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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조화로운 도시 전주

On the Road 2024 SUMMER

조화로운 도시 전주 한국인에게 가장 전통이 잘 보존된 도시가 어디냐 물어본다면 전북 전주(全州)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특유의 목조건물인 한옥(韓屋)이 유독 많은 도시가 전주다. 하지만 전주는 과거 전통에만 안주하는 도시가 아니다. 잘 보존한 과거 위에 다양한 문화와 혁신을 고루 섞어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조화로운 도시다. ⓒ 셔터스톡 전주한옥마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곳 중 하난 오목대(梧木臺)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평평한 대지 위에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아니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약 30만 제곱미터에 무려 700채가 넘는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주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마을로 손꼽히는 까닭이다. 촘촘히 박혀 있는 기와지붕들은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조선왕조의 시작 오목대가 전망대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자 안에 들어가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 대풍가(大風歌) >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 일자 구름이 흩날리네. 威加海內兮歸故鄉 온 천하에 위풍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사를 구해 천하를 지키랴! 오목대 < 대풍가 >의 주인공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다. 고려(高麗) 말 장수였던 그가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상경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불렀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로 세울 조짐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즉 조선왕조의 시작점이 전주였다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 북촌한옥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한옥보존지구이다.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을내려다보면 빼곡한 기와지붕이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조선왕조와 전주의 연결고리는 오목대만이 아니다. 한옥마을 남쪽 끝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이때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 개국 직후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재위 1400∼1418)이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본향(本鄕)인 전주를 비롯해 평양(平壤)과 개성(開城), 경주(慶州), 영흥(永興) 등 주요 도시에 아버지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다. 그중 전주에 세운 것이 경기전이다. 한복을 입고 경기전(慶基殿)을 산책 관람 중인 시민들. 경기전은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 역할을 했다. 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正殿)은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으로, 경기전의 중심 영역이다. 현재 정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模寫本)이고, 원본(原本)은 정전 뒤 어진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정전 북쪽에 있는 조경묘(肇慶廟)는 태조의 22대조이자 가문의 시조인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사고(史庫)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조선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서,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 사례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하마비(下馬碑)’와 ‘드므(순우리말. ‘頭毛’라 음차하기도 한다)’에서는 옛사람들의 위트가 엿보인다. 하마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하마, 즉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라는 뜻에서 세운 비다. 경기전 정문 앞에 놓여 있는데, 비를 받치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獅子) 또는 해치(獬豸) 모습에서 엄숙함보다 조선 석물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난다. 정전 뜰에 놓여있는 6개의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뒀던 수조들이다. 행여 화마(火魔)가 건물 가까이 오더라도 물 표면에 반사된 자신의 흉측함에 놀라 도망가길 원하는 바람이 녹아 있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하마비 (下馬碑). 뿐만 아니라 500년에 가까운 조선왕조 내내 지금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도 일대를 총괄하던 행정 관청이었던 전라감영(全羅監營), 전주부성(全州府城) 시설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남문(豐南門) 등은 오목대와 경기전, 그리고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의 역사와 전통, 나아가 위상을 상징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전통 속에 녹아있는 교류의 자취 전주에 오로지 수백 년 전의 옛것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의 증거들도 적지 않다.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뚝 서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이다. 한반도 최초의 순교(殉敎) 현장에 들어선 성당으로, 지난 1914년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을 지은 주요 인부들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전동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성당 건축을 위해 중국인 목수 5명과 석공 100여 명이 가마를 설치해 65만 장의 벽돌을 찍어냈다고 한다. 그들을 이끈 인물은 강의관(姜義寬)이라는 이였는데, 쌍흥호(雙興號)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다양한 천주교 관련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라고 하면 으레 조선왕조와 전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곤 하지만, 알고 보면 오랜 교류의 자취도 숨어있다. 1914년 준공된 전주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로마네스크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로, 초기 천주교 성당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전주 하면 중국과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주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의 일이다. 1899년 전주에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군산(群山)이 개항(開港)되며 ‘쿨리(苦力)’라 불렀던 인부를 비롯해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눈에 군산보다 상업과 문화, 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상위 도시였던 전주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정착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지금의 다가동(多佳洞) 차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화교(華僑)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다. 당시 화교들 중에는 해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60%에 달하는 이들은 요식업과 주단포목(紬緞布木)을 거래하는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전통의 도시에 화교의 유입에 따른 문화적 접변(接變)은 특히 요식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화요리(中華料理)’라는 전에 없던 음식들이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화요리는 새 정착지의 식재료를 이용해 현지화되고, 이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의 길을 걷는 특성이 있다. 소스인 춘장(春醬)만 중국에서 왔을 뿐 지금은 한국식 중화요리의 대표주자가 된 ‘짜장면’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주 화교는 그 짜장면에 또 한 번 혁신을 가했다. ‘물짜장’이라는 새로운 음식으로 변주해 낸 것이다. 물짜장에는 춘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기름기 많은 짜장면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손님을 위해 춘장 대신 간장을 주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간장 베이스에 전분을 넣어 걸쭉한 소스를 만든 뒤, 삶은 해물과 밀가루 면 위에 얹은 것이다. 원래의 짜장면과는 전혀 다르게 해물잡탕면에 가까운, 또 하나의 한국식 중화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히트를 친 물짜장은 멈춰 있지 않았다. 또다시 ‘순한맛’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산시(群山市)와 익산시(益山市), 완주군(完州郡) 등 인근 도시로도 번져나갔다. 전주에서는 전주화교소학교(全州華僑小學校) 교장이기도 한 화교 류영백(劉永伯) 씨가 운영하는 진미반점(真味飯店),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보장(大寶莊) 등이 물짜장 명맥을 잇고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화교의 유입은 전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식문화를 진일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불고기나 갈비탕, 잡채, 심지어 순대에까지 들어가는 당면(唐麵) 등 다양한 식재료들이 화교들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식재료와 요리법이 접목되면서 음식문화의 폭발적인 융성을 가져왔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화교와 전주, 화교와 한국을 굳이 구분해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화에는 위아래도, 내 것 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명이든 다른 문명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여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며 발전을 도모해 왔을 뿐이다. 전주는 그와 같은 교류를 품어주는 품 너른 고장이었으며, 그런 교류의 결과가 곧 전주다. 혁신 끝에 탄생한 전주비빔밥 태초부터 당연한 것도 없었다. 비빔밥 역시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색과 맛, 그리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전주비빔밥을 궁중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주비빔밥이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데에도 지치지 않는 혁신의 노력이 있었다. 전주 향토 음식인 전주비빔밥은 전주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전주 비빔밥의 종류는 30여 가지로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현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비빔밥 식당은 1951년 문을 연 ‘한국집’이다. 다만 당시에는 비빔밥이 아니라 ‘한국떡집’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떡과 정과(正果)를 판매했다고 한다. 그 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식사 메뉴로 떡국을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는 떡국이 주로 겨울에만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때 떠올린 것이 사철 장사가 가능한 ‘뱅뱅돌이’였다. 뱅뱅돌이는 전주지역에서 비빔밥을 일컬었던 말로, 주걱이나 숟가락으로 뱅뱅 돌려가며 밥을 비비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대형 그릇에 온갖 나물을 넣어 한꺼번에 비빈 뒤, 손님 주문에 따라 1인분씩 덜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전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한학자 고(故) 조병희(趙炳喜 1910~2003) 씨는 1988년에 전주문화원이 발간한 『전주풍물기 (全州風物記)』라는 책에 실은 ‘1920년대 남밖장’이라는 글에서 뱅뱅돌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음식점에 들르게 되면 건장한 일꾼이 커다란 양푼을 손에 받쳐 들고 옥 쥔 숟가락 두어 개로 비빔밥을 비벼 대는데, 흥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빙빙 돌리던 양푼이 허공에 빙빙 돌다가 다시 손으로 받쳐 들고 비벼대는 솜씨는 남밖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경이랄까?” 남밖장은 전주부성의 남문, 즉 풍남문 밖에 있는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은 전주남문시장이라 불린다. 낮 시간대 시장도 인상적이지만 매일 밤 열리는 야시장 때문에라도 여행자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아무튼 남밖장의 이런 뱅뱅돌이를 콩나물과 고사리, 애호박, 표고버섯 같은 채소에 쑥부쟁이와 꽃버섯 등의 계철 채소, 그리고 쇠고기 육회를 얹는 식으로 고급스럽게 재해석해 낸 것이 바로 한국집이었다. 현재 전주에 비빔밥 식당으로 한국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과 밤, 대추 등 영양식 재료를 넣은 비빔밥을 돌솥에 담아내는 하숙영 가마솥비빔밥(전 중앙회관), 밥을 미리 초벌 볶음을 해서 내는 성미당 등도 사랑을 받고 있다. 1950년대초 한국집이 비빔밥을 고급화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비빔밥 식당이 자신만의 변주와 혁신을 이어가며 1960~1970년대부터 이미 ‘비빔밥 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한 곳이 전주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전주 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거의 모든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심지어 2007년 이래 매년 가을이면 전주비빔밥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영화의 거리를 비롯해 전주 곳곳에서 진행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10일간 총 43개국 23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당연한 풍경 너머의 새로운 발견 전주에 가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모순을 극복하며 지탱해 온 조선왕조의 기반에서부터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더욱 풍성한 문화를 살찌워온 역사, 그리고 전통에 기반을 두되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고 변주에 변주,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해 온 한국 사회의 저변을 만날 수 있다. 2010년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세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된 연유, 2012년 세계에서 4번째로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비밀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전주는 역사와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성을 바탕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여행지이다.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On the Road 2024 SPRING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경상북도 예천(醴泉)은 산악 오지인 동시에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물의 고장이다. 또 조선시대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를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도 있다.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예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 한국관광공사 예천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볼 곳이 있다. 회룡포(回龍浦) 전망대이다. 장안사(長安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내성천(乃城川)을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서 흘러온 물길이 180도 휘어지더니 다시 180도를 돌아 나가는데,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이 마치 비상하는 용의 몸짓을 닮았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강들이 만나는 물류망의 핵심   회룡포에서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다. 세 개의 물길, 즉 회룡포를 지나 흘러온 내성천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금천(錦川),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막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주요한 물류 루트지만, 지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물류는 주로 물길로 이어졌다. 수레나 등짐보다 평평한 나룻배나 뗏목을 이용하면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많고 무거운 물량을 상대적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나 뗏목이 못 갈 정도로 얕다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하천 주변 길을 이용하면 되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들의 이름은 ‘주(州)’ 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巛 또는 川)과 그 사이의 하중도(河中島)를 본뜬 상형자로서, 이후에는 마을을 거쳐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로 확장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 한반도 역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 하천을 끼고 탄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예천도 마찬가지였다. 삼강주막이 그 상징이다. 지난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들이 하루에 서른 번 넘게 왕래했던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물류의 중심이자 휴게소, 그리고 식당과 숙소였다. 다만 1934년 대홍수로 근방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삼강주막과 그 옆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그 시절 나그네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을 배추전과 막걸리를 옛 삼강주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주막에서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 과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에게 식사를 해주거나 숙식을 제공하던 건물이다. ⓒ 예천군 예천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에서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 예천군   살기 좋은 마을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을 담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대개 골 깊은 내륙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옥토가 펼쳐져 있고 물류망도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상북도 예천에도 십승지지 중 한 마을이 있다. 삼강주막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십승지지 중 한 곳이다. 마을 안팎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을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지로서 주목을 받아온 금당실마을은 현재 수십 채의 고풍스러운 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옥들은 약 7킬로미터에 달하는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유히 마을을 걷다 보면 이내 왜 이곳이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다. 북쪽은 높은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막혀 있고, 마을 주변에는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주요 도시 간의 이동로에서는 빗겨나 있어 군사상의 중요성은 작아 보이는 위치다. 순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마을 북서쪽 끝에 있는 송림(松林)에서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이 송림에는 900여 그루의 소나무가 800미터에 걸쳐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금당천(金塘川)이 종종 범람하자, 주민들이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힘을 합쳐 조림한 숲이다. 수령이 100~200년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풍광도 뛰어나고 역사성도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같은 봄에는 송림도 송림이지만, 송림 근처 용문사(龍門寺)까지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수놓는 벚꽃길도 일품이다. 금당실마을에 들를 예정이라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한옥에서 숙박하며 송림 산책을 하고, 이어 벚꽃길도 걸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송림의 경우에서처럼 범람과 같은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아가 십승지지 특유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 예를 살펴보기 위해 벚꽃길 중간쯤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마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고택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미로 같이 이어진 돌담길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림도 마을의 볼거리다. ⓒ 예천군 풍요를 바탕으로 꽃피운 문화 초간정은 16세기 조선의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 1591)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심신 수양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계곡 한쪽의 수직 암반 위에 지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모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교차가 큰 봄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신비로움이 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사는 십승지지를 넘어 마치 신선이 노니는 상상 속 이상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초간정이 겉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곳은 권문해가 한반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서재이기도 하다. 이 사전은 고대부터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 인물, 동식물, 설화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모두 20권(卷) 20책(冊)으로 이뤄져 있다. 옛 책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중 ‘권’은 내용 분류에 따른 장(章, chapter)의 개념이고, ‘책’은 오늘날 쓰는 낱개 수량을 뜻한다. 즉 『대동운부군옥』은 20가지의 주제를 20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말이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 1589~1671)이 『대동운부군옥』에서 벼슬을 지낸 이들의 이야기만을 선별해 만든 인물사전식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 곳도 초간정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배상현(裴象鉉 1814~1884)이 형법과 논밭과 관련한 여러 제도와 지리 등을 정리한 『동국십지(東國十志)』를, 박주종(朴周鍾 1813~1887)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1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 등을 잇달아 편찬했다. 그런 면에서 예천은 백과사전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예천의 사대부들은 풍요로움을 향유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타인, 나아가 후세대에 전수하기 위해 애썼고, 실제 이루어냈다. 인공적으로 만든 원림과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 정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초간정(草澗亭)의 모습. ⓒ 예천군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지혜 공동체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절묘한 지혜들도 놀랍다. 예천에는 무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퍼진 가지의 너비가 동서 23미터, 남북 30미터에 달하는 ‘석송령(石松靈)’이라는 거대한 소나무와 그에 준하는 ‘황목근(黃木根)’이라는 팽나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석송령이 한국 최초의 재산을 소유한 나무가 된 연유는 이렇다.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1927년 본인의 토지 6,600㎡를 이 소나무에 상속 등기한 뒤, ‘영험한 소나무’라는 뜻에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식이 없어도 그렇지, 토지를 일가친척이나 친한 이웃 등에게 상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비밀의 실마리는 나무가 소유한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수목은 특정 개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마을에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이웃들이 나무와 토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공공의 번영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뜻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석송령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행여 아래로 쳐진 석송령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돌로 가지를 받치고, 겨울이면 가지에 눈이 무겁게 쌓이기 전에 쓸어낸다.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피뢰침도 설치해 두었다. 그동안 석송령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수십 명에 달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혜택을 받는 청소년들이 있어서이다. 석송령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황목근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5월이면 나무 전체에서 노란 꽃을 피워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팽나무는 보유 토지의 면적이 석송령의 두 배가 넘는 13,620㎡나 된다. 다만 특정 개인에 의한 상속의 결과는 아니다. 마을의 공동재산이던 토지를 1939년 황목근 앞으로 이전등기(移轉登記)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도 임대료가 발생하는데, 마을의 중학생들에게 매년 30만 원 정도씩 장학금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사실 황목근이 있는 금원(琴原) 마을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각 가정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수저씩 떠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의 ‘금원계안(琴原契案) 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貯蓄救助契案) 임원록’ 등이 그것이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나무인 석송령. 나무의 키에 비해 가지의 길이가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을 받쳐두었다. ⓒ 권기봉(權奇鳯) 진정한 십승지지의 요건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는 예천의 남쪽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 ‘말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바위와 흙을 돋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만든 구조물이다. 오랜 옛날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자, 말(言)을 묻어 버리자며 무덤(塚)을 만든 것이다. 본디 모든 싸움의 씨앗은 말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하면서도 들이 넓고 물류망이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십승지지로 이름 높았던 금당실마을과 예천의 곳곳…. 그러나 십승지지는 자연과 지리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십승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을 여행하다 보면 비록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와 관련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 간 싸움이 잦자 싸움의 시작이 되는 말(言)을 묻자는 것에서 시작된 말(言)무덤. 이곳에는 무덤과 함께 말조심을 표현하는 각종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 신중식(申中植)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YecheonCountry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On the Road 2023 WINT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오랜 기간 ‘빨리빨리’가 한국의 주요 이미지였던 적이 있었다. 사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방편이었다. 이 겨울, 당신이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무주군(茂朱郡)을 여행한다면 단편적인 빨리빨리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한국의 숨겨진 단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덕유산은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명산이다. 특히 겨울이면 눈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상고대를 만드는데,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이재형(李在烱) 덕유산(德裕山)은 ‘덕(德)이 넉넉하다’는뜻을 품고 있다. 해발고도 1,614미터의 향적봉(香積峯)을 중심으로 장대한 능선이 남북 방향으로 3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다. 그 속에는 해발고도 1,300미터 안팎의 봉우리들만이 아니라 2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 13개의 이름난 대(臺), 수십 개에 달하는 못(潭)들이 안겨져 있다. 특히 물돌이가 9천 개에 이를 정도로 굽이굽이 흐른다고 하여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르는 계곡은 경치가 빼어나 사시사철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을 추려 ‘구천동 33경(景)’이라 한다. 한국 최고의 겨울 산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덕유산은 곤돌라를 이용하면 정상인 향적봉까지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겨울스포츠와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곤돌라 예약은 필수다. ⓒ 한국관광공사   산의 매력은 두 발로 걸어야 제맛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이 낮엔 햇빛에 살짝 녹는 듯하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다시 얼어붙는데, 이렇게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 나뭇가지 전체가 마치 유리로 코팅한 듯 투명한 얼음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상고대’라 부르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덕유산의 상고대는 다른 곳의 상고대와 달리 훨씬 두껍고 투명하다. 고도가 1,000미터 이상인 데다 습도와 풍량까지 알맞기 때문이다. 상고대가 뒤덮은 나무를 밀치며 걸을 때면 가지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내는데, 직접 들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유산은 한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평소 등산이 익숙하지 않아 산행이 힘들다면, 곤돌라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고도 1,520미터 지점까지 단 20분 만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상부 승강장에서 내린 후 향적봉까지 가기 위해서는 완만한 계단 600미터만 걸으면 된다. 등산 채비가 되지 않았다면, 승강장 휴게소에서 아이젠과 스패츠, 등산 스틱 등의 겨울 산행용품을 대여할 수 있다. 덕유산을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키가 있다. 한국 유일의 국립공원 내 스키장이자, 슬로프 면적이 가장 넓은 스키장인 동시에 제일 큰 표고 차를 보이는 스키장이다.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하이킹을 하든 스키를 타든 왜 덕유산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 산이라 불리는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절경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어느 곳보다 청정한 곳이 덕유산, 나아가 무주다. 예컨대 무주에서는 1997년 이래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매년 여름마다 무주반딧불축제가 열리고 있다. 반딧불이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환경지표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남대천(南大川) 일대에 특히 반딧불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는 1982년부터 천연기념물 3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빼어난 자연환경 반딧불이 탐사와 생태환경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는 무주반딧불축제는 청정환경지표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무주군의 대표 축제이다. ⓒ 한국관광공사 한반도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1960년대부터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정부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다. 이어 1964년 덕유산 남쪽에 있는 지리산(智異山) 근방 구례군민들이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자발적 움직임 끝에 지리산은 1967년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5년, 덕유산 일대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10번째 국립공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덕유산 해발고도 1,300미터 지점에는 낯익은 나무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빼놓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이다. 야외용 크리스마스트리로는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나 전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실내용으로는 아담한 구상나무를 사용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가지 사이사이에 여백이 있어 장식물을 달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용 구상나무는 20세기 초반에 ‘한반도 고유종’으로서의 구상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반도가 원산지다. 그런데 이 친숙한 나무를 언젠가는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013년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 이 나무를 ‘위기종’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멸종된다는 뜻과도 같다. 자칫하다간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이 멸종돼 지구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구상나무의 멸종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응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4년부터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이름으로 산림조성 및 숲가꾸기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주)유한킴벌리(Yuhan-Kimberly, Ltd.)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2021년부터 구상나무 보존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실제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온실에서 6,800여 본의 모종을 키우고 있으며, 그 수를 늘리기 위해 2022년에는 12만 개의 구상나무 씨앗을 수집했다. 덕유산을 비롯해 구상나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이식하기 위해서다. 마치 중요한 데이터를 잃지 않기 위해 백업 작업을 하듯 구상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 등나무운동장은 등나무 넝쿨이 관중석 지붕에 올라타도록 50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 관중석에 나무 그늘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된 경기장이다. ⓒ 무주군 백업의 기원 그러고 보면 무주에는 실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해온 공간이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적상산(赤裳山)에 위치한 사고(史庫)가 그곳이다. 14세기 말~20세기 초 존재했던 조선왕조는 기록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절대 권력자인 왕의 전횡을 막고, 후대에는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다.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 꼽힌다. 심지어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사례다. 이러한 점을 높이 사 1973년에는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기록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 그리고 무수한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백업’ 덕분이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항상 4~5질씩 만들어, 한 질은 수도에 두고 나머지는 여러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냥 보관만 한 것이 아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꺼내 ‘포쇄(曝曬)’라 부르는 작업, 즉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일을 반복했다.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벌어진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전쟁 도중이었다. 무주 남서쪽 약 50킬로미터 거리의 전주(全州) 사고에 있던 것을 제외한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불에 타 버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그 유일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백업하는 것이었다. 재차 5질로 복구해 전국에 분산 보관했는데, 그중 한 곳이 적상산 사고였다. 사고 주변이 절벽이다 보니 적군이 침입하기 어려웠고, 완만한 지대에는 이미 1,5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적상산성(赤裳山城)을 고쳐 지어 보완했다. 다만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은 20세기 초에 서울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익히 이야기한 백업 덕분이다. 태권도원은 경기, 체험, 수련, 교육, 연구, 교류 등 태권도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문 공간이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태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 무주군 무주 여행을 해야 하는 까닭 무주는 관광을 넘어 한국 사회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들이는 노력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다. 읍내 남쪽에는 ‘등나무운동장’이라는 곳이 있다. 500여 그루의 등나무 넝쿨이 철제 뼈대를 타고 올라가 여름에는 관중석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내리는 눈을 막아줄 수 있도록 설계한 운동장이다. 한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건축물을 지향했던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다. 사실 모더니즘 건축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듯 왕왕 위압적인 모습을 보였고, 자연도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鄭奇鎔, 1945-2011)의 생각은 달랐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주인처럼 설 수 있도록 자연을 대하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매년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잎이 돋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앙상해진다. 건축가는 앙상한 가지조차 인상적인 등나무를 이용해 천연의 스타디움이 완성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관중석 가장 뒷줄에 올라서서 운동장 한 바퀴를 걸어본다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무주 등나무운동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무주 여행은 한국의 겨울이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감탄하는 계기를 마련해줄지 모른다. 또 그 매력의 가장 큰 근원 가운데 하나인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여정이 될 것이다. 동시에 ‘빨리빨리’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했을 것 같은 한국 사회가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하고 공존해 왔는지를 발견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무주에 겨울이 왔다. 당신도 어서 무주에 와야 할 이유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가을 정취 가득한 서산에서 찾는 한국, 한국인

On the Road 2023 AUTUMN

가을 정취 가득한 서산에서 찾는 한국, 한국인 지난 2021년 9월 유튜브 Imagine Your Korea 채널에 올라온 ‘Feel the Rhythm of Korea-Seosan’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영상 제목은 ‘머드 맥스(Mud Max)’였는데,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의 2015년 작인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 를 패러디해 만든 것이었다. 영화에서는 사막을 달리는 트럭이 등장하나, 머드 맥스 영상에서는 경운기들이 갯벌을 질주하는 식이었다. 이 영상은 바다에 면해 있는 충남 서산(瑞山)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을 정취 물씬 풍기는 서산으로 분노 대신 기대감을 머금고, 지금 달려보자. ⓒ 서산시 서산을 포함한 주변 지역은 ‘내포(內浦)’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갯고랑들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발달해 있다. 그만큼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差)가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산 북쪽의 가로림만(加露林灣)은 평균 조차가 4.7미터나 되고, 최대 조차는 무려 8미터 안팎에 달한다. 서산 남쪽 천수만(淺水灣)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의 조수간만 차가 내어준 보물 웅도(熊島)는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한다. 웅도와 육지를 잇는 것은 유두교이다. 하루에 두 번 바닷물에 잠기는 신비로운 모습에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해당 다리는 갯벌생태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25년 철거될 예정이다. 세계 수위권에 속할 정도로 큰 조수간만의 차는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해 주는 풍요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2016년 한국 최초의 ‘해양생물보호구역’이자 25번째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2019년 92.04제곱킬로미터 규모로 확대되었을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깨끗한 바다가 바로 가로림만이다. 머드 맥스 영상에서 주민들이 경운기를 타고 내달리는 곳 역시 간조로 드러난 가로림만의 오지리(吾池里) 갯벌이다. 밀물 때는 전어(錢魚)와 우럭을 비롯한 다양한 생선들을 잡을 수 있다. 썰물 때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에서 한국에서 생산되는 감태(甘苔)의 대부분이 여기서 채취되고, 바지락과 새조개를 포함한 다양한 저서성(底棲性) 해산물이 잡힌다.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 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낙지(絡蹄)가 제철이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식탁에 낙지죽이 오른 적이 있는데, 교황이 두 차례나 리필을 요청했을 정도로 호평받으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어민들이 낙지 잡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오지리 갯벌 남쪽에 위치한 중왕리(中旺里)에 가면 된다. 그들은 낙지가 개펄에 만들어 놓은 숨구멍을 찾은 뒤, 작은 삽처럼 생긴 가래를 이용해 최대 1미터까지 파 내려가 잡아 올린다. 원한다면 직접 낙지 잡이 체험도 해볼 수 있다. 낙지 제철인 가을에는 가로림만 곳곳에서 낙지잡기 체험이 가능하다. 특히 오지리와 중왕리 사이에 위치한 웅도(熊島)에서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섬이 6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육지와 단절되었다가 다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 갈라짐’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씩 있으니 바다 갈라짐 역시 하루에 두 번씩 볼 수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유독 큰, 그래서 생물종이 더욱 다양하고 양도 넉넉한 가로림만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다. 다만 오는 2025년쯤이면 연륙교가 들어설 예정이라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채 2년도 남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풍요로움이 초래한 아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노력 서산과 맞닿은 가로림만은 주민들에게 다양한 수산자원을 제공한다. 한편 바다로부터 얻은 풍요로움은 바다 밖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불러왔다. 출몰하는 해적의 노략질로 인해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서산은 동쪽의 산군(山群)과 바다 사이에 들판도 넓게 발달해 있기에 거기서 얻는 소출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선조들이 본격적인 대응에 나선 것은 조선 초인 1416년이었다. 천수만 북쪽의 도비산(島飛山)에서 군사훈련 겸 사냥대회를 하던 조선 3대왕 태종(재위 1401~1418)이 도비산 동쪽에 위치한 해미(海美) 지역이 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단은 곧 실행으로 이어졌다. 1417년에 축성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했다. 그러고는 한반도 중부지역을 관장하는 육군 최고지휘기관인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을 해미로 옮겨와 육상 외에 해상 방어까지 맡도록 했다. 서산이 한반도의 주요한 식재료 공급지로서만이 아니라 명실공히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내기 위한 최전선임과 동시에 최후의 보루 역할까지 짊어지게 된 것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된 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현재 해미 한복판에서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약 1.8킬로미터 길이의 해미읍성(海美邑城) 이 그 증거다. 높이 5미터 안팎의 성벽이 빈틈 없이 둘러쳐져 있고 ‘치(雉)’ 도 2개나 되어, 당시의 삼엄했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데, 꿩은 무언가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면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대가리만 살짝 내놓고 동태를 살피곤 한다. 즉 ‘치’는 성벽 중간중간에 톱니처럼 바깥으로 툭 튀어나오도록 지은 구조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일찍 관측할 수 있도록 하고, 행여 전투가 벌어지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뿐만 아니라 양 측면에서도, 즉 3면에서 공격해 격퇴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해미읍성 안으로 들어가면 수령이 3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를 중심으로 지방 관아인 동헌(東軒)과 출장을 온 관료들이 숙박하던 객사(客舍), 죄인들을 가두어 두었던 옥사(獄舍) 등도 재건되어 있다. 동헌을 왼쪽으로 끼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면 정상에 청허정(淸虛亭)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지금의 정자는 2011년에 재건한 것이기는 하나 해미읍성 일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제격이며, 주변의 소나무 숲은 산책하기에 일품이다. 전북 고창읍성(高敞邑城) 및 전남 낙안읍성(樂安邑城)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온 읍성(邑城)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해미읍성이 제 역할을 했기에 내륙지방은 오래도록 안녕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협력과 상생의 역사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기 위해 오는 10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제20회 서산해미읍성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이후 4년 만의 축제다. 긴 역사만큼이나 더욱 다채로운 행사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두 사찰과 한 개의 마애불에 녹아있는 염원 충남 서산은 문화유산 면에서도 두터운 역사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자연과 조화로움도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곳으로 개심사(開心寺)와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그리고 간월암(看月庵)이 있다. 보물 143호로 등재된 개심사(開心寺) 대웅전(大雄殿). 개심사에 가면 건축예술이 돋보이는 대웅전 외에 심검당(尋劍堂)도 둘러볼 것을 권한다. 심검당은 여러 절을 떠돌며 수행하던 행각승이 머물던 별채로, 자연이 깃든 아름다움을 뽐낸다. 먼저 상왕산(象王山)과 일락산(日樂山) 사이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개심사는 백제 말기인 서기 654년에 창건된 이래 1,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써오고 있는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미학적인 가치로 말미암아 충남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도 일컬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개심사는 사찰로 향하는 여정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사찰 주차장에 닿기 직전 지나는 신창(新昌) 저수지는 일대의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인데, 가을 아침 그곳을 지날 때면 상서로운 안개가 신비감을 더해준다. 잠시 차에서 내려 산책을 권한다. 이후 주차장에서 일주문(一柱門)을 지나면 사찰까지 500미터 남짓한 숲길이 이어진다. 그 끝에서 만나는 첫 풍광은 직사각형 연못 위에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다. 그 옆으로 거울 연못이라는 뜻의 ‘경지(鏡池)’라고 새겨놓은 표석이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물에 비추어 돌아보고 성찰하라는 의미로, ‘마음을 열고 온갖 번뇌를 씻는 사찰’이라는 뜻을 가진 개심사의 이름과 일맥상통한다. 이렇듯 개심사는 화려하지 않아 오히려 돋보이는 사찰이다. 2004년 복장유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280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불(木佛)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 1484년에 고쳐 지은 이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웅전(大雄殿) 등 곳곳에 단아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거처인 심검당(尋劍堂)이다. 옆에 연결돼 있는 부엌 부분만 후에 덧대어졌을 뿐 대웅전과 비슷한 시기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유독 이목을 끄는 까닭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휘어진 통나무를 최소한만 다듬어 세운 기둥 때문이다. 단청도 칠하지 않아 미세하게 벌어진 나무 틈새들에서는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사찰 안팎의 가을 단풍과 함께 어우러져 천년고찰의 중후함과 함께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운치를 더한다. 백제 말기의 화강석 불상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긴 세월 수풀에 파묻혀 있다가 1958년 발견되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오묘하게 변하는 미소가 돋보인다. 개심사의 반대편 산자락에 거대한 암반을 캔버스 삼아 조각돼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역시도 꾸밈 없이 소박해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심지어 범접할 수 있는 저 너머의 누군가가 아니라 내 주변의 장난끼 많은 친구와 같은 익살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른 분위기 변화도 예사롭지 않다. 벽면 부조이기는 하나 양감(量感)이 풍성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보니 시간 흐름에 따라 태양빛이 드리우는 각도가 달라져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더욱이 1,500년 가까이 베일에 싸여 있다 1959년에야 세상에 알려져 국보로 지정된 문화유산이기에 특별함은 배가 된다. 서산마애삼존불이 괜히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게 아닌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서산에 간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머드 맥스 영상에도 등장하는 간월암이다. 천수만 위에 떠 있는 서산의 최남단 섬 간월도(看月島)에 있는 유일무이한 암자(庵子)이다. 이곳 역시 웅도처럼 하루에 두 번 바다 갈라짐이 나타날 때면 약 30미터 폭의 길이 드러나기에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웅도와 차이라면 밀물에 길이 잠긴다 해도 나룻배가 있어 들고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밀물에 잠겼을 때의 모습이 마치 연꽃 같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리는데, 실제로는 밀물 때든 썰물 때든 할 것 없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 질 녘에 간월암에 간다면 그 그윽함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간척의 역사가 곧 한국의 역사 개심사를 비롯한 서산마애삼존불과 간월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 질박한 역사 유산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감정은 옛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깊은 염원이다. 바다가 많은 것을 제공해 주긴 했으나 해난사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전근대 시대에는 해적의 노략질 탓에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옛 서산 사람들, 나아가 한국인들은 그와 같은 도전적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생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음에도 다시 일어섰으며, 독재 시대를 물리치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해 왔다. 그런 면에서 간월암 바로 동쪽에 있는 ‘서산 A지구 방조제(防潮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끝내 그 방조제를 쌓는 데 성공함으로써 착공 15년 3개월 만에 완공한 ‘서산 AB지구 간척지(干拓地)’는 좁게는 서산, 넓게는 한국과 한국인의 면면을 상징하는 바로미터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큰 바다답게 공사가 시작된 1980년 당시에는 간척지 조성을 위한 방조제를 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승용차 크기의 돌을 퍼부어도 초당 8미터가 넘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기 일쑤였다. 공사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공사를 맡고 있던 정주영(鄭周永 1915~2001) 현대건설(現代建設)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고철로 이용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들여온 23만 톤급 대형 유조선이 있었는데, 그것을 끝내 메우지 못하고 있던 마지막 물막이 공사 구간에 바짝 붙여 가라앉히라는 지시였다. 모두가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유속이 잦아든 틈을 타 공사는 순조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길이가 7.7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당시 한국의 전체 농경지 면적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1만 헥타르가 넘는 농경지였다. 단일 농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1년 안팎을 먹을 수 있는 양의 쌀을 재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청정한 바다와 영양 풍부한 갯벌이 선사해 준 충분한 양식, 그리고 공동체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확대하기 위한 노력으로 대표되는 충남 서산. 그러고 보면 서산 여행은 단지 서산의 과거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의 한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주민들이 수산자원을 활용하는 한편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보호를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는 점을, 해미읍성이나 불교 관련 문화유산으로부터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행복도 중시하는 문화를, 그리고 서산AB지구 간척지에서는 그런 역사가 낳은 한국인의 정신까지 말이다. 가을 정취 넘치는 서산은 과거를 통해 한국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여행지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작가

한적하면서도 역동적인 휴양지

On the Road 2023 SUMMER

한적하면서도 역동적인 휴양지 강원도 양양은 그 자체로 종합선물 세트와 같은 고장이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고갯길이 있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걸을 수 있는 트레일이 있다. 역경을 딛고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문화유산 낙산사(洛山寺)가 있으며, 한국 최고의 서핑 성지로도 꼽히는 곳이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이 고개를 넘을 땐 늑장을 부릴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뛰어난 풍광이 여행자를 붙잡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비밀스러운 길을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길을 다소 돌아가더라도 강원도(江原道)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고갯길을 놓치지 말라고 추천하는 이유이다. 아름다운 고갯길과 배려의 건축 설악산은 한국인이 사랑하고 즐겨 찾는 산이다. 설악산의 한계령 이남 오색지구를 남설악이라고 하는데, 주전골은 남설악에서 가장 수려한 계곡으로, 하이킹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수 있으며, 주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고갯길의 이름은 ‘오색령(五色嶺)’이라고도 부르는 ‘한계령(寒溪嶺)’이다. 한계령은 ‘차디찬 계곡을 끼고 있는 고개’를 뜻한다. 실제로 해발고도가 1,000미터가 넘어 근처의 대관령(大關嶺)이나 미시령(彌矢嶺), 진부령(陳富嶺) 중 가장 높은 고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그가 1751년 저술한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추지령(楸地嶺)과 철령(鐵嶺), 연수령(延壽嶺), 백봉령(白鳳嶺), 대관령, 그리고 한계령을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로 꼽았는데, 그중에서도 한계령을 최고라 칭했다. 고갯길 정상에 다다르면 지난 1980년대 초에 들어선 한계령휴게소를 만날 수 있다. 녹음에 둘러싸인 설악산(雪嶽山) 국립공원을 감상하려는 이들의 시선을 가리지 않으려는 듯 처마 선을 유난히 낮게, 그리고 테라스를 길게 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어디에서나 기암괴석 너머 푸르른 동해를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건물은 한계령의 정취를 방해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지붕 높이를 낮췄고, 주변 산세와 어울리게 높낮이를 조절했다. 이런 세심한 고민을 바탕으로 건물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과 그의 후배인 류춘수(柳春秀)다. 한계령휴게소가 그러하듯 김수근의 건축은 배려의 미학이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갑자기 세찬 비바람이 불면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처마 밑이나 내부로 들어와 쉴 수 있도록 1층을 최대한 열린 형태로 설계했으며, 아예 골목길 형태로 만들어 쉬엄쉬엄 지나다닐 수도 있도록 했다. 내부 기둥에 붙어있는 1983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본상’ 수상 동판은 그런 배려심 넘치는 설계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동시에 자연을 대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계곡 하이킹과 온천욕의 조화 주전골 입구에 있는 용소폭포는 높이는 약 10m, 소의 깊이 약 7m로 아담한 규모다. 옛날 옛날 이 소에서 살던 천년 묶은 암수 이무기 2마리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 하다가 수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굽이굽이 내려가다 보면 곧 오색약수(五色樂水) 입구 쯤 자리한 약수터탐방지원센터에 닿는다.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바로 ‘오색약수’와 ‘주전골(鑄錢谷) 하이킹’이다. 서기 1500년경 한 승려에 의해 발견된 오색약수는 하루 용출량이 1,500리터에 달하는데, 그 역사성과 고유성을 인정받아 201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다섯 가지 색깔의 약수를 뜻하는 오색약수라는 이름은 주전골 위쪽에 있던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찰 주변에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특이한 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약수의 이름이 오색약수, 지명은 오색리, 한계령의 또 다른 명칭인 오색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설의 영역일 따름이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얼핏 보면 투명한 약수지만, 입에 대어 보면 산화된 철의 맛이 난다. 실제로 철(鐵) 성분이 유독 많다 보니 오래 두면 산화반응을 일으켜 투명색에서 회색을 거쳐 다갈색에 이어 황토색으로, 최종적으로는 붉은색으로 변한다. 즉 다섯 가지 색을 모두 지녀 오색약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이다. 오색약수는 주전골 하이킹을 하기에 최적의 출발점이다. 오색석사 터에 새로 지어진 성국사(城國寺)와 선녀탕(仙女湯)을 지나 용소폭포(龍沼瀑布)에 이르는 약 3.5킬로미터 거리의 트레일은 당일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왕복 2시간에서 3시간 정도가 걸린다. 걷다 지치면 울창한 녹음 사이로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발을 담가봐도 좋다. 시원함을 넘어 차갑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특히 오색약수에서 성국사까지 이어지는 약 700미터는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어 노약자나 교통약자도 큰 어려움 없이 주전골, 나아가 설악산 국립공원의 정수를 모아둔 것 같은 장쾌하며 압도적인 경치 속으로 녹아들 수 있다. 주전골 근처 오색그린야드호텔에서는 오색약수를 이용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톡 쏘는듯한 탄산 온천에는 탄산과 칼슘, 철 등 인체에 유용한 성분이 풍부해 신경통, 피로 회복, 위장 장애 등에 효과가 있다. ⓒ 오색그린야드호텔 하이킹을 마치고 오색약수로 돌아온 뒤에는 온천욕으로 몸을 풀며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도 추천한다. 최근 리모델링을 끝낸 오색그린야드호텔에서는 오색약수를 이용한 온천욕이나 한국 특유의 문화인 찜질방도 체험할 수 있다. 온천 후 출출해진 배는 오색약수와 호텔 사이에 있는 20여 곳에 이르는 식당에서 채울 수 있다. 이곳에서는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다양한 산채(山菜) 음식과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며 말린 황태(黃太)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여기에 강원도에서 옥수수 알갱이나 더덕 뿌리를 넣어 만든 막걸리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이다.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은 동해에서 떠오른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 중 하다나. 바닷가 석굴 위에 지어져 암자 법당 아래로 바닷물이 쉴새 없이 출렁이며 드나든다.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海水觀音空中舍利塔)에서 시민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낙산사는 빼어난 절경으로도 유명하지만, ‘기도 성지’, ‘관음 성지’라고 불릴 만큼 소원을 빌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바다 낙산사는 서기 671년에 지어진 이래 무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사찰이다. 애초에는 3층으로 지어졌다가 1467년에 7층으로 높여 세운 칠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홍련암(紅蓮庵)은 문화유산과 자연이 어떻게 앙상블을 이루며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사찰을 세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친견했다는 낙산사의 창건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푸르른 동해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절묘한 배치가 인상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 2005년 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산불 탓에 낙산사 건물 중 20여 채가 불에 탔다는 점이다. 의상(義湘)기념관에 전시된‘녹아내린 동종(銅鐘)’이 당시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 파괴와 소실, 그리고 재건을 거듭해온 생명력에서 유추할 수 있듯 2005년의 경험은 슬픔으로만 기억되고 있지는 않다. 녹아내린 동종 맞은편에 전시된 첼로와 바이올린이 그 증거들이다. 당시 불타고 남은 건물의 대들보를 이용해 만든 것들인데,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서피비치는 하조대해수욕장 북쪽에 조성한 국내 최초 서핑 전용 해변이다. 이국적인 풍광과 함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구성되어 있으며, 비치 파티, 캠핑 등도 즐길 수 있다. 서피비치에서는 ‘서프 스쿨’을 운영한다. 초보자부터 중상급자까지 수준별 맞춤 강습이 가능하다. 또 서프 요가, 롱보드, 스노쿨링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낙산사가 정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면, 죽도해수욕장과 인구해수욕장 주변에 즐비한 서핑 숍들은 양양의 동적인 활력을 보여준다. 파도의 규모와 빈도가 적당하고 바닷물이 유난히 맑아 한국 서핑 숍의 약 70퍼센트가 양양에 몰려 있을 정도이다. 하조대해수욕장에는 2015년에 한국 최초의 서핑 전용 해변인 1킬로미터 길이의 서피 비치(surfyy beach)도 생겼다. 7월 말 8월 초의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에는 그야말로 ‘물 반 서퍼 반’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초심자들도 어렵지 않게 강습을 받을 수 있어 며칠 묵으며 배우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는 사이 주전골 같은 산과 계곡이 그립다면 해수욕장 사이에 자리 잡은 죽도정(竹島亭), 또는 하조대(河趙臺) 일대를 산책해보기를 추천한다. 죽도정은 죽도해수욕장(竹島海水浴場)과 인구해수욕장(仁邱海水浴場) 사이에 돌출된 죽도산 위에 있는 정자이다. 주변 암반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전망대에의 조망이 일품이다. 책 한 권 가지고 올라가 그늘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으면 이보다 훌륭한 독서실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조대는 한국 정부가 지정한 명승(名勝) 가운데 하나다. 정자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사 소나무가 아니다. TV에서 공영 방송이 시작되거나 끝날 때 한국 국가인 애국가가 1절부터 4절까지 흘러나오는데, 2절 도입부에 등장한다. 이에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모르는 이가 없는 소나무가 되었다. 물론 유명세가 전부는 아니어서, 그 자체로 독특한 미감(美感)을 뽐낸다. 어떤 면에서는 산과 계곡, 바다, 그리고 문화유산을 아우르는 여행지로서의 양양 그 자체를 대표한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작가

낯익은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성찰

On the Road 2023 SPRING

낯익은 곳에서 발견하는 낯선 성찰 여행의 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풍광을 만끽하는 데 집중하는 이도 있을 테고, 온전한 휴식에서 의미를 찾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나 쇼핑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낯익다고 생각한 데서 낯선 가치를 발견할 때, 익숙하다고 여긴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기쁨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충청남도 부여는 좋은 여행 목적지가 되어줄 것이다. ⓒ 부여군 부여라고 하면 응당 ‘망국의 비애미’가 느껴지는 애달픈 고장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알고 보면 찬란한 문화를 일궈냈던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부여다. 예상과 달리 부여의 진정한 보물들은 낯익고 익숙한 곳 속에 숨겨져 있다. 세계와 교류하던 백제의 창구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6년 5월 3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봉황 뚜껑 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 받침으로 구성되었다. 백제의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이 돋보인다. 금강은 400km 남짓한 길이로 한국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부여 사람들은 부여를 지나 흐르는 금강을 유독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마강은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으로,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상〮하류 16km 구간을 가리킨다. 지금은 금강 하굿둑이 건설돼 유람선 외에는 선박 통행이 자유롭지 않지만, 조선왕조 말기까지도 크고 작은 배가 드나들었다. 심지어 약 70km 하류에 있는 황해 바다로부터도 배가 들어왔고 또 나갔다. 그 핵심 창구가 백마강과 부소산성 사이에 자리한 구드래 나루터다. ‘구드래’라는 어휘는 현재 한국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일본어에 흔적이 남아 있다. 구드래에 어원을 두고 있는 ‘구다라(Kudara)’는 ‘본국’, ‘큰 나라’, ‘섬기는 나라’ 등을 뜻한다. 그리고 동시에 백제라는 국가를 가리키는 낱말이기도 하다. 즉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때로 경쟁하며 때로 협력했고, 멀리 중국이나 일본과는 해상무역 등을 통해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를 살찌웠으며 문화 발전을 도모해갔다. 무수한 무역선이 드나든 나루 이름이 국가 전체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백제가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국토 면적이 비교적 작고 대륙과 연결된 육로가 없었음에도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무려 7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던 원동력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낙화암의 진실 백화정은 부여 부소산성북쪽 금강 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육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의자왕(재위 641~660년) 때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천여 명이 이곳의 절벽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황포돛배를 본뜬 유람선이나 수륙양용 버스 등을 타고 백마강을 주유할 수 있다. 배에 몸을 실으면 30분이 채 안 걸려 고란사 선착장에 닿는데, 그곳에서부터 부소산성산책길이 시작된다. 백제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는 고란사를 지나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마강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백화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낙화암’은 바로 그 아래에 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백제가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3천 명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내려 자진한 곳이라며 부르기 시작한 명칭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약 1천 년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가 무릇 그러하듯, 승리자는 미화되고 패배자는 격하된 탓이다. 12세기 중반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은 “웅대하고 용맹했으며 담력이 크고 결단력이 있었다. … 어버이를 효로써 섬겼고 형제와는 우애가 깊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라 불렀다(雄勇有膽决 … 事親以孝與兄弟以友時號海東曾子)”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은 한반도를 가리키며,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동양의 오성’ 중 하나로 꼽히는 학자다. 즉 의자왕은 왕으로서의 품위뿐만 아니라 성현에 비견될 정도로 인품과 학식이 훌륭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의자왕은 신라의 성 40여 개를 일거에 빼앗거나 외교술로 신라를 고립시키는 등, 탁월한 면모를 지닌 왕이었다. 다만 신라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까지 합세한 대군의 침략에는 버텨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여 함락과 의자왕의 중국 압송 이후에도 백제 부흥군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왕(豊王 623~?)을 중심으로 무려 3년이나 나당 연합군에 항쟁을 이어갔다. 때론 사실과 진실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낙화암이라는 비애미 넘치는 이름 뒤에는 이처럼 끝까지 용맹했던 백제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백제 문화의 정수 만수산 자락에 있는 무량사 극락전은 외부에서는 2층 구조이나 내부는 위아래 구분이 없는 통층 구조의 특징을 보이며,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늘어서서 장관을 이룬다. 융성했던 백제의 모습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누각인 사자루를 지나, 군용 창고와 막사 터, 그리고 계백(階伯 ?~660)과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등 백제의 마지막 세 충신(忠臣)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삼충사’를 지나 부소산성 밖으로 나오면, 멀지 않은 곳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의 깊이와 너비는 실로 깊고 또 넓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지난 1993년 12월 12일 해가 뉘엿뉘엿 지던 오후 4시 반쯤, 능산리 고분군 발굴작업이 어느덧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약 1.20m 깊이의 진흙 구덩이 속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높이가 60cm가 넘고 무게가 12kg에 가까운 대형 향로가 한 기 출토되었다. 출토 이후 채 3년도 안 돼 그 미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였다. 초기에는 그저 중국산 향로가 발굴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만들어지곤 했던 스타일의 향로라는 점, 백제는 불교 왕국이었으나 정작 향로에는 도교적 색채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에서 만들어진 향로임이 분명했다. 큰 틀에서의 모양은 비슷할 수 있으나 능산리 고분군에 딸린 대장간 터에서 발굴된 데다 중국의 향로들과는 달리 금동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래한 현악기인 거문고(거문고는 순우리말로, 한자로는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등이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산 향로와 백제금동대향로는 모양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달랐다. 특기할만한 것은 향로의 뚜껑 부분에 조각된 거문고를 연주하는 악사 주변으로 서역에 기원을 두고 있는 종적(縱笛 피리의 일종)과 완함(阮咸 기타와 비슷한 악기)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에 더해 동남아시아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북(鼓), 북방 유목민들의 관악기인 배소(排簫 팬플루트와 흡사) 등을 연주하는 악사들도 배치돼 있다. 아랍을 비롯한 서역의 향(香) 문화와 중국식 향로 등 외래문화와 전통문화, 불교사상과 신선사상 등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모습도 엿보인다. 이는 백제가 뛰어난 것은 더욱 살리고 한계가 있는 것은 세계와의 교류와 수용을 통해 극복하는 현지화 혹은 자기화에 능했음을 보여준다. 백제금동대향로에 서려 있는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통해 백제의 문화 및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큰 강’이란 뜻을 담고 있다. 백제 시대고증을 거쳐 건조한 황포돛배와 한국 최초로 운행하는 수륙양용 버스 투어를 통해 부여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 왕궁을 재현한 곳이다.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생활문화마을 등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부여군 신동엽 생가와 문학관 1960년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민족시인 신동엽을 기리고자 만든 신동엽 문학관. 시인의 생애와 문학성을 연구하고 신동엽 문학상을 제정하여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백제는 천수백 년 전 과거의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고장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북서쪽으로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문학관이 있다. 1959년에 등단한 신동엽은 10년을 활동하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문단에 남긴 족적은 뚜렷했다. 현대 한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1960년 ‘4.19’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남긴 작품들은 이후 세대들에게 독재를 뛰어넘는 대안적 상상력을 키워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아직은 이루지 못한 꿈이나 언젠가는 이뤄내야 할 과제인 남북통일을 이야기했으며, 당시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던 권위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시인은 요절했지만, 그의 뜻은 이어져야 했다. 유족과 출판사 창비가 기금을 마련하여 아직 독재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던 1982년에 탄압을 무릅쓰고 ‘신동엽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다. 일반적인 문학상들과는 달리 시와 소설 어느 장르에도 국한하지 않고 시인 신동엽의 올곧은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작가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상이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상자를 선정해온 결과, 2023년 3월 현재 제40회 수상자까지 배출해냈다. 이런 그의 정신, 즉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가 더 나아지게 하는 데 문학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 신동엽문학관이다. 그렇기에 문학관은 유미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문단의 한계를 넘어 실천적이며 참여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 시인 신동엽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 고즈넉한 고도의 멋 규암 나루터 일대에 조성된 자온길에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 공방, 식당과 카페 등이 늘어섰다. 과거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이 되고자 자온(自溫)이라 이름 지었다. 백마강 너머 규암 나루터 일대에 있는 자온(自溫)길은 부여 여행의 막바지에 방문하기 좋다. 규암마을은 백마강을 통한 물류가 활발했던 시절 흥했던 마을로, 도시화로 쇠락하면서 빈집이 많아졌다. 자온은 다시 온기가 가득한 마을로 재생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이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신동엽의 뒤를 잇는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과 각종 용품을 만드는 크고 작은 공방들, 로컬 식재료를 이용한 식당과 카페 등을 만날 수 있다. 부여라는 고장이 지닌 여유로운 정서와 푸근하고 편안한 풍경까지…. 자온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느새 백제의 찬란했던 영화로움이 떠오를 것이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 전환의 의미에 눈 뜨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안동이라는 한국의 정신

On the Road 2022 WINTER

안동이라는 한국의 정신 고택과 리조트, 노포와 트렌디한 식당, 목조다리와 최신식 보트 …. 도시 곳곳에 과거와 현재가 한데 뒤섞여 있지만 그 모습이 조화롭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에 취해 걸음을 옮기다 보면 하회(河回)마을과 고택, 그리고 서원에 발길이 닿는다. 그곳에서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다 보면 왜 안동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   하회마을 입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방문한 1999년, 그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근조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잠시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당시 김대중(Kim Dae-jung 金大中, 1924~2009)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안동’이었다. 여왕이 안동으로 간 까닭은? 자신의 73번째 생일에 안동에 도착한 여왕은 배우 류시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담연재(澹然齋)에서 안동 국시와 편육, 찜, 탕, 안동 소주를 곁들인 한국식 생일상을 받았다. 류시원의 생가가 담연재라는 것과 그가 조선 중기 문신인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13대 후손이라는 건 그 당시 뉴스를 보고 알게 되었다. 푸른색 모자를 쓴 여왕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고추장과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산 류(柳) 씨 문중의 고택인 충효당(忠孝堂)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식 예법에 따라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방 안으로 들어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고려 말에 지어진 사찰 건물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알려진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앞 돌탑에서 여왕이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았을 때는 돌탑이 무너질까 봐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마음을 졸였으며, 여왕에게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는 건 소원을 빌어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당시 여왕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우리가 안동이라는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조선이라는 500년 왕조를 흐르는 DNA가 유교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의 핵심 통치 이념으로 선택하는 순간, 한국적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수많은 ‘정서’와 ‘예법’들이 탄생했다. 한국에선 ‘가부장’이라 부르는 남성 중심의 문화나 손윗사람을 존중하는 ‘장유유서’ 문화가 그렇다. 안동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과 서애(西厓) 류성룡이라는 영남학파의 대가들이 태어난 곳이며, 한국 유교의 원형을 간직한 도시다. 또 한국에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내가 여왕의 ‘안동 루트’를 처음 언급한 것 역시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호스트가 고심 끝에 찾아낸 한국 정신의 정수가 안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그 여정의 출발로 정답에 가깝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이 지난 1999년 안동을 방문했을 당시 사진이다. 그녀는 자신의 73번째 생일에 안동을 방문해 한국식 전통 생일상을 받았으며,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을 관람하며 한국 전통문화를 직접 경험했다. ⓒ 안동시청 조선 중기 학자로 퇴계 선생의 제자인 금난수(1530~1599) 선생이 세운 정자인 고산정(孤山亭)은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한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의 정신의 정수 하회마을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됐고, 국보 2점과 보물 4점, 민속문화재 11점 등이 보존된 민속 마을이다. ‘하회’는 물이 돌아 흐른다는 뜻으로 낙동강 상류인 화천이 ‘S’자 모양으로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한다. 이곳은 태극 모양 혹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습을 띠고 있어, 예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땅으로 여겨졌다. 어딜 가나 한국의 오래된 마을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동이 늘 마음에 와닿았던 건 시간이 박제된 거대한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이다. 화경당(和敬堂), 양진당(養眞堂) 같은 고택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면 밭에 가지런히 심어 놓은 열무, 상추가 보이고 대문 앞에 걸린 우유 배달 주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회마을에서 멀리 않은 곳에 앞서 말한 류성룡의 병산 서원(陶山 書院)이 있다. 서원은 교육 기관이다. 공자(孔子 (B.C.551~B.C.479), 맹자(孟子 (B.C.372~B.C.289)에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전국 최고의 ‘1등 스타 강사’가 운영하던 조선 최고의 기숙 학원 정도라 말할 수 있겠다. 영남학파의 두 거장, 서애 류성룡의 제자들이 모였던 곳이 ‘병산 서원’이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성리학(性理學)에 용맹정진했던 곳이 도산 서원(陶山 書院)이다. 병산 서원은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라 평가 받는다. 서원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와 병풍처럼 두른 산이 만들어 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도산 서원은 병산 서원보다 규모 면에서 더 장대하다. 특이한 점은 퇴계 이황이 생전에 강학하던 서당과 퇴계 이황 사후에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 한 공간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서원으로 들어서면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머물며 공부한 서당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직접 볼 수도 있고, 서원으로 올라가면 여러 사람이 모여 강론을 하거나 큰 회합을 개최했던 전교당(典敎堂)에 앉아 안동의 잔잔한 풍경을 관망할 수도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미리 도산서원 선비문화 수련원 홈페이지에서 ‘선비문화 체험’을 예약해 체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선시대의 유생들이 입었던 유복을 입고, 서원과 퇴계 종택, 이육사 문학관 등을 탐방한 후, 은은한 달빛 아래 퇴계 명상길을 산책하는 1박 2일 코스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많다. 1572년 서애 류성룡 선생에 의해 지어진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주변의 빼어난 강산을 품은 경치와 건축미, 서원의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5년 하회마을 입구에 개관한 탈 전문박물관으로,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어 이어오는 하회별신굿탈놀이에 사용하는 탈을 비롯해 한국 탈 250여 점과 외국 탈 250여 점을 소장 및 전시하고 있다. 식도락의 도시 나는 어느 지역을 가든 근처 시장에 들른다. 시장 특유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그 도시의 활력 지수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에는 몇 개의 큰 시장이 있는데, 그중 구 시장은 갈비 골목과 찜닭 골목 그리고 맘모스 제과라는 오래된 지역 빵집 등 미식로드로도 유명하다. 미식가에게 안동은 며칠을 여행해도 성에 차지 않을 전통 음식의 성지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보통의 칼국수보다 면발이 얇아 국물 위에서 나풀거리는 ‘안동국시’를 정말 좋아한다. 부드러운 목 넘김 때문에 꿀꺽꿀꺽 잘 넘어가 평소보다 늘 더 많이 먹게 된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어울려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인 국밥은 한국 식문화에서도 매우 중요하다.제철 무와 한우를 잔뜩 넣어 시원한 맛이 일품인 ‘안동 국밥’ 역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메뉴 중 하나다. 안동은 종갓집이 많아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다. 제사를 지낸 후 남은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골동반(骨董飯), 즉 비밤밥을 먹던 풍습이 있었는데, 평소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비빔밥을 먹을 수 있도록 제삿밥처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헛제삿밥이다. 안동 정중앙에 위치한 전통시장인 구시장에는 안동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안동찜닭집 30여 곳이 몰려 있는 찜닭 거리가 있어 원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관광객에게 유명한 안동 먹거리 중 하나는 안동 찜닭이다. 구 시장은 찜닭 골목으로도 유명한데, 본래는 통닭 골목이었다. 1980년대 프렌차이즈 양념치킨이 유행하면서 상권이 죽자 상인들이 자구책을 찾아 개발한 것이 매콤짭짤한 간장 양념에 윤기가 흐르는 당면과 각종 채소를 넣어 푸짐하게 조리한 찜닭이다. 이는 전국에 안동 찜닭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간고등어’ 역시 바다에서 먼 내륙 지역까지 생선을 상하지 않게 가져오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축적된 안동의 대표적 음식이다. 며칠을 먹어도 즐거울 향토 음식이 즐비하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지역 젊은이들이 고향 음식을 재해석한 ‘안동 고등어 파스타’나 ‘간고등어 버거’ 등은 미식의 쾌락을 극대화한다. 구 시장의 매력은‘올드 앤 뉴’가 다채롭게 섞여 고여있지 않고 흐른다는 것이다. 식사를 든든히 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월영교 산책은 최고의 선택이다. 이곳엔 캄캄한 밤, 강 아래로 번지는 아련한 불빛만큼이나 절절한 ‘원이 엄마’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이곳에서 원이라는 아이와 배 속의 아이를 두고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움, 원망이 빼곡히 적힌 아내의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인과 함께 방문했다면 ‘문 보트’를 타고 월영교 아래에서 낙동강 유람을 하는 것도 추천한다. 특히 이 주위에는 신축 호텔과 한옥 리조트 같은 다양한 숙박 시설과 주토피움, 유교랜드 같은 위락 시설이 밀집해 있어 고즈넉한 고택의 매력과는 전혀 다른 안동을 즐길 수 있다. 월영교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책교로, 팔각정에 오르면 안동댐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다리 아래에서는 형형색색 빛나는 문보트와 전통 배인 황포돛배를 타고 여유를 누릴 수도 있다. 유교랜드 Confucian Land 전통과 현대의 교류 얼마 전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왔다. 나는 그곳에서 한때 화려했지만 낡아가는 도시의 흥망성쇠를 본 듯했다. 과거와 다를 것 없는 ‘화산 쇼’나 ‘분수 쇼’는 마치 초췌해진 중년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하던 시저스 팰리스 호텔이나 벨라지오 호텔 역시 기력이 다한 것 같았다.여전히 관광객은 많았지만, 급격히 노쇠한 이 도시를 떠올리자 안동의 변화된 모습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처음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한 건 20여 년 전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 돈을 받는 매표소나 마을 입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같은 편의 시설도 없었다. 하지만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한국관광공사의 영문 슬로건이 실감 날 정도로 마을은 (둘러보기 편한 방식으로) 완벽히 재편돼있었다. 특히 마을 입구로 가기 전 ‘하회세계탈박물관’은 메인 음식을 먹기 전 입맛 돋우는 애피타이저처럼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웃는 얼굴의 하회탈(국보 121)과 다양한 세계 민속 탈이 장식돼 있어 흥미로웠다. 나는 안동을 둘러보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특징이라 생각했다. 머물지 않고 움직이는 것,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 개선점을 찾는 것 말이다. 오래된 길 위에 낡은 노포와 트렌디한 레스토랑이 어울려 있고,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고택을 옮겨 현대식 한옥 호텔로 부활시키는 역동성 말이다. 한국은 결코 잠들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는 다양한 맥락으로 읽힐 테지만, 나는 그것이 이 작고 고요한 동방의 나라를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힘이라 믿는다. 안동은 그런 의미에서 전통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도시다.   백영옥(Baek Young-ok 白榮玉)소설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강릉을 보는 세 가지 시선

On the Road 2022 AUTUMN

강릉을 보는 세 가지 시선 강릉을 단순히 바닷가 도시라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그곳엔 시대를 앞서간 문인들의 문학이 있고,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화폐 모자가 태어난 고장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향긋한 커피 향이 퍼지는 도시다.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이후 저마다 맛을 차별화 한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첫 강릉 여행에서 동생과 서로의 신발을 경포대 모래밭에 파묻고 놀다가 잃어버린 적이 있다.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문인인 정철(鄭澈, 1536~1593)이 “십 리나 펼쳐진 흰 비단”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끝없는 해안가 중 어느 곳에 신발을 묻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파도를 보며 발을 구르던 기억이 난다. 해 질 무렵이라 신발 사는 걸 포기하고, 저녁 내내 맨발인 채였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 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간질이던 따뜻한 모래알 때문이다. 그날 강릉의 모래가 마치 강릉의 살갗처럼 느껴졌다.   조선 중기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은 아름다운 용모에 문학적 자질까지 뛰어났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그의 작품 213수 중 128수는 세상을 떠나 신선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고 있다. 느리게 걷는 여행 작가가 되고 난 후, 강릉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Heo Gyun 許筠, 1569~1618)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생가였다. 허균은 그의 소설에서 세상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인 ‘율도국’을 꿈꾸던 조선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나는 성격이 곧아서 남이 틀린 짓을 하면 참고 보지 못하고, 속된 선비들의 멍청한 짓은 비위가 상해 견딜 수 없었다”라고 말했고, 올곧은 성격이 문제가 돼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그는 성리학 이외에 다른 학문이 설 자리가 없던 조선에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고, 서산대사 같은 승려들과도 교류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건 누이의 재능을 알아본 그의 혜안이었다. 그는 27세에 요절한 누이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녀가 쓴 시를 모아 유고 시집을 냈다. 이는 조선시대엔 극히 희귀한 일이었고, 허난설헌의 시집은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許筠•許蘭雪軒 記念公園)에는 경주 삼릉에 비견할 만한 소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한 눈에도 수백 그루는 될 법한 소나무에 일일이 번호가 적혀 있는 게 신기해서 소나무에 걸린 숫자를 하나씩 헤아리다가, 590번째 소나무 근처에서 강릉 바우길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났다. 찾아보니 ‘바우(BAU)’는 강릉 말로 바위라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손으로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쓰러져 가는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능력이 있는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과 같았다. 이 길을 치유의 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바우길은 대관령에서 해안, 옥계에서 주문진, 강릉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17개 구간 총 280km의 장대한 길이었다. 걷기에 좋은 날이라 작정하고 걸어보기로 했다. 얼마 안 돼 홍길동 조각상이 놓인 다리 하나를 만났고, 허난설헌이 쓴 시 「죽지시(竹枝詞)」가 새겨진 기념비가 보였다. 우리집은 강릉땅 갯가에 있어(家住江陵積石磯) 문 앞 흐르는 물에 비닷옷 빨았지요.(門前流水浣羅衣)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朝來閑繫木蘭棹)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지요.(貪看鴛鴦相伴飛) 시 한 수 읽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갈대밭을 낀 커다란 현대식 건물이 아르떼 뮤지엄(ARTE MUSEUM)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진 찍기에 지금 이곳보다 핫한 공간은 없다!”라는 리뷰와 함께 최근 MZ 세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근처에 있었다. 예약 없이 보기 힘든 전시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입장 대기 줄이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전시관에 들어갔다가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는 관람객들의 손들이 어두운 전시관 안에선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였다. 눈앞까지 덮쳐오는 빛과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 또한 이곳에선 일종의 행위 예술처럼 느껴졌다. 제주, 여수에 이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 전시관 내 천둥(THUNDER)은 이곳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천둥의 가운데서 거대한 번개를 경험할 수 있다. ⓒ 아르떼 뮤지엄 허균의 생가터에 있다가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뮤지엄에 오니 ‘올드 앤 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 미디어 아트 속을 걷다 보니 눈앞으로 쏟아지는 폭포와 파도 안에 갇힌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전설 속의 백호랑이를 마주한 밀림 속 방랑자가 되었다가,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여행자가 되기도 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던 건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수백 장의 사진이 증명한다.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뮤지엄을 나온 후 다리 끝에서 만난 광활한 물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사실이었다. 강릉을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가 바다와 함께 있는 풍경이 놀라웠다. 바닷물이 해안의 모래를 밀어 생긴 둑 모양의 사주가 바다를 차단하면서 생긴 호수를 ‘석호’라고 부르는데, 강릉의 경포호가 바로 석호다.걷는 속도로 본 세상은 가장 아름답다. 달리거나 뛸 때는 볼 수 없었던 무수한 풍경이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포가시연습지와 날아든 작은 나비와 풍뎅이도, 시간에 따라 너울대는 긴 그림자와 그늘을 바라보는 일 역시 걷는 속도에 따라 머문다. 바쁜 일상이 아닌 한적한 여행에서 느린 걸음이 주는 선물이다. 경포가시연습지는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의 복원작업이 성공하여 군락을 이룬 곳이다. 습지와 습지 사이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달을 포함한 다양한 희귀조류 철새들이 찾아온다. 검은 대나무의 집 한 나라를 상징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캐나다의 단풍나무나 브라질의 삼바, 프랑스의 에펠탑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화폐라고 생각한다.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 중 가장 큰 단위인 100달러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최고액권인 5만 원에는 누가 있을까? 바로 신사임당(Sin Saimdang 申師任堂, 1504~1551)이 있다. 우리나라 화폐 속 인물은 총 다섯 명인데 그중 두 명이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영의정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말하자면 세계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모자 화폐 인물인 셈이다. 1972년 율곡이 오천 원권 화폐 인물로 채택된 후 그가 태어난 집, 오죽헌(烏竹軒)은 화폐의 한 자리를 지금까지 꿰차고 있다. 오죽(烏竹)은 수피가 검은 대나무의 일종으로 오죽헌은 뜰 안에 오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후 1998년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면서 강릉의 변천사와 역사, 문화, 유적 등 볼거리가 풍성해져 연간 80~90만 명의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오죽헌으로 향하는 입구에 선 사람들이 율곡과 신사임당의 화폐 기념물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연인은 화폐 전시물 앞에서 준비해온 5만 원과 5천 원을 꺼내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유명인의 생가를 둘러보는 일은 그 인물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비가 온 직후 오죽헌의 검은 기와와 초록의 숲은 그 색이 한층 짙어져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청량한 검은 대나무 소리는 더위를 식혀 주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모자는 국내 화폐 중 5만 원권과 5천 원권에 삽화된 인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셔터스톡 오죽헌은 집 주위로 검은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까마귀 '오(烏)’와 대나무 ‘죽(竹)’ 한자를 사용해 이름 지어졌다 커피의 도시 강릉의 커피 거리는 1980년대, 작은 어촌마을 안목(Anmok 安木)에 생긴 최초의 자판기에서 시작됐다. 안목항에 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판기 커피가 유독 맛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안목 해변 도로에 하나둘 자판기들이 생겼다. 자판기 주인들은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커피 맛을 차별화했고 이를 설명하는 빼곡한 안내문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수십 대의 자판기 사이로 카페가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외국인들도 자주 찾는 강릉의 대표 커피 거리가 되었다. 경포대 일대는 1982년 지정된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분리된 경포호와 송림, 흰 모래, 푸른바 다가 조화를 이루는 경포해수욕장은 동해안 최대 해변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태어난 세대에겐 강릉을 대표하던 것이 경포대와 같은 바다였다면, MZ세대에게 강릉은 커피의 도시다. 인구 2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에 500여 개에 이르는 카페가 있다. 카페 ‘보헤미안 박이추’는 강릉의 커피가 유명해지게 된 시발점이다. 한국의 커피 역사를 말할 때 박이추(朴利秋)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 건 그가 생두에 열을 가해 볶는 로스팅을 처음 시도했기 때문이다. 로스팅의 단계에 따라 커피 맛과 향이 달라지는데, 특유의 쓴맛 때문에 커피를 거부하던 사람들도 커피를 ‘맛’을 넘어 ‘향’으로 즐기는 법을 알게 되면서, 그의 커피는 점점 유명해졌다. 혜화동과 안암동에 처음 문을 연 카페 보헤미안은 2001년 갑자기 강릉의 경포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에 분점을 내는 대신, 지방을 선택한 건 파격적이었다. 늘 내 관심을 끄는 건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택 하나가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는 일이다. 미국의 포틀랜드가 뉴욕이나 LA 같은 도시의 복잡함에 질린 사람들의 안전지대가 됐던 것처럼 박이추에게 강릉은 자신을 품어줄 완벽한 도시로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강릉에 가면 기념품을 사듯 커피 전문점에 들러 원두를 구입하고 대형 로스팅 기계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또 커피 박물관 커피키퍼에 들러 커피의 역사와 다양한 품종의 커피나무를 관찰한다. 야근을 거듭하는 밤에는 잠을 깨기 위해 달콤한 믹스 커피를, 아침 출근길에는 아메리카노를, 낮에 졸음 밀려오거나 허기를 느낄 때면 라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됐다. 이러한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세계에서 도시 대비 가장 많은 카페가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한 잔에 담긴 커피가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문화와 도시를 만든 셈이다.

엔진은 웅웅거리고……

On the Road 2022 SUMMER

엔진은 웅웅거리고……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거제도는 대한민국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임진왜란, 한국전쟁의 뼈아픈 흔적이 세월 속에 고스란히 새겨진 곳인 동시에 아름다운 바다 경치와 풍광을, 그리고 시대의 예술가들을 품은 곳이기도 하다. © GEOJE CITY 지난봄 일기 예보에서 남쪽은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내 얼어 있던 마음이 스스르 녹았다. 그리고 내 기억 속 거제도의 어느 해안 도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때를 놓치면 묵직한 꽃 터널도 그 아래 어른거리는 꽃그늘도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꾸리고 해가 뜨기 전에 차에 올랐다. 네비게이션은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약 네 시간 반이 걸린다고 안내했지만, 쉬엄쉬엄 가면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차에서 들을 만한 음악을 평소에 넉넉히 골라 놔 다행이었다. 는 플레이 리스트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곡이다. 오래되었지만 아직 훌륭한 머슬카,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며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 보는 내용이다. 엔진은 웅웅거리고 아픈 기억은 떠올라(Engines hum and bitter dreams grow) 그랜 토리노에 붙들린 마음(Heart locked in a Gran Torino) 외로운 리듬으로 밤새 고동치네(It beats a lonely rhythm all night long) 이 노래는 동명의 영화에 삽입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중 하나로듣고 있으면 내 차도 그랜 토리노가 되어 나를 달래 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Walt Kowalski)는 한국전쟁(1950~1953) 참전 용사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며 독불장군인 데다 참전 후 트라우마로 사람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다. 그도 거제도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거가대교가 완공되면서 부산~거제간 거리는 140㎞에서 60㎞로 단축되었으며, 이동 시간도 2시간 30분에서 30~4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 gettyimagesKOREA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 거제도는 부산광역시와 통영시를 각각 동쪽과 서쪽에 두고 있는데 섬이긴 해도 오래전부터 배를 타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서쪽의 통영시 쪽으로는 1971년 준공된 거제대교와 1999년 개통한 신거제대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2010년에는 거가대교가 완공되어 부산 쪽으로도 육로가 열렸다. 통영과 연결된 두 연륙교 아래의 해협은 암초가 많고 수로가 좁아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무신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이곳으로 적선을 유인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의 날개를 닮은 진법을 펼쳐 적군을 호쾌하게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아무리 호쾌한들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닐지. 거제도에 새겨진 전쟁사를 거론하자면 한국전쟁 때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던 일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50년 9월, 유엔군은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이후 수많은 포로들이 생겨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 고현‧수월 지구를 중심으로 총 1,200만㎡의 부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51년 2월 포로수용소 업무를 개시하여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의용군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했는데, 그중에는 300여 명의 여자 포로들도 있었다.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로 조성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전쟁 역사의 교육장이자 관광명소가 되었다. 영화 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최대 규모인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수용자로 댄스단을 구성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NEW 이 포로수용소 유적을 기념하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제네바 협약을 접하게 된다. 전쟁에서의 인도적 대우에 관한 기준을 합의한 국제 규약이다. 특히 1949년에 합의된 제4협약은 포로들의 인권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협약이 처음으로 적용된 때가 한국전쟁 시기다. 유적 공원 초입의 전시실에는 수용소가 포로들의 인권을 위해 애쓴 여러 사례들이 선전돼 있었다. 특히 수용소 내 배식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던 사정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로들이 아무리 배려 받았다고 한들 전쟁 중이었다는 건 명백하다. 그들은 고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를 어떤 섬에 고립된 채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이따금 대외 선전을 위해 평화롭고 즐거운 모습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소설가 최수철(Choi Su-chol, 崔秀哲)은 거제 수용소의 포로들이 스퀘어댄스를 췄다는 사진 자료를 접하고 연작 소설 『포로들의 춤』(2016)을 썼다. 연출가 김태형(Kim Tae-hyung, 金泰亨)은 같은 소재로 뮤지컬 (2015)를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영화감독 강형철(Kang Hyoung-chul, 姜炯哲)은 이 뮤지컬을 각색하여 (2018)를 찍었다. 전시에 붙잡혀 온 공산주의자들이 적국의 민속춤을 과연 자발적으로 연습해서 췄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유 보도 사진 작가 그룹 매그넘 소속의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 1952년에 찍은 한 사진에서는 연병장을 돌며 춤을 추고 있는 포로들이 기이하게 커다란 가면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적의 춤을 배웠다는 것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아직 공산주의를 고수하며 고향으로 송환될 날만 벼르는 동료 포로들에게 린치를 당하거나, 당장의 위험은 없더라도 나중에 사진이 퍼지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포로들의 춤』과 와 에서 이런 해석을 엿볼 수 있다. 한때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이들에게 그 이상 무엇을 베풀어야 하며 어떻게 통제하고 교화하란 말이냐고 물을 수 있다.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이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로서 달리 할 말은 없다. 그저 제발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나 그 비슷한 위협과 폭력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거제도에는 모래보다 흑진주를 닮은 몽돌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이 많다. 바닷물이 밀려왔다 몽돌 사이로 빠져나갈 때면 ‘자글자글’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는 한국 자연의 소리 100선에 선정됐다. © gettyimagesKOREA 이번엔 임진왜란의 수많은 해전 중 유일한 패배지, 칠천도로 향했다. 기념관 마당에 서서 물살을 바라보며 한숨을 몇 번쯤 내쉬었다.20분 정도 거리에는 옥포가 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왜군과 싸워 승리한 곳이다. 나의 ‘그랜 토리노’는 전쟁의 흔적을 따라 나를 이끌고 있었다.   두 개의 큰 섬으로 연접한 해금강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해금강 사자바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일 년 중 3월과 10월에만 볼 수 있는 비경이다. © gettyimagesKOREA 몽돌 해변 거제에는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이 많다. 남동쪽에 있는 학동 흑진주 몽돌 해변도 그중 하나로 연중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오랜 세월 갯바위가 파도에 부서져 돌덩어리가 되고, 돌덩어리들이 닳고 닳아 주먹 크기의 둥글둥글한 몽돌이 되었다. 바위가 몽돌이 되기까지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내 삶의 길이는 순간이나 다름없다. 전쟁도 그 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정말 흑진주처럼 까맣고 반질반질한 몽돌들이 햇살을 튕겨 냈다. 해변을 가득 메운 몽돌은 파도가 칠 때마다 서로 부대끼며 아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만큼 파도의 거친 힘을 흩어 버리고 있다는 뜻이다. 모래사장과 달리 몽돌은 바닷가 주민들을 보호해 주는 기능이 있다. 이 해변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성난 파도가 기승을 부리다 간 어느 날, 해안의 몽돌들이 모두 사라지고 모래만 남아 있었다. 주민들이 이 기이한 현상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다음 날 거짓말처럼 몽돌들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 짤막한 이야기에서 이곳 사람들이 몽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기념 삼아 하나둘씩 챙겨가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흔적도 꽤 보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몽돌 해변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어느 사연이다. 지난 2018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 사무소로 소포 하나가 배달됐다. 그 안에는 몽돌 두 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 놀러 왔던 한 소녀가 기념으로 몽돌을 가져갔다가 엄마의 설명을 듣고 크게 후회해 돌려준 것이었다. 과태료나 벌금을 물리겠다는 경고판보다는 진심이 담긴 소녀의 편지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관광객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까? 해변을 둘러보다가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해금강을 보기 위해서다.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인데, 1971년에 일찌감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2호가 되었다. 정부가 지정한 129개의 명승 중 도서 및 해안 형은 딱 15개가 있는데 그중 2개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거제 지구에 몰려 있다. 이곳의 바다 경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해 주는 증거다.   서양화가 양달석(梁達錫, 1908~1984)은 동심이 깃듯 향토적인 그림을 많이 남겨 ‘소와 목동의 화가’라고도 불렸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인 청마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태어난 곳에 세워진 기념관으로, 청마의 문학과 삶의 자취에 대한 기록을 관람할 수 있다. 거제가 낳은 예술가들 해금강의 위용을 가슴에 새기듯 담고 항구로 돌아와서 다시 길을 잡았다. 국내1세대 서양 미술가 중 한 명인 양달석(Yang Dal-seok, 梁達錫, 1908~1984)과 한국 시단의 큰 기둥, 유치환(Yoo Chi-hwan, 柳致環, 1908~1967)을 만나러 가야 했다. 두 사람이야말로 죽어서 해금강의 우뚝 솟은 바위들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먼저 도착한 곳은 양달석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 성내 마을이다. 그의 작품으로 벽화를 곳곳에 그려 놓아 그림책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목동과 소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 많았다. 그림 속 아이들은 바지가 흘러내려 볼기가 훤히 드러나는데도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닌다. 물구나무를 서거나 허리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도 있다. 그 행동과 표정들이 무척 해학적이다. 소는 게으르게 풀을 뜯고 있고 산천초목은 푸르며 모든 것이 평화롭다. 화가가 그려 낸 세계는 어째서 저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가. 양달석은 아홉 살 때부터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서 소와 친해졌다고 한다. 꼴을 먹이다 소를 잃고 돌아와 크게 야단맞은 날이 있었는데, 밤새 산을 뒤지며 찾아다니다 잃은 소를 발견했을 때는 소의 다리를 붙들고 오래 울기도 했단다. 그런 아픈 기억들이 아무런 걱정과 근심이 없는 세계를 꿈꾸는 화가를 만든 건 아닐까. 청마기념관은 피안을 꿈꾸던 또 한 명의 거제 출신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현실이 고될지언정 시 안에서는 의지를 일으켜 세웠던 유치환이다. 그의 대표작 「깃발」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구절이 나온다. 바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문학 수업에서 역설법을 설명할 때 반드시 예로 든다. 그가 거제를 노래한 시 「거제도 둔덕골」이 기념관 마당의 시비에 새겨져 있었다. 시는 여러 행에 거쳐 고향 마을의 각박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다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해 뜨면 밭 갈며 어질게 살다 죽겠다”라고 약속한다. 보통 사람의 여유와 포용력이 아니다. 푸른 말을 뜻하는 그의 호(號) ‘청마(靑馬)’가 이 섬의 산야를 누비는 상상을 해 본다. 엔진은 웅웅거리고……. 버릇처럼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내게는 과연 몽돌 한 개만 한 여유와 포용력이 있을까? 나의 ‘그랜 토리노’가 엔진을 웅웅거려 대답해 줬다. 그런 질문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On the Road 2022 SPRING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두 개의 큰 강의 발원지이자, 두 국가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땅 영주에는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는 굽고 낮은 다리와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뜬 바위가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숨겨진 깊은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보물 같은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 경상북도 영주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맑은 시내가 합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1979년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이 긴 외나무다리가 물길이 동네를 휘감아 돌아 섬이 되어버린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어쩌면 옛날 영주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시는 한반도의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가장 위쪽에 있다. 강원도와 맞닿아 있는 북동쪽으로는 태백산이, 서쪽 경계선을 길게 공유하고 있는 충청북도 쪽으로는 소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영주 사람들은 북쪽을 가로막은 저 높은 산들의 건너편이 궁금했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닷가에서부터 세계의 넓이가 궁금한 타지 사람들도 끊임없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상상과 경험을 나누었으리라. 남쪽에서부터 영주로 모여든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물길을 생각해봤다.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이다. 나는 영주에 반드시 그 발원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보를 찾아봤다. 짐작대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에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기사에서 ‘순흥’이 바로 영주 일대의 옛 이름이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다. 영주에는 낙동강뿐 아니라 한강의 여러 작은 발원지들 가운데 하나도 있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정보였다. 한반도 남쪽의 중요한 두 강이 모두 이 곳에서 흘러나왔으니 영주는 세상의 시작이기도 한 셈이었다.오후 늦게 서울을 벗어나 두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죽령터널 입구가 보였다. 죽령터널은 소백산 아래를 뚫어 충북과 경북을 이은 4,600미터짜리 긴 관문이다. 터널 저쪽이 바로 영주라는 걸 알고 있어 다른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17세기 중엽 비옥한 토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성된 무섬마을에는 현재 40여 호의 고가옥이 남아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외나무다리가 굽은 이유 나는 영주 남쪽의 무섬마을로 향했다. 강물이 크게 굽어지는 안쪽, 마치 강줄기를 밀어내며 혹처럼 툭 불거진 육지에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이런 지형에 형성된 마을을 물돌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과 양옆은 물길이 감싼 채 휘돌고 뒤로는 산이 막고 있어 그야말로 섬이나 다름없다. 완벽히 고립된 곳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는 이런 지형이 거주민들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풍수학적 믿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자급하며 살 수 있을 만큼 넓고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마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강을 가로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다. 강은 여름 장마철만 아니면 두 발로 건너다닐 수 있을 만큼 얕은데, 그렇다고 옷을 적실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나마 다리를 놓은 것이다. 모래톱과 얕은 물에서 고작 1미터나 떠 있을까? 외나무다리의 폭은 남자 어른 손으로 두 뼘이 될까 말까 했다. 희한하게도 다리는 강을 직선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커다란 S자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알 길이 없었으나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사진에 담아두고 오래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 남녀노소에게 인기이고, 드라마나 방송에도 소개되어 끊임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호젓하게 즐길 생각으로 일찍 도착했다. 나처럼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이 없진 않았다. 외나무다리 위에 앞뒤로 서서 느릿느릿 건너는 한 커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카메라 앵글에서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다리를 굽이지게 설치한 이유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장마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면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지금이야 북쪽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다리가 놓여 있으나 그것이 없던 시절에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한번 물살에 휩쓸려버리면 다시 설치하기가 무척 번거로울 게 뻔하고 불어난 강의 물살을 이겨내도록 단단하게 놓을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주 다시 놓지 않으려면 재료도 아낄 겸 직선으로 놓는 게 아무래도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고택과 정자로 가득한 무섬마을의 가옥 중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잘 보존돼있다.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 고을의 고요한 정취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혹시나 그저 미관상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리를 건너봤다. 한 가닥 외나무다리에는 곳곳에 다리의 폭만큼 짤막하게 옆으로 덧대 놓아 두 가닥이 되는 곳이 있었다. ‘비껴다리’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어쩌다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잠시 비켜서서 양보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사려 깊고 합리적인 사고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S자로 길게 구부려 놓은 비효율적 형상이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잘 보존된 전통 가옥들이 한눈에 가득 담겼다. 19세기 말까지도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이 살았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몇몇 기와집들의 크기와 모양만 봐도 그저 잠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인 소도시쯤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선비가 배출되었고 독립유공자만도 다섯 명이라니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의 안목과 뜻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왔다. 돌담과 흙길을 따라 걷다가 무섬마을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마당에 한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Cho Chi-hun 趙芝薰 1920~1968). 학창시절 교과서를 펼치고 그의 시 「승무(僧舞 The Nun's Dance)」를 소리 내어 읊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섬은 그의 처가였고 그가 이곳에서 남긴 시 「별리(別離)」가 커다란 바위에 아내이자 서예가인 김난희(金蘭姬 1922~)의 필치로 깊게 새겨져 기념되고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서 어디론가 떠나는 상황을 새색시의 눈으로 그린 시였다.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을 마루의 큰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며 눈물로 옷고름을 적신다. 아마 이 여인의 남편도 외나무다리로 강을 건넜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문득 외나무다리의 S자 모양이 이해되는 듯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마을을 나서던 무수한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뗄 수 없었다.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 가야만 하는 마음이 무거워 차마 강을 훌쩍 건너버리지 못했고,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어도 남아서 그 모습을 볼 이의 가슴이 더 미어질 것을 염려해 눈물을 삼키며 걸었다. 보내는 이도 기둥 뒤에 몸을 숨겨 떠나는 이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나마 길게 굽이져 놓인 다리가 강을 건너는 시간을 늦춰주니 서로 위안으로 삼았다. 나는 시 속의 남편이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디디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머리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피었다 지고, 아득히 멀리서 떠내려온 작은 잎사귀는 발 아래 잠시 머물지도 않고 스쳐 흘러가버린다. 열린 왕조와 닫힌 왕조 시내로 돌아와 영주의 중심가를 돌아봤다. 도심 인근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고향집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한 국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큰 강들의 발원지를 품은 영주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의 고향집은 세 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해서 ‘삼판서 고택’이라고 불렸다. 비록 원래 있던 자리에서 수해를 당해 무너진 것을 옮겨다 복원해놓았다 해도 한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성립하고 대를 이어 고위 관리를 배출해 낸 가문의 위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벽의 마애여래삼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발견 당시 불상 세 구의 양 눈이 모두 정으로 쪼아 파져 있었지만, 큼직한 코나 꾹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 힘찬 기상이 배어 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 영주 근대문화거리를 둘러보다가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 숭은전에 이르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그가 고려에 항복하러 개성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이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금 하나의 왕조를 열었던 혁명적 사상가를 만나고 온 길이었고 이제는 천 년을 이어 오다 멸망한 자신의 나라를 새로운 왕조에 바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임금을 만나는 중이었다. 국운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고 한다. 영주는 경순왕의 그런 애민정신을 기리며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숭은전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용이 이 자리에 떨구었을 눈물을 생각하는 중에 겨울 해는 또 빠르게 기울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도 부석사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긴 오르막길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감상하던 중에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앞뒤에서 걷고 있는 관광객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며 도적떼를 물리치고 내려앉았다는 바위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잠시의 불편쯤이야 전설이 깃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대가인 셈이었다. 그 전설적 바위 곁에 부석사가 지어지던 676년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만큼 강성하던 때다. 불교가 국교로 그만큼 큰 지원을 받던 시기였기에 부석사의 규모나 위상은 특별했다. 그런 나라가 약 250년 뒤에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드디어 108개의 계단을 모두 지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에서 왕조의 흥망성쇠 따위는 어느새 하얗게 지워지고 없었다.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왼쪽에 바로 그 뜬 돌, ‘부석’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 1751)에는 바위 아래로 밧줄을 밀어넣고 훑어도 걸리는 데가 없다고 적혀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부석사 뒤편의 화강암 일부가 판상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와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잔돌들 위에 얹혀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어른 스무 명쯤 둘러앉을 수 있을 크기의 테이블 같았다. 속세의 잣대로 절의 창건설화를 재고 있자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부석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계심 없이 느리고 게으른 걸음걸이에서 일종의 핀잔이 읽혔다. 고양이가 나타났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서야 나는 무심결에 도서관 책벌레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던데 내게 깨우침을 준 고양이에게서 혹시 부처를 만난 건 아닐까. 부석사 범종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절의 전경과 그 너머 소백산맥이 구비구비 절경을 이룬다. 부석사는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창건된 이래 이제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의 대표적 불교 사찰이다. 2018년 다른 여섯 개 사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범종루는 안양루와 함께 부석사에 있는 2개의 오래 된 누각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범종루는 사찰 마당 가장자리에 자리하지만, 이곳의 범종루는 경내 중심축에 당당히 위치하고 있다. 사물이 배치되어 하루 두 번 이들을 두드리며 중생의 평안을 비는 예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순환을 포용하는 공간 오후에는 강원도 방향으로 난 고개,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의 산간마을을 다녀왔고 다시 부석사 아래로 돌아와 소수서원을 둘러봤다. 남대리는 조선의 6대 왕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삼촌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손에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바로 거기에 한강의 영남 발원지가 있다. 소수서원은 학자를 양성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지방 사립 교육기관인데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아홉 곳 중 하나다. 최초로 임금이 그 이름을 내려준 서원이며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安珦 1243~1306)을 비롯해 많은 유학의 거목들을 모시고 있다. 소수서원 주위의 둘레길은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 된 서원의 경관을 풍취를 즐기기에 좋은 산책코스다. 수령이 3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는 소나무를 포함해 적송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다. 1542년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2019년 다른 여덟 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용한 산사 성혈사에는 아름다운 건물 나한전이 있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단아하면서도 더욱 그윽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나한전의 세 칸 연꽃과 연잎, 두루미, 개구리, 물고기 등 상징적 문양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다. 영주의 곳곳을 다녀 볼수록 그 독특한 면모가 감탄스러웠다. 한 국가의 설계자가 난 곳이면서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을 기리고 있는가 하면, 서원을 통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 곳인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어린 왕의 여린 발자국이 남은 곳이기도 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주가 자랑하는 인물인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선생을 통해 발원과 회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호를 붙여 엮은 저서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에는 식민지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한국인들의 이모저모가 아주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은 봄에 영주를 떠났다가 겨울이면 한껏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식민지 주민으로 점령국에 맞서는 일에 대해 캐고 다니는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들은 얘기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에 기록하고 그 종이를 새끼처럼 꼬아 봇짐의 멜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검문을 당하더라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1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지사들의 유가족을 만났고 사건 당시의 신문기사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조금씩 수집했다. 송상도 선생의 사례에 이르러 나는 뜻을 품고 바깥 세계로 나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무섬마을에 가족을 남겨두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의 단단한 각오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포용과 포섭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발원지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회귀할 수 있는 피안의 공간이고자 하는 것이 영주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채비를 할 때까지도 평생을 바쳐 나라를 다시 일으킬 불씨를 모으던 어느 선비의 행로를 생각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고속도로를 타고 휑하니 돌아가는 건 어딘가 송구했다. 나는 옛 죽령 고갯길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르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도로를 운전하는 동안 이 험한 고개를 두 발로 넘어 영주를 떠나던 선비의 단단하고도 거대한 기개(氣槪)를 느껴보고 싶었다.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나는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영주에서 나서는 것인가 자문했다. 영주에서의 경험을 자랑할 것 같고 여러 번 다시 올 것이므로 출발로 여기기로 했다.

섞인 시간의 단맛

On the Road 2021 WINTER

섞인 시간의 단맛 전라북도 군산은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곳이다. 부흥과 약탈의 허브가 됐던 이 항구 도시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지금도 유효한 듯한 군산의 생경한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달라지는 현대 도시의 속도감에 뭉근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물이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때문에 군산에는 지금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도시지만, 요즘은 인기 높은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우리는 뭔가 섞여 있는 걸 보면 흔히‘짬뽕 같다’라고 표현한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잘 섞으며 볶다 육수와 함께 끓여낸 빨간 짬뽕 한 그릇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어우러져 있다. 짬뽕으로 유명한 군산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짬뽕처럼 잘 어울려 섞여 있다. 군산으로 떠나는 길에 뜨끈한 짬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다시 군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탔을 때 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외관 도장이 벗겨질 만큼 오래된 기차였는데 마치 시간이 섞인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객차 내부에선 상상했던 타임머신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1909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한 동국사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불교 사찰이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었는데, 현재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 지정 ‘근대문화유산’이다. 시간여행 그래선지 군산에서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주변으로 시간이 박제된 곳이다. 마을 한복판을 오가던 기차는 군산역에서 어느 제지공장까지 나무와 종이를 천천히 싣고 다녔다. 오래 전 운행이 멈추며 마을 곳곳엔 당시의 시간도 멈춰 있었다. 60~70년대식 학교 교복이며 과거의 군것질거리와 잡화들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적한 분위기지만, 나는 과거 속으로 이토록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해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휘발되는 시간의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것은 녹슨 철길에 남은 목재나 종이 냄새와 비슷했다. 철길마을에서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인 군산 탐닉에 앞서 짬뽕부터 먹으러 나섰다. 군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집이 여럿 있다. 내가 찾아간 짬뽕 가게는 ‘빈해원’이었다.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칠십 년 전통을 가진 이곳의 ‘청탕면’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는 짬뽕이다. 한입 맛을 보자 신선한 해물이 진득하게 우러난 국물 안에서 일종의 위로가 느껴졌다. 시간이 농축된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장소가 주는 예스러움이 분위기를 더하고 음식은 깊은 위로가 된다. 군산에서 느낀 켜켜이 쌓인 첫 시간의 냄새가 종이었다면, 두 번째는 짬뽕이다. 군산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서 곡식이 가장 많이 생산되며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배가 든든해진 나는 근대 건축물들을 한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화 거리를 찾아가 그 에너지의 과거 버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근대 건축관과 근대 미술관, 근대 역사박물관을 하나씩 둘러보며 나는 그 생기가 아직도 여전한 게 신기했고 역사와 세월이 남긴 것에는 고유한 작품성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에 닳고 퇴색된 것들이 아직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풍경을 현재가 공유하는 광경은 여러 개의 차원과 시간이 섞인 시공간의 모형과 같았다. 시간을 견딘 이 거리의 빈티지한 변화에선 일말의 건축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기능만을 중시하지 않고 미를 추구했던 흔적을 아스라이 엿보았다. 가장 아담한 건축미를 보이는 건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군산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이 흐르는데, 주변에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모아두던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창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 그야말로 세곡 납부용 물류센터로 이용됐다. 당시 일제의 곡물 선적 전용 창구였을 이 건물 앞에 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건축했으며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썼고 창은 로마네스크식, 현관은 영국식인데 지붕은 일본식으로 덮었다. 과연 군산의 대표적인 짬뽕 스타일 건축물이다. 군산지역에서 포목점을 경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뒤 부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살았던 집이다. 1920년대에 지은 전형적 일본식 무가의 가옥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외관이 당시 부유한 일본 상류층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질적 조화로움 근대화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절인데 현재는 한국 사찰로 사용된다. 한눈에 봐도 무척 일본풍인 이 조그만 절은 느낌이 낯설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듯 액세서리 없이 댄디한 대웅전의 옷차림에, 월명산 자락의 백 년 된 대나무숲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려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며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절의 뜰에는 일제가 한국인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군산의 소작농들을 착취했었다. 핍박당한 소작농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항거하며 거세게 봉기했었다. 그러나 거친 역사를 통과해 온 종교시설의 호젓한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의 원한마저 부질없이 휘발되고 해탈에 이른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 주변에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재미있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요즘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에 나온 달고나의 인기가 군산에서도 폭발적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마주했다.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가정집일 뿐이지만, 시간의 풍파를 견딘 매력적인 장소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 넓은 창을 가진 안채들이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근처 월명동 골목의 오래된 벽들, 좁은 골목들, 녹슨 철제 대문들이 주는 느낌도 아스라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채 아직도 존재하는 흔적들을 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남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빨리 팽창하며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의 묵묵함을 보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다. 시간여행의 현란함에 취한 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이 곳은 서구의 빵 맛을 먼저 본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빵집이었는데, 일제의 패망 이후 한국인이 명맥을 이어받아 현재의 빵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 가게에서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직접 먹어보니 과거의 맛과 현재의 맛이 혓바닥 위에서 짬뽕되었다. 흔한 빵마저 시간여행의 매개물이 되는 곳이 군산이다. 빵을 즐기지 않는 나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먹어버렸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문학의 기록 “나라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가 내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일본인이 내놓고 가는 내 땅을 쟤들이 왜 팔아먹으려고 해? 이게 나라냐?” “기다리면 나라에서 억울하지 않게 처리하겠죠.” “됐고, 난 오늘부터 도로 나라 없는 백성이야. 제길. 나라가 백성한테 고마운 짓을 해 줘야 백성도 믿고 마음을 붙이며 살지, 독립됐다면서 고작 백성의 땅 뺏어 팔아먹는 게 나라냐?” 채만식(蔡萬植 1902 ~ 1950)의 소설 (1946)의 마지막 장면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채만식 문학관 앞에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이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도착부터 나를 따라다닌 군산이 가진 특별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채만식 문학관에는 30여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그가 집필한 200여편의 많은 작품을 모아둬 작가의 작품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군산 출신인 채만식 작가는 해방 전후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스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는 한반도가 조선 땅이었던 시절, 행정기관에서 주인공 집안에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 받을래? 아니면 논을 내놓을래?’ 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선대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조금씩 사서 모은 자기 논을 절반 이상 빼앗긴 주인공은 상심이 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소작농 생활로 어렵게 살다 지쳐 일본인에게 남은 땅을 팔게 된다. 어차피 일제가 망하면 다시 자기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제의 재산을 환수한 독립 정부가 땅을 다시 빼앗아 가 팔아치우면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생애 내내 자기 것을 빼앗기기만 했던 운명으로 살아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독립의 기쁨은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이 인물을 통해 한 국가가 멸망할 무렵 과도기적 혼돈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꼈을 억울함과 회의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채만식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군산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점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성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 작가는 일제의 힘에 동조했던 문학가 중에서 제대로 ‘반성’을 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에 소설 (民族-罪人 1948~1949)을 발표하며 반성의 의지를 작품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그런 일단락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은 군산의 근대유산들과 함께 버려지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군산역으로 돌아가기 전 무려 칠십 년 동안 호떡을 팔고 있다는 중동호떡에 들렀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호떡은 얇은 밀반죽 빵 속에 시럽을 넣어 구은 음식이다. 보통은 기름에 굽지만 여긴 화덕에 구운 것을 팔았다. 나는 호떡의 느끼하지 않은 단맛에 기분 좋게 취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철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 속에 남겨진 깔끔한 단맛. 그 맛이 꼭 군산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쉽사리 현실감을 아련하게 흐려버린다. 약 2.5km의 철길 양쪽으로 낡은 집들과 옛 모습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예전 학창 시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도시를 구경하다 보면 아름다운 색감의 서정적인 벽화와 종종 마주친다. 유명 관광지에 화려한 포토존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좁은 골목길의 소박한 벽화도 많다. 20세기 전반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채만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에는 전시실, 자료실, 시청각실과 함께 문학 산책로, 공원도 갖추어져 있다. 2018년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빈해원은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옛스러운 정취의 독특한 건물로 을 비롯한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름에 지지지 않고 않고 오븐에 굽는 중동호떡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흰찰쌀보리와 함께 검은콩, 검은쌀, 검은깨를 넣은 플랙푸드 선식이 시럽으로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하다.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On the Road 2021 AUTUMN

천년 수도의 아름다운 파동 오랜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 땅을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된다는 고대 왕국의 수도. 경주는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찬란했던 문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자리한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감은사는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짓기 시작한 절로 지금은 지상에 이 탑들만 남아 경주의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다. 비트 세대 대표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 1922~1969)— 그가 말년에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던 걸 상기하며, 한때 불교문화의 심장이었던 경주로 향하는 길에 두근거리는 맥동을 느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이 칼럼의 이름 “On the Road” 였다. 경주를 요약하는 단어는 ‘천년 수도’다. 정확하게는 992년 동안 수도였으니 천년에서 8년 모자라지만 아름다운 도시니까 그냥 넘어가자. 기원 전 57년부터 936년까지 하나의 나라로 살았던 사람들, 그 나라의 이름은 신라였다. 천년간 지속된 국가는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비잔티움과 신성로마제국을 포함하며 오랜 역사성 부문에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제국 정도만 생각날 뿐. 아, 파라오 왕조도 상당했었지. 그런데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의 작은 땅에도 천 년 동안 지속하며 찬란한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주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나 장안(시안), 바그다드 같은 화려하고 유명한 대도시와 같은 리그에서 뛴 선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주는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를 너머 유럽과 교류하던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신라인의 무덤에서 로만 글라스가 출토되기도 한다. 시야가 좁지 않고, 경기장을 넓게 쓰며 세계시민으로 존재감을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행패와 전쟁으로, 웬만한 건 다 무너졌던 이 나라에 아직도 신라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비도를 지나면 궁륭천장으로 짜인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연꽃 모양의 돔으로 이루어진 천장과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부처와 보살, 수호신들이 고대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준다. 현재는 보존 문제로 관람객이 주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며 볼 수 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나는 배를 타고 온 이방인 탐험가처럼 동쪽 바다에서부터 경주로 들어가 문무 대왕(~681 文武大王)을 기리는 첫 유적지,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만났다. 이 절의 네이밍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왕의 은혜를 팔로우하고 틈만 나면 ‘좋아요’를 계속 누르겠다는 뜻이다. 감은사지의 느낌은 조금 특별하다. 관광명소 특유의 과도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자칫 버려진 듯 보일 지경이다. 입장료도 없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낡아버린 쌍탑만 달랑 남은 절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쌍탑은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다. 고대의 감은사 아래는 바닷물이 닿는 곳이었고, 절 아래로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용이 된 왕을 지키는 중인지 용이 두 개의 탑을 지키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의 수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오래 잡아끌어 시선을 돌리기 싫을 정도다. 이 탑을 해체하고 복원할 때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舍利具)에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보물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주 그냥 미친듯이 예쁘다. 탑의 겉모습인 수수한 아름다움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보이지도 않는 탑 속에 숨겨진 이 보물이 신라의 찬란한 문명을 만든 기본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하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아름다움은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난다는 걸 가르치는 것인가. 신라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더 보고 싶어 경주 속으로 빨리 파고들었다. 곧 경주로 향하는 바닷바람을 막는 토함산이 나타났고, 산 깊은 곳에 있는 석굴암(石窟庵)이 등장했다. 경주의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최전방 국가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 투톱이다. 불국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로마에 있는 판테온과 비슷한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고대에 그런 상당한 건축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도 충분히 바빴다. 석굴암은 불교국가였던 신라의 깊은 불심으로 만든 아름다운 인조 돌 동굴 속 불교미술이자 건축미의 절정이다. 빗물도 스며들지 않고 안에 이끼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돌을 뚫어 석굴을 만들자니 화강암이 너무 단단해서 조립식 건축 기법으로 이 인조 석굴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점이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 석굴과 다른 점이고, 그래선지 상당히 유니크한 매력을 뿜어낸다. 내가 찾아간 날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내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석굴암의 내부 역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줄 서서 지나가야 해서 자세히 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긴 시간 빤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름다움은 가슴에 와락 안기는 종류였다. 조각 예술의 강렬한 미학이 파동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은데, 잠깐 스쳐봤으나 망막에 본존불상의 표정이 배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의 석가여래좌상은 불교미술사에서 두드러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전실과 원실 사이, 비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20여 년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대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에 불교미술이 접목된 화강암 석굴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한석홍   빈티지 미학 탄력을 받은 나는 다음 차례의 아름다움을 찾아 불국사로 향했다. 대웅전(大雄殿) 앞 쌍탑을 보며 한 자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의 빈티지 미학을 느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다음 왕조들에서도 주요한 지방 거점의 역할을 하며 존재해 온 경주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빈티지일 것이다. 한때의 찬연했던 광휘와 오래 견뎌온 것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었다. 이 두 개의 탑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시공간을 봐왔겠는가. 왕조의 흥망성쇠를 보았고, 그들의 삶이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굴곡도 보았을 것이고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쌍탑을 비롯해 불국사의 구조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균형미를 갖고 있다. 불국사의 보물인 다보탑(多寶塔)에 조각된 네 마리 사자상 중 세 개는 유실되었다. 석가탑(釋迦塔)은 보수 공사 중에 떨어뜨리고, 탑 속의 사리함이 깨지는 등의 난리와 풍파도 겪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유물들은 번뇌를 초월한 듯 무덤덤해 보였다. 뭐든 견뎌낸 것들은 참 고혹적이다. 침략을 받고, 땅을 빼앗기고, 지진이 나고, 도굴당하고, 유물이 사라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문화재를 지키려 노력해 온 이들의 마음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석가탑 안에선 당시의 목판 인쇄술을 보여주는 다라니경(陀羅尼經)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신라의 자랑스러운 보물이다. 인쇄술이 인류문명 발전에 얼마나 큰 속도감을 부여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빈티지 유물들이 보여주는 시공간의 크기와 깊이에 압도되다 불국사를 빠져나오니 문학관이 하나 보였다. 경주 출신인 김동리(1913~1995 金東里), 박목월(1915~1978 朴木月)두 작가를 함께 기념하는 시설이었다. 이들은 꽤 아름다운 글들을 썼다. 신라 문화와 한국 근대문학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나는 하나의 연결점을 떠올렸다. 신라시대에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는 거대한 범종의 금석문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 내겐 이 글귀가 신라 사람들이 돈이나 탐하는 대신 문학을 사랑했다는 얘기로 해석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했던 나라였으니,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남긴 것 아닐까? 어릴 때부터 경주의 문물을 보고 자랐을 작가들이 부러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덕에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풍부한 시야를 자동으로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문득 박목월 시인의 기념관에 흐르던 육성 시 낭독이 들려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 (William Wordsworth 1770~1850)처럼 광의의 낭만주의 시를 써온 시인의 서정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통찰이 압축되어 있었다. 경주의 보물은 유물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 또한 오래도록 남아 계속 빛나고 있다. 나의 문학기행은 문학관에서 짧게 마무리했지만 더 깊은 탐구를 위해 두 작가의 생가와 주요 작품의 배경지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잘 마련되어 있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불국사는 석굴암과 함께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한 석축으로 조성된 터에 대웅전, 극락전 등 전각과 석가탑과 다보탑, 백운교와 연화교 등을 품고 있다. 석굴암과 더불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3만 8,000평의 평지에 23기의 원형 분묘가 솟아 있는 대릉원은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군이다. 경주 시내 한가운데 황남동에 자리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년에 주조된 성덕대왕신종은 높이 3.66m, 입지름 2.27m, 두께 11~25cm, 무게 18.9톤에 이르는 범종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이다. 종의 맨 위에서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은 한국 동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며, 깊고 그윽한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동리목월문학관은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1913-1995)와 시인 박목월(1915-1978)을 기리기 위해 2006년 토함산 자락에 건립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원고, 작품집, 동영상 등을 전시하고, 각기 생가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연결되는 투어도 제공한다. 동리문학관 안에 복원된 소설가 김동리의 창작실이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동리문학관과 목월문학관으로 나뉘어져 각 작가의 유품, 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소설가 김동리의 육필 원고이다. 복원된 그의 창작실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만년필, 안경, 책장, 집필노트 등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찬란한 종소리 문학관을 떠나 대릉원(大陵苑)에 다다른 나는 거대한 무덤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의 그로테스크함에 감탄하다 시공간에서 내 좌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한 무덤 속으로 피신했다. 실내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천마총 내부였다. 발끝이 서늘했다. 경주 기행 내내 비가 많이 왔는데 발이 젖는 줄도 모르도록 경주는 계속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이었다. 무덤 속은 무섭거나, 신비하거나, 칙칙하거나 할 것 같았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죽어서 누워있던 자리는 몰락의 느낌 없이 편안해 보였고 그 정성 들인 장례에 동원된 품을 생각하니 옛날 사람들의 부지런함도 경이로웠다. 내 게으름을 반성하며 무덤에서 나오자 경주 시내 황남동 번화가가 나왔다. 나는 현대에 조성된 번화가와 고대 무덤가의 간극에 살짝 황당해졌다. 죽음의 한복판에 삶의 한복판이 있다니. 삶과 죽음의 관계는 조화일까 부조화일까. 현대와 고대의 간극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경주란 여러가지 선명한 대비만으로도 독특한 존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앞서 언급했던 성덕대왕 신종 앞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주를 찾은 내가 가장 다시 만나고 싶었던 신비였다. 이 종의 표면에 새겨진 반쯤 뭉개진 글자들, 그러니까 재물을 싫어하고 글재주를 사랑했다는,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눈앞에 생생히 홀로그램으로 띄워주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종의 독특한 공명을 가진 소리를 떠올렸다. 독자에게 종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거대한 범종이 퍼트리는 맥놀이 현상은 현대의 파동 역학을 잘 알고 만든 것 같은 소리라 소름이 돋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경주에 오면 이 웅혼한 종소리를 꼭 한 번 듣고 가면 좋겠다. 이 종소리가 지닌 파동은 경주의 빈티지 미학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과, 문학에 대한 이해의 경건함과, 세계와 교류하던 고대의 대도시를 지키는 용이 스스로의 찬란함에 감탄하며 내지르는 포효 세리머니와 같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파동을 부디 전달받을 수 있길 바라며. 아름다움에 경도되는 파동이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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