한 모습의 이 근대 유적은 조선(1392~1910)이 자주 국가임을 표방했다. 초기 서양식 근대 건축물의 하나이기도 한 이 문을 바라보고 있는 영천(靈泉)시장은 애초에 규모가 꽤 컸으나, 주변 지역의 재개발과 고가도로 건설 등으로 많이 축소되었다. 북적이던 오래된 재래시장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정겨운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알고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 시장에는 소문난 맛집이 여러 곳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집은 ‘달인꽈배기’다. 시장 어귀 골목을 향해 시원하게 트인 가게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고 다음 손님을 부르는 씩씩한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받아든 꽈배기를 한입 베어문 사람들의 미소가 구경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환하게 번진다. 꽈배기는 반죽한 밀가루를 가늘고 길게 늘여 두 가닥으로 꺾은 다음, 새끼줄을 꼬듯이 꼬아 식용유에 튀겨낸 과자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 한족의 오랜 전통 과자 ‘마화(麻花, mahua)’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텐진 지역의 특산물인 마화는 다소 딱딱한 질감인데, 연변 조선족들이 술이나 효모로 발효시켜 부드럽게 만들어 이를 ‘타래떡’이라 불렀다. 한국의 꽈배기는 여기에 설탕을 뿌려 단맛을 강조했다. 배배 꼬인 달콤한 꽈배기를 손가락으로 풀어 먹기도 하고, 통째로 베어 먹는 재미가 있다. 열세 살부터 시작한 노동 달인꽈배기의 직원은 다섯 명이다. 사장인 임춘식 씨와 그의 아내, 아들과 며느리, 그의 막냇동생까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일한다. 간판에는 ‘42년 전통’이라 쓰여 있는데, 그 간판을 단 것이 작년이니 올해로 43년째이다. 남쪽 지방 도시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인 열세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어머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영천시장 안 튀김 가게에 있던 고향 선배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원래 여기가 떡 골목이었어요. 대부분 떡집 아니면 튀김집이었죠. 어느 날 누가 꽈배기를 가지고 와서, 이거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 하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고향 선배와 같이 만들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꽈배기집도 없었고, 사람들이 잘 먹지도 않을 때였어요. 먹어 본 사람들이 담백하다, 맛있다, 소화도 잘된다, 그러더라고요.” 가게를 차려 독립한 것은 36년 전이다. 주 거래처는 건설 현장에 임시로 차려 놓은 식당과 학교 안에 있는 매점이었다. 밤새도록 만들어 박스로 포장해 놓으면 새벽에 가져가는 도매 장사였다. 20kg짜리 밀가루를 하루에 20포대씩 소화해야 하는 중노동이었고, 밤낮이 뒤바뀌어 몸도 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시 식당과 학교 매점이 사라지면서 가게는 아침에 문을 열어 일반 손님들에게 판매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미리 만들어 둔 것을 파는 게 아니라 즉석에서 튀겨 팔게 되니, 손님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단골이 생기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저는 매일 꽈배기 서너 개씩 먹어요. 일단 맛있으니까 먹고, 뭐가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살피기 위해 먹어요. 소금의 양, 설탕의 양, 물의 양, 반죽하는 시간, 다 중요하죠.” 사람들이 그의 꽈배기를 먹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의 현란한 기술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반죽할 때 들어가는 밀가루는 40kg, 여기에 설탕과 마가린과 따뜻한 물을 붓고, 생 이스트를 넣어 두 손으로 치대며 반죽한다. 발효한 반죽을 넓게 펴서 적당한 크기로 툭툭 자른 다음, 가느다란 줄 모양으로 만든다. 그것을 반으로 접어 공중으로 획 던지면 보기 좋게 꼬아져 툭 떨어진다. 굵기와 크기가 일정할 뿐만 아니라 속도가 엄청나다. 홀린 듯 그의 작업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에게 ‘달인’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오후 세 시,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작업복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고 힘찬 걸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세상은 아직 한낮, 소박한 행복이 그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 변함없는 맛 널리 소문이 퍼지고, 여러 매체에서 취재를 오고, 가게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꽈배기 가격은 이상할 정도로 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3개에 2천 원 정도는 받고 있는데, 4개에 천 원이다. 그것도 10여 년 전부터 같은 값이라니. 그 사이에 재료비도 올랐을 텐데, 이래서야 남는 게 있을까 싶다. “가족끼리 하니까 인건비가 안 들어요. 달걀, 우유를 넣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서 옛날 가격으로 팔아요. 올리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요즘 경제도 안 좋고 제가 먹고살 만하니까 그냥 파는 거예요. 싸니까 손님들이 참 좋아해요.” 힘에 부칠 때도 있을 텐데, 손반죽을 고집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기계를 써본 적이 있는데, 너무 맛이 없는 거야. 내가 맛없으면 손님도 그렇다는 거죠. 손님이 맛없다고 하면 우리도 기분이 안 좋고. 그래서 기계를 없애버렸어요. 힘이야 들지. 그런데 힘 안 들이고 돈 버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꽈배기는 고급스러운 일이에요. 준비하는 시간도 별로 안 걸리고, 반죽해서 튀기면 되고, 튀긴 다음에 기름 버리면 끝이죠. 재고도 없으니까요.” TV 방송을 탄 후에는 체인점을 내 보자는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반죽을 직접 해야 하고, 바로 튀겨서 팔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매장을 관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반죽을 해서 오래 놔두면 색깔도 안 나고 맛도 없어지기 때문에 세 시간 안에 튀겨서 팔아야 한다. 직접 와서 배워가면 모를까, 몸이 하나이니 체인점은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고집이 변함없는 맛을 만들었다.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어진대요. 한 자리에서 열 개 먹는 사람도 있어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프라이팬에 구워 먹거나 가스레인지에 돌려서 말랑해지면 설탕 뿌려 먹는대요. 할머니들은 밥통에 쪄서 드시고, 젊은 사람들은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먹고. 할머니 한 분이 잔뜩 사가시기에 ‘어떻게 드시려고 그래요’ 하니까, ‘걱정하지 말아,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팔기나 해’ 그러더라고요.” 그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시작된다. 여섯 시면 가게문을 열고 반죽을 시작한다. 여섯 시 반쯤 첫 손님들이 온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는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학교나 병원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와요. 식사 대신 먹기도 하고, 포장해 가서 동료들과 나눠 먹기도 하고. 아침에 달달한 거 먹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아침 장사가 끝나면 열 시쯤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점심시간을 맞은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미리 만들어 두면 맛이 없으니 그때그때 튀겨서 판다. 오후 두세 시면 꽈배기는 동이 난다. 하루 세 번 반죽하고, 다 팔고 나면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가게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나면, 열심히 일한 가족들은 각자의 생활을 누린다. 소박한 행복 “나는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일찍 일을 시작했잖아요.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 생활부터 했어요. 오직 기술 배운 거, 성실한 거, 인심 안 잃은 거 가지고 여기까지 왔어요. 아들 하나 있는데, 대학 졸업하고 몇 년 직장을 다녔어요. 그러다 이 일을 하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세상 좋아지고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 좀 편하게 살았으면 했어요. 아들만 힘들면 괜찮은데, 며느리까지 힘드니까. 이 일은 사람이 있으면 있는 대로 필요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힘 안 들겠어요. 우리 시대 살면서 고생 안 한 사람 어디 있어요. 지금 행복하고 만족하면 되는 거지. 나는 옛날에 힘들었던 얘기 별로예요. 지금 열심히 하는 거, 행복하게 일하는 거, 그게 중요하지.” 그가 삶에서 바라는 것 또한 대단하지 않다. “내 가족,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거. 그거밖에 없어요. 이날까지 살면서 주식 한 번 안 해 보고 복권 한 번 안 샀어요. 만 원 벌면 만 원 쓰고. 일 한참 많이 하고 돈 많이 벌어 봤을 때 친구들을 많이 잃어 봤어요. 다 돈 때문이에요. 어디 가면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 있어도 내가 카드 꺼내서 밥값 내버려요. 나는 꽈배기 열심히 만들어서 팔면 되니까. 남들은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굳이 돈 없다고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 내겐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고, 그럼 부자 아닌가요? 행복하니까 부자라고 생각해요.” 그의 삶은 그가 만드는 꽈배기처럼 소박하고 담백하다. 오후 세 시,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작업복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고 힘찬 걸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세상은 아직 한낮, 소박한 행복이 그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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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0 AUTUMN 241

이웃과 나누는 정직한 일상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집을 구하는 데 익숙하다. 매물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공유 플랫폼에 업로드하는 공인중개사들도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 속에서도 대도시 서울에는 아직 골목 초입에서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며, 상술 대신 정직을 신념으로 누군가의 거처를 찾는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조강희 씨가 15년째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공인중개사 사무소 앞에서 서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웃 복덕방에 내기 장기를 두러 나가신다. 내기에 이기는 날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양손에 커다란 수박을 사 들고 돌아오신다. 포크록 가수 강산에가 1993년에 발표한 노래 에 나오는 풍경이다. 한때 ‘복덕방’이라 불리던 그 장소는 가옥이나 토지 같은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임대차 거래를 중개하는 본연의 목적 외에도, ‘동네 사랑방’이라는 가외의 임무를 수행하던 곳이었다.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열어둔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다. 온 동네 소문들이 그곳에서 시작되고, 살을 찌워 밖으로 퍼져 나갔다. 누군가 곤경에 빠지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도 했다. 기쁜 일이 생기면 따끈한 부침개에 막걸리를 따르며 함께 축하했고, 슬픈 일이 생기면 안아 주고 위로해 주었다. 낮은 지붕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가까웠던 시절의 이야기다. 낮았던 지붕이 높아져 하늘에 닿을 듯한 고층 아파트로 바뀌면서, 동네는 더 이상 다정하지 않게 되었다. ‘공인중개사 사무소’라는 딱딱한 이름의 간판으로 바뀐 복덕방도 더 이상 사랑방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는 아직 예전의 그 문을 다 닫지 않은 곳이 있다. 다정한 동네의 온기와 사람 냄새를 찾기 위해 서촌을 향해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조강희 씨가 그날의 거래 내역을 수기로 정리하고 있다. 그의 소개소에는 하루 평균 3명 정도 손님이 오는데, 10명 중 한두 명과 계약이 성사된다. 작고 낡은 한옥들 경복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이 궁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을 통칭하여 북촌, 서쪽에 있는 마을을 서촌이라 부른다. 조선 시대(1392~1910) 북촌에는 사대부 집권 세력이 살았고, 서촌에는 역관이나 의관 같은 전문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름난 화가와 시인 등 예술가들도 서촌의 주민들이었다. 현재 북촌과 마찬가지로 서촌 한옥도 정부의 지원으로 보존되고 있는데, 북촌의 번듯한 한옥에 비해 서촌의 한옥은 대체로 아담하다.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골목이 꼬불꼬불 이어진다. 그 골목 안에 ‘중앙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15년째 운영하고 있는 조강희(Cho Kang-hee 趙康熙) 씨의 인생이 있다. “서촌은 도심과 인접해 있는데, 뒤에는 멋진 산이 있고 큰 공원도 있어요. 집을 사고 팔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동네가 좋아서 여기 살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많지요. 한번 들어온 사람은 잘 안 떠납니다.” 이곳의 집들은 대개 65~100㎡ 규모의 작은 구옥들이라 불편한 점이 많다. 하지만 아파트에서 누릴 수 없는 장점들이 있다. 조 씨는 한옥의 장단점을 목록으로 만들어 손님들에게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나무, 돌, 흙 같은 자연 소재로 지은 집이라 건강에 좋습니다. 안정감이 있고 이웃과 소통하기도 쉽습니다. 주거 공간이 좁긴 해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지요. 취향에 따라 마당을 가꾸는 재미도 쏠쏠하고, 바람도 잘 통하고, 계절의 변화를 늘 느낄 수 있어서 심심할 틈이 없어요. 반면에 친환경 소재인 탓에 벌레가 꼬이고, 단열과 방음이 잘 안 되고, 불과 물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는데 수리를 통해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지붕, 벽채, 마루 등은 주기적으로 보수가 필요한데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을 해 주고 있어 경제적인 부담은 없지요.” 서촌은 청와대가 지척에 있는 데다가 1968년 북한 무장 공비 사건 이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삼엄한 경비로 인해 일반인들이 살기 불편한 동네였다. 동네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의 신원 조회는 기본이고, 하룻밤 묵는 외지인도 신고를 해야 했다. “전투 경찰들이 늘 지키고 있었고, 개발도 못 하게 하고 제약도 심하니까 불편한 점이 많았죠. 1990년대 말에 건축 규제가 완화되고 재개발한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는데, 그래도 지을 수 있는 건 빌라 정도였어요. 도로변은 7층, 안쪽은 5층 이상 올릴 수 없었지요. 2010년에 한옥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었을 때는 실망한 사람도 많았어요. 낡은 집을 헐어도 한옥만 지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곳은 고층 빌딩의 숲을 누비는 사람들이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고요한 섬으로 남았다. 서촌의 시계는 느리게 간다. 조금 천천히 걷기 위해서, 빌딩 사이에 가려져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곳에 찾아온다. 그런 ‘느림’의 특수를 먼저 누린 곳은 북촌이었다. 옛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북촌의 한옥들 사이에 소박하고 앙증맞은 가게들이 들어섰고, 호기심 많은 청년들이 기웃거렸다. 제법 장사가 되기 시작하자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렸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가게들은 하나둘 서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게스트하우스도 생겨나서 외국인들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조강희 씨는 손님들과 집을 보러 갈 때마다 한옥의 장단점을 상세히 일러준다. 그는 서촌의 한옥들이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이웃과 소통하며 살기에 좋다는 점을 강조한다. 절박해서 택한 직업 조강희 씨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했다가, 대기업의 하청을 맡게 되면서 12년 동안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5년,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하던 전자 제품의 부품을 중국에서 만들게 되면서 하루아침에 공장 문을 닫게 되었고, 직원들의 월급과 퇴직금을 챙겨주느라 많은 빚을 져야 했다. “아이 둘 다 막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돈은 계속 벌어야겠는데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 공인중개사 하는 사촌 형님을 만났어요. 나도 이 일을 해 봐야겠다 하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의 나이 52세 때 일이었다. “그때 집사람이 식당을 하고 있었어요. 아침에 재료 사서 식당에 가져다주고, 학원으로 갔습니다. 하루 네 시간씩 잤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했으면 일류대학에 갔을 거예요. 2006년 3월에 공부를 시작해서 다음 해 2월에 시험에 붙었어요. 절박했으니까, 이거 떨어지면 아이들 대학 졸업도 못 시킨다고 생각하니까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지요.”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공부를 해 한 번에 합격하고,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부동산 소개소에서 견습 생활을 마친 후 학원 원장의 조언을 받아 서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 자리에서 벌써 15년째, 오전 10시면 그는 어김없이 사무소 문을 연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부동산에 관심이 없었어요.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 대가만큼 벌어서 사는 거지, 투자를 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자리를 잡을 때도 원장님이 추천하신 곳이니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와서 주저앉았어요. 어느 지역이 더 좋다거나 돈이 된다거나 그런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다가 보니 슬쩍 욕심이 생겨서 다른 동네로 옮겨 보려 한 적도 있었는데, 잘 안 됐어요.” 옮기려고 한 곳은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경기도 지역이었다. 아파트는 가구 수도 많고, 집을 구하는 손님들이 원하는 바도 명확하다. 내부 구조도 동일하니, 발품을 팔며 여러 집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직접 보지 않고 도면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집의 크기와 층수, 내부 상태만 간단히 확인하면 된다. 하지만 서촌에 있는 집들은 일일이 돌아다니며 눈으로 구석구석 보기 전에는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의 문턱은 높다. 중개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매물을 공유하는데, 모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비싼 가입비를 내야 한다. 그는 그 돈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서촌에 눌러앉았다. “손님들은 당연히 깨끗하고 채광 좋은 집을 원하시는데, 여기 집들은 자꾸 낡아가서 문제예요. 그래도 정이 들어서 이젠 떠나기도 어려워요.” 그의 소개소에는 하루 평균 3명 정도 손님이 오고, 10건 중 한두 건의 계약이 성사된다. 까다로운 손님도 있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으니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윤리 의식 조 씨의 하루는 오전 7시 반에 시작된다. 식사를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 후 8시 반에 집에서 출발하여 전철을 탄다. 그는 서울 외곽에 있는 평촌 신도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집에서 사무소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저녁 7시 반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면 밤 9시. 토요일에도, 공휴일에도 반복되는 일상이다. “처음에는 일요일에도 일을 했어요. 좀 나이가 드니까 이렇게는 안 되겠다,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싶어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고 있습니다. 일요일에는 업무 생각은 하지 않고 푹 쉬어요. 집 청소도 하고, 등산도 가고. 특별한 취미도 없고, 술을 즐기지도 않아요. 제 삶이 그냥 이렇습니다.” 그의 소개소에는 하루 평균 3명 정도 손님이 오고, 10건 중 한두 건의 계약이 성사된다. 까다로운 손님도 있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으니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좋은 집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음료수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손님이 복이 있어서 그렇다”며 공을 돌린다. ‘복덕방’은 ‘공인중개사 사무소’로 바뀌었지만, 서촌 사람들은 지금도 오다가다 이곳에 들러 차를 마시며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한다. 팩스를 보낸다거나 복사를 해 준다거나 등기부 등본을 떼어 주는 등 간단한 서비스도 무료로 해 주고 있다. 인터뷰 도중에도 화장실 변기가 흔들리는데 집주인에게 얘기 좀 해달라며 누군가가 찾아왔다. “중개사는 윤리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해요. 투기를 조장할 수 있는 직업이거든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죠. 저는 허풍도 못 떨고 언변도 좋지 않아요. 딱 공무원이나 선생님 스타일이죠. 그래도 이 직업이 좋은 게,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정신이 멀쩡할 때까지는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년이 없으니까요.” 정직한 중개사를 만나기 위해 느린 서촌에서 느린 삶을 꿈꾸는 또 한 명의 운 좋은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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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0 SUMMER 197

다정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은 꿈 다수의 고객들은 친절하다. 그러나 전화통 건너 말 한마디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이들도 없지 않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치유법으로 다친 마음을 달래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마의자를 판매하는 회사의 콜센터에서 3년째 일하는 장윤영(Jang Yoon-young 張允瑛) 씨도 그러하다. 3년 차 콜센터 직원 장윤영(張允瑛) 씨가 고객의 전화에 응대하고 있다. 그는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 평균 100통의 전화 통화를 한다. 장윤영 씨는 오전 7시 40분에 일어난다. 8시 20분에 집에서 나오면 25분 후 회사에 도착한다. 15분 동안 커피를 타는 등 업무 준비를 시작한다. 정각 9시,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고객만족팀 장윤영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는 하루 평균 60통의 문의 전화를 받고,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사은품과 주의할 점 등을 안내하는 전화를 40통 정도 건다. 고객들에게서 걸려 오는 문의는 대부분 주문한 제품의 배송에 관한 것이다. 안마의자는 배송 기간이 1주일에서 10일 정도 걸린다. 당일 배송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매우 긴 시간이다. 배송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00일 이내 배송 예정이며, 정확한 일정은 해당 지역 배송팀에서 직접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00명 중 80명은 “사정은 알겠지만, 그래도 빨리 받고 싶다”고 말한다. 곱지 않은 말로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지만, 친절하게 설명하면 대부분 납득한다. 윤영 씨는 자신이 하는 말을 경청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는 사람을 ‘좋은 고객’으로 분류한다. 반면에 100명 중 18명은 ‘나쁜 고객’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불평을 늘어놓기 위해 전화를 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어디서 그따위 변명을 늘어놓는 거냐 하면서 막무가내로 고함을 지른다. ‘최악의 고객’은 100명 중 2명 정도이다. 이들은 거침없이 욕을 퍼붓고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매일 아침 9시에는 ‘나쁜 고객’을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전날 저녁부터 참았던 화를 터뜨리기 위해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다. 월요일 9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주말 내내 시계만 노려보고 있던 이들이 억눌렀던 불씨를 폭발시킨다. 윤영 씨에게 월요일 아침은 ‘한 주의 즐거운 시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윤영 씨가 하루 동안 상대하는 사람들 중 20퍼센트 정도는 불쾌하고 모진 말로 마음에 상처를 주곤 한다. 그 힘겨움을 덜기 위해 그는 가끔 일기를 쓴다. 악명 높은 근무 환경 오전 업무가 끝나는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거른 윤영 씨는 식당으로 향하는 대신 조용한 공간을 찾아 몸을 숨긴다. 두유 하나와 삶은 달걀 하나로 텅 빈 위장을 달랜 후 눈을 감고 잠시 잠을 청한다. 그에게는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 듣거나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한 끼 밥보다 절실하다. 육체 노동자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듯 감정 노동자는 소진된 감정을 채울 침묵이 필요하다. 오후 근무를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지금 회사에는 2017년 11월 23일에 첫 출근을 했어요. 콜센터가 문을 연 직후여서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직원도 부족했죠. 이틀 교육받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고 일단 끊은 다음 선배에게 물어본 뒤 일 처리를 했죠. 콜센터는 근무 환경이 열악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했어요.” 입사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그 ‘악명’을 제대로 실감할 계기가 왔다. 한 고객이 주문한 제품을 당장 보내지 말고 나중에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언제 보내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갑자기 욕을 해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윤영 씨가 무슨 말을 하든 상대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욕을 했다. 결국 “험한 말을 쓰셔서 상담을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회사를 나와 근처 놀이터로 갔다. 그네에 앉아 한참 울었다는 윤영 씨는 지금도 그 목소리와 전화번호를 기억한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가치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 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불공평함에서 오는 불행이 쌓이면,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이유를 찾는다. “무턱대고 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에요. 소리 지르면 일이 해결되는 경험이 많았기에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것일 테고요.” 그는 거친 고객들과 맞닥뜨릴 때마다 그들의 입장과 생각을 헤아려 보려 애쓰고 있다. 원하는 것이 있거나 불만이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이 직업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재미있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그녀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그런 일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수고한다고 말해주거나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어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고객의 말투와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슬펐던 일은 기억나는가? 한숨과 더불어 돌아온 대답이다. “강아지가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걸 모르고 작동을 시켰다는 고객이 있었어요. 가엾게도 강아지는 구하지 못했어요. 부모님이 쓰시던 걸 자기 집으로 옮겨 달라는 전화도 받은 적이 있어요. 원래 사용하시던 분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겠죠. 한번은 고층 아파트에 사다리차로 안마의자를 운반하는데, 의자가 떨어지면 어쩔 거냐고 주인이 항의를 하는 바람에 배송하는 기사님이 사다리차에 같이 탔다가 떨어진 일도 있었어요.” 그에게는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 듣거나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한 끼 밥보다 절실하다. 육체 노동자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듯 감정 노동자는 소진된 감정을 채울 침묵이 필요하다. COVID-19 때문에 친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포옹할 수 없는 요즘, 그는 펭수 인형으로 허전함을 달랜다. 스트레스 해소법 즐겁게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윤영 씨는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료에게 ‘이상한 전화를 걸어온 이상한 고객’ 이야기를 하다가 고소를 당한 콜센터 직원이 있었다. 그 ‘이상한 고객’이 하필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콜센터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윤영 씨가 일하는 곳에도 그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동일한 직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이 하얘질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모르는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이니 아무리 불쾌하거나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저 마음속에 처박아두거나 잊어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했다. “욕을 듣고 울고 나서도 다음에 걸려온 전화는 반갑게 받아야 해요. 계속 전화가 오기 때문에 잠시 밖에 나가서 마음을 달랠 수도 없죠. 그래서 마음 상하는 전화를 끊고 나면 혼잣말을 하게 돼요.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자기 자리에 앉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죠.” 그러나 오후 6시 정각이면 어김없이 그날의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퇴근 시간이 되면 쾅, 문을 닫듯 마음을 닫고 스위치를 내린다. 윤영 씨는 스트레스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사무실에 향수를 여러 종류 가져다 놓고 이것저것 뿌려요. 냄새가 달라지면 공기가 달라지고, 그걸로 기분전환이 돼요. 퇴근 후 직원들과 술 한잔하면서 쌓인 걸 푸는 날도 있지만, 요즘은 대체로 집에 일찍 들어가요.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있는 시간이 절실하기도 하니까요.” 현실에 대한 긍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니기 시작한 첫 직장에서 10년 동안 그는 호락호락한 직원이 아니었다. 상대가 세게 나오면 자신도 세게 나갔고, 하고 싶은 말도 거리낌 없이 했다. 그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얼마 전에는 안마의자에 문제가 생겨 A/S를 신청하는 고객의 전화를 받았다. 접수를 받고 알아보니 미수금이 있었다. 미수금을 먼저 납부해야 한다고 안내를 했더니 “코로나19에나 걸려서 죽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몇 달 전 갑자기 세상을 등진 동생과 홀로 남겨진 엄마가 떠올랐다.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을 안을 수 없는 요즘 60cm 키의 펭수 인형을 안고 다닌다. 보드랍고 가볍고 둥근 그 애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면 힐링이 된다. 숨 쉬기가 힘든 것이 KF94 마스크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성대는 늘 건조해 부어 있고, 오후만 되면 다른 목소리가 된다. 목젖이 사과만큼 부어서 침 삼키기가 힘들다. 물론 목젖은 멀쩡하다. 그냥 가끔 뜨겁고 단단한 무엇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꿀꺽 삼키는 기분을 말한 거다. 오늘은 한 고객이 나에게 “코로나19에나 걸려서 죽으세요”라고 악담을 했다. 나는 이제 엄마에게 하나밖에 안 남은 자식인데, 죽으라니. 윤영 씨는 어릴 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나 쓰고 싶어 하지만 쓰지 못하는 것을 쓰면서,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다정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의 꿈이다. 순간순간이 그리 행복하지도 않고, 훈장을 달아줄 만큼 거룩하지도 않은 하루하루가 반복되지만, 그렇다고 지나온 인생의 어느 한 점을 비틀고 싶지는 않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해 탄식을 늘어놓거나 하지 못한 일에 미련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놓고 싶지도 않다. “인간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세상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어요. 그래도 주어진 모든 시간 동안 잘 해내고 싶어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게 되는 것, 그게 인생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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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20 SPRING 199

바느질로 꿰맨 40년 인생 아무리 좋은 옷감과 디자인이 있어도 바느질 없이는 결코 옷이 되지 못한다. 서울 동대문 패션 타운에 인접한 신당동 봉제 동네는 K-Fashion의 마지막 제작 과정을 책임지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여기서 40년 경력의 재봉사 김종구(Kim Jong-gu 金鐘球)씨의 늦게 찾은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 재봉사 김종구(Kim Jong-gu 金鐘球) 씨가 서울 신당동에 있는 공동 작업실에서 옷감을 재단하고 있다. 10대에 봉제를 배우기 시작해 40여 년 동안 봉제 일을 해 온 그는 2018년 국가가 인정하는 ‘1급 봉제 전문가’가 됐다. 옷을 만드는 데는 옷감과 디자인 그리고 바느질,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옷감과 디자인이 있어도 바느질 없이는 결코 옷이 되지 못하니, 바느질은 그만큼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에 비해 봉제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김종구 씨는 그런 세태를 비난하지 않는다. “봉제는 배우기도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려야 비로소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죠. 또 디자이너와 재봉사에 대한 인식 차이도 있고요.” 디자이너와 재봉사 그가 이 오래된 직업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10대에 봉제를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줄곧 이 일만 해온 그는 2018년에야 국가가 인정하는 ‘1급 봉제 전문가’가 되었다. 또래들은 이미 은퇴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는 일거리가 넘치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한편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어려서는 만날 맞으면서 일을 배웠고, 젊어서는 노력한 만큼 소득이 없어서 그만둘 생각을 자주 하곤 했는데, 지금은 대접을 받아요. 게다가 이 일엔 정년도 없으니 언제까지나 할 수 있죠. 7~80대 선배님들이 아직 현직에 계시니까요.” 종구 씨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시절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K-Pop과 K-Beauty에 이어 K-Fashion도 한류 붐을 타면서 한때 사양 산업으로 분류됐던 패션 산업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뛰어난 봉제 기술을 유지,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정부의 정책도 큰 힘이 되고 있다. 덕분에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KASSA, Korean Advanced Sewing Skills Academy)의 봉제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종구 씨도 거기서 특강을 하는데 수강생이 많아 한 반에 20명으로 제한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정도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자신이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마다 쑥스러우면서도 행복하다. 특강하는 선생님 “예전에 아들이 봉제를 하겠다고 했었는데, 제가 절대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도 못 받고 수입도 적었거든요. 지금이라면 권했을 텐데 그땐 미래가 안 보였어요. 아들이 지금 IT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가끔 회사 다니기가 힘들다고 해요. 혹시 다시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열심히 가르쳐 주고 싶어요.” 한국의 봉제 산업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 노동 운동사에 대표적 순교자로 기록된 전태일(Chun Tae-il 全泰壹)은 동대문 평화시장의 햇빛도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종일 재봉틀과 씨름하면서 박봉에 시달렸고, 10대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매일 14시간 넘는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22살의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작업장 앞 거리에서 분신자살했다. 현재 봉제 노동자는 50대 장년들이 주를 이룬다. 서울에서는 주로 동대문 패션 타운을 중심으로 여러 동네에 흩어져 일하는데, 대개 부부나 친척 두어 명이 모여 하청이나 재하청을 받아 일한다. 작업 환경은 전태일이 살던 시대에 비해 좋아졌지만, 노동 시간은 여전히 길고 임금 또한 낮다. 종구 씨는 1962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대개 그렇듯 그도 형제가 여럿이다. “아들 넷, 딸 넷 8남매 중 저는 여섯째였어요. 대가족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죠. 위의 형제들은 학교에 다녔지만, 여섯째인 저는 정규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소개해 준 양복점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고등공민학교에 다녔어요. 양복점에서는 먹여 주고 재워 줄 뿐 보수는 없었고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다녀온 후엔 양복점에서 일을 했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라 일거리가 넘쳐서 밤 12시까지 일하거나 밤을 새우는 일도 흔했다. 그만두고 집으로 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아버지 말씀을 생각하며 참아 냈다. 그가 다닌 학교는 인가 받은 정규 학교가 아니어서 중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받으려면 국가가 시행하는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다. 그는 두 번 응시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에 취직은 검정고시보다 훨씬 쉬웠다. ‘제일라사(第一羅紗)’라는 양복점에 취직해 3~4년 동안 말단 직원으로 일했고, 그 후 여러 양복점에서 재봉사 경험을 쌓았다. 종구 씨가 기술을 익히는 동안 봉제 산업은 값싼 노동력에 힘입어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노릇을 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봉제는 배우기도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려야 비로소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죠. 또 디자이너와 재봉사에 대한 인식 차이도 있고요.” 김종구 씨는 요즈음 주로 디자이너들의 의뢰를 받아 의상 샘플을 제작한다. 그의 날렵하고 명확한 손놀림에 의해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가 실체화된다. 행복한 프리랜서 “기성복이 늘어나면서 맞춤 양복이 시들해졌어요. 어렵게 배운 기술인데 일감이 없더라고요. 할 수 없이 여성 기성복 회사에 취업했어요.” 그 회사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는 동안 동료와 결혼도 했다. 그때 만난 아내 역시 지금도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종구 씨는 봉제하는 틈틈이 책을 읽었다. 공자, 노자의 가르침도 읽고 역사책과 경영 서적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좋아하는 책은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How to Stop Worrying and Start Living)과 나관중의 『삼국지』인데 『삼국지』는 1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흔히 말하기를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사귀지 말고,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다투지 말고, 열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역시 다양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싸움에서 이기는 전략과 전술에 무한한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종구 씨는 여성복 회사 시절 함께 일했던 상사와 여성복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지만 1997년 금융위기 때 부도가 나서 접고 말았다. 그다음엔 둘이 함께 브랜드를 론칭해 한때 국내 매장을 50개쯤 확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건비 상승으로 국내에서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 산동성 위해시(山东 威海)에 생산 기지를 설립해서 제가 지사장으로 총괄했는데 7년쯤 되니 또 인건비 문제가 생겼어요. 직원이 180명쯤 됐는데 오래 근무하면 자연히 임금이 올라가잖아요. 근로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데 한국에 있는 사장은 월급을 올려주지 않으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결국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때 3년 동안 퇴근 후 중국 산동대에서 중국어를 배운 덕에 회사를 떠난 후 단동으로 갔고, 거기서 북한 출신 화교와 함께 평양에서 생산한 의류를 한국에 납품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무역이 중단되면서 그만두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여성복 업체에서 5년 동안 일한 후 퇴사했다. “전엔 늘 회사에 소속된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프리랜서에요.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 좋아요.” 그렇지만 그의 일과는 직장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찍 일어나 아파트 단지 안의 헬스장에 가서 운동한 후 아침을 먹고 오전 8시에 신당동에 있는 공동 작업장 ‘인성기획(人性企劃)으로 출근해 오후 8시에 퇴근한다. 출퇴근길 지하철은 붐벼도 종구 씨는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 즐겁다. 쉬는 일요일엔 주로 산에 가거나 가족들과 교외나 바닷가로 나가 외식을 한다. 여행을 꿈꾸는 재봉사 작업장은 5명이 함께 쓰는데 종구 씨처럼 샘플을 만드는 사람이 3명,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 2명이다. 이들은 각기 작업대와 재봉틀을 놓고 독립적으로 작업한다. 종구 씨에게 의류 샘플을 의뢰하는 고객들은 인터넷 쇼핑몰 운영자들, 동대문 상가 판매 사업자들, 해외 주문을 받기 위해 샘플을 원하는 사업자들, 홈쇼핑 납품업자들 등이다. 더러는 디자이너와 봉제 기술자의 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는데, 디자이너가 그려온 아이디어가 옷으로 실체화될 수 없는 경우가 그럴 때다. “대개 경험이 적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그런 요구를 하는데 그럴 때는 잘 설명해 주면 돼요.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때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보여 주지요. 그러면 그 사람도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게 되거든요. 기술자가 정성을 다해 만들고 본인과 고객이 함께 만족해야 좋은 옷이에요. 만든 사람 혼자 만족하면 좋은 옷이 아니죠. 다른 직업도 그렇지만 이 일도 적성이 맞아야 잘하는 것 같아요. 말수가 적고, 집중력이 있고, 치밀한 사람이라야 해요. 둘째는 목표가 뚜렷해야 해요. 이게 내 직업이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기술이 늘어요.” 종구 씨는 재킷, 원피스 등 종류별로 샘플 하나당 기본 가격을 설정해 놓고 주문받은 제품 제작의 난이도에 따라 공임을 덧붙여 받는다. “재단할 때는 판단이 빨라야 해요. 머뭇거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죠. 봉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고객과 약속한 시간을 맞춰야 하니까요.” 10대에 처음 봉제를 배울 때 종구 씨에겐 꿈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일을 줄이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책 보면서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요. 중국에 있을 때 태산, 백두산 등 여러 곳을 갔지만 못 가본 곳이 더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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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9 WINTER 225

궁궐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국인에게 길을 안내해 주면 묘한 뿌듯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 보람을 매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의 궁궐인 덕수궁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장수영(Chang Su-young 張殊英) 해설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영어 강사의 길을 접고 덕수궁 해설사가 된 장수영 씨가 중화전(보물 제819호) 앞에 서 있다. 그는 해설사가 된 지 2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학 시절 처음 지리산에 갔는데 너무 좋아서 그 후로 자주 가게 되었어요. 1박 2일로 짧게 다녀올 때도 있었고, 1주일 동안 천천히 능선을 따라 걸을 때도 있었어요. 산 정상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보면 도시에 살면서 마음 졸이고 머리 아파했던 일들이 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리산은 저에게 휴식의 장소라서 지금도 자주 찾고 있어요.” 장수영 씨는 항구 도시 부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일상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했고, 자신이 특히 좋아하게 된 지리산을 비롯해 한국의 어지간한 산은 거의 다 올랐다. 그는 그렇게 찾았던 산들이 자신의 진로까지 바꿀 줄은 몰랐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산이 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돼요. 지리산은 ‘어머니 산’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산이 주는 포근한 느낌 때문만은 아니에요.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그 산에 숨어들기도 했고, 지금도 삶에 지치거나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들어가잖아요. 저는 지리산을 통해 그 산이 품었던 사람들의 발자취까지도 사랑하게 됐어요. 나아가 이 나라 곳곳에서 살다 간 선조들의 흔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는 부산 신라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학교와 학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쳤다. 아주 평범한 선택이었고, 정해진 수순처럼 살았다. 하지만 산에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2017년 6월 마침내 덕수궁 해설사가 되었다. 궁궐로 출근하다 장수영 씨가 출근하는 직장인 덕수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 현재 8명의 공식 해설사가 활동 중이다. 해설사들은 한국어 해설은 기본이고 각자 하나씩의 외국어 해설을 제공하는데, 영어 해설사가 4명, 일본어와 중국어 해설사가 각각 2명씩이다. 보통 하루에 2~3회, 1회당 50분 내외에 걸쳐 해설이 진행된다. 덕수궁 입장객들은 무료로 해설을 들을 수 있으나, 10명 이상 단체로 해설을 듣기 원할 때는 미리 신청해 예약해야 한다. 단, 야간 개장 시간에는 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들에 비해 규모도 작은 편이고 관람객도 적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궁궐보다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 해설을 하려면 한국사의 전체적 흐름을 알아야 하죠. 특히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많았던 곳이라 해설사들이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요. 요즘에는 역사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전달하는가도 참 중요하단 걸 느끼게 됩니다. 역사란 것이 워낙 민감한 부분이 많아서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단어 하나 뉘앙스에도 조심하게 돼요.” 덕수궁은 왕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던 행궁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재위 1567∼1608)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경복궁을 비롯해 성 안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던 월산대군[조선의 9대 왕 성종(재위 1469∼1494)의 형]의 저택과 주변 민가들을 손보아 행궁으로 삼은 것이다. 이곳에서 즉위한 선조의 아들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중건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이 행궁은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는다. 이후 경운궁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재위 1863∼1907)이 이곳으로 돌아오면서였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이곳 경운궁에서 거행했다. 이후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재위 1907∼1910)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경운궁은 덕수궁이란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요즘 덕수궁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 중에는 덕수궁이나 한국의 역사, 문화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거나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왕’이나 ‘황제’ 모두 최고 권력자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굳이 고종이 자신을 황제로 칭했느냐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도 해요. 그러면 고종이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한 것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언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난 2년여에 걸친 기간 동안 수십 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을 만났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국가별로 해설을 듣는 유형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분들의 태도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단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연구하는 자세로 해설을 들으세요. 질문도 가장 많아요. 파란만장한 덕수궁에 관한 얘기를 듣다가 눈물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죠.” 숱한 역사적 상흔의 현장이자 소중한 문화 유산인 덕수궁으로 출근하는 수영 씨의 하루하루는 즐겁다. 자신의 해설을 통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덕수궁이란 우리의 유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흰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 위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은 장수영 씨가 즉조당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해설을 하고 있다. 덕수궁 해설사들은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보통 한복을 입는다. 끊임없는 공부 “일본과 얽힌 얘기가 많다 보니, ‘그럼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떠냐’고 묻는 외국인들도 있어요. 공식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지 않지만, 민간 교류는 많다고 얘기해요. 일본어로 해설하는 해설사들은 한일관계에 대해 훨씬 민감하고 많은 질문을 받을 거예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 온 관광객일수록 역사적 사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자신보다 해설사 경력이 더 오래된 동료들에게 “전에 덕수궁을 찾아오던 관광객들과 요즘 오는 분들의 특징이 다르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K-Pop, BTS, TV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한 관광객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설사들은 전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비단 역사뿐 아니라 건축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쌓아야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가 역사의 현장이라 역사를 거론하면서 건축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소실됐다가 새로 지어진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 같은 전각들에 대해 얘기하면, 외국 손님들이 아주 열심히 들으세요.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이렇게 멋진 건물들을 다시 지을 수가 있었느냐’며 놀라기도 하죠. 더욱이 덕수궁에는 다른 궁궐들에는 없는 서양 근대식 건축물들이 있어서 그런 건물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의 설명처럼 덕수궁엔 전통 한국식 건축물과 서양 근대식 건축물이 함께 어울려 있다. 대표적인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은 유럽풍 석조 건물로 영국 건축가 J. R. 하딩이 설계해 1900년에 기공, 1910년 준공했으며 고종이 외국 사절들을 만날 때 주로 이용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1936년에 기공돼 1938년에 완공된 석조전 서관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 중이다. 또 1900년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진 정관헌은 왕궁에 건설된 최초의 유럽식 건물로 동서양 양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식만큼 중요한 체력 숱한 역사적 상흔의 현장이자 소중한 문화 유산인 덕수궁으로 출근하는 수영 씨의 하루하루는 즐겁다. 자신의 해설을 통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덕수궁이란 우리의 유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그는 어김없이 아침 7시 50분에 집을 나서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덕수궁으로 향한다. 출근 시각은 9시지만 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해서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해설을 하러 나갈 때는 보통 한복을 입는다. 봄과 가을에는 흰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 여름에는 하늘색이나 베이지색 저고리에 남색이나 보랏빛 도는 남색 치마를 입고, 겨울에는 한복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혹서기에는 한복 대신 반팔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고, 혹한기에는 긴 패딩코트를 입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한복을 통해서도 외국인 손님들에게 우리 문화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궁궐들은 월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따라서 수영 씨의 휴무일도 일반인들과 달리 월요일이다. 퇴근 후 1주일에 3번은 헬스클럽에 가서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고, 수요일에는 피아노도 배운다. “해설사가 되기 전엔 지리산에 들어가 살고 싶었죠. 하지만 지금은 여기 덕수궁에서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보다 더 좋은 해설사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와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또 해설에 필요한 외국어를 더 잘해야 하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해설을 해야 하니까 체력도 좋아야 하죠.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해설사는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영어로 된 우리 역사책을 열심히 읽고 있어요. 손님들로부터 ‘해설이 유익했다, 해설을 듣고 나니 다시 한국과 덕수궁에 오고 싶다’는 말씀을 듣고 싶어요.”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해설이었어요. 칠레에서 온 여대생이었는데, 참 친절했어요. 제가 ‘당신이 내 첫 손님이다, 당신에게 해설하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했더니, 그분도 자신이 제 첫 손님이 되어 영광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언젠가 칠레에 가게 되면 꼭 방문해야 할 명승지를 알려달라고 하자, 종이에 꼼꼼히 적어 주었어요.” 장수영 씨는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진 그 칠레 여대생이 다시 한 번 덕수궁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때보다 더 나은 해설을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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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9 AUTUMN 238

헌책과 이어 온 40년 인연 정보와 지식이 책보다 인터넷이나 SNS로 유통되는 세상에서 비좁은 책방에 헌책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40년째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정병호(Jeong Byung-ho 鄭炳浩) 씨는 만약 아들이 대를 이어준다면, 10년 뒤에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고 한다. 정병호 씨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40년 동안 운영해 온 헌책방 서문서점에서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의 한복판 청계천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시장 건물에 닿는다. 1950년대 헌책방들이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한 평화시장 1층 골목은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책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새 교과서를 구하지 못한 중고등학생들은 헌 교과서를 찾았고, 대학 입시에서 낙방한 젊은이들은 쇼펜하우어와 사르트르의 책을 뒤적였다. 당시 그곳의 헌책방은 200~300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유명한 헌책방 거리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향길에 접어들었고, 지금은 겨우 18개가 남았을 뿐이다. 그곳에서 정병호 씨는 40년째 서문서점(瑞文書店)을 운영하고 있다. “헌책방 거리가 사양길에 접어든 건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과 교과서가 바뀐 게 가장 큰 이유였지요. 그전에는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만든 국정 교과서가 과목별로 하나씩뿐이었고 지방에서 교과서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이곳 헌책방을 찾곤 했는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출판사가 다양한 교과서와 참고서를 내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헌책방이 줄기 시작했고, 앞으로는 더 줄어들겠죠. 지금도 팔려고 내놓은 서점들이 있으니까요.” 평화시장 헌책방 거리에는 한때 200~300여 개에 이르는 서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20개가 채 되지 않는다. 달라진 독서 환경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디지털화하는 사회다. 스마트폰 보유율이 95%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거의 모든 국민이 휴대전화를 소지했다. 한때는 선생님이 되기를 꿈꾸는 초등학생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유튜버가 꿈인 아이들이 더 많다. 이런 변화 속에서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에 발표한 ‘국민 독서 실태 조사’를 보면, 2017년 1년 동안 잡지나 만화가 아닌 문학, 철학 등 단행본 도서를 1권 이상 읽은 성인은 약 60%에 불과했다. 즉 한국의 성인 10명 가운데 4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바빠서’ 그리고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사용하느라’였다. 풍조가 이런 데다 인터넷 서점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할인 판매를 하니 작은 서점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니까 조금이라도 싼 값에 책을 팔 수 있지만, 중소 서점들은 중간 도매상을 통해 거래하니 마진이 더 적어요. 그러니 인터넷 서점들과 경쟁할 수가 없지요. 헌책방 중에도 대형 서점들이 있지만 경쟁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병호 씨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 상인회’의 회장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세상이 변하는 걸 어떻게 막겠느냐면서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할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1990년대 중반쯤 친구들이 철판 사업을 함께 하자고 권했어요. 서점에서 1년 버는 걸 한 달이면 벌 수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고, ‘난 철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책은 좋아한다. 그러니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3개 층을 합쳐 6평 남짓한 서문서점은 안팎으로 발 디틸 틈 없이 책들로 빼곡하다. 그림에 대한 오랜 사랑 그 후 병호 씨는 한 번도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서점에 전념했다. 몇 년 후 경영 부진을 타개해 보려고 서점 간판에 ‘디자인, 인테리어 서적’이라고 써 넣었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깊어서 미술책을 많이 갖고 있었고, 그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요즘 그의 서점에서 판매되는 책 중엔 일반 서적의 비중이 훨씬 높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림과 화집을 좋아한다. 앞으로 10년쯤 더 서점을 운영한 후엔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고 한다. 부인 유설애(Yu Seol-ae 柳雪愛) 씨도 책과 예술을 좋아한다. 부부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는데, 딸은 독일에서 파이프오르간과 지휘를 공부하는 중이고 아들은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다 그만두고 다른 공부를 하는 중이다. 병호 씨는 아들도 책을 좋아하니 서점 주인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말한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혹시라도 서점을 하겠다고 하면 다 줄 거예요.” ‘다 준다’는 말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책들은 물론 점포까지 주겠다는 뜻인 것 같다. 그의 점포는 1층이 서점이고 2, 3층은 책 창고다. 3개 층을 합쳐 6평이니 크지는 않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그만한 규모의 점포가 그리 작은 것도 아니다. “먼 친척에게서 서점을 인수했는데 처음엔 참 힘들었어요. 월세를 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아기 돌 때 선물로 들어온 금반지들을 싸들고 금은방에 가서 판 적도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월세는 제 날에 꼬박 냈어요. 건물주가 월세를 받으러 오지 않으면 제가 출근길에 갖다 드렸지요.” 그러다 1996년 무렵 건물주가 병호 씨에게 점포를 사라고 제안했다. 그가 돈이 없다고 했더니 3천만 원을 빌릴 수 있게 보증을 서줬다. 덕분에 가게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도 그 건물주가 고맙다고 한다. 책을 고르고 포장할 때는 1, 2, 3층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서점을 비우고 창고에 올라갈 때는 손님이 연락할 수 있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가 쓰인 메모지를 쌓인 책들 위에 놓고 간다. 예전에는 단골이 제법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없다. “전에는 필요한 책의 제목을 종이에 써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10여 권의 책 제목을 써 가지고 오시는 분, 제목은 물론 저자 이름과 출판사 이름까지 써오는 분도 계셨어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 손님은 하나도 없고, 가끔 휴대전화로 원하는 책의 표지나 제목을 찍어 오시는 분들은 있어요. 제 서점에는 주로 연세 높은 손님들이 오시는데 옛날 책들은 글씨가 작아서 읽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안타깝지요.” 책과 함께 하는 일상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집 근처 도봉산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를 드린다. 7시 조금 넘어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9시쯤 집을 나선다. 청계천 부근은 주차비가 비싸 버스나 지하철로 출근한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근처 동묘 쪽 골동품 거리에 있는 오래된 헌책방에 들러 책도 구하고, 그곳 책방 주인들과 얘기도 나눈다. 거기엔 헌책방 세 곳이 있다. 때로는 지하철 2호선 잠실나루역 부근에 있는 ‘서울책보고’에 들를 때도 있다. 이곳은 독서 문화 진작을 위해 서울시가 올해 3월에 개설한 시설이다. 헌책 위탁 판매 공간과 북카페가 있고, 기증 도서 전시, 토크쇼, 헌책 경매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헌책 위탁 판매 공간에는 약 30개의 헌책방 부스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서문서점이다. “매스컴에서 서울책보고에 대해 보도해 준 덕분에 시민들이 꽤 찾아와요. 초기에는 더 잘됐는데 요즘은 그때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요.” 헌책방들 중에도 규모가 제법 큰 곳들이 있다. 그런 책방들은 직원이 서울책보고에 상주할 수 있어 판매 실적이 제법 되지만, 병호 씨처럼 혼자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서울시에 책 판매를 위탁하고 판매액의 10%를 수수료로 지불한다. 동묘나 서울책보고에 들렀다가 자신의 서점에 도착하면 보통 11시쯤 된다. 찾아오는 손님은 많지 않아도 병호 씨는 온종일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 서울책보고에 보낼 책을 선별하고, 주문 받은 책도 모아서 부쳐야 한다. 10여 년 전부터 TV 방송국의 드라마 제작국에도 책을 보내고 있다. “드라마에 의사가 등장하면 의사 방의 책장에 의학 관련 책이 꽂혀 있잖아요? 그렇게 드라마 장면에 어울리는 책을 골라 보내는 거지요. 전에는 소품 담당하는 분들이 책도 준비했는데 등장인물의 직업에 어울리는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제가 책을 골라 보내주면 아주 좋아해요. 적을 때는 50권, 100권부터 많을 때는 몇 천 권일 때도 있는데, 얼마 전에는 2천 권을 보냈어요. 몇 년 전에는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 5만 권쯤 보낸 적도 있어요. 매장 하나가 오픈할 때마다 200권쯤 보냈는데 거의 다 소설책이었죠.” “책 읽는 사람들이 줄고 온라인 서점들이 더 커져도 저는 그냥 이렇게 살 거예요. 저는 저대로 일하며 먹고 사는 거지요.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평생 할 수 있겠지요.” 서울 잠실나루역 근처에 있는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독서 문화 진흥을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약 30개의 헌책방 부스가 있어 서문서점의 책들도 이곳에서 위탁 판매되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들 서점에서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성당에서 연락이 오면 바로 성당으로 향한다. 그에게 오는 연락은 대개 교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인데, 그가 연령회(煉靈會) 총무 요셉(Joseph)이기 때문이다. 연령회는 천주교 신자가 선종했을 때 염(殮)에서부터 입관, 장례 미사, 매장 또는 화장 준비에 이르기까지 장례의 전 과정을 맡아하는 신도들의 봉사 단체이다. 병호 씨는 10년째 연령회 총무로 일하고 있는데, 거의 한 달에 두 번꼴로 장례를 치른다. 그럴 때는 서점 문을 닫아야 하지만 기꺼이 달려간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좋은 건 끝까지 하자는 주의예요.” 성당에 달려가야 할 일이 없을 때면 보통 오후 6~7시 사이에 서점 문을 닫고 귀가한다. 저녁을 먹고 교보문고의 인터넷 중고 장터에 판매할 책을 올리고 주문 사항을 확인하다 보면 밤 12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들게 된다. “책 읽는 사람들이 줄고 온라인 서점들이 더 커져도 저는 그냥 이렇게 살 거예요. 저는 저대로 일하며 먹고 사는 거지요.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평생 할 수 있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책과 같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병호 씨는 담담한 수묵화 화집이다. 아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도 아버지를 닮았을 것 같다. 10년 후 그림을 그리는 병호 씨와 서문서점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3대에 걸쳐 92년 동안 뉴욕시를 지키고 있는 스트랜드서점처럼 서문서점도 청계천변에서 92주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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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9 SUMMER 246

‘운 좋은’ 젊은이가 꿈꾸는 행복 한국의 기성 세대에게는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현재의 욕망을 절제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20대는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취업 준비생인 양혜은(Yang Hye-eun 梁惠恩) 씨도 그렇다. 한국의 20대는‘포기하는 세대’로 불린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의 ‘3포 세대’라는 말이 2011년에 처음으로 나왔고, ‘5포 세대’, ‘7포 세대’를 거쳐 2015년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세대라는 뜻의 ‘N포 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20세기 후반 ‘하면 된다’를 모토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기성 세대들 중엔 이런 젊은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젊은 시절 한국과 오늘의 한국은 다르다. 그땐 빠른 경제 성장 덕에 취업이 쉬웠고 더 나은 미래도 꿈꿀 수 있었지만, 몇 년씩 취업 준비생으로 사는 젊은이가 많은 지금 미래 설계는 운 좋은 소수의 특권이 되다시피 했다. 양혜은 씨가 서울 화양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한국어 교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취업 준비생인 그는 집보다 카페에서 일할 때 집중력이 더 높아진다고 말한다. 목표를 위한 여정 20대 중반인 양혜은 씨도 취업 준비생이다. “어르신들은 저희 또래에 대해 안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시지만, 저희들은 사실 그분들 말에 관심이 없어요. 그건 아마 저희가 너무 바쁘기 때문일 거예요.” 혜은 씨는 초등학생 과외부터 카페 직원, 미술관 도슨트까지 별의별 일을 다 해 보았고, 지금도 주중과 주말에 각기 다른 일을 해서 방세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주중에는 미국에서 쓰이는 한국어 교재를 만드는 일을 해요. 말은 ‘재택 근무’지만 주로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죠. 녹음된 한국어를 들으면서 대본과 맞춰 보고, 오자나 탈자가 있으면 수정하는 일이에요.” 주말엔 카페에서 일한다. 계속하고 있는 두 가지 일 외에도 임시 행사 요원이나 사무 보조 등 아르바이트할 일이 들어오면 거의 다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정규직으로 취직해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일 년 만에 그만두었다. 회사가 스타트업이라 뭐든 각자가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는 창의성을 인정해 주면서도 좀 더 짜임새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혜은 씨가 입사를 고려하는 회사들은 자신의 궁극적 목표와 닿아 있는 곳들이다. “저는 창작을 통해 아름다움을 전달함으로써 사회를 이롭게 하는 사람, 비영리 공공예술 활동을 통해 어린이나 가정적으로 힘든 친구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매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는다. ‘가정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된 건 자신의 경험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은 서울에서 살지만, 고향은 제주도고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그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원, 어머니는 주부, 할아버지는 땅부자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도박을 하고 남의 보증을 서서 빚더미에 앉게 됐고, 그로 인해 밭과 땅을 다 잃은 할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져 몇 달 동안 병원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의 싸움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제주도엔 친인척이 많아 이혼을 해도 복잡한 일들이 없어지지 않았다. 사람에겐 아홉 개의 얼굴이 있다는 말도 있듯 혜은 씨는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사람에겐 여러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어 서울의 대학에 가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했으나, 언니들이 적극 지원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님 이혼 후 이제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아주 독립적으로 살았는데, 막상 고시원에서 혼자 살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다 보니 너무나 힘들었어요. 1학년 1학기 땐 골목에 나가 언니에게 전화하며 운 적도 많았어요.” 가장 싼 주거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고시원엔 1~2평짜리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방과 방이 얇은 벽으로 나뉘어 있어 프라이버시가 없다. “2학기부터는 울지 않았어요. 학교 캠퍼스가 넓어 좋고, 배우는 게 즐거운 데다 가족 같은 친구들도 사귀었어요. 서울이라는 도시와 다양한 사람들이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혼자 보내는 시간 혜은 씨의 하루는 오전 8시에 시작할 때도 있고, 11시쯤 시작할 때도 있다.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은 일찍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느지막이 일어난다. 아침은 토스트나 달걀로 해결하고 노트북, 스케치북, 카메라 등이 담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행선지는 거의 매일 다른데 대개 전날 정해 둔다. 청과 도매시장이나 한약재 시장 골목을 돌거나 미술관, 도서관, 공원 등을 찾아 사진을 찍고 메모한다. 그리곤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 한 잔에 크루아상이나 마들렌 하나를 곁들여 먹으며 4시간가량 ‘재택근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보다가 주로 새벽 4시쯤 잠자리에 든다. 예전엔 책을 사서 보았지만 이제는 빌려 보려고 노력한다. “책이 많아지면 이사할 때 불편해서요. 그래도 『빅 이슈』는 거의 빼놓지 않고 사는 편이예요. 콘텐츠가 좋잖아요.” 그림은 사진 찍어 온 것을 그리기도 하고, 핀터레스트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본 이미지나 영화 장면을 그릴 때도 있다. “대학 4학년 때 5개월 동안 영화제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행사 지원을 했어요. 졸업 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전시 기획자들과 창작자들 인터뷰를 많이 했고요. 그전에는 작품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창작자들을 접하면서 나도 직접 해 보고 싶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나흘 저녁엔 구청 사회복지관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수영을 배운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닷가에서 놀았지만 수영은 잘 못한다. 대학 시절 학교에서 호주 브리즈번으로 어학 연수를 보내 주었는데 그때 외국 친구들과 시내 수영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수영 잘하는 친구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며 언젠가 수영을 꼭 배워야지 생각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육체적 움직임으로 생각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제 룸메이트는 저보다 몇 달 먼저 배우기 시작했고 저는 3월에야 시작했는데, 수영을 통해서 좀 더 단순해지고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 계속할 생각이에요.” 혜은 씨에게 룸메이트는 가족과 같다. 지금은 여섯 번째 룸메이트와 사는데, 제주도청이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제주도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처음 만났고, 현재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운영하는 청년주택에서 함께 산다. 각자 방이 하나씩 있고 작은 거실, 욕실, 부엌이 있다. 일인당 방세 26만 원에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과금을 합해서 30만 원쯤 낸다. “룸메이트가 있어서 좋은 점은 무엇보다 집에 대화할 사람이 있다는 거죠. 취침 시간, 청소 습관 등 생활 패턴이 다르면 불편할 때도 있어요. 예전 룸메이트 하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저만 보면 뭔가를 먹이려 했어요. 덕택에 제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나 늘었지요.” 주말에 일하는 카페는 건국대학교 부근에 있는데 사장님이 좋아 2017년 2월부터 지금껏 다닌다. 그에게는 늘 새로운 도전을 하는 여사장님이 우러러 보인다. 사장님은 여러 번 도전 끝에 제과제빵사 자격증과 운전면허도 땄고, 식물도 열심히 가꾸어 카페 입구가 언제나 식물로 가득하고, 요즘은 딸기 라테, 청포도 에이드 등 새로운 메뉴도 연구하고 있다. 혜은 씨는 카페에서 오래 일한 덕에 대부분의 음료를 만들 수 있고 카페라테에 하트도 그릴 수 있지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진 않았다. 취업 준비생들 중엔 자격증을 여럿 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겐 자격증이 하나도 없다.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보통 불안감에 쫓기는데 저는 ‘취업하려 하면 할 수 있다, 불안해하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자’ 그렇게 생각해요.” 작년엔 혼자 인도와 이집트를 여행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3주, 이집트에서 2주를 보내고 돌아오니 저축은 바닥났지만 여행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저축이 없다고 불안하진 않아요. 돈은 취업하면 다시 벌 수 있으니까요. 여행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저를 더 잘 알게 됐기 때문이에요. 매일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까 제 안의 새로운 면이 발현되더라고요. 결론적으로 제가 혼자 매우 잘 지내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창의적인 직업을 얻고 싶어 하는 양혜은 씨에게 전날 정해 둔 행선지를 찾아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기록해 두는 것은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다. “저는 창작을 통해 아름다움을 전달함으로써 사회를 이롭게 하는 사람, 비영리 공공예술 활동을 통해 어린이나 가정적으로 힘든 친구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는 주말마다 건국대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일한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없지만, 2년 넘게 이곳에서 일한 덕분에 지금은 대부분의 음료를 능숙하게 만들어 낸다. 위로와 격려 혜은 씨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리학에 에너지보존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인생엔 “행운 총량 보존의 법칙”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행운은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첫 행운은 늘 그를 지지하고 격려해 주는 언니들이다. 큰언니는 제주대학교 졸업 후 상하이의 복단대학교(Fudan University 復旦大学校)에서 석사 과정 중이고, 작은언니는 제주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다. 세 자매는 오래 전 “절대 결혼하지 말고 서른 살까지 능력을 쌓고, 책임지지 못할 거면 아이를 낳지 말자”고 약속한 적이 있다. 혜은 씨는 “절대 결혼하지 말자고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언니들 중에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 있거든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행운이었다. 그분이 글을 잘 쓴다고 격려해 준 덕에 계속 글을 썼고, 2015년 대학교 휴학 중에 ‘업코리아’라는 칼럼 전문 웹사이트에 영화, 연극, 책 리뷰를 썼다. 원고료는 없었지만 독자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창작과 소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바빠서 못 쓰지만 언젠가 다시 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혜은 씨는 가끔 자기 전에 ‘혜은아 수고했다. 공부와 일, 두 마리 토끼를 좇느라 늘 고생했구나’ 하고 자신을 위로한다. “살다 보면 내리막길도 있고 오르막길도 있는데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래 사는 사람은 많아도 성숙한 어른은 흔치 않다. 혜은 씨는 겨우 스물여섯 살이지만 이미 어른이다. 사람의 성숙도를 정하는 건 과거의 길이가 아니라 자신과 삶에 대한 이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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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9 SPRING 240

신발을 깁고 닦아서 얻은 행복 한때 서울의 골목골목에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던 구둣방이 점차 사라져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구둣방을 30년이 넘도록 홀로 지켜 온 김성복(Kim Seong-bok 金成福) 씨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평화로웠다. 김성복 씨(왼쪽)는 1986년 서울 옥수동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작은 구둣방을 마련한 후 지금까지 일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해 일한다. 인생의 첫 운은 부모에게 달렸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에서 보듯 좋은 부모는 아이가 전쟁마저 놀이로 느끼게 하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녀의 인생을 전쟁터로 만드는 부모도 적지 않다. 구둣방 주인 성복 씨의 어린 시절은 불운하게도 전장 같았다. 그의 고향은 한반도 최남단, 흔히 ‘땅끝마을’로 불리는 전라남도 해남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노름을 좋아했고, 그런 남편을 둔 탓에 어머니는 소금과 생선을 팔며 일곱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홉 살 때는 제무시(GMC) 트럭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 바람에 평생 장애를 안은 채 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차 고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느 날 나락을 실어 나르는 제무시가 고장이 났는지 수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걸 지켜보고 있는데, 운전 조수가 다가와 잔심부름을 해 주면 태워 주겠대요. 그래서 물건도 날라 주고 시동 거는 일도 도와줬어요. 그런데 막상 시동이 걸리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냥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트럭 뒤에 매달렸는데, 그러다가 달리는 트럭에서 그만 떨어졌어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는 “수많은 신발을 닦고 고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일감이 많았던 옛날에는 구두를 닦아서 버는 돈이 훨씬 많았지만, 요즘에는 구두 닦는 고객이 부쩍 줄어들면서 수선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혼자 서울로 간 소년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은 성복 씨에게 “그 다리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지만, 서울에 가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 거다”라며 상경을 권했다. 그 말을 믿었던 성복 씨는 집을 떠나 홀로 무작정 상경했다. 그의 나이 고작 열두 살 때였다. 서울역에 도착해 어디로 갈까 서성이던 어린 소년은 부랑자 두목쯤 되는 사람의 눈에 띄어 ‘찍새’로 일하기 시작했다. 찍새란 서울역 근처 사무실을 돌며 닦아야 할 구두를 수거해 오는 사람을 일컬었다. 그것이 성복 씨가 구두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그렇지만 찍새는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3년 하다 그만두고 신문팔이와 껌팔이를 했다. 그렇게 가족 없이 혼자 서울을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불량한 친구들이 많아졌다. 착실하게 살아 보려고 해도 그런 친구들이 자꾸 찾아와 유혹하니 뜻대로 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를 잡아준 사람이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이유숙(Lee Yu-sook 李柳淑) 씨였다. 그녀도 10대 말에 상경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힘겹게 살고 있었다.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은 2년쯤 교제한 후 성복 씨가 스물셋, 유숙 씨 나이 스물에 결혼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예요.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았지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또 그 사람하고 살고 싶어요. 지난 세월, 그 사람도 나처럼 열심히 일했어요. 도배, 미싱, 파출부…. 쉬지 않고 일했고, 지금도 봉제 일을 하고 있죠.” 성복 씨는 결혼 후엔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일에만 전념했고, 1986년 만 서른다섯 살 때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 아파트 상가 주차장에 작은 구둣방을 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일요일만 빼곤 한 평짜리 정사각형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자신의 가게로 출근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오전 9시에는 문을 열고 저녁 6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성복 씨가 노름꾼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책임감 있는 가장 역할을 하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두 딸은 그에게 세 명의 손자를 안겨 주었다. 이제 그의 삶은 전장을 벗어났지만, 그의 하루는 여전히 군인처럼 규칙적이고 분주하다. 여전히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자신의 승용차로 집에서 30분 걸리는 가게에 출근하는 일과를 거르지 않는다. 구둣방의 어두운 미래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는 구두 한 켤레 닦는 값이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4,000원이에요. 물가 오른 것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죠. 옛날엔 오토바이에 바구니 달고 구두를 걷으러 다닐 정도로 일감이 많았어요.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이 많아서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온종일 바쁘게 일해야 했거든요. 닦아야 할 구두가 가게 앞에 스무 켤레씩 쌓여 있었으니까요. 덕택에 두 딸 대학 보내고 좀 살 만해졌는데, 요새는 구두 신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나도 나이 들어 힘에 부쳐서 오토바이는 안 타요.” 2005년 공무원들의 복장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문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자 구두를 신는 사람들도 차츰 줄기 시작했고, 덩달아 구둣방 문전도 한산해져 갔다. “이젠 아이고 어른이고 다들 운동화처럼 편한 신발을 신잖아요. 그러니까 구두 닦을 일이 없지요. 물론 아직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구두를 닦는 단골손님들이 있지만 많진 않아요. 게다가 요새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다들 차를 타고 다니니까 구두가 잘 더러워지지도 않고, 길도 다 아스팔트 포장이 돼 있어서 더욱 그렇죠. 예전엔 구두 닦아서 버는 돈이 훨씬 많았지만, 이제는 수입의 절반을 수선으로 벌고 있어요.” 그는 손님이 없을 때는 산책하듯 동네를 돌아다닌다. 한곳에서 33년째 구둣방을 하고 있으니 어딜 가나 아는 사람들이다. 그가 부재중일 때 손님이 가게에 찾아와도 걱정은 없다. 손님들이 가게 문에 적힌 그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기 때문이다. 성복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처럼 매일 구둣방으로 출퇴근하며 살고 싶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구둣방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세대의 직업으로 끝날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 중에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조차 없으니까요.” 성복 씨의 말처럼 구둣방은 곧 사라질지 모른다. 오랫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고된 발을 감쌌던 짚신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근대 이전 이 땅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지푸라기를 꼬아 엮은 짚신을 신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었다. 가죽신이나 고무신을 전문적으로 닦고 수선하는 신기료장수는 19세기 말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성복 씨가 태어나 자란 1950년대 시골 장터나 도시 변두리엔 으레 신기료장수가 있어서, 갈라지거나 터진 고무신에 접착제를 바르고 달군 쇠로 눌러 붙여 다시 신을 수 있게 해 주었다. 20세기 초 근대화와 함께 들어온 양화(洋靴)가 널리 퍼지며 고무신은 점차 스님들이나 교도소의 재소자들, 시골 노인들만 신는 신이 되었고, 신기료장수들의 일도 대부분 가죽 구두 수선이 되었다. 그 신기료장수의 후예인 성복 씨가 구둣방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성복 씨의 말처럼 구둣방은 곧 사라질지 모른다. 오랫동안 이 나라 사람들의 고된 발을 감쌌던 짚신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김성복 씨는 구두에 약을 바른 뒤 천에 물을 조금 적셔 문지른다. 그래야 깊이 있는 광택이 나기 때문인데 이런 방법을 ‘물광’이라고 한다. 소박하고 즐거운 삶 “신문팔이, 껌팔이, 다방 주방 청소, 동대문시장 옷가게에서 라벨 찍기, 별의별 거 다 해 봤어요. 이발 기술도 5년이나 배웠고, 창신동 봉제공장 동네 작은 공장에서 여자 기성화 만드는 일도 했었는데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파서 그만두었어요. 여러 일 중에서 구두 닦는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어려서 장애를 얻은 몸인데, 이 일을 하며 참 잘 써먹었지요. 나는 도둑질도 못 하고, 펜대 잡는 일은 더더욱 못 하고, 노는 것도 싫어해요. 언제나 뭔가 일을 해야만 하는 성격이라 이 일이 잘 맞았던 거죠.” 그의 하루는 사계절 내내 다르지 않다. 고작해야 여름엔 7시 반에 퇴근하고 겨울에는 6시에 퇴근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람들을 부추겨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봄철 꽃바람조차 성복 씨를 컨테이너 박스에서 끌어내진 못한다. 어쩌면 그에겐 여행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이래 그의 삶은 늘 먹고 잘 곳을 찾아 낯선 곳을 헤매는 비자발적 여행 같았으니 말이다. 그는 서울 25개 구(區)의 수만큼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그가 살아 보지 않은 구는 고작 한둘뿐이다. “일할 때는 손님 많으면 기분 좋고 손님 없을 땐 쉬고, 집에서는 텔레비전 보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식구들하고 밥 먹고, 그러면 돼요. 일요일이면 아내와 교회에 가지만 거기에 매달리진 않아요. 나는 즐겁게 살아요. 언짢은 일이 생겨도 마음에 잘 담아 두지 않죠. 남한테 줄 거 없고, 받을 거 없고,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다들 내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해요.” 성복 씨의 신산했던 지난 얘기를 듣다 보면 한국의 전래동화 「콩쥐팥쥐」와 외국 동화「신데렐라」가 떠오른다. 가혹한 운명에 시달리던 착한 사람들이 마침내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 고전들에서 악운을 행운으로 바꿔 주는 열쇠가 바로 ‘신발’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는 벌과 복을 내리는 신과 사람들이 신는 신발, 둘 다 ‘신’이라고 발음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네가 신고 있는 신은 확실하다. 신을 믿지 말고 네 신을 믿어라’라는 말이 있다. 또 ‘사람의 운명을 정하는 건 신이지만, 운명을 바꾸는 건 신발’이란 말도 있다. 수많은 신발을 고치고 닦으며 어린 시절의 불운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가정의 가장이 된 김성복 씨가 어느 날 문득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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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8 WINTER 282

태권도의 진정한 즐거움을 가르치는 사람 태권도는 건강한 육체에 바르고 강한 정신을 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국의 국기(國伎)이다. 대한태권도협회 강사이자 연세정훈태권도의 대표인 심재완(Shim Jae-wan 沈載完) 씨는 그런 교육적 책임감으로 지난 3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심재완 관장이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기 전, 초등학생 관원들과 함께 명상 훈련을 하고 있다. 태권도는 육체를 단련시키되 그 힘을 절제하는 정신도 함께 연마하는 무도이다. 지난 5월 30일 세계태권도연맹 한국 대표단이 바티칸 교황청을 찾아 프란치스코 교황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였다. 이 행사는 ‘평화는 승리보다 귀하다(La pace è più preziosa del trionfo)’라고 쓰인 현수막을 펼치며 끝났다. 태권도가 심신 단련을 통해 싸우지 않고 평화를 얻는 것이 목표인 무술임을 강조한 퍼포먼스였다. 한국의 전통 무술을 발전시켜 탄생한 태권도는 한국전쟁 후 널리 보급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사실상 국기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2018년 3월 3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관련 법령의 개정으로 정식 국기가 되었다. 이보다 훨씬 앞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련자가 계속 늘고 있다. 서울에 본부를 둔 세계태권도연맹의 회원국은 현재 209개국에 달한다. 하지만 국내 사정은 조금 달라 보인다. 1970년대 태권도 붐을 타고 도장이 급속히 늘어났지만, 수련생 확보를 위한 ‘유치원화’와 도장 간 과도한 경쟁이 진행되면서 어린이 전용 ‘놀이 체육’과 엘리트 스포츠의 두 갈래로 성격이 변모한 듯하다. “해외에는 건강을 위해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이 많은데, 국내에서는 기능 위주로 가르쳐요. 미국의 수련자 수는 한국의 열 배쯤 되는데 한 도장에 평균 500명, 많으면 2,000명이나 등록한다고 합니다. 외국에선 가장이 퇴근 후 가족과 함께 배우는 일이 흔하지만, 한국의 회사들은 너무 늦게 끝나서 직장인들이 가족과 함께 수련하기는 어렵죠.” 심재완 관장의 말이다. 해외와 달리 태권도 수련자가 점차 줄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의 도장엔 늘 활기가 넘친다. 무도의 기본 정신 “전국적으로 도장에 등록한 수련생이 평균 50~70명이라고 하는데, 우리 도장은 270~280명 수준입니다. 인근 초등학교의 어떤 반에서는 50~70%가 우리 도장에 다닐 정도죠.” 전국에 산재한 약 1만 4,000개의 태권도장 중에서 이렇게 수련생이 많은 도장은 흔치 않다. 심재완 씨가 도장을 시작한 것이 1986년이니 어느새 32년째다. “태권도가 어린이 체육 활동이 되면서 닭싸움이나 피구, 레크리에이션 같은 놀이 체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 치중하는 도장이 많아졌어요. 아이들이 태권도 수련을 힘들어 하니까 놀이로 관심을 끄는 거죠. 그런데 그런 도장에 다니는 아이들은 1년쯤 지나면 절반밖에 안 남아요. 금세 흥미를 잃게 되거든요. 우리 도장 아이들은 보통 5~6년씩 다녀요. 수련을 하면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진정한 무도의 즐거움을 깨닫고 있는 거죠.” 그도 한때는 놀이 체육을 시도할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공인 6단인 사범으로서 무도의 기본 정신을 지키려는 책임감으로 오로지 운동으로만 정면 승부해 왔다. 태권도에는 전 세계 공통의 체계가 있다. 심사를 거쳐 무급에서 10급, 9급 하는 식으로 1급까지 올라가고, 그 다음에는 1단, 2단, 3단으로 계속 승격한다. 다만 ‘단’ 칭호는 만 15세 이상에게 주어지며, 그 이하 연령은 단에 해당하는 실력이어도 ‘품’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도복 위 허리 부분에 매는 띠는 그 등급을 나타내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고, 대개 입문자는 하얀 띠를 매며 검은 띠는 유단자를 뜻한다. 가끔 노란 띠나 빨간 띠 등을 맨 어린 수련생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색깔엔 등급의 의미가 없고 어린이들의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각 도장이 재량껏 만든 것이다. 단을 높이려면 실력과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심 관장처럼 6단이 되려면 5단을 따고 5년이 지나야 6단 심사를 받을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9단이 제일 높다. 4단 이상이면서 국기원에서 실시하는 지도자 교육을 받고 자격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심 관장처럼 ‘사범’ 칭호를 받는다. 도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의 아들은 5단, 딸은 4단이라고 한다. 여학생 관원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멋진 발차기를 보여 주고 있다. 심 관장의 ‘발차기 여행’ 프로그램은 특히 여학생들에게 사기를 올려주고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그는 몇 해째 사진과 영상을 도장 블로그에 올려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 심재완 기획력이 돋보이는 프로그램 심재완 씨는 1962년 충청북도의 한 산골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예닐곱 살 때 옆 동네에 태권도장이 생겼는데, 호기심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 다닐 수 없었다. 나중에 어린 소년의 형편을 알게 된 그 도장의 관장은 무료로 레슨을 해 주었고, 그 덕에 태권도를 접할 수 있었다. 재미를 느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온 후에도 수련을 계속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정 형편을 고려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태권도를 자신의 진로로 선택했다. 졸업과 함께 도장에 사범으로 취직했고, 결혼한 후에는 세를 내서 소규모의 도장을 차렸다. 그 도장을 30년 동안 운영하다가 2016년에 신축 건물의 지하층을 매입해 규모를 넓혔다. 체계적으로 공부가 하고 싶었던 그는 연세대학교 평생교육원 태권도학과에 진학해 1기 졸업생이 되었고,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태권도학과에 들어가 학구열을 이어갔다. 그렇게 이론적인 틀을 쌓아가면서 기획력도 높여 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그의 도장은 그의 남다른 기획력을 증명하는 현장이다. 일반적으로 태권도장들은 9 대 1 정도로 남자 수련생이 많지만, 심 관장의 도장은 남녀 비율이 6 대 4쯤 된다. 심 관장은 그런 특성을 십분 살린 프로그램을 짰다. 보통 한쪽 다리로 서서 다른 쪽 다리를 직선으로 차올리는 발차기는 여자 수련생들이 남자 수련생들보다 두세 배 잘한다. 그래서 ‘발차기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여행지는 서울 시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미국이나 베트남 등 해외가 되기도 한다. 수련생들이 여행지의 자연이나 색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멋지게 발차기를 하면 심 관장이 그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 기록한다. 그는 이 발차기 여행을 위해 영상 제작 기법도 배웠는데, “동영상을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리는 작업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요. 특히 여자 수련생들이 나중에 엄마가 된 후 제가 촬영한 동영상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보여 주며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 그의 기획력을 보여 주는 일이 있다. 한국태권도도구수련원(Korea Taekwondo Tool Training Center) 대표이기도 한 그가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는 ‘도구 수련’이 그것이다. “도구 수련은 다른 사범이 개발했지만 널리 퍼지진 못했어요. 저는 그것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교육에 접목시키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태권도 수련은 사범이 일방적으로 시키는 것이었지만, 도구를 이용하면 수련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엔 다리가 완전히 벌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다리를 사범들이 몸을 눌러서 억지로 벌어지게 하곤 했는데, 도구 수련을 계속하면 아이들이 혼자 할 수 있어요. 처음엔 키 작은 도미노를 차서 넘어뜨리다가 점차 더 높은 도미노에 도전하고, 결국 목표치에 도달하는 거죠.” 처음 도장에 오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가르치고 명상 훈련을 시키는 것도 기본 인성을 키우기 위해서다. 늘 다정한 할아버지 같은 심 관장이지만, 아이들이 자신보다 약하거나 어린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마지막 꿈 그는 매일 아침 8시 반에 일어나 11시쯤 도장에 도착하면 바로 도복으로 갈아입고 사범들과 함께 실내를 정돈한다. 11시 30분쯤 사범들과 식사를 하고 나면 그는 교육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다른 사범들은 초등학교 수련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인근 학교로 향한다. 이 도장에는 두 대의 12인승 미니버스가 있다. 버스를 타고 12시 반에서 2시 사이에 도장에 도착한 아이들은 모두 도복으로 갈아입고 수련을 시작한다. 심 관장의 일과는 모든 수련생이 떠나고 도장을 대충 정리한 후인 밤 10시에서 11시 사이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는 “집에 돌아가 씻고 뭐 좀 먹고 수련생들 사진들을 블로그와 유튜브에 올리다 보면 보통 새벽 1시 반이나 2시쯤 잠자리에 들지만, 숙달돼서 그런지 별로 힘들지는 않다”고 말한다. “좀 피곤하다 싶을 때는 집에서 쉬면서 아이들 발차기 운동하는 사진을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되죠.” 남들이 보면 그의 일상은 태권도가 전부이지만, 그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항상 새로워한다. “처음 도장을 열 때 세 가지 꿈을 가졌어요. 내 집을 마련하는 것, 갖고 싶은 차를 사는 것, 그리고 내 소유의 공간에 도장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죠. 이 꿈들을 다 이루었어요.” 이제 남은 꿈은 단 하나, 현재 50대 후반인 그는 70세가 될 때까지 아이들이 태권도를 하며 잘 자랄 수 있도록 돕고 싶단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현실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보다 정신적으로 약한 것 같아요. 과잉 보호하는 어머니들이 많기도 하고요. 형제자매 없이 혼자 크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양보, 배려, 협동심 같은 것이 없고 툭하면 싸워요. 심지어 배가 불러서 음식을 버릴지언정 남에게 주진 않아요. 늘 받기만 해서 나누는 걸 모르는 거죠.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은 약해졌고, 골밀도와 근력 같은 것도 감소했어요.”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속상하지만 “그럴수록 태권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처음 도장에 오는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가르치고 명상 훈련을 시키는 것도 기본 인성을 키우기 위해서다. 늘 다정한 할아버지 같은 심 관장이지만, 아이들이 자신보다 약하거나 어린 친구들을 괴롭히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는다. “운동으로 몸만 강해지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태권도는 육체적으로 강해지되 그 힘을 절제하는 정신도 함께 연마하는 거예요. 몸을 쓸 줄 알게 되면 행동에 더욱 조심해야 하고, 남보다 세졌으면 남을 도와야지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거죠.” 자기보다 어린 친구들을 괴롭힌 수련생이 받는 벌 중에는 검은 띠를 하얀 띠로 바꾸는 것도 있다. 하얀 띠는 처음 시작할 때 매는 것이니, “네 머리와 마음을 고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 담긴 벌이다. 텅 비었던 도장 안이 도복 입은 아이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심 사범’의 얼굴이 환해졌다. ‘평화는 승리보다 귀하다’라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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